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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7/02 13:48:23
Name 맛밤
Subject [일반] 정말로 따실 줄은 몰랐지. (수정됨)
편의상 반말로 작성한 점 양해 바랍니다.


나의 어머니는 56년생, 세는 나이로 올해 칠순을 맞이하셨다.
평생을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만 타고 다니시던 어머니는, 올 초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와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운전면허를 따야겠다.”


양평에서도 동쪽 끄트머리, 행정구역상 경기도지만 광주나 이천보다 강원도 원주나 횡성이 더 가까운 외진 곳에서 사시는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입원하신 다음부터는 장을 보거나 기차역에 갈 일이 있으면 콜택시를 불러 타고 다니셨다.

동네에 단 한 대 있는 콜택시를 하도 자주 불러서, 이제는 차가 나가서 없으면 기사분 가족들이 자기들 차로 마중을 나오는 VIP가 되신 어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직접 운전하겠노라고 자식들에게 일종의 선언(?)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핸드폰을 오직 전화와 문자 용도로만 쓰시다가 몇 년 전 손녀가 생기고 나서야 뒤늦게 카카오톡을 배우셨고, 그보다 먼저 도전했던 컴퓨터는 배우기를 진작에 포기하셨으며, 스마트 TV를 사드려도 일반 채널만 시청하시는 분이었기에, 나는 어머니께서 하신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몇 번 도전하다가 포기하시겠지.’


어머니가 운전학원을 등록할 때도, 필기시험을 응시생 중 최고 점수로 합격하셨을 때도, 나는 어머니가 운전면허를 따신다는 사실이 현실로 와닿지 않았고, 그저 나이 드신 노모께서 하시겠다는 일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이후 기능 시험에서 연거푸 고배를 드셨다. 듣기로는 T자 구간에서 자꾸 떨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시험에 떨어지고 풀이 죽은 어머니께 “다음에는 붙을 수 있을 거에요. 긴장하지 마시고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라는 식으로 매번 매크로 같은 응원을 하면서, 속으로는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요즘 연세 많으신 분들 운전과실로 인한 사고 뉴스가 많은데... 면허를 반납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괜히 면허 따고 다니시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아니야, 대중교통도 없는 시골에서 다니시기 너무 불편하기도 하고, 답답하고 무료하게 사시는 것보다는 여기저기 다니시면 활력도 찾으시고 좋지 않을까...’


내가 별 시덥지 않은 고민을 하는 와중에 어머니는 네 번의 도전 끝에 기능 시험에 합격하시더니, 도로 주행 시험은 두 번 만에 합격하시고 기어코 운전면허를 따버리셨다.


“잘됐네, 축하드려요.”


‘으레 떨어졌겠거니’ 하고 전화를 드렸다가 적잖이 놀라서인지, 나는 축하의 마음조차 제대로 어머니께 전하지 못하고 담백하다 못해 싱거울 정도로 맥빠진 말들만 골라서 하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아들, 엄마 차 사줄거지?”


나는 당장에라도 원하시는 차를 사드리겠다고 호언장담을 드렸지만, 어머니는 동네에서 타고 다닐 작은 중고차면 된다고 답하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1만 Km도 타지 않은 아버지 차를 처분하지 말 것을. 아니, 어차피 어머니가 타고 다니시기엔 좀 큰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중고차 사이트를 검색하면서 온갖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나이 칠순에 운전면허 반납이 아니라 취득이라니.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방송에서 본 것 같은데 이게 되네. 가만, 장모님 차도 낡았던데 어머니 차만 사드릴게 아니라 장모님 차도 사드려야 하나. 그냥 내가 타던 차를 어머니 드리고 내가 새 차를 살까. 곧 이사도 하고 개업도 해야 하는데 통장 잔고가 괜찮으려나. 아이고 중고차 가격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네...

손가락으로 애꿎은 태블릿만 튕기고 있는 내게, 아내는 장모님 차는 괜찮으니 어머니 차만 사드리라고, 처음부터 면허 따시면 차는 사드릴 생각 아니었냐면서 괜히 이상한 차 사고 돈 아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고, 나는 빙긋 웃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정말로 따실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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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밀크러버
25/07/02 14:08
수정 아이콘
흐흐 어머니 멋지십니다.

저희 부모님도 이번에 10여년 만에 차 하나 뽑으시는데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흐...
無欲則剛
25/07/02 14:43
수정 아이콘
(수정됨) 딴 소리해서 죄송하지만 차는 왜 뽑죠? 태클 거는게 아니라 그냥 궁금하네요.
왜 차에 대해서만 뽑는다는 표현을 쓸까라는 의문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25/07/02 14:45
수정 아이콘
양 불량의 확율이 있는 가챠라 뽑기라고 표현을 ..??
소이밀크러버
25/07/02 15:08
수정 아이콘
저희 지역에서는 낮잠도 한 잠 때리고 온다고 합니다. 크크.

그냥 재미있는 표현으로 쓰는거 아닐까요.
안군시대
25/07/02 15:30
수정 아이콘
관용적 표현에는 별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죠. 국어학자 같은 분들이 이유를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게 확실한 근거에 기반하지 못할때도 많고요.
無欲則剛
25/07/02 16:27
수정 아이콘
전 반대로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어학자들은 학자들답게 100프로 단정을 안하시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모르는 것들을 종합해서 내놓는 해석일테구요.
다람쥐룰루
25/07/02 15:53
수정 아이콘
신기하게도 신차만 뽑지 중고차는 뽑는다는 표현을 잘 안쓰더군요
색상이나 옵션 등을 사면서 선택하는 시스템 때문인가 싶기도 한데요
손꾸랔
25/07/02 19:51
수정 아이콘
중고차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뽑는다는 말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품을 픽업해온다는 뉘앙스 같네요.
근데 이게 '고른다'는 의미보다는 그냥 나오는 순서대로 가져오는거 같아요. '가래떡 뽑는'거 처럼
사부작
25/07/02 16:44
수정 아이콘
차가 제일 자연스럽지만 차 뿐만 아니라 고가의 새 물건을 심사숙고해서 구매했다는 뜻으로 쓰는 것 같아요. 새 옷 뽑았다, 새 신발 뽑았다처럼요

왜 그런 표현이냐는 모르겠네요. 심사숙고 해서 골랐다는 걸 강조하는 거였을까요.
25/07/02 17:42
수정 아이콘
옛날에는 품질이 더 들쭉날쭉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뽑는다는 말을 썼나 싶습니다
無欲則剛
25/07/02 14:42
수정 아이콘
멋지시네요. 교통안전 기원합니다.
수메르인
25/07/02 14:56
수정 아이콘
어머님께서 면허 따신 건 축하드립니다만, 정말 도로로 나가셔도 괜찮으실까요? 평생 운전하시던 분들도 운전대 내려놓으시는 연령대인데..
다람쥐룰루
25/07/02 15:47
수정 아이콘
많은 분들이 걱정하는걸 보면서 최근에 운전면허를 취득 혹은 갱신하셨으면 운전을 해도 된다는 우리 사회의 신뢰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면허시스템을 좀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최근에 도로에 캐스퍼가 엄청 많이 보이던데 볼때마다 이쁘고 좋더군요 이런 얘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넌 그거 타면 1인승이라고 타지 말라고 하던데 그정돈가요
카미트리아
25/07/02 15:50
수정 아이콘
저는 부모님 더 나이 들면 최신 차로 바꿔드릴 생각입니다.
안전 장치 많이 달린 걸로요...

케스퍼 ev 같은 경우는 급발진 방지 장치도 달리고..
사람의 부족함을 최신 안전 장치들이 확실히 사고에 도움이 된다고 느껴서요..
ArcanumToss
25/07/02 16:24
수정 아이콘
아... 그런데 칠순이면 자동차를 모시는 게 그리 좋은 나이는 아닙니다...
최대 75세까지만 모시고 그 후로는 안 모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인지 능력과 반사 신경이 모두 받쳐주질 못 하거든요.
25/07/02 16:48
수정 아이콘
많은 분들께서 하시는 걱정을 저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도 적었지만, 동네가 시골이고 버스도 거의 안 다녀서 어머니께서 다니시기가 많이 불편하십니다.
마트나 편의점도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자식들 보러 기차를 타려 해도 기차역까지 차를 타야 합니다.
차가 없으면 가택연금 상태나 다름 없죠.
그래서 면허가 없어도 되는 4륜 오토바이 같은 것도 알아봤는데, 영 성에 차지 않으시는 듯 하더라구요.

동네에서만 다니시고,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거나 복잡한 도시 쪽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시니, 말릴 수가 없었네요.
일단 안전에 관한 옵션이 많이 달린 차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실의에 빠지거나 우울해 하지 않으시고,
무언가를 이루려 노력하시고 끝내 성취하신 것 자체는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저 '잘됐네'라고만 하고 넘어가기에는 아쉽기에 나름 시간을 들여 마음을 정리해가면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아들 된 입장에서 그저 어머니께서 편안하고 안전한 운전만을 하시기를,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축하해주신 분들, 염려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 드립니다.
This-Plus
25/07/02 17:15
수정 아이콘
연세 많은 여성분이 면허 따는 게 정말 쉽지 않던데 멋지네요.
25/07/02 18:19
수정 아이콘
일단 어머니의 운전면허 취득을 축하드립니다.

너무 슬픈 이야기지만 노인 면허 반납도 수도권 일부 도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죠. 시골에서는 버스도 몇시간에 한번 오니 차 없으면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죠.
노인 운전을 못하게 하는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다못해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사고 대부분은 노인들이라고 하지만 일부는 젊은 사람도 있죠.
다행이 요즘 최신 차량들은 장애물을 감지해서 페달 오조작을 방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옵션이 있는 차량으로 사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25/07/02 20:06
수정 아이콘
우와 필력이 장난 아니십니다
한국화약주식회사
25/07/02 22:59
수정 아이콘
군 단위로 넘어가면 버스가 시간 단위는 커녕 하루 2번 오면 좋은 곳인 곳도 많습니다 (...) 요즘엔 택시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지만 그것도 이용 횟수나 거리의 한계가 있죠. 그렇다고 편의점이나 마트에 간단히 뭐 사러 가는데 걸어서 1시간 반 넘는 곳도 많구요. 제가 살았던 동네가 딱 그랬습니다.

버스 지하철이 잘 갖춰진 곳이 아니면 어쩔수 없이 차가 있어야 기초적인 생활 반경을 갈 수 있는 곳도 있어서, 그런 곳이라면 차가 있어야 합니다.
콩순이
+ 25/07/03 11:54
수정 아이콘
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조심조심 운전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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