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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 09:08
시조관련으로 검색해보면 웹사이트가 꽤 나오긴 하는데, 명확하진 않은데 대부분 '구전'으로 얘기하고 있네요.
단심가의 경우 최초의 한글 기록은 1728년라네요. http://www.yongin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739
20/03/06 09:12
허허허 구전이군요.
그럼 아마도... 작성자는 우리말로 시조를 짓고, 그 뜻을 한자로 기록하고... 외우고 외우고 외우고 있다가 전달하면서 읽어줘야 했겠네요...
20/03/06 09:16
아마 저당시의 사고방식(?)이 우리랑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각 지역 아리랑처럼 약간의 변형이 있으면서 정말 노래하듯 구전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20/03/06 09:24
옙 뭐 아리랑이야 그러려니 하는데...
하여가 - 단심가 같은 경우에는 킬방원과 정몽주 사이의 개인적인 내용이고... 정몽주를 죽인 것이 뭐 자랑도 아닌데 그걸 구전될 정도로 이사람 저사람한테 말하고 다녔으려나 싶기도 해서요 크크 하기사 한글 만든 세종대왕은 아버지께 직접 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20/03/06 09:35
회색사과님의 마지막 줄 생각이 맞을 것 같네요.
사실 두 시조는 당시 배경을 제외시키고, 시조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뛰어난 작품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보기에는 시조를 먼저 읊고, 답가(답시조)를 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 분위기상 수많은 기싸움이라든가 하는 것이 오갔을 수도 있겠고, 아마 당사자들에게는 평생 못 잊을 순간이었을 겁니다. 순전히 제 생각이긴 한데, 태종 이방원이 그 때 내심 정몽주에게 그 충정 뿐 아니라 단심가로도 탄복하지 않았을까 해요. 이방원은 며칠 걸려서 지어낸 시조일텐데, 그 답가를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버린 셈이니...... 그리고 하여가의 답가로서 하여가와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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