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04/12 04:26:28
Name 딸기
Subject 한국(KOREA)형 야구 팬 (수정됨)
여사친 A는 두산 팬, 엄밀히 말하면 박건우 선수의 팬이다. 야근을 하면서도 핸드폰으로 두산경기를 언제나 챙겨보고, 한달에 서너번은 잠실야구장을 찾는다. 네다섯벌의 유니폼, 베어스 모자, 베어스 패딩 또는 점퍼와 함께. A의 핸드폰 케이스에도 두산베어스가 있고 에코백에도 두산베어스가 있다. 야구장에서 맥주한잔 마시고 소리치며 응원가 부르는게 너무 좋고, 박건우 선수가 너무 잘생겼단다.

하지만 A는 야구를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6-4-3병살과 4-6-3병살을 구분하지 못하고, 좌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왜 좌투수가 올라오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wRC+와 WAR를 들이밀며 2017년의 박건우는 mvp를 받을만 했다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홈런 20개 밖에 못쳤는데 왜 mvp야? 그래도 A는 언제나 잠실 1루에서 목청이 터져라 두산베어스를 응원하고, 박건우 안타를 외치며 즐겁게 야구를 본다.



친구 B는 야구라면 다 좋아하는 진성 야구팬이다. 크보를 넘어서 메이저리그도 일일히 챙겨보며, NPB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경기를 틀어놓으면 재밌게 잘 본다. 선수들의 성적을 논할 때면 wOBA와 FIP를 이야기하며 타율과 방어율은 볼 필요도 없는 스탯이라 절하한다. 크보에 제대로 된 UZR통계가 없다는 걸 아쉬워하고, kWAR보다 sWAR가 우월한 이유를 설명하며 열변을 토한다.

B는 투수의 공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야구장 보다는 집에서 TV로 야구보는 것을 선호한다. 공 하나하나의 무브먼트와 볼배합에 감탄하고 분석하며 야구를 본다. 연례행사 정도로 B와 야구장을 가게 되면 언제나 야구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수 뒤쪽 3층, 아니면 외야에 자리를 잡는다. 경기는 뒷전이고 몰래 숨겨온 소주나 홀짝 대다가 금세 취해버린다. 야구가 좋고, 야구와 함께 술마시는 것이 마냥 좋단다.



나는 언제나 키움팬 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크보팬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맞는것 같다. 집 TV에서 안 나오는 스포티비2에서 키움경기를 하는 날이면 불편하게 컴퓨터로 응원팀 경기 시청하는 것 보다는 TV로 타팀 경기 보는 것을 차라리 선호한다. 가끔은 황금사자기나 대통령배도 챙겨보며 결승전 정도는 목동에서 직관하기도 한다, 드래프트 시즌에는 1차나 2차 1라운드 지명을 얼추 맞추기도 하며, 타팀팬인 친구들 보다 그 팀의 유망주 선수들을 더 잘알고있다.

한달에 한번 정도 야구장을 가지만, 응원팀의 홈인 고척은 멀어서 안가고 집에서 가까운 잠실로만 간다. 왠지 돈이 아까워서 굳즈는 굳이 사지 않고, 강윤구가 마킹되어있는 서울히어로즈 유니폼 하나를 10년 가까이 입고다닌다. 미리 예매하지 않고 현장에서 티케팅해도 표를 구하기가 쉽다는 이유로 팀과 상관 없이 언제나 3루에서 경기를 본다. 클리닝타임 전까지 소주 두팩에 맥주 세잔을 후딱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 그날의 원정팀을 목빠지게 응원한다. 어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고 오늘은 내 고향 충청도를 부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A를 은근히 낮추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야구를 알지도 못하는 애가 이상한 바람이 들어서 야구장을 다닌다며 무시했다. 너는 야구를 즐기는게 아니라 덕질을 하고 있는 것 뿐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반면 B는 나보다 더 수준높은 야구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리그나 팀 상관없이 야구 그 자체를 좋아하고, 세이버를 토대로 세밀하게 야구를 분석하는 B야 말로 진정으로 야구를 즐긴다고 여겨왔었다. A와 비슷했던 나의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했고, B와 같은 야구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곤 했었다.



오늘 업무차 근처에 들렀다가 시간이 나서 간만에 혼자 고척돔을 다녀오게 되었다. 비인기팀 키움과 비인기팀 KT의 경기이다 보니 딱히 크지도 않은 고척돔은 텅텅 비어있었고, 1루 응원석 근처에만 얼마 되지 않는 관중들이 모여있을 뿐이었다. 쓸쓸하다 못해 적막한 고척돔 외야에서 혼자 야구를 보고있는데 문득 A와 B가 떠올랐다. 크보에서 선호하는 관중은 누구일까. 구단에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진정한 야구팬은 과연 누구일까. 방구석에서 입으로만 야구를 논하는 나와 B가 진짜야구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메이저리그가 저물어가고 있는 중에도 크보가 연일 흥행가도를 달리는 이유는 나와 A, B 중 어떤 사람들 때문일까.


오늘따라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영웅출정가를 따라부르며 A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일 잠실더비 같이 갈래? 나 야구보는법 좀 가르쳐 줘라.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0-22 14:1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4/12 04:39
수정 아이콘
스포츠팬으로써 해당종목좀 모르면 어떻습니까 보고 즐기면 되죠.
각종 커뮤에서 많은 유저분들이 야알못이니 축알못이니 인터넷에서 박제되는거 보면 씁쓸할때가 종종있습니다.
안개 속 망령
19/04/12 04:41
수정 아이콘
요즘 어떤 분에 대한 조리돌림이 너무 심한 것 같군요. 1절 2절...
HA클러스터
19/04/12 14:23
수정 아이콘
그분이 끝을 안내고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19/04/12 05:10
수정 아이콘
뭐든 a쪽이 좋은팬이죠...
19/04/12 05:11
수정 아이콘
와 글 좋네요. 저도 야구좀 본다면 보는 편인데..

룰도 잘 모르고, 경기보다는 선수들 사진 찍는거에 재미들린 야구부심 부리는 분들이 소위말하는 얼빠 여성팬들이 구단에 도움이 훨씬 되죠 흐흐.

직관, 유니폼, 굿즈, 행사참여, sns홍보 등등.. 비교불가일거에요
부대찌개
19/04/12 05:11
수정 아이콘
한국형(KOREA)이 아니라 한국(KOREA)형인데요...
진인환
19/04/12 07:45
수정 아이콘
한국형(KOREABROTHER)
19/04/12 11:22
수정 아이콘
수정했습니다.
쥬갈치
19/04/12 06:27
수정 아이콘
뭐 좋고 나쁘고가 있나요
다 그냥 야구팬인거지
제랄드
19/04/12 06:35
수정 아이콘
제목 때문에 오히려 저평가 받으실지도? 글 좋네요~
유게에 있던 아싸들의 대화법이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송파사랑
19/04/12 07:20
수정 아이콘
야구장이 노래방 된지 오래여서.. 앰프 틀어놓고 응원하는거 진짜 극혐입니다
파핀폐인
19/04/12 07:27
수정 아이콘
크으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꿀꿀꾸잉
19/04/12 07:46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及時雨
19/04/12 08:11
수정 아이콘
축구 직관 가끔 가는데 다같이 노래 부르는 공간의 힘에서 축구가 많이 밀린다는 걸 가끔 느낍니다.
노잼겜이라도 응원잼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지금 KBO 리그 같아요
청순래퍼혜니
19/04/12 08:20
수정 아이콘
제목이 좀 그래서 읽을까 말까 했는데 아주 좋은 글이었네요~ 추천드렸습니다.
Multivitamin
19/04/12 08:43
수정 아이콘
글은 좋은데...

이거 마지막에 여사친이랑 같이 야구보러 간다고 흘리시는 글 아닙니까 크크 봄이네요.
19/04/12 11:25
수정 아이콘
답장이 뭐라고 왔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크크
메가트롤
19/04/12 08:52
수정 아이콘
한국형(KOREA)이 아니라 한국(KOREA)형인데요...(2) ㅠㅠ
19/04/12 08:5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여자인데도 초등학교때부터 야구에 푹 빠져서 tv중계 안하는 날은 라디오앞에서 대기하면서까지 모든 야구일정을 소화했죠 당연히 야구룰에 해박해서 야구축구 좋아하시던 이모부는 야구장갈때 저를 데리고 갈 정도였어요 얘가 제대로 본다구요 아빠는 잠실구장 지나가다 어린이회원 모집하는 걸 보고 딸내미 생각나 신청해주셨구요
중고등학교 때는 안보다가 대학때쯤에 다시 불타올라 구원투수가 누가 나올 지 대타가 누가 나올지 예견하고 적중하는 수준까지 좋아했죠
지금 생각하면 그 열정으로 야구 관련 직종을 했었으면 좋았겠단 생각도 가끔 합니다

나이가들면서 야구를 등한시하다가 요즘 열살 아들이 야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시 야구를 보게됐는데 옛날 분위기랑은 많이 달라진듯요 야구를 분석하며 보는 사람들보다는 응원하며 노는 분위기를 즐기러 오는 사람이 많더군요
제가 야구장 열심히 다닐 때만 해도 여자들은 남자친구들때문에 원피스입고 야구장 가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여성팬들이 더 적극적이더군요
이제는 저도 열정이 없으니 초집중해서 보는 게 아니라 요즘같이 노는 분위기가 아이나 저나 더 좋더군요
특히 패밀리석은 넘나 좋더라구요!!
어쨌든 요즘 아들이랑 야구장 가서 전광판 숫자나 알파벳의 의미부터 모든 룰을 엄마가 설명해주니 아들의 눈에 존경심이 보이더군요
그래도 야구는 룰을 알아가면서 빠져드는 거죠
유쾌한보살
19/04/12 09:15
수정 아이콘
간만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9/04/12 09:33
수정 아이콘
a도 b도 c도 다 야구팬이죠 뭐. 남에게 피해주는게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즐겨도 좋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크보야 앰프 소리 좀 줄이면 안되겠니. 애기데리고 직관 가고 싶다ㅠㅠ
미카엘
19/04/12 09:49
수정 아이콘
즐기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다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19/04/12 10:14
수정 아이콘
다 야구팬이지만 A가 좀더 인싸식이네요 크크크크
19/04/12 10:20
수정 아이콘
저도 집관을 선호하는 소위 '주둥이' 유저인데요.
결혼 전에는 야구 볼때 치킨하나 시켜놓고 동생이나 아버지와 같이 쟤는 꼭 중요한 순간에 어떻고 저떻고,
쟤는 지금 타율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야구를 즐겼고
지금은 야구를 좋아하는 집사람과 야구 얘기를 하면 누가 잘생겨서 호감이 가고,
쟤는 눈빛이 맘에 안들고 이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심지어 집사람 친구가 야구팀 관계자라서 내부사정 뒷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듣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저희 집사람 야구와 관련된 가십을 좋아하지만 매년 유니폼도 사고
심지어 집사람 친구네 가족이 구단 관계자라서 직관은 기본이고 선수들도 종종 보고 뭐 그럽니다.
아무튼 저같은 주둥이 유저도 나름의 야구를 즐기는 방식이 있지만,
저희 집사람과 살면서 야구 즐기는 법을 공유해보니 나름 재미있다 싶습니다.
청자켓
19/04/12 10:27
수정 아이콘
두 유형 모두 한국(KOREA)형 야구팬 맞네요... 베이징뉴비,라이트팬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사실 크보는 저렇게 즐기는게 좋아요. 너무 딥하게 즐기면 실망이 커집니다.
저격수
19/04/12 10:43
수정 아이콘
흐흐 조리돌림이라지만 제목이 적절한걸요. 한국형 야구팬이잖아요.
막줄만 없었다면 좋은 글이었을 텐데요.
그리움 그 뒤
19/04/12 10:46
수정 아이콘
구단 입장에서는 A 가 도움이 되는 팬이겠지만,
일반 팬의 입장에서는 A던 B던 글쓴이던 모두 팬인거죠.
대신 B 형태의 팬이 다른 형태의 팬에게 여러가지 지표 갖다대면서 그것도 모르면서 야구 보냐고 하는 꼬라지는 극혐입니다.
그래서? 지표가 뭐 어떻다고?
그린우드
19/04/12 11:01
수정 아이콘
Korean Brothers 불만있어요?
노이즈캔슬링
19/04/12 11:32
수정 아이콘
그냥 라이트팬은 한미일 다 있을거 같은데, A 같이 야구장에서 응원가 크게 부르는 젊은 여자팬은 진짜 한국형 맞죠. 오히려 일본이 수입해간 느낌이고요.
이웃집개발자
19/04/12 12:58
수정 아이콘
응원합니다!!
아웅이
19/04/12 15:33
수정 아이콘
여사친 승!
벙아니고진자야
19/04/12 16:04
수정 아이콘
글은 이렇게 쓰는겁니다... 좀 보고 배우세요... 그 '레알(REAL) 한국형(KOREABROTHER)'님
김두식
19/04/13 16:16
수정 아이콘
키움팬 반갑습니다!!
나물꿀템선쉔님
20/01/08 16:05
수정 아이콘
읔 많이 찔리네요..... 크크크
이벤트 덕분에 놓쳤던 좋은 글 읽고 갑니다
20/02/03 15:14
수정 아이콘
쉽게 읽히면서 생각도 하게만드는 좋은글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추천게시판을 재가동합니다. [6] 노틸러스 23/06/01 30161
3733 (장문의 넋두리) 헤어짐은 언제나 슬픕니다. [18] 다시마두장1331 23/05/30 1331
3732 팀켈러 목사님이 지난 5/19 소천하셨습니다 [61] Taima1142 23/05/29 1142
3731 건설현장의 안전관리 현실과 한계 [104] 퀘이샤1096 23/05/27 1096
3730 [LOL] DRX 스킨 공개기념 2022 DRX 롤드컵 서사 돌아보기 (약간스압) [25] 종말메이커1060 23/05/27 1060
3729 아기가 너무 이쁘네요 [112] 보리차1096 23/05/25 1096
3728 [PC] 가정의 달 기념 삼국지 조조전 모드 이야기 [46] 손금불산입13448 23/05/24 13448
3727 전기차 1달 타본 소감 [111] VictoryFood13794 23/05/21 13794
3726 나의 주식투자답사기, 손실로 점철된 짧은 기록 [58] 숨결12722 23/05/18 12722
3725 초등자녀를 둔 부모가 자기자식 수학과외하면서 느낀점 몇가지 [88] 오타니13018 23/05/17 13018
3724 [역사] 그 많던 아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 떡볶이의 역사 [48] Fig.112860 23/05/17 12860
3723 [똥글] 사도세자 입장에서 바라보기 [50] TAEYEON15409 23/05/15 15409
3722 비혼주의의 이유 [75] 소이밀크러버15889 23/05/15 15889
3721 아주 소소한 취미.jpg [37] 아스라이15243 23/05/13 15243
3720 [PC] 정치적 올바름과 스카이림 [40] 이선화14936 23/05/09 14936
3719 사진40장.jpg [45] 이러다가는다죽어15057 23/04/18 15057
3718 버크셔 헤서웨이 주주총회 번역(의역) - 1부 [36] 김유라13681 23/05/08 13681
3717 요리는 아이템이다. [49] 캬라13224 23/05/06 13224
3716 (스포) 전지(全知)하면서 전능(全能)할 수 있을까? [51] 마스터충달13152 23/05/05 13152
3715 아내 이야기 1 [41] 소이밀크러버13151 23/04/25 13151
3714 [역사] 평양냉면 vs 함흥냉면 / 냉면의 역사 [70] Fig.112990 23/04/20 12990
3713 40대 중반. 인생 2라운드의 두려움. [48] 한글날만기다려15837 23/04/24 15837
3712 정신재활중인 이야기 [8] 요슈아14407 23/04/24 1440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