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면서
장기간 여행하면서 관리 안 된 똑딱이로 찍은 사진이라 사진에 먼지가 가득하고 상당히 조악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ㅠㅠ
제목만 그럴싸한 그냥 사진만 가득한 여행기입니다. 크크
1. 12월
그 해 겨울, 저는 꽤 깊은 슬럼프에 빠져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 여행을 시작한지 9개월 정도 지나 있었고, 대개 여행이 그렇듯 몇 번의 슬럼프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했습니다. 겨울은 제가 일하던 직종의 취업 기간이었고, 한국에서 하나둘 들려오는 2~3년 어린 후배들의 취업 소식이 마냥 기쁘게 들리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해는, 제 20대의 마지막 해이기도 했으니까요.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다는건, 그리고 그 순간을 타지에서 홀로 맞는다는건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여행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쿠바를 거쳐서 남미를 여행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머릿 속에 그런 계획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결제만 남은 순간이었는데, 문득 이렇게 도망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아둥바둥 취업하고 사는데 혼자 쿨한 척 떠난 세계일주. 주변 친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짧은 직장 생활을 통해 알게된 나의 형편없는 모습과 그런 모습으로 다시 취업시장에 나서야 한다는 불안감에 세계일주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도망쳐 나온 것 뿐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또 도망치면, 정말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질러버렸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대신, 남극으로 가는 크루즈 티켓을.
리우 데 자네이루를 출발해서 남극을 경유하여 발파라이소로 돌아오는 24박 25일의 일정이었습니다.
세부 일정입니다.
그런데 일단 리우로 가야되잖아? 그래서 리우행 비행기도 끊었죠.
아틀란타를 경유해서
리우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크루즈 탑승!
크루즈쉽 치고는 그다지 크지 않은 63000톤의 배인데 똑딱이에는 다 담기지 않네요.
리우를 출발하는 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상은 하루 종일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출항을 했는데 딱 10초 구름 사이로 예수상이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그래서 겨우 한 장 찍었습니다. 크크
저기 예수상 있어요.. 똑딱이의 비애 ㅠㅠ
그렇게 제가 탄 배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거쳐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궁 까사 로사다. 뮤지컬 에비타에서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를 부르는 곳인건 원숭이도 알겠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상징 엘 오벨리스꼬.
크리스마스 이브는 몬테비데오 해변에서 보내고
[약후방주의]
남미는 크리스마스가 여름이네요. 하하하
크리스마스 분위기 가득한 메인 레스토랑. 다행히 크루즈 승객은 가족 위주라 외롭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외롭지 않았음 ㅡㅡ
12월 27일, 일정이 조금 변경되어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합니다.
객실 TV로 현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TV는 무려 Life's Good, LG!
피지알에 포클랜드 제도 다녀온 사람은 없겠죠? 흐흐 가장 큰 마을 포트 스탠리입니다.
매일 아침 제공되는 선상 뉴스. 표지에 그 날 대표 일정이 나오는데 세일링 투 안탁티카..! 안탁티카..!! 여름이라 남극이 요즘 서울보다 더 따뜻하네요.
이 날 드레이크 해협을 건넜는데 정말 배멀미 때문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ㅠㅠ
그리고 12월 29일, 드디어 남극에 진입합니다.
2. 12월 29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는데 이미 해가 뜬지 한 시간 반이 지났습니다. 크크
얼음 동동. 유빙이 떠다니기 시작합니다.
킹 조지 아일랜드입니다. 네, 그 세종기지가 있는 섬입니다.
세종기지는 아니고 칠레기지였나.. 남극소년님이 알려주시겠죠!
선장님의 저 뿌듯한 표정. 따봉~!
고래가 점프하는 걸 찍고 싶었지만 점프는 안 하더군요. 그냥 꼬리만..
저기 곰팡이처럼 보이는게 다 펭귄이랍니다... 똑딱이라서 똑송합니다. ㅠㅠ
참치 아니고 펭귄입니다.
남극에서의 첫날은 사실 기대 이하였습니다.
킹 조지 아일랜드는 그냥 눈 쌓인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큰 기대 없이 밤을 보내고 둘째날을 맞았습니다.
3. 12월 30일
둘째날 아침, 갑판에서 본 풍경입니다.
사진으로는 첫 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저는 정말이지 너무나 환상적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정말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눈을 뜬 기분입니다.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지구가 아니라는 느낌은 남극이 처음이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피트니스 클럽. 인정?
선미갑판에서. 사방이 설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유빙을 타고 떠다니는 펭귄 가족. 보이시나요? 똑송합니다. ㅠㅠ
이게 한계입니다. ㅠㅠ
이제 더 이상 멘트할 것도 없으니 풍경이나 감상합시다.
제가 가장 아끼는 사진입니다. 어지간한 여행자 앞에서도 사진 한 장으로 꿀리지 않는 자신감!
얼음만 보기 지겨우시죠? 잠시만
[약후방주의]
크루들이 이벤트도 하고
러시아에서 온 처자는 다르군요. 덜덜덜
다시 풍경 감상합시다.
이 정도면 빙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군요.
뭐랄까 사방이 막힌 것 같은데 계속 항해하면서 새로운 풍경이 나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수 갑판에서 찍은 파노라마
그리고 선미 갑판에서 찍은 파노라마입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건 기억나네요. 세븐 시스터즈라고 불리는 봉우리입니다.
둘째날 선상 디스플레이로 확인한 현재 위치
남위 64도!!
남극에서의 둘째날은 단언컨대 제 여행에서 가장 황홀했던 하루였습니다. 정말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하루 체험한 기분이었습니다.
4. 12월 31일
남극에서의 마지막 날은 날씨가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제와 다른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더라구요.
그렇게 제 20대 마지막 날은 남극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근데 저 장식 크리스마스 장식 재활용아니냐 읍읍
그런데 있잖아요? 이건 오글거려서 말하기 좀 그런데요..
제 20대 마지막 날 떠오른 해는 그 날 지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이로써 나는 영원한 20대야!! 하하하 (feat. Life's Good, LG!)
라고 4시간 후 33살 되는 아재가 혼자 귤 까먹으며 외칩니다. ㅠㅠ
5. 1월
그렇게 남극에서의 꿈같은 3일은 마무리 되고 배는 다시
진정한 땅 끝, 케이프 혼을 지나서
세계 최남단의 도시 우수아이아입니다.
엘 핀 델 문도, 세계의 끝에서. 뒤에 보이는 배가 제가 타고 온 배입니다.
비글 해협과 마젤란 해협을 지나 북상합니다.
크루즈에서의 마지막 석양이 진다..
최종 목적지 발파라이소에 도착합니다. 대항해시대 했던 아재님들 반갑죠? 크크
그리고 저는 그렇게 남미를 9개월 더 여행하게 됩니다. 흐흐 그리고 아직도 그 빚을 갚고 있지요. ㅠㅠ
6. 마치면서
사실 예전에
https://cdn.pgr21.com/pb/pb.php?id=qna&no=27905 이 질문을 했던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했던 질문인데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언젠가 피지알에 여행 후기를 남겨야지 했는데 벌써 몇년이 지나버렸네요.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꼭 12/31 날짜 맞춰서 남극 다녀온 이야기를 쓰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봅니다.
4시간 남은 2016년 마지막 날 모두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는 모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3-13 13:2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