내 연애도 못챙기는 주제에 남들의 연애상담은 열심히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생판 본 적도 없는 어느 남자, 어느 여자의 심리를 추론하고 최적의 답안을 고르는 일은 제법 즐거웠다. 내가 너라면 그렇게 선물 공세는 안 할거야, 그렇게 고백을 지르진 않겠어. 나는 저 멀리서 감정의 우주를 관망하며 질서를 조종했다. 아서라 뜨거운 이여, 달궈진 채로 돌진하는 그대의 앞에는 두가지 결말뿐이니. 닿지도 못하고 대기권에서 연소되거나, 소혹성 충돌로 둘 모두가 산산조각나거나. 눈을 감고 손짓으로 거리를 가늠하며 나는 그들의 우주에 고요와 평화를 안배했다. 위성이 되어라. 주위를 맴돌지라도, 언젠가 그대들 사이의 인력은 서로를 놓아주지 않을 지어다. (미친 놈도 아니고 이런 말을 실제로 하진 않았다 속으로 이런 비유에 자뻑했을 뿐)
신님 놀이가 끝나면 광활한 어둠 속 수많은 결정이 빛나는 가상의 공간은 현실의 하늘로 대체된다. 하늘은 맑고 뚱뚱한 구름도 다 채우지 못하는 수많은 여백들. 빵또아를 먹든지 쫀드기를 뜯던지 시시한 나의 하루를 감칠맛으로 마취해야 했다. 은하계까지 끌어온 조언은 이래저래 오지랖이었고, 써먹을 데 없는 지혜는 허무만 낳았다. 차라리 담백하게 설득하는 편이 나았을텐데. 수많은 고사성어가 있지 않은가. 가만있어, 하지마라, 그러지마, 아진짜좀, 짜져있어, 미쳤구나, 소름돋아, 징그러워, 궁상떠네.
내가 이같은 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8할은 내 덕이다. 내가 정말 수없는 멍청이 짓을 했기 때문이다. (1할 정도는 편지를 쓸 때 시집에서 근사한 부분을 손수 “발췌”하시는 지인의 덕이다 하지 마라….) 난 내 님에 대한 야속함과 나란 인간을 향한 자기혐오를 수도 없이 헷갈렸다. 모두가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 가장 숭고한 희생도 해보고 이루 말 할 수 없는 비열한 짓도 저질렀다. 대충 이런 거다. 혼자 퍼스트 클래스에 앉혀 비행기를 태운다. 멋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진 않는다. 그 비행기는 높은 확률로 추락한다. 언제나 낙하산은 하나뿐이다. 울면서, 혹은 울지도 않고, 내가 메던가, 그이에게 주던가, 둘 다 메지 않거나, 둘 중 하나가 그 낙하산을 메고 서로 부둥켜 안은채 허공으로 뛰던가. 웃음과 슬픔의 농도는 중요치 않다. 아무튼 왈칵!!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수많은 비행기 테러가 내 머릿속에서만 끝났다는 것이다. 딱히 상대방을 존중하거나 내 망상의 코메디끼를 알아차린 건 아니었고, 그냥 내가 너무 진지해서 그런 감정도 노나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묵은 금이다. 어쩌자고 이렇게 내가 똑똑했을까. 웅변으로 이어졌다면 나의 이불킥은 일격필살 하이킥에서 상중하 연타로 진화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고 내 이불킥이 강력해진 건 아니다. 헛방으로 끝난 뒤 과거한테 수도 없이 처맞는다. 내가, 내가, 내가 왜 그랬을까아아아아아. 잠들기 전 코너에 몰려 열대 맞냐 아홉대 맞냐의 차이뿐이지만, 그래도 한방이라도 덜 맞고 넉다운 되는 게 위안거리가 되긴하니까.
부끄러운 과거는 언제나 섬뜩하다. 이를 상기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안쓰럽고 민망한 순간으로 남을 확률이 크다. 나는 나를 자신하지 못한다. 연애권력의 완벽한 상하관계에서 권좌에 앉아 옷자락을 늘어트리는 나를 말릴 수 없었기 때문에. 무심하고 이기적인 지배자들에게 마음 속 쿠데타를 일으키던 내가, 훗날 뒤집힌 관계에서는 제왕의 횡포를 마음껏 즐겼다. 연락을 하건 말건, 선물을 주건 말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똑같다”는 이 표현조차도 내 임의적인 편집이다. 과거 내가 복종했던 그 이들은 나보다 더 다정했고 사려가 깊었던 것 같다. 그들과의 만남 이후 나는 내가 당했던 (것 같은) “그러면 안되는” 짓을 많이 저질렀다. 뭐 어쩌란 말인가. 나도 내 나름대로는 아껴주고 챙겨주는데. 굶주린 것은 그 이의 사정이다. 내 마음의 곳간은 언제나 열려 있고 퍼가는 사람이 알아서 챙겨갈 일이다.
집으로 그 이를 데려다주던 어느날, 나는 하야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는 낡은 핸드폰을 바꾸는 게 싫다고 했다. 나와의 카톡창이 없어져버리는 게 싫어서. 한 진심 한다고 믿던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딴게 뭐라고? 제 때 답변도 안하는 나와의 카톡을 자기 전에 보고, 심심할 때 본다고 했다. 연락을 하면 되지 않냐고 꾸짖으니 바쁜 거 알고 제때 연락 못받으면 자기만 서운하니까 차라리 지난 카톡을 보고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앞으로 제때제때 카톡 더 많이 해줄게. 잠들기 전, 나는 나한테 질렸다. 그 와중에도 “제때제때”라는 조건을 붙여 선심을 베푸는 내가 있었다. 안되겠다. 이 모든 것을 청산하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 나는 그 이의 훗날이 안타까워 말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내가 어렸을 적 겪었던 마음의 가뭄이 저 이를 덮치겠지. 가슴이 쩍쩍 갈라지고 홀로 타는 마음에 신음하겠구나.
그런데, 내가 운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나는 똑같이 나쁜 놈이고 우리 관계에서 무책임한 사람은 나였는데. 버리는 주제에 버려지는 사람을 동정하며 우는 건 대체 뭔 짓거리인지. 어쩌면 가장 진실했을 그 순간에도 나는 용서받지 못할 마음을 품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말 하는 것부터 벌써 자기 변호의 속성을 띄기 시작했다는 걸 난 부정하지 못하겠다.
과거는 현재로 연속되는 선이다. 동시에, 과거는 매 순간 점으로 남으며 현재와 이어지지 않는다. 그 어느쪽이건 과거는 현재를 담보하지 못한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자라게 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은 감정일 뿐이었다. 성찰의 트리거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온전히 성찰로 이어질지 혹은 그 성찰이 행동을 낳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 말아야지, 하는 윤리의 하한선이 조금식 올라가는 순간 못난 짓의 상한선도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얘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조금씩 비겁해지는 게 인생이라고 떠들면서. 성장이라는 단어는 되바라진다는 이면을 지닌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빈번히 자괴감이라는 변호사를 고용하고 공범들과 연대한다. 과거의 시커맸던 순간이 현재와 미래의 새하얀 순간으로 이어질수 있을까. 깨달은 게 있고 마음을 더 기울인다 한들 이어지는 인생은 절대로 표백되지 않는다. 그나마 덜 때가 묻을 뿐 계속 잿빛으로 얼룩지며 편리한 도피처를 견고히 세울 뿐이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을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몽땅 서론이다. 뭔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면, 나는 Eternity님의 Bitch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글쓴이에게 악감정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글을 읽으며 나는 아리송해졌다. 저 글조차도 부질없는 자기 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만날 이에게는 잘 해줘야지, 끝날 땐 끝나더라도 예쁘고 고운 연애를 해야지. 나는 이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 그 진심이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며 이를 외치는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일단 내가 걸리는 부분은 Bitch론의 배치 구조다. 예를 들어보자. “픽업 아티스트의 회고록”이라는 책이 있다고 치자. 이 책은 250페이지 분량에서 200페이지를 내가 어떻게 픽업 아티스트로 불리게 되었는지, 여자한테 이런 잘못을 했고 어떻게 농락했으며 자신이 찌질했는지를 설명한다. 다음 50페이지에서 저자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이와 같은 구조가 과연 신빙성을 가질 수 있을까. 마지막의 50페이지가 진실되면 진실될 수록, 나는 앞의 200페이지를 불필요하다 느낄 것이다. 아니면 이를 심정적 동조를 위한 장치라고 여기거나.
나는 Eternity님이 픽업 아티스트라는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화자의 진실을 빛바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Bitch론은 다음과 같다. 과거의 친구를 바라보고, 그 친구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현재 나의 깨달음을 조망하고, 이야기는 현재와 미래의 결심으로 이어진다. 전체 일곱 문단 중 다섯 문단은 과거의 찌질한 친구와 나에 대한 발견이다. 이 분량의 할애가 나를 의심케 만든다. 사유하는 자의 자의식은 늘 과거에 빚을 진다. 그런데 그 다섯 문단의 과거를 이제 와서 현재의 내가 두 문단으로 냉정하게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 과거가 과거형으로 기술되는 순간 이는 현재와 유리된다. 이 시간의 단절 속에서 Bitch론의 서사는 관찰당하는 지난 날의 나와 관찰하는 현재의 나로 이분된다. 김태원이 그랬던가, 과거는 늘 아름다운 것이라고. 현재 속에 과거가 나열되는 순간, 과거는 고백의 재료가 된다. 사건의 본질은 뿌옇게 되고 흐릿한 형태를 좇는 작업 자체가 주를 차지한다. 이 모든 과거는 결국 현재의 나를 위한 디딤돌이 되고 현재를 보조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과거에는 그랬었다 - 라는 분량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의 결론 -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에 나는 쉽사리 설득당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렇지 못하고 있을 수다 있다,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가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왜 이야기는 길고 긴 과거의 회상에서 “~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라는 국민학교 연설문 형식으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닫고 끝맺음을 서두를 수 밖에 없는가.
다음으로 내가 제시하고 싶은 의문은 화자의 시점이다. Bitch론의 “나”는 전지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로서 Bitch론은 사건을 담아낸 고백의 “형식”이 더 크게 자리잡는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고백은 늘 일정한 가치판단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화자의 고백은 읽는 이의 공정한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은 그 자체로 반성을 증명하는 형식을 띨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못한 거 안다는 사람에게 청자가 다른 반응을 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뉘우치는 사람의 이야기는 감정적 최면의 효과가 더 강해진다. Bitch론의 시점은 그 자체로 어떤 반응을 강제하게 된다. 더욱이, 화자가 미래에 대한 자기 확신을 명백하게 밝혔을 경우 이야기 내부에서 비판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1인칭 전지적 시점은 모든 독자를 직접적 청자로 설정한다. 대화의 형식에서 이야기 안에 청자를 가둬놓고 모든 발언에 진실의 무게를 싣는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1인칭 시점의 화자를 매번 믿지 않는다. 어떨 때는 화자와 청자의 구도를 벗어나 화자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 스스로를 놓고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한발짝 멀리서 나는 Bitch론을 설파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내 옛날 모습이 생각나네. 나도 그 때는 참 찌질하고 상대방 원망도 많이 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란 이런 거라고 믿으니까.”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좀 싸해진다. 자기 자신이 깨달음의 시작이자 종착지가 되는 이야기에 나는 반문하고 싶어진다.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보는 이야기를 하는 현재의 자신은 미래의 자신에게 또 다른 과거가 되지 않을까. 현재의 나 자신은 타인과 미래의 자신에게 성장을 약속할 수 있는가. 결국 스스로가 보증하고 배신하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화자와 독자 모두를 “좋은 사람”이 된듯한 착각에 빠트리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Bitch론이 나를 싸하게 만드는 건 개인의 성찰에 타인들이 쓰여진다는 점이다. [그 부끄러움은 그녀를 향한 미안함이기도 했지만, 내 연애를 끝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스스로 망쳐버린 나 스스로의 못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 결심에 “그녀를 향한 미안함”은 불순물에 가깝다. 나의 베풂에 초연해지고, 상대방을 욕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챙기는 과정이지 그것이 대단한 성장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당신을 좋아했던 이 남자가 그렇게까지 못난 남자는 아니라는 것 정도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그냥 내가 쪽팔리기 싫으니까 취할 수 밖에 없는 정신적 방어의 자세다. 왜 이런 자기 변호가 “최소한의 선물” 이자 “마지막 호의”로 포장되는가. 애초에 저 쪽은 이런 사람으로 남아주세요!! 하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것은 명백한 신파다. Bitch론의 모든 서사는 모든 수사를 떼내면 “폼잡기”로 귀결된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폼 잡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늘 정신적으로 폼을 잡고 싶어한다. 연애 관계에서도 가오가 떨어지길 바라진 않는다. 비록 인사치레일지라도 사소한 말과 제스쳐가 남긴 마지막 인상이 시작과 중간 모두를 덮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본질을 호도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내가 부끄러웠고, 나 자신의 연애 실패가 부끄러웠다면, 그 현재와 미래는 “부끄럽기 싫은 나”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왜 관계로 뻗어나가고 상대방을 위한 일처럼 표현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부끄럽고 싶지 않은 기본적 욕망이 Bitch론에서는 지나치게 거룩하고 성스럽게 변모한다. "솔직히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그동안 기회를 줘서 고마웠다.", "그래도 그동안 나는 진심으로 좋았다."는 정도의 얘기를 해주고 싶은 건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지 상대방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제 볼장 다 봐서 헤어지는 마당에, 혹은 아무 것도 없는 관계에서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게 이제까지의 관계에 무슨 의미를 지니며 아무 상관없는 새로운 연애에는 어떤 디딤돌이 될 수 있을까. 상대방의 행복과 과거를 지켜주는 일은 관계의 바깥에 있는 나에게 달린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챙겨줄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나 지킬 법한 예의를 유지하면 되는 일이고 그 안에 저런 명대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다음 사람에게부터 도전하면 되는 일을, 굳이 민폐 끼치던(…) 사람을 늘어잡고 “그동안 고마웠다….” 라고 소회를 남길 이유는 딱히 없다. 만약 나에게 이런 저런 선물을 해오던 사람이 “그동안 기회를 줘서 고마웠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화자 자신의 개인적 성장에 타인이 동원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상대방은 고마운 사람으로,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담을 수 있던 사람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연애와 별반 상관이 없다. 이것은 오히려 화자가 말하는 “마지막 순간에 나오는 본성”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나는 이런 식의 본성과 안 - 본성의 이분법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연애가 실패해서 쓰라리다면 솔직하게 쓰라려하는 것이 훨씬 더 본성에 가깝고 진실된 이야기다. 왜 그 순간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를 표하는 인격적 도야를 이뤄야 하는가. 뒷담화 안하고, 해코지만 안한다면 내 머릿속에서 뺨을 때리든 악질로 생각하든 그건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다. 연애는 인격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격은 장기적, 성공적(…) 연애를 가능케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마저도 절대적이지 않다. 어떤 또라이는 미친년 팔렐레와 죽이 잘 맞고 서로를 인정할 테니까. 과거에 대한 결벽에 괜히(상대방이 요구하지 않은) 좋은 사람씩이 될 필요가 없다. 내가 차이고, 끝내 깨진 연애에 지킬 게 있을까. 나를 몰라주는 인간을 잡놈잡년 만드는 일은 불가피하다. 어찌됐건 내 정신건강을 지키는데 효과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일이다. 당사자에게 준 만큼 받을 수 없다는 건 신경질 나는 일이 맞고 여기에 반응하는 건 자연스럽다는 이야기다. 이 만고불변의 감정적 진리는 인격적 성숙과 충분히 양립한다. “잘못한 건 없지만서도, 진짜 더럽게 튕기네 썅X.” 미워하면서도 좋아할 수 있고, 고마운 사람이지만 욕할 수도 있다. 내 마음의 변덕은 변덕대로 내버려두면 되고, 피로해질 때쯤이면 인격이든 뭐가 돼든 브레이크를 걸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다. 찌질해지기 싫은 건 찌질해지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찌질해져서 행복할 수 있다면, 찌질해지면 되는 일이다. 500일간 썸머를 좋아했던 톰은 영화 결말에 훌륭한 이가 되었던가? 새로운 이를 만나자 날짜는 1로 넘어가고 인연을 향한 톰의 도전 의식이 돋보였을 뿐이다.
나는 왜 Bitch론이 Bitch론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작 이야기를 채우고 있는 건 엄한 사람을 Bitch로 몰고, 그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Asshole들의 이야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 Bitch를 Bitch라 하는 게 뭐 어떤가. 세상은 온통 Bitch, Asshole 천지빼까리인데. 다만 본문이 판단해야 할 것은 엄한 여자가 Bitch인지 Bitch가 아닌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나누는 화자와 화자의 친구가 Asshole인지 아닌지가 아닐까. Asshole의 이야기에 Bitch라는 제목은 암만 해도 흥미 위주로 타인을 소비하는 느낌이 강하다.
개개인의 연애관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엄청난 교훈으로 소비된다면, 뭐라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결국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 본질은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네오가 흐느끼며 "앞으로는 조제가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기를..." 이라고 나레이션을 읊었다면 나는 약 두시간동안 이어진 츠네오의 연애를 몽땅 부정했을 것이다. 츠네오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매우 솔직하게 절망하고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동감한다. 어찌할 수 없는 그의 슬픔에 같이 흔들린다. 이처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비루해진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민폐에 대한 사과와 그에 대한 창피함이다. 못난 사람이면 못난 사람으로 남으면 된다. 길을 걷다 자빠지고서는 훌륭한 이가 되어야지!! 여기에 바나나껍질을 놓은 이를 용서해야지!! 라고 하진 않듯이. 상대방은 Bitch가 아니지만 나는 Asshole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선언이 임시방편에 가까운 정신승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련지.
결론. 인간은 감정에 초연해질 수 없다. 원없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다 마음 풀리면 다시 헤헤 거리고. 그게 정신 건강에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연애에 교과서 같은 정답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유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관용과 인내의 굴레 앞에서 연애는 더 부자유해질 것 같기만 하다. 만약 성숙하고 자유로워지는 게 가능하다면 연애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를 얽매고 휘감는 그 부자유에 기꺼이 자신을 복속시키면서 연애는 싹을 틔운다. 그 과정에서 덜컥거리며 상대방을 욕하고 모함도 하면서 연애는 애증의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속세의 오욕에 마음껏 휩쓸리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연애의 증거다. 미워하면 어떠한가. 사랑하니까 쪼다도 되고 그러는거지. 군자가 되는 대신, 두꺼운 이불을 사자.
@ 참고로, 예시로 든 내 연애는 정의구현이 이루어졌다. 지리적 요인을 이유로 나는 잠수함에 탑승했고 어느날 통신은 나 새 애인 생겼다!! 는 메시지를 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못살게 방치해둔 죄는 비호될 수 없을 것이다. 하........쎄굿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