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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7/22 13:43:07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6화- [-조우#7-]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6화.
[-조우#7-]

#
“왕녀께서 직접 전장에?”
“예. 전하께서 한 번 뜻을 말씀하시면 저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허어. 그것 참.”
“걱정입니다.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시면. 생각만 해도 제 목이 눈앞에서 뒹구는 것 같아서.”
“그거 참 힘들겠군요.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시기엔 너무…….”
“너무 연약해보이신다구요?”
“아아. 미안합니다. 큰 결례를 저질렀군요.”
“하하.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자주 제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는 저도 프렌경과 같이 당황하곤 하지요.”

  한 차례 난리 통이 지나간 광장대로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부지런한 움직임이 가득했다. 상인들은 빨리 물건을 달라며 재촉하는 모험가들을 다독이며 가판대를 다듬기 바빴고 뒤늦게 철수 명령을 전달받은 시장의 사병들은 투덜거리며 무장을 재정비하고 열을 맞추고 있었다. 하늘 한 가운데 떠올라 눈부시게 따뜻한 빛을 내뿜는 태양 아래 그곳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다를 바 없는 분주한 교역의 도시. 프렌과 파벨은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그 거리에서 시간이 단절된 것 마냥 한가로이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국왕 전하께서도 로즈 전하를 마주치게 되시면 언제나 꾸짖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 아닌 꽃이 만발한 궁의 정원이라고. 전하께서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로즈 전하께서는 언제나 흘려버리시지요.”
“허어. 그 말씀 역시 엄연한 어명이실 텐데.”
“생각하기 나름입니다만. 설사 그것이 어명이라고 하셨어도 전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전하는 그런 분이십니다.”
“파벨경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참 무겁겠소.”
“무거운 만큼 큰 영광이지요.”

  프렌은 웃는 파벨의 얼굴을 보며 아직 젊어 보이는 이가 감당하기 힘든 짐을 이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 그 웃음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고된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할 만큼 밝았기에 더 이상은 유감의 뜻을 전하지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어제의 사건으로 시에는 피해가 없으셨는지요.”
“예. 다행히 시의 외곽지역에서 발생했던지라 인명 피해나 그 밖에 피해는 없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겨우 4기만이 소환되고 말더군요. 우리 입장에서야 참 다행인 일입니다만.”
“시장께서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예. 아무래도 우리 시는 메인스트림을 옆에 두고 교역이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지는 도시인지라 아무래도 시의 치안이 최우선됩니다. 몬스터가 득실득실한 곳이 아무리 오가기 쉽다고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하여 우리 레인저들도 그렇고 그 때문에 전하께서도 이 곳 시장님께만 특별히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군요.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는 해도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게 쉽지 않으실 텐데.”
“그런 점이라면 오히려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이 곳 시민들은 대부분이 시를 찾아오는 모험가들이나 상인들을 상대로 하여 수입을 얻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소문을 수습하는데 우리보다야 훨씬 능숙하지요.”

  생업이 소문으로 인해 위협받게 될 만한 상황이라면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설사 그 소문이 낭설이 아닌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들은 그 말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한다. 혹은 사실을 거짓처럼 만들어야한다. 메인스트림이 완공된 후 지난 몇 년의 세월을 보내며 그들은 어느 정도 그 수완을 발휘하는데 익숙해졌고 그로 인해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세상의 모든 진실이 만들어지는 곳이라며 조롱을 사기도 했다.

“헌데 그들을 만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현장 조사건으로 꽤 바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 일 역시 전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셔야 성미가 풀리신 다기에 역시 이번에도 저로서는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더군요.”
“그리고는 파벨경께 그들을 만나라 명을 내리신겁니까?”
“예. 그렇지요.”
“그들을 직접 베니자크로 불러들이실 수도 있으실 텐데. 아랫사람 다루시는 게 참 험한 분이시군요. 왕녀께서는.”
“하하. 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파벨은 다시 속 좋게 웃으면서 프렌의 말을 부정했다.

“뭐. 프렌경의 말대로 그들을 궁으로 부르는 것도 방도가 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수도까지 함께 갈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 중에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이들이 모험가들 아니겠습니까. 자칫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만사가 뒤틀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라도 더 아쉬운 상황에 처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저와 전하이니 직접 찾아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렇소?”
“예. 그리고 저 역시 궁 안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 터라. 속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인 것 같아서 이리 나오게 됐습니다.”
“왕녀 전하를 모시는 최측근의 가장 귀중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니 이거 참 영광입니다.”
“하하.”

  속이 편할 리가 없다. 궁에 남아있는 자신의 친형이나 현장으로 직접 걸음한 로즈를 생각한다면 그 마음이 편할 순간은 단 한 시도 없을 것이다. 애써 웃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웃음을 보는 이로 하여금 숨겨진 속내가 없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자신 역시 수완이 늘어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곳입니다.”

  파벨과 프렌이 멈춰선 여관은 문 밖으로까지 소란스러운 실내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잠시 망설여야했다.

“야 이 망할 여자!!”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고함 소리에 파벨은 멍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홀 안을 둘러봤다. 프렌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파벨보다 먼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고는 한 번 더 당황하며 아직 홀 안을 둘러보고 있는 파벨에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찾으시는 이들은 저기 있습니다.”

  프렌은 홀 한 가운데에 뒤에 매달린 두 사내를 내치고는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체격 좋은 검사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은 자신을 향해 소리 지르는 사내에 밀리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맞서고 있었다. 그 둘의 목소리 때문에 홀 안의 모든 이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길 포기한 채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 서 있는 자들이 파벨경이 찾으시는 그 모험가들입니다.”
“찾기 어렵지 않아서 좋군요.”
“너무 눈에 띄는 것도 좀 곤란하실 거 같습니다만.”

  그들이 아직 홀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그 와중에 이번에는 맞서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청중들의 귓전을 때렸다.

“내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어? 아앙? 당신한테 뭐라 했냐고! 그 변덕쟁이 똥고집 왕녀한테 뭐라 그랬지 당신한테 뭐라 했냐고!? 이 귓구멍 막힌 팔푼이 자식아!”

  프렌은 반사적으로 파벨을 쳐다봤고 그런 프렌을 의식했는지 파벨은 겉으로는 심기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 눈은 충분히 동요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아…….”

#
“좀 깨워주지. 에라이 속 좁은 놈.”

  실컷 팔자 좋게 자고 일어난 켈모리안은 생각과는 달리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왕녀 일행의 행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던 아크는 나에게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지나갔는지조차 묻질 않았으나 그보다 늦게 일어난 켈모리안은 마치 아침 기도회에 어미가 깨우지 않아 가지 못했다며 투정부리는 자식 마냥 칭얼거렸다. 내가 제일 일찍 일어나서 혼자서 그들의 행진을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상쾌한 아침을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들어야했다.

“밥이나 먹어. 시끄럽게.”

  참다못한 아크가 조용히 말하자 그제야 궁시렁 거리는 것을 멈추고서는 빵 한 조각을 집어 들고는 볼품없이 손으로 찢어먹기 시작했다.

“할 일도 없는데 시 구경이나 가보자.”
“그러지 뭐.”

  아크는 입맛이 없다는 듯 일찍 나이프를 내려뒀다. 홀 안은 어제와는 다르게 상당히 분주하고 시끄러웠다. 이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나와 아크는 하루도 못 참고 다른 여관을 찾았을 것이다. 조용한 우리의 오즈와는 전혀 다른 풍경. 이런 것도 구경거리라면 거리겠지만 쉽게 질려버린다. 무엇보다 귀가 너무 아프다. 들려오는 대부분의 화제는 아침 일찍 지나간 왕녀 일행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나와 아크에겐 쓸데없이 시끄럽기 만한 불쾌한 소음으로만 들렸다. 다만 켈모리안은 그리도 행진이 보고 싶었던 것인지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느라 계속 빵조각을 테이블에 흘렸다.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야. 볼 거 없이 휙 지나갔다면서.”
“응. 생각했던 거랑은 완전 다르던데? 천천히 지나가면서 시선을 즐기거나 그러지도 않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갈 길이 바쁜가보지. 뭐 다른 나라 나라님 사정을 우리가 알아서 뭐하냐.”
“그러게. 어휴.”
“다시 가볼까.”
“어딜?”
“짐은 찾아와야 할 거 아니냐. 이대로 멍청하게 내일까지 기다릴래? 내일 또 무슨 일이 생겨서 레인저들이 우릴 도울 여력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거야 그렇지만. 어차피 거기까지 또 걸어가면 내일이나 돼야 할 텐데.”
“에이.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여관에만 처박혀있기 답답했던지 아크는 계속해서 했던 말을 번복하며 이러니저러니 답답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아크가 그러거나 말거나 켈모리안은 여전히 칠칠치 못하게 식사를 계속 이어갔다. 사실 이런 한가한 날을 처음 격어 볼만큼 격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당장 발에 못이 박혀 가만히 있질 못하는 사람만큼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하루 느긋이 오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편안히 보내면 되는 것이고 다만 익숙지 않은 곳에 적응하기엔 하루가 너무 짧다는 시간적 제한이 문제였다.

“아오! 짜증나! 말이 되냐고!”
“아니 저어. 쥰.”
“넌 좀 가만히 있어봐. 지금 내가 참게 생겼어?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옆 테이블에 거칠게 앉는 한 여자와 그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내 앉는 다른 그녀의 덕분에 오늘 하루를 뭘 하고 보내야 좋을까 하는 나와 아크의 상념은 물로 잉크를 씻어내듯 기억에서 사라졌다. 성량만 두고 따지자면 란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다.

“아니. 그 왕녀 때문에 메인 스트림을 통제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하루에 딱 한 번만 운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운행 간격만 좀 벌여두면 되는 거 아니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미리 명단에 이름까지 적어두고 더럽게 비싼 요금까지 다 냈구먼. 뭐가 어쩌고 어째?”
“저어. 쥰. 그건 우리가 이해를 해야지.”
“이보세요. 이 팔자 좋은 아가씨야. 내가 왜 이렇게 성을 내는데. 이틀내로 이걸 가져가지 않으면 의뢰를 놓친다고. 알아? 이게 우리한테 얼마나 큰 기회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방도가 없는걸 어떻게 해. 화만 내지 말고. 침착해. 으응?”
“아유우! 미칼리스 넌 참 속도 좋다.”

  무슨 급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쥰이라고 불린 잔뜩 흥분한 그녀는 연신 테이블을 퉁퉁 쳐대며 목소리를 높이며 성을 냈고 마주앉은 미칼리스라는 이는 그런 동료를 어떻게든 진정시켜보려 애를 쓰는 듯 했으나 그러기엔 목소리로나 기세로나 참 힘들어보였다.

“여기요! 이봐요오!”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자신들을 쳐다보지 못한 주인장을 찾는 쥰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홀 안을 뒤흔들었고 그제야 새 손님이 들어온 것을 알아챈 주인은 손에 맥주잔을 든 채로 뛰어오느라 꽤 위태로운 장면을 연출해야했다. 저러다 잔에 남은 맥주라도 누군가한테 흘리는 날엔 성격 고약한 사람한테 걸렸다간 큰일인데.

“여기 맥주 한 잔에 아무거나 취하지 않을 음료 하나. 식사는 필요 없어요. 빨리!”

  주문도 참 급하게 한다.

“아악! 어떻게 해야 되지? 으응? 미칼리스! 어떻게 해야 되냐고!?”
“내…….내가 어떻게 알아.”
“카악! 이번에야말로 개블리로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번을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단 말이야!”
“그…….그렇지만. 꼭 개블리로 들어가야만 블랙스미스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린 지금도 충분히 잘…….”
“어이. 어이. 이보세요오. 좀! 그냥 속편하게 고철덩이가 치대가면서 푼돈이나 벌면서 살 거였으면 여자의 몸으로 내가 왜 굳이 이런 험하고 몹쓸 길로 들어섰겠어?! 응?! 목표가 있는 거 아냐! 목표가! 최고! 최강! 장인! 블랙스미스중에서도 개블리 길드의 용병 단에 소속된다는 게 얼마나 큰 성과인지 모르진 않겠지?”
“그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왜 위험천만하게 코르사크까지 건너가면서 이 속성석들을 구해왔는데!? 바로 그거 때문이잖아. 꼭 개블리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감수한 위험에 대한 성과는 얻어야지! 안 그래?”
“으…….으응…….”
“비싼 돈 들이고 죽을 뻔 하면서까지 구해온 오브젝트가 있으면 최소한 써먹어봐야 할 거 아냐. 이딴거 만들어봤자 개블리 길드 내에서 시연할게 아니라면 쓰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 그냥 골동품이라고!”

  듣고자 하여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대화는 우리 뿐 만 아니라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쥰이라는 여자는 계속해서 성을 냈고 그 일행은 잔뜩 주눅 든 채 그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분을 함께하느라 무척이나 힘들어보였다. 때마침 그녀들의 테이블에 주인장에 내려놓은 시원한 마실 거리가 당도했고 한참 열변을 토해내던 쥰은 그대로 잔을 들어 기세 좋게 반을 비우더니 잔으로 테이블을 후려치듯 내려놨다.

“에잇. 튀었잖아.”

  처음엔 시끄러운 목소리에 무슨 일인가 쳐다보다 조금 지난 후엔 별 관심 없는 이야기다 싶었는지 고개를 돌려버린 아크의 얼굴에 쥰이 힘차게 내리친 잔에서 파편이 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있던 아크는 갑작스럽게 볼가를 습격한 맥주 몇 방울이 불쾌했던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에에. 미안합니다. 에잇! 짜증나!”

  사과의 말을 전하는 와중에서 그녀는 여전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아크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한참을 노려봤다.

“별 일이 안되다보니까 이젠 맥주도 지 멋대로구만. 아이 짜증나.”

  별로 미안한 기색이 없어보여서인지 아크는 노려보는 것을 관두고 결국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가씨.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미안하다고 툭 한 마디 해놓고선 뭡니까.”
“아니.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내가 화가 나서 내가 짜증내는데 무슨 상관이죠? 내가 그 쪽에 피해를 준 건 겨우 맥주 몇 방울 튄 것뿐인데.”
“아니 그러니까! 사과를 하려면 좀 성의 있게 제대로 하란 말입니다.”
“성의? 허! 나 참. 이봐요. 겨우 맥주 몇 방울 튄 걸로 무슨 사과를 얼마나 성의 있게 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왜요. 내가 뭐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뭐요?”
“행색을 보아하니 모험가이신가본데. 그 형편에 지켜줄만한 연인이 있어보이진 않고. 몇 시간만이라도 연인 행색이라도 해드릴까? 그럼 기분이 좀 풀리겠어요?”

  어느 샌가 그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얼굴을 댄 채로 거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위험한데.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오? 난 사과를 하라 그랬지 그따위 거짓 애인 행세나 해달라고 굽실거린 적 없어.”
“호오. 그러세요? 이거 내가 사과를 한 번 더 해야겠네요. 난 댁이 성의라고 하기에 그런 성의를 말하는 줄 알았어요. 미안하네요.”
“뭐?”
“어머. 댁처럼 외로운 모험가들한테는 그런 성의가 꽤나 귀한 것 아니었나요?”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저기..쥰. 말이 좀 심하잖아.”
“넌 좀 가만히 있어. 쪼끄만 게 쫑알쫑알 시끄럽게.”

  자기 테이블에 앉아있는 동료마저 무차별적으로 면박을 주는 그녀를 보며 이대로 둘을 더 붙여놨다간 한가로이 명상이나 하면서 조용히 보낼 오늘 하루가 남녀 간의 치졸한 말싸움으로 얼룩질 것 같아 잔뜩 긴장한 채 아크의 옆에 붙어 섰다.

“저어.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서로 실수한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이만하고 넘어가시죠. 그 쪽분은 그 쪽 분대로 기분 상한 일이 있으신 듯 한데 이만…….”
“닥쳐.”
“네?”
“닥치라고.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뼉다구 같은 놈이 어른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꺼져.”
“저…….저기…….”
“요르. 넌 저기 물러나 있어. 옆에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이 사람들이 지금 날 완전 쓰다 다 헌 행주 취급하네.

“형도 그렇고 그 쪽 그 뭐냐.”
“남의 이름을 모르면 그 쪽 그 쪽 하지 말고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니? 팔푼아?!”
“.....”
“그래. 네 말대로. 나는 나대로 화날만한 일이 있어서 소리 지르던 중이었고. 니들은 니들 사정대로 옆에 앉아있었겠지. 맥주 좀 튄 거야 미안하게 됐다만 그게 이렇게까지 말꼬리 붙잡고 늘어져야 될 만큼 막대한 데미지라도 줬어? 맥주 튄 네 볼이 썩어 문드러지기라도 했니? 난 분명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이봐. 쳐다보지도 않고서는 미안하다고 틱 한 마디 하고는 그게 사과라고?”
“이 자식이 아까부터 진짜 짜증나게!?”
“쥬운. 안 돼. 이러면,”

  결국 두 사람은 서 있던 거리를 한 발작 더 줄이며 가까이 다가서서 노려보기 시작했고 곧 이어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험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미칼리스라는 작은 체구의 그녀는 본격적으로 분을 분출하며 달려드는 자신의 동료를 붙잡아 말리느라 애썼고 나는 한 차례 신나게 얻어맞은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아크의 팔을 잡고 말리기 시작했다.

“야이. 망할 여자야! 목소리만 크면 다야? 앙?”
“내 목소리 큰데 네가 뭐 보태줬어?!?! 사람 말을 똑바로 못 알아듣고 빈정대면 다야?”
“내가 언제 빈정댔어?! 사과 똑바로 하라는 게 그게 빈정댄 거야? 성의 있게 하라는 말을 그딴 식으로 해석하는 게 빈정대는 거지!!!”
“상대 수준에 맞춰서 놀아 준 것도 죄냐?!”

  점점 유치해져가는 이 싸움을 어떻게 말려야 할 지 몰라 난처하기는 나나 반대편에 서서 죽을 것 같이 힘든 얼굴을 하고 있는 미칼리스나 똑같았다.

“교양이라곤 하나도 없는게! 화가 난 게 있으면 좀 조용이나 말할 것이지!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 화난걸 달래주기라도 해야 돼? 뭘 그리 좋은 일이라고 크게 떠들어!”
“어쭈? 내가 너한테 뭐라 그랬냐? 앙? 너한테 뭐라 그랬냐고?!”
“지금 뭐라고 하고 있잖아!!!”

  속으로 둘 다 닥치라고 이 짧은 시간에 수백 번은 중얼거린 것 같다. 아니 크게 말한다고 해도 이 두 사람의 우격다짐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내가 그 망할 왕녀한테 뭐라 그랬지 너한테 뭐라 그랬냐고.”
“화가 났으면 혼자 알아서 삭힐 것이지. 왜 남의 멀쩡한 얼굴에 맥주나 튀기고 난리야!”
“누가 거기 앉아 있으래?”
“그러는 넌 누가 거기 앉아서 맥주 튀기래! 이 망할 자식아!!”

  닥쳐. 두 사람 다 제발 좀 닥쳐.

“크흐음. 안녕들 하시오.”

  안녕하지는 못하지만 잠깐이나마 유치함의 끝을 향해 치닫는 두 사람의 싸움을 멈춰준 것에 대해선 감사하겠어. 점잖은 헛기침 소리에 두 사람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는지 홀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의 아쉬운 시선을 뒤로 하고 싸움을 멈췄다.

“하루 사이에 다 나았나보군. 잘 잤소?”
“아. 프렌 대장님. 예. 배려해주신 덕분에.”

  둘의 싸움을 멈춘 것은 레인저 프렌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젯밤 하우스에 돌아올 때와 같이 한 사내를 옆에 두고 서 있었다. 이 남자 표정을 보니 꽤 곤란해 하는 얼굴인데.

“잠시 할 말이 있어 찾았소. 편하게 쉬고 계실 줄 알았네만 와보니 이거 꽤 바빠 보이시는군.”
“아…….아닙니다.”
“흐음. 안녕하시오. 아가씨. 나는 이 곳 라임턴 레인저들의 대장 프렌이라고 하오.”
“쥰 터커라고 합니다.”
“격하게 말씀 나누시는데 미안합니다만 아가씨의 대화 상대 분들을 좀 모셔가고 싶습니다만.”
“데려가시든 삶아 드시든 상관없어요. 눈앞에서 치워만 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크아아아악!!!!!!”

  긴장의 끈을 너무 일찍 놓았다. 끝까지 자신의 불쾌한 기분을 감출 줄 모르는 쥰의 언사에 아크는 마치 짐승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이제 끝인가 하고 돌아서는 구경꾼들을 붙잡아 세웠고 프렌의 옆에 서 있던 남자는 귀가 아팠던지 인상을 구겼다.

“그 전에 잠시. 혹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심기가 불편하신지 말씀해 주시겠소. 라임턴을 찾는 분들의 불편함이라면 내가 들어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다 됐고요! 이게 다 그 망할 왕녀 때문이에요. 애초에 당도하겠다는 예정일랑 완전 무시해버리고 들이닥치는 바람에 내일 메인스트림의 선박 편을 모조리 이용할 수 없게 돼버렸단 말이에요!”
“아아. 그것 때문이셨군.”
“그것 때문이라니? 말 참 편하게 하시네요. 오늘 남은 용무를 해결하고 내일 당장 출발해야 되는데! 굳이 다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한테는 어떤 일 보다 중요한 사항이라고요! 그게 다 망할 왕녀인지 뭔지 때문에 말아먹게 생겼는데!!”
“저어. 쥰..이라고 하셨소?”
“네. 그래요.”
“미처 소개하지 못한 내 실수이외만. 그런 언사는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군요.”
“네?”
“이 분은 로즈 쇼넬 왕녀를 모시는 파벨 멀린 경이라고 하오. 말씀하신 점 때문에 불쾌하신 것이야 잘 알겠소만 정 그렇게 분을 풀고 싶으시다면야 이제부터라도 최소한 파벨경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말해주셨으면 하오만.”
“어머.”

  사그라지지 모르던 쥰의 기세는 프렌의 옆에 서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렸고 더불어 그녀 옆에 서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미칼리스는 사색이 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얼굴로 바람에 잎사귀들이 흔들리듯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사정은 이 정도로만 설명하기로 하고. 켈모리안씨는 어디 있소?”
“아. 같이 있었는..”

  분명 우리가 홀을 뒤집을 듯 싸우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테이블에 앉아 있던 켈모리안은 어느 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낯빛이 새파래진 미칼리스의 옆에 서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과 같이 빛나는 그 녀석의 표정은 며칠간 녀석과 함께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의욕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이봐요. 만나서 반가워요. 시간 어때요? 제가 맛있는 식사 대접해드릴게요.”

  뜬금없기도 이 만한하면 대륙 최고가 아닐까.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 모두를 무시한 채 켈모리안은 여전히 미칼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아까보다 떨림이 더 격해진 그녀는 결국 굳어버린 쥰의 등 뒤로 재빨리 숨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저 사람. 무서워.”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9-16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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