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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1/15 17:05:53
Name TheLasid
Subject [일반] 호러물 이야기 (1): 필연에서 우연으로, 영웅에서 인간으로
며칠 전에 좋은 분들과의 모임에서 우연히 호러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창 수다를 떨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아, 내가 생각보다 호러물을 참 좋아하는구나! 라고요. 이왕이면 글을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Orbef님과의 다음번 공동 번역도 진행해야하는데... 원고를 절반쯤 번역해놓고 딴 길로 샌 건 비밀입니다 :))

각설하고, 우리는 왜 호러물을 볼까요? 혹은 왜 보지 않을까요? 무섭다, 잔인하다, 징그럽다... 이는 누군가가 호러물을 보지 않는 이유인 동시에 저 같은 사람들이 호러물에 열광하는 대표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면 저희 호러물 애호가는 뼈에서 살을 분리하는 걸 좋아하고, 피와 척수에 취한 변태들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강하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호러물에는 그밖에도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있거든요.

고난과 시련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인류는 쇠퇴했습니다. 외계인이 쳐들어왔습니다. 사악한 용이 출현했습니다. 부모님은 살해당했습니다. 약혼자는 납치당했습니다. 아이코? 이번엔 제가 납치당했네요. 큰일이에요! 제 순둥이 종자가 거대한 풍차 괴물한테 맞아 죽기 일보직전입니다!

보시다시피, 호러물의 플롯은 사실 다른 장르와 특별히 다를 바가 없이 시작합니다. 일상은 깨어지고, 악은 거대하며, 저(주인공)는 나약합니다. 드라큘라나 늑대인간, 미라, 프랑켄슈타인 같은 (상대적으로) 엄청 초창기의 호러물에 등장하는 악역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합리적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하는 짓에는 뭔가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죠. 백작님께선 정당한 복수를 원하십니다. (물론, 뭐에 관한 복수인지는 끝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요.) 늑대인간 형님은 어떻게든 갈망을 이겨내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시련과 유혹 앞에서 의지는 산산조각 나지만요. 붕대맨은 착했습니다. 잠만 잤죠. 건방진 인간 놈들이 무덤을 털러 오기 전까지는요. 창조자의 사랑을 갈구하던 똑똑하고, 친절하며, 심지어 힘도 센 피조물은 괴물로 만들어집니다.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빨리 증오로 바뀌니까요.

아니...이 친구들한테 딱한 사정이 있단 건 알겠는데요. 그래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냐고요?

당연하지, 네가 나쁜 놈이니까.


권선징악. 고전적 세계관을 이보다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요? 조너선 하커가 드라큘라에 의해 고난을 겪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커의 혈통이 드라큘라와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사실, 백작님은 하커를 몹시 좋아합니다. 독일에서 하커를 구하기 위해 아주 제대로 동분서주하셨죠. 다른 흡혈귀 놈으로부터 (정확히는 년으로부터) 지켜줘, 얼어 죽지 않게 살려줘, 구조대 보내라고 전보도 쳐줘 그야말로 수호천사였죠. 감히 자기가 오랫동안 지켜봐 온 좋아하는 먹잇감에 다른 놈들이 손을 대선 안 됐거든요.* 늑대인간에게 물리셨다고요? 그러게 달밤에 왜 밖에 나다니고 그래요. 집안에 얌전히 짱박혀있을 것이지. 네...? 고고학자시라고요? 뭐라는 겁니까 도굴꾼 노무 시키가. 다른 사람들의 조각난 시체를 바느질해서 하나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 누더기를 부활시키기 전에 얼굴을 미리 확인하십시오. 태어난 생명에 책임을 다하십시오.
(*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드라큘라의 손님>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어쩌면 주인공이 하커가 아닐 수도 있거든요. 번역서 ‘주석 달린 드라큘라’에 그 내막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옛날 옛적 호러물에서는 험한 꼴을 당하는 주인공들에게 나름대로 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고난이 찾아오는 건 필연이었죠.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시련을 이겨낼 힘과 용기가 있었고, 아름다운 약혼녀와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절의 호러물은 거대한 악을 타도하는 뛰어난 힘과 지략을 지닌 영웅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유혈과 공포는 어찌 보면 소도구에 불과했죠. 이러한 추세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호러물의 대세가 책에서 영화로 넘어가기 전까지는요. 그러니까, 성스러운 숲 안에서 뻑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난 그냥 보통 사람이라고. 나쁜 놈이 아니라니까?

헐리우드가 온 세상을 주름잡기 시작한 이후로 호러 장르는 조금 더 파급력 있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70~80년대 전까지 호러물은 주로 특이한 취향을 가진 상류층이나 식자층 사이에서나 널리 읽혔습니다.) 그러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우선, 호러물의 제목이 아주 친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이의 책>이라고요? 지금 장난하십니까? 혹시 ‘예술 영화’로 오해받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이블 데드>가 딱이라고요. 관객의 몰입을 돕기 위해서 주인공과 등장인물들도 바뀌었습니다. 비탄에 빠져 분노를 삼키는 고귀한 남녀는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그 자리를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로 진창을 구르는 (조금, ‘때로는 아주 많이’ 잘 생긴) 흔남흔녀들이 채웠죠. 특별한 출생의 비밀 따위는 없습니다. 이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에요. 뭐 돈이 좀 많을 순 있겠죠. 평소에 호러 영화에 등장시키고 싶은 재수 없는 친구들 있잖아요? 변호사라든가 변호사라든가 변호사 말입니다. (혹시 변호사가 끝까지 살아남는 호러 영화도 있나요? 댓글로 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인권 변호사 이런 친구들 말고요.) 이에 발맞춰, 나쁜놈들도 적절한 밸런싱이 이루어집니다. ‘나사 하나 빠진’ 악마라던가, ‘영 안 팔리게 생긴’ 인형이라든가, 시체 덕후들이라든가, 그밖에 ‘그냥’ 미친놈들이 주연으로 캐스팅됩니다.

작품의 전개 방식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전달하는 ‘공포’의 양상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공들은 고난을 겪어야 할 특별한 당위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우연이죠. 한밤중에 차를 타고 여자 친구랑 이동하다가 오른쪽으로 틀어야 했는데 왼쪽으로 틀었다 정도가 잘못이랄까요? 모든 불행이 그렇듯, 시련은 사소한 일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무작위성은 한동안 (혹은 지금까지도) 호러 장르를 주름잡는 특징이 되었습니다. 불행에는 이유가 없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전달하게 된 것이죠. 이제, 전기톱에 썰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은 여러분의 친구입니다. 축 늘어진 채로 가로등에 목매달린 사람은 당신의 약혼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존재’는 한때 여러분의 가족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무고한 이들을 죽여야만 합니다!

이러한 ‘몰입감’은 초고전 호러물과 고전 호러물 사이를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둘 사이에 커다란 공통분모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악’은 반드시 쓰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차이는 예전처럼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님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이 승리할지언정, 적어도 오늘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악에 굴복하지만, 당신만큼은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영화의 몰입감과 합쳐져 실로 통쾌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로 당신이 우리의 영웅입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 악은 자멸하거나 단순히 재수가 없어서 망하곤 했습니다. 기억하시죠? 이 친구들도 우리 수준에 맞게 너프됐다는 걸요.)

이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먹어주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화보다 더 몰입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치인 게임 분야에서 크게 번창했지요. 그런데...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 지금 호러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이건 뭔가...호러가 아니라 그냥 유혈이 낭자한 액션물 같은데요? 맞습니다. 파급력과 상업성을 얻은 대가로 호러물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가 생겼죠. 진정한 호러 덕후라면 마땅히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진정한 공포를 맛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뭘까요?

호러물 이야기는 2편 악의 각성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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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15 17:13
수정 아이콘
재밌습니다 크크
TheLasid
17/11/15 17:42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D
及時雨
17/11/15 17:18
수정 아이콘
호러 너무 조와용 흐아아앙
이 장르는 아마 영원히 B급이겠지만 흑흑
TheLasid
17/11/15 17:43
수정 아이콘
흑흑 처음에 호러로 성공한 다음에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작가나 감독들 보면 부들부들합니다.

B급 덕후들도 많단 말이에용. 호에엥
세인트
17/11/15 17:24
수정 아이콘
부부가 호러/스릴러 매니아다보니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음 편도 너무너무너무 기대하겠습니다! 흐흐.

뱀발인데, 근래 나온 호러/스릴러 영화중에 재밌게 본 건 곡성이랑 맨 인 더 다크 정도네요. 둘 다 그냥 호러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요.크크.
(쓰고보니 둘 다 벌써 꽤 됬구나...)
제임스 완 표 영화들은 요새 다 그저 그런 느낌이라 ㅠㅠ
TheLasid
17/11/15 17:45
수정 아이콘
호러가 은근 장르 정체성이 흐릿한 듯해요. 요즘은 써있기는 호런데 가만 보면 코믹인게 왤케 많은지 ㅠ

암튼, 맨 인 더 다크는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
17/11/15 17:47
수정 아이콘
아니, 죽은 이의 책이 어때서요.
지금 학교호러물의 고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어두운 동굴속, 창백한 소년들이 촛불을 둘러싸고 죽은 자들을 위한 제의를 행한다.. 며칠 뒤 소년 하나가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나머지 소년들은 공포에 휩싸이는데..
TheLasid
17/11/15 17:59
수정 아이콘
아니, 왜 우리 이블 데드 기를 죽이고 그러세요!

죽은 시인의 사회는 명작 호러였긴 하죠. 그래도 제목이 이블 포잇이었음 더 대박쳤을 겁니다!

죽은 시인들의 망령에게 쫓기며 공포에 질렸던 소년들은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나는데...
17/11/15 18:06
수정 아이콘
크크 좋은 글에 뻘댓글 죄송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있어 유일한 호러 요소는 한글 번역 제목..


근데 돈키호테에 호러 요소가 있나요?
TheLasid
17/11/15 18:10
수정 아이콘
크크 아니에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

호러라는게 판본에 따라서 전래 동화가 되기도 하고, 19금이 되기도 하잖아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돈키호테에 호러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부디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
17/11/15 18:04
수정 아이콘
히치콕 감독 영향이 컸다고 봐요. 공포란 멀리 있는게 아닌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일상에서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시작되는..

호러영화는 요즘 것 보단 옛날 것들이 훨씬 좋더군요.
TheLasid
17/11/15 18:16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저도 요즘 호러는 두 번은 안 보게 되더라고요. 히치콕은 정말 대단한 사람 같아요.

작품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서스펜스가 넘쳤습니다. 당장 연령별 사진만 봐도...어후...
알테어
17/11/15 18:42
수정 아이콘
호러영화 안본지 오래되서 보고 싶네요 흐

옥수수에서 장산범 무료하던데..

그거나 봐야겠군요.
及時雨
17/11/15 20:53
수정 아이콘
Aㅏ 장산범은...
17/11/15 19:17
수정 아이콘
러브크래프트풍의 코스믹 호러를 좋아합니다. 거기까지 꼭 다루어 주세요!
TheLasid
17/11/16 12:54
수정 아이콘
오오...러브크래프트 좋아하시는군요. 막 반갑네요. 코스믹호러를 빼면 얘기가 안 되지요! :))
시즈토
17/11/16 00:1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이블 데드처럼 당시 영화를 좀 더 예로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호러 영화의 코드가 바뀌는 건 알겠는데 정작 그때 영화를 잘 몰라서 이해 부족이 오네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TheLasid
17/11/16 13:07
수정 아이콘
사실 저도 호러 영화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정도로 잘 알지는 못합니다 :))

본문 중간중간에서 언급한 내용은 좀비 영화의 대부격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었고요. 영 안팔리게 생긴 인형은 '사탄의 인형'입니다. 나사 하나 빠진 악마는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를 떠올리면서 썼는데...사실 이 분은 생긴게 조금 나사가 빠졌을 뿐,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참 모범적인 악마 대공님이셨지요 :)

사실 이 시기의 고전 영화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아무도 안 보는 영화가 되어버려서 글에서 언급하기가 조금 조심스러웠습니다. 이블 데드도 반쯤은 팬심으로 적기는 했지만, 이름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특별히 안 적었을 듯해요. 의견 감사해요. 다음 편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
시즈토
17/11/16 14:01
수정 아이콘
너무 고전이라서 그러셨군요. 저는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을 쓰고 있거든요. 호러와도 접점이 많아서 쓰신 글 잘 읽고 있는 차에, 영화까지 알면 더욱 좋겠다 싶은 개인적 바람이 생겨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다음 편을~
TheLasid
17/11/16 14:29
수정 아이콘
이야...소설가 분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글은 제가 아니라 시즈토님이 쓰셔야 할 것 같은데요 :))
그런데, 다음 편에도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오긴 하겠지만, 꼭 영화에 방점을 찍고 얘기하지는 않을 듯해요.
17/11/16 00:37
수정 아이콘
[당연하지, 네가 나쁜 놈이니까.]

까지 읽고 '아니 요즘 추세는 그게 아닌데요?' 라고 댓글 달아야지~!!' 하고 생각했었다가, 그 다음 문단 읽고 '우왕 잘못했다능!' 라고 생각했네요.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블데드는 진짜 명작입니다.
TheLasid
17/11/16 13:13
수정 아이콘
요즘엔 추세가 없는 거 같더라고요 흐흣...애초에 B급 감성이 충만한 장르라 그런지 정말 온갖 게 다 튀어나오는 느낌입니다.

이블데드는 지금 봐도 재밌더라고요. 내용도 연출도 유치찬란 그 자체인데 왜 그리 재밌는지 모르겠습니다 크크.
윌모어
17/11/16 08:53
수정 아이콘
호러 영화, 공포 영화 많이 좋아합니다. 다컸으면서도 무서운 것 보고나서 자려고하면 자꾸 방 구석구석을 확인해보고 잡니다 ㅠ ㅠ 혹시 뭐가 있을까봐...
TheLasid
17/11/16 13:09
수정 아이콘
크...호러를 좋아하시면서도 감수성을 잃지 않으신 그 모습 존경합니다! 저는 갈수록 무서운 거에 무감각해 지더라고요 ㅠ 제 뇌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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