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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1/13 15:04:42
Name 구밀복검
Subject [일반] 파고 : 깨시민이나 베충이나 다를 거 없거든?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처음부터 플롯을 공개하니, 혹여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는 분들은 0번 단락들을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GTAE4

핑크 플로이드 - Time







0.
코엔 형제의 1996년 작 <파고>의 플롯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 딜러인 제리 룬드가드(윌리엄 H 머시 분)는 주차장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회사의 주인이자 그의 장인인 웨이드(하브 프레스넬 분)는 그에게 돈을 빌려줄 것을 거부하는 등 돈을 빌릴 곳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제리는 칼(스티브 부세미 분)와 개어(피터 스토메어 분)에게 자신의 아내인 진을 유괴해줄 것을 부탁하고, 이후 장인을 협박해 8만 달러를 얻어내 이를 반씩 나눠 가질 계획을 세운다.

칼과 개어는 진을 납치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경찰을 죽이게 되고, 목격자 둘까지 죽여버린다. 브레이너드의 경찰서장이자 만삭의 임산부인 마지(프란시스 맥도먼드 분)가 이 사건을 수사를 담당하여 사건의 윤곽을 밝혀내기 시작한다.

제리는 웨이드에게 돈을 건내 받고 이를 칼/개어와 분배하려 하지만, 사위인 제리를 평소 무시하던 웨이드는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겠다며 직접 주차장으로 돈을 들고 가고, 돈을 인계 받으러 간 칼은 뻣뻣하게 구는 웨이드를 살해해버린다. 웨이드가 들고 온 금액은 당초 제리와 칼/개어가 생각했던 8만 달러를 훨씬 웃도는 100만 달러였고, 이를 알게 된 칼은 차액인 92만 달러를 눈밭에 숨기고 개어에게 4만 달러를 주기 위해 은거지로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칼은 자동차 소유권을 가지고 개어와 시비가 붙어 언쟁을 벌이다 개어에게 살해 당하게 된다.

개어가 칼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는 현장을 급습한 마지는 개어를 생포하고, 제리 역시 경찰의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연행되면서 사건이 마무리된다.



1. 계급
코엔 형제의 영화들을 일관하는 특징 중 하나는 운명적 계급이다. 그들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팔자는 정해져 있으며,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품었던 이들은 모두 파국을 맞는다. 예컨대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에서 백화점 사장 빅 데이브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이발사 에드는 빅 데이브가 자신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 팔자를 고치려고 하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끝끝내는 아내를 잃고, 어이없는 누명을 쓰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모스는 우연히 획득한 거금을 지켜내기 위해 영화 내내 고군분투하며 결국에는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적을 피했다 싶은 시점에서 우연한 시비에 휘말려 어이없게 죽는다. <인사이드 르윈>은 주인공 르윈이 뜨내기 뮤지션 신세를 고쳐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의 삶은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엔딩을 통해 보여준다. 그처럼, <파고>에서도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이들은 처참하게 몰락한다. 제리는 유괴를 가장하여 장인인 웨이드의 돈을 가로채려다 의도치 않게 웨이드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고 자신 역시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고, 칼은 계획 이상의 돈을 은닉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고작 자동차 소유권을 가지고 개어와 다투다가 도끼에 살해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고>가 '사람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고 그에 수긍해야 하며, 독단적으로 이를 벗어나려는 이들은 준엄하게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식의 보수적인 당위론을 말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파고>는 그렇게 인물들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계의 냉혹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사실이 스스로 말을 하게끔 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의 억압성을 폭로한다.

이것을 드러내는 장치 중 하나가 인물들의 캐릭터를 동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리 룬드가드를 상징하는 것은 돼지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돼지가 놓여 있으며, 그의 집 부엌은 돼지로 도배되어 있다시피하다.




그에 반해 제리의 장인이자 기업주인 웨이드 구스터프슨의 사무실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사자이다.  



이로부터 둘의 계급적인 격차가 드러나며, 장인에게 착취당하는 제리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사자가 돼지를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아마 몇몇 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서 자연스럽게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을 떠올릴 것이다.



* "돼지는 주는 먹이만 먹고 산다. 그리고 살만 찐다. 자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돼지들. 그런 돼지들이 되고 싶진 않았다. 돼지의 왕이 되고 싶었다."

이후, 제리의 아내인 진이 칼과 개어에게 납치되는 시퀀스에서 다시금 등장하는 돼지는 결정적이다. 마치 진이 도살당하는 돼지라는 것처럼 말이다.



코엔 형제는 이러한 계급적 대조를 통해 제리의 출세욕을 보다 맥락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인상을 한층 강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골프라는 소재이다.




위처럼, 제리의 사무실에는 골프하는 사람 모양의 피규어들로 장식이 되어 있다. 여기에서 제리가 성공과 출세를 갈망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보다 구체화 된다. 여기에 하릴 없이 '아이 러브 골프' 낙서를 하고 있는 제리의 모습은 쐐기를 찍는다.





2. 마지
자동차 딜러인 제리가 돼지고, 기업주인 웨이드가 사자라면, 경찰서장인 마지는 새이다. 영화는 마지가 처음 등장하는 신에서 마지의 침실이 새로 장식되어 있음을 먼저 보여준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나 연속적으로 보여주면서 말이다.  




이는 마지가 새처럼 자유로우며 계급적 충돌로부터 벗어나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마치 지니어스 게임의 독수리처럼 말이다.



* 한 턴이라도 굶으면 사망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만 하는 사자나, 사자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중간계층인 하이에나나, 포식자들의 위협에 떨고만 있어야 하는 피식자들과는 달리, 독수리는 유유자적하게 하늘에 머물며 생존을 확보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마지는 등장 인물들 간의 갈등 관계로부터 비껴나간 중립적인 심판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주 갈등은 제리/웨이드/칼/개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마지는 이들과 이해관계가 얽힌 것이 전혀 없다. 또한 그녀는 대단히 유능한 경찰로, 임신 중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도 원기왕성하게 수사를 진행해 나간다. 그녀는 칼과 개어의 살인 현장을 단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살인 장면을 그대로 추리해내며, 제리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채고, 분쇄기에서 칼의 시체를 갈아넣고 있던 개어의 고어함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정확히 그의 다리를 맞춰 생포해내며 사건을 종결시킨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무기력하게 그려지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분)과는 달리, 마지는 세파의 잔혹무도함을 능히 당해낼 수 있는 용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코엔형제는 일련의 미장센들을 통해, 실상 이러한 마지조차도 [세상의 섭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행위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커피다. 마지는 사건 현장을 검증하면서 인스턴트 커피로 허기를 때우는 데 반해,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제리와 웨이드와 그의 회계사는 카페에 앉아 진을 납치한 칼과 개어에게 어떤 식의 대응을 취할 것인지를 논의하며 비싼 커피를 마신다. 여기에서 마지 역시도 계급적 격차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마치 경찰서장이라고 해봐야 블루컬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커피가 계급적 이질성을 강조하는 장치라면, 침대는 계급적 동질성을 보여준다. 제리와 개어를 체포하는 데에 성공하고 사건을 마무리한 마지는 자신의 남편과 침대에서 어깨를 기대며 TV를 바라보면서 "여보,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목가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치 개어 같은 잔혹무도한 범죄자와는 다른, 안온하고 조화로운 삶을 자신들이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칼과 개어가 매춘부와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서 TV를 보고 있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마치 능력 있고 정직한 경찰서장이든 인간 이하의 악질 범죄자이든 연인과 떡치고 어깨에 기대 TV 보며 잠을 청하는 것은 똑같다는 듯이 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깨시민이나 베충이나, 전라도민이나 경상도민이나, 민주당빠나 새누리당빠나, 평소 하는 짓은 다 거기서 거기다' 쯤 될까.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처럼, 코엔 형제는 마지가 범죄자들과 가지는 동질성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초반부에 제리와 칼과 개어가 주점의 테이블에 앉아 진을 납치할 것을 의논하는 신의 카메라 구도와, 마지가 중반부에 대학 동창인 야나기타를 오랜만에 만나 잡담을 하는 신의 카메라 구도는 놀라울만큼 유사하다. 심지어 야나기타는 제리나 칼과 다를 바 없는, 허언증을 앓고 있는 허풍선이 사기꾼이며, 야나기타의 흑심을 경계하면서도 접대용 웃음으로 일관하는 마지의 표정도 그에 못지 않게 허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계급적 동질성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수단은 햄버거이다. <파고>에는 유난히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스카티도 맥도날드로 가고


제리의 동료도 햄버거를 먹고


마지도 햄버거를 먹는다.

이런 식으로 햄버거를 통해서 인물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코엔 형제는 도발적인 연출을 감행한다. 마지가 서에서 칼과 개어의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도중에, 마지의 남편이 그녀와 함께 먹을 햄버거를 가져오며, 마지는 남편이 낚시에 쓸 지렁이를 넘겨준다. 이때, 마지는 햄버거를 보면서 "이야 맛있겠다!(Yeah.Looks pretty good.)"라고 말하는데, 정작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남편이 쥐고 있는 지렁이 봉투이다. 마치 햄버거가 지렁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개어는 팬케이크에 환장하는 인물이라는 점도 공교롭다.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인물들이 어떻게 그려지든 간에, 인물이 먹는 것이 곧 그 인물들을 규정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묵직하다. 실상 마지든 제리든 개어든 먹는 것은 거기서 거기이며, 나아가 그들이 사실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렁이를 먹는 인간들끼리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이 장면이 암시하는 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파고>의 인물들은 모두 교환과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예외가 되는, 인간적인 결합처럼 그려지는 것이 마지와 그녀의 남편이다. 그런 그들에 의해 지렁이와 햄버거가 교환되는 신이 연출되었다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코엔 형제는 마지와 남편이 햄버거와 지렁이를 맞교환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들조차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기브 앤 테이크의 교환을 전제로한 계약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제리와 웨이드와 칼과 개어가 각각 대가의 교환을 통해 성립된 관계이듯, 마지와 남편은 지렁이와 햄버거로 얽혀있는 관계인 것이다.



3. 출산
마지의 임신은 장식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지렁이는 마지만 먹는 것이 아니며, 마지의 태중에 있는 아이 역시 지렁이를 먹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중에서 마지가 졸음결에 시청하는, 투구벌레가 [벌레]를 물고 와서 새끼에게 6개월 동안 먹인다는 TV 다큐의 내용과도 호응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이 신이 나오기 바로 직전, 칼은 전파 수신이 되지 않는 고물 TV를 두들기며 제발 화면이 나오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언뜻 보면 칼이 마지에게 TV를 틀어준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식으로 칼/개어와 마지라는, 흉악범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이라는 정반대의 입장에 놓인 이들이 연속성을 갖게 된다.  

개어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임신 사실을 알리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칼과 시비가 붙어 칼을 살해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마치 저런 여성에게서 개어가 태어났다는 듯이 말이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일이겠죠'라는 대사 역시도 심상치가 않다.





이러한 것들을 진이 칼과 개어에게 납치되는 장면과 연관시켜보면 참 절묘하다. 납치되기 직전, 진 역시도 TV를 시청하고 있고, TV에서는 코미디언 둘이서 '빈 닭에서 나온 빈 달걀'을 가지고 농담을 하고 있다.



이것을 영화의 중심인 마지와 매치시키면? 빈 닭인 마지는 지렁이와 벌레를 먹으며 태중에서 빈 달걀을 기르는 것이 되는 셈이다. 마치, 만화 <몬스터>에서 나치의 우생학 계획에 의해 요한과 안나의 모친이 몬스터를 임신하듯 말이다.



* 인간은 뭐든지 될 수 있단다

결론적으로, 마지든 칼이든 개어든 개어든 간에, 똑같이 침대에 누워 연인과 하루를 마무리하고, 똑같이 테이블에서 허위어린 만남을 가지며, 똑같이 지렁이와 다를 바 없는 햄버거를 먹는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인사이드 르윈>처럼 순환적이고 회귀적인 삶을 살아간다. 마지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칼 같은 3류 악당이 될 수도, 개어 같은 냉혹한 범죄자가 될 수도, 제리 같은 재벌가의 찌질한 데릴사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마지와 마찬가지로 만삭의 몸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지렁이 햄버거를 씹으며 범죄자를 처단하고는 자신의 도덕성과 목가성에 만족을 느끼며 연인과 잠을 청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엔딩에서 아들 폴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장느가 폴의 딸인 손녀를 품에 품고서 희망을 품지만, 폴에게서 그러했듯 그러한 기대가 무참하게 배반될 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 <렛 미 인>이 오스칼과 호칸이 나오는 장면들을 병치시키면서 오스칼과 이엘리의 동화같은 로맨스가 결국에는 호칸의 죽음과 동일한 경로를 걸을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샤이닝>의 잭이 전 관리인과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되는 것처럼, 혹은 <차이나 타운>에서 아이다가 이블린과 동일하게 자신의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에 놓이는 것처럼, <똥파리>의 상훈의 인생살이가 그대로 영재에게 대물림되는 것처럼,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의 엔딩에서 새로이 구성되어 부모의 묘소에 참배드리는 료타의 가정이, 부모의 가정처럼 애정과 증오와 질시와 연민이 뒤얽힌 암투를 벌일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4. 도끼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폴 버니언 동상이다. 도끼를 든 나무꾼 형상을 하고 있는 이 동상은 이 영화에서 딱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영화의 시작 시점에서 칼과 개어가 파고에서 브레이너드로 진입하여 납치를 실행에 옮기기 전 매춘부를 구입하려 할 때에 나오고, 두 번째는 개어가 우발적으로 경관과 목격자를 살해하기 직전에 나오며, 세 번째는 개어가 마지에게 연행되는 장면에서 나온다.







즉, 세 장면은 모두 개어와 관련이 있으며, 폴 버니언 자체가 개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어가 [도끼]로 칼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한층 더 분명해진다.



개어는 사실 마지와 더불어 <파고>에서 가장 비합리적/비타산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영화 내내 그는 돈을 비롯한 모든 것에 초연한 태도를 고수하며, 뜬금없게도 팬케이크나 TV나 자동차 따위에 묘한 집착을 보인다. 이러한 개어의 비정형성은 칼을 도끼로 살해한 뒤 분쇄기에 시체를 갈아넣는 장면에서 극대화 된다. 이는 전혀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유'를 '이득'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어에게는 그저 칼이 자신을 화나게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죽일 이유로는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개어의 일련의 태도는 마치 김동인의 <감자>의 복녀를 연상하게 한다. 그처럼, 복녀는 '감자'로 상징되는 이익을 위해 기존의 유가적 도덕을 벗어던지지만, 그로써 그녀 내부의 내적 갈등이 영구히 봉합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투기심에 가득찬 복녀는 이해득실과 관계없이 정념을 분출시키지만, 타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는 헛짓거리에 불과하며, 그녀의 비합리적인 선택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결말에 가서는 복녀가 살해되는 장면의 막장드라마 같은 역동성과 극단성은 갑자기 휘발된 채, 마치 공식 보고서 같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문체로 복녀의 사후처리가 묘사되면서, 불길 같은 열정의 반란이 결국에는 차가운 이해관계에 진압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분쇄기에서 시체를 갈아버리는 개어의 엽기성은 경찰서장 마지에게 체포되어 압송되는 순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며, 개어는 그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마지의 고색창연한 훈계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폴 버니언 동상을 응시하며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 겨울도 가고 봄이 이르렀다. 그때 왕 서방은 돈 백원으로 어떤 처녀를 하나 마누라로 사오게 되었다.
"흥!"
복녀는 다만 코웃음만 쳤다.
"복녀, 강짜하갔구만."
동네 여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면, 복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웃고 하였다. '내가 강짜를 해?' 그는 늘 힘있게 부인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생기는 [검은 그림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놈 왕 서방. 네 두고 보자."
왕 서방이 색시를 데려오는 날이 가까왔다. 왕 서방은 아직껏 자랑하던 길다란 머리를 깎았다. 동시에 그것은 새색시의 의견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흥!"
복녀는 역시 코웃음만 쳤다.

마침내 색시가 오는 날이 이르렀다. 칠보단장에 사인교를 탄 색시가, 칠성문 밖 채마 밭 가운데 있는 왕 서방의 집에 이르렀다. 밤이 깊도록, 왕 서방의 집에는 중국인들이 모여서 별한 악기를 뜯으며 별한 곡조로 노래하며 야단하였다. 복녀는 집 모퉁이에 숨어 서서 눈에 살기를 띠고 방안의 동정을 듣고 있었다. 다른 중국인들은 새벽 두시쯤 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복녀는 왕 서방의 집 안에 들어갔다. 복녀의 얼굴에는 분이 하얗게 발리워 있었다. 신랑 신부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을 무서운 눈으로 흘겨보면서, 그는 왕 서방에게 가서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이상한 웃음이 흘렀다.
"자, 우리집으로 가요."
왕 서방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눈만 정처 없이 두룩두룩 하였다. 복녀는 다시 한번 왕 서방을 흔들었다.
"자, 어서."
"우리, 오늘 밤 일이 있어 못 가."
"일은 밤중에 무슨 일."
"그래두, 우리 일이…"
복녀의 입에 아직껏 떠돌던 이상한 웃음은 문득 없어졌다.
"이까짓 것."
그는 발을 들어서 치장한 신부의 머리를 찼다.
"자, 가자우, 가자우."
왕 서방은 와들와들 떨었다. 왕 서방은 복녀의 손을 뿌리쳤다. 복녀는 쓰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섰다. 그가 다시 일어설 때는, 그의 손에는 얼른얼른 하는 낫이 한 자루 들리어 있었다.
"이 되놈, 죽에라. 이놈, 나 때렸디! 이놈아, 아이구 사람 죽이누나."
그는 목을 놓고 처울면서 낫을 휘둘렀다. 칠성문 밖 외따른 밭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왕 서방의 집에서는 일장의 활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활극도 곧 잠잠하게 되었다. 복녀의 손에 들리어 있던 낫은 어느덧 왕 서방의 손으로 넘어가고, 복녀는 목으로 피를 쏟으면서 그 자리에 고꾸라져 있었다.

복녀의 송장은 사흘이 지나도록 무덤으로 못 갔다. 왕 서방은 몇 번을 복녀의 남편을 찾아갔다. 복녀의 남편도 때때로 왕 서방을 찾아갔다. 둘의 사이에는 무슨 교섭하는 일이 있었다. 사흘이 지났다.
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 의사 - 왕 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 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가져갔다.




현대 사회는 이익과 약육강식과 도구적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며, 도덕과 윤리와 공동체 등의 전통적인 가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는 악다구니 속에서 흔적 없이 소멸된다. 인간은 전통과 결별하고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선택이 항상 이익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오히려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우연으로부터 나오곤 한다. <그 남자는 그곳에 없었다>가 인물들의 선택이 자신들의 의도와 기대를 배반하고 파멸로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자승자박적인 아이러니를 산뜻하게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이때에, 이전의 선택 과정에서 포기했던 열정과 정념과 취향 등에 기반한 가치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것은 <가지 않은 길>로 비유할 수 있는 내적 갈등을 일으키며 일종의 정신분열적인 태도를 낳는데, 그로부터 박탈감과 후회와 회한과 같은 자학적인 정서가 발생하며, 이것이 외부로 분출될 때는 개어나 복녀에게서 볼 수 있는 '이유 없는 분노'로 드러난다. 유약한 남편 대신 사내다워 보이는 빅 데이브와의 외도라는, 내적 갈등을 유발할만한 과감한 선택을 했던 도리스 - 재미있게도 <파고>의 마지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인데, 마치 마지가 도리스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 가, 빅 데이브의 영웅담이 모두 그의 허풍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빅 데이브 이 개자식!"이라고 외치며 박탈감 속에 자살을 택하듯이 말이다. 복녀도, 개어도, 계급의식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박탈감과 분노가 연원한 지점은 분명 계급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는 결국 타산의 통제에 의해 체제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일회적인 광란극에 그치고 만다.



5. 결어
기실, '계급구조가 낳는 불평등은 박탈감을 낳고, 박탈감이 갈등을 낳으며, 갈등이 범죄를 낳는다. 따라서 범죄자는 사회적 모순의 반영일 뿐이며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식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고리타분해서 결코 그 자체로는 미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메시지 자체로는 전혀 호소력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영상을 통하여 시각적으로 제시될 경우 완전히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다. 즉, 똑같은 메시지라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서 각인이 될 수도 외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메시지, 그러니까 주제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오한 주제의식을 다루기에 영화는 전혀 적합한 수단이 아니다. 그리하자면 영화보다는 문학이, 문학작품보다는 자연과학/사회과학/철학이 보다 나은 수단이다. 아무리 잘난 영화라고 해도 이미 수많은 학자나 문필가들이 제기한 주제를 반복할 뿐이며, 대개의 경우는 잘해야 시정잡배의 개똥철학보다 그리 나을 게 없다. 예컨대 명작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메시지라고 해봐야 원작인 암흑의 심연의 재탕일 뿐이다. 베트남전이 불의한 전쟁이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조차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렇듯, 영화의 가치는 주제에 있는 것이 아니며, 주제를 '영상 서사'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텍스트나 이미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극적인 실재감은 서사와 주제의식을 '영화적'으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준다. <그래비티>가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남게 된 이유도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파고>는 그야말로 뭇 영화들의 교과서가 될만한 작품이다. 영화의 서사와 주제는 대단할 것은 없지만 굳이 흠을 잡을 것이 없는 정도면 충분하며 - 물론 이러한 무난한 수준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많은 영화들은, 비유하자면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법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이를 영상으로 얼마나 성공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달려있다는 것을 <파고>만큼 설득력 있게 제시한 영화도 드물다.

코엔 형제는 <파고>의 오프닝에서 처음에 이것이 1987년 미네소타에서 일어난 실화라고 밝히지만, 사실 <파고>에서 발생한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나중에야 이것을 알게 되고 나서 감독들의 장난질에 분개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닐 수도 있다. 보통 실화, 그 중에서도 범죄를 다룬 실화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오면, 여타 픽션들에 비해 대중들은 호기심 어린 반응을 보인다. 이는 실화를 다룬 사건이기에 현실감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며 실화의 [비현실성]에 뜨악에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 저런 미친 놈도 있을 법 하지'라는 실화의 [현실성]에 납득한다. 즉, 실화에 기반한 작품들은 순수한 픽션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더 깊은 감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파고>의 서사가 실화라는 속임수에서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며 실화로서 향유했던 이상, <파고>에서 그려지는 파국은 우리의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와 강자존으로 점철되어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전통과 도덕과 질서가 풍화되어 가는 모습은 이미 <파고>에서 보여줄만큼 다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 4/5 코엔 형제가 쓴, 앞으로도 길이 회자될 계급 영화의 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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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사진
15/01/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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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네요. <파고>도 보고 싶네요.
구밀복검
15/01/13 15:44
수정 아이콘
저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코엔 형제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다만,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분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는 달리, <파고>의 경우에는 얼핏 보면 평범한 스토리지만 면밀히 영화를 검토한 관객은 섬뜩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분석해보는 재미는 더 있지 않나 싶어요.
조과장
15/01/13 15:49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전문 평론가 신가요~?
아이러니 라는 단어를 정말 잘 풀어낸 영화였습니다.
오래 간만에 영화를 다시 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구밀복검
15/01/13 15:51
수정 아이콘
아뇨 그냥 영화 좋아하는 매니아에요 흐흐; 아이러니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고>도 훌륭하지만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가 더 교과서적이지 않았나 싶긴 합니다.
조과장
15/01/13 16:03
수정 아이콘
군대 휴가 나와서 포스터의 강렬한 모습(설원 위의 총잡이)에 빠져서, 보았습니다.
처음 경찰서장의 어이 없는 모습에 실망하다가, 이야기의 진행이 되면 될수록, 뭐랄까,
건조한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분쇄기 신은 참~ 좋았습니다.
보고 나서 인생 뭐있냐는 생각으로 복귀했습니다. 흐 흐
마스터충달
15/01/13 15:55
수정 아이콘
깨시민이나 베충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면 깨시민이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오유나 일베나 그게 그거'라고 하는 양비론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파고>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일베'의 그림자를 느꼈는데, 저는 결론이 많이 다르게 나더군요. 개어의 비정형성에서 느껴지는 것은 순수한 악의와 그로인한 공포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있다니...'라는 점이죠. 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집니다. 주유소 편의점에서 황당한 논리로 주인을 협박하는데, 그 논리에 이성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너무나 무의미하죠. 애거나 안톤 시거의 폭력성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이 '미친놈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노인을...>의 보안관은 충분한 연륜을 쌓았음에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비록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친놈들을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공포의 핵심이었던 거죠.

언급하신 <파고>의 '실화의 장난질'은 이러한 공포를 더욱 배가시킵니다. 이런 미친놈들이 픽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은 섬뜩함의 정도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코엔 형제 영화들의 치밀한 플롯은 영화를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공포는 더 무시무시해집니다. 이런 미친놈들이 정말로 현실에 등장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아마도 <시리어스 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한 폭풍같은 자연재해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준비도 예측도 할 수 없는 채로 삶을 송두리째 부셔버리고 마니까요.

일베의 비상식적인 행보와 주장은 이 '미친놈들'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실제 일베유저였던 후배와 이야기를 해본적이 있습니다. 5.18이 북괴가 선동한 폭동이라는 그의 주장에 그들이 좋아하는 팩트를 들이대며 틀린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논점일탈, 물타기 등을 시전하며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5.18은 폭동이라는 주장을 지속하더군요. 뻔히 보이는 상식을 어떻게 그리 왜곡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니 이해는 영원히 불가능 하겠죠. 그들의 이런 '이해할 수 없음'이 인터넷에 머문다면 무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현실로 뚫고나온 순간 무시할 수 없는 공포가 됩니다.

그런 '미친놈들'이 우리와 다름없이 먹고 자고 싼다는 것은, 그들이나 우리나 다름없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우리와 함께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요? 코엔 형제는 이 지점에서 오는 공포를 스크린에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밀복검
15/01/13 16:04
수정 아이콘
그런 해석은 이 영화에서 유독 마지를 둘러싼 장면들을 강조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 마지는 임산부로 설정되었는가. 왜 칼이 TV를 두드리는 쇼트가 '투구벌레가 새끼에게 벌레를 먹이는 다큐'를 임산부 마지가 바라보는 쇼트로 전환되었는가, 왜 하필 마지와 남편이 지렁이와 햄버거를 교환하고 햄버거 대신 지렁이를 보여주면서 '맛있겠다'는 대사를 하는지 등등을 말이죠. 또한, 마지막에 마지가 개어를 압송하는 장면에서도, 마지가 도덕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 와중에 개어가 폴 버니언 동상을 슬쩍 쳐다보는 시선을 따라가면서 카메라 시점이 이동하면서 [개어의 시선]으로 장면을 진행시킵니다. 마치 마지의 설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개어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말이죠. 이렇듯, 단순히 '어떤 미친 놈들'에 대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었다기에는 포괄되지 않는 도발적이고 전복적인 장면과 장치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충달
15/01/13 16:20
수정 아이콘
마지가 임산부인 점도 그 공포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동한다고 봤습니다. <세븐>에서 트레이시(기네스 펠트로우)가 '이런 곳에서 아이를 낳아서 기를 자신이 없어요.'라고 하소연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내가 이런 미친놈들하고 살아갈 자신은 있긴 한데, 그들 사이에 아이를 낳는 것은, 싸질러 놓는 것 같은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딸이 없는 저에게 고영욱은 조롱의 대상이지만, 딸있는 아버지들에게 고영욱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처럼요.

하지만 영화는 (특히 코엔 형제의 영화는) 단편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분석하신대로 계급적 상징들을 활용하는 면도 있고, 이를 통해 개어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이러한 해석들에는 매우 동의하는 바이고, 그것을 짚어낸 분석력과 풀어낸 필력에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양비론적 결론과 이어지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는 그러한 계급적 동질성이 단순히 동질성에 머물지 않고 공존하는 공포로서 한 번 더 해체했던 것이죠. 이것이 아니더라도 그 동질성에 무언가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밀복검
15/01/13 16:33
수정 아이콘
등장 인물들의 계급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양비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구조'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죠. 염상섭의 <두 파산>이 양비론을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는 작품인 것처럼요. 특히, <파고>의 엔딩은 본문에서 이야기했듯이 마지가 남편과 침대에서 TV를 보며 잠을 청하는 장면인데, http://i.imgur.com/AfNfDTS.png 로 이건 너무 의도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범인들 붙잡아 놓고 자신들은 잘 되어 가고 있다며 안심하고 있지만, 정작 범죄자들과 잠자는 구도가 똑같으니까요. 그저 흉악범들과 공존하는 공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엔딩을 저런 식으로 처리할 필요는 없었겠죠. 이것은 '우리 중 누구도 세파의 개같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은 문제의식으로는 충분할 수 있어도, 답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죠. 그야 영화가 해답까지 제공할 의무는 없습니다만, 약간 아쉬움을 느낌직은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갈망, '우리 중 누구도 운명 앞에서 떳떳할 수 없다면, 무엇이 해결책인가요?'라는 질문에 답한 것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안톤 쉬거에게 "동전(운명)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야."라고 일갈하는 칼라 진 모스의 대사로 말이죠.
마스터충달
15/01/13 17:10
수정 아이콘
'우리 중 누구도 세파의 개같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해석은 확실히 공감이 갑니다.

여기서는 양비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제목이라던가 본문의 '깨시민이나 베충이나, 전라도민이나 경상도민이나, 민주당빠나 새누리당빠나, 평소 하는 짓은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표현에서 양비론적인 뉘앙스를 느껴 댓글 남겨 보았습니다. 특히 일베처럼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먹고 자고 하는 동물적인 공통점 밖에 없는 인간이라 부르기 아까운 존재들에게 다른 이들과 동급의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지라... 양비론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이 점에 대해서는 굳이 논의를 이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해석에 대한 비판에 답변을 드리자면, 단순히 흉악범과의 공존이 공포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폭력성보다 '이해할 수 없음'이 공포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음'은 범죄자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구조적 부조리로 확장된다고 보고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시리어스 맨>과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가 상당히 노골적이라고 봅니다.) 제가 보는 이 부조리(또는 불가해)가 구밀복검님이 언급하신 '세파의 개같음'과 어느 정도 통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밀복검
15/01/13 17:27
수정 아이콘
예. 그리고 그 <불가해함>, <노인>으로 상징되는 전통과 도덕을 무력하게 만드는, 신들이 사라지고 우연이 지배하는 이 땅에 남겨진 근대적 약육강식 질서의 실체가 자본이나 국가나 시스템 따위위 허깨비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개개인들 그 자체임을 보여준 것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보네요.
15/01/13 16:07
수정 아이콘
참 좋은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전부 찾아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쓸쓸함, 외로움 같은 끝맛이 남더군요.
그 중 <파고>가 제일 그랬습니다. 아직도 눈 덮인 영화 속 배경이 떠오르네요.
구밀복검
15/01/13 17:32
수정 아이콘
사실 본문에서는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생략했습니다만, 미국 중북부 분위기와 하얗게 눈 덮힌 쇼트들이 의미하는 바도 간과할 부분은 아니겠죠. 참 여러 측면에서 곱씹어볼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검은책
15/01/13 16:22
수정 아이콘
코엔형제 영화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에요.
오래전에 보고 충격받고 한동안 멍했고
영화라는 쟝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지요.
리뷰 보니까 다시 보고 싶어요.
정말 이런 리뷰라니!!!
어떤 리뷰가 되었던 리뷰를 보고나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되는데 다시 보고싶게 만드시는군요.
정말 잘 봤습니다.
구밀복검
15/01/13 16:4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사실 글 쓰는 페이스가 워낙 늦고 한 편 쓰려면 엄청나게 뜸 들이는 타입인지라 어지간하면 리뷰 같은 것도 하기 싫어하고 그냥 남이 쓴 글 댓글이나 달곤 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본 파고는 처음 봤을 때 이상으로 너무 인상적이라 자연스럽게 '이것만은 꼭 리뷰를 해야만 하겠다'라는 충동이 들더군요.
15/01/13 17:21
수정 아이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처음에 뜨는데 그것도 구라라고 인터뷰를 했죠. 코엔형제가 장난끼가 참 많은거 같아요.
얼마전 골든글러브에서 드라마 <파고>가 상을 수상했던데,(그래서 드라마 <파고> 리뷰인줄 알았습니다.)
영화 <파고> 저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구밀복검
15/01/13 17:3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드라마 파고도 보고 싶은데 아직 못 봤습니다. 사실 드라마까지 보고 리뷰를 남겼어야 하지 않나 싶긴 합니다만, 인내심이 부족한지라 영화보다 분량이 많은 드라마는 잘 못 챙겨 보겠더군요. 한 편에 끝나는 영화가 좋습니다 하하.
15/01/13 17:42
수정 아이콘
영화 <파고>는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저한테 여러가지 의미가 많습니다. 부세미야 말할것도 없고, 조엘 코엔과 결혼하여 계속 코엔형제 영화에 출연하는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인상적인 엑센트와 능청스런 연기는 마치 우리나라 충청도 사투리와 말투를 듣는 것 같았고, 이후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또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하죠. 또 막 러시아에서 넘어와 연극 위주로 활동하던 피터 스토메어를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된 작품이 <파고>인데, 역시 독특한 러시아 악센트와 강한 외모, 뛰어난 연기력 때문에,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배우일겁니다. 또한 선한 인상으로 어리숙하지만 하는 행동은 악랄한 주연 윌리엄 마시의 캐스팅은, 코엔형제의 뛰어난 캐스팅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15/01/13 17:58
수정 아이콘
밑에 있는 골든글러브 글 보고 설마했는데 영화 <파고>의 드라마판이었군요.
시간 나면 반드시 챙겨봐야겠습니다.
15/01/13 17:35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저도 같은 영화를 봤는데 매우 흥미로운 글이에요!
특히 동물과 인물을 연관시키는 부분에서 감탄했습니다.
구밀복검님의 리뷰를 자주(번거로우시겠지만)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검은책
15/01/13 17:41
수정 아이콘
저도 같은 바램이...
이렇게 정성스럽고 날카로운 리뷰는 정말 돈내고 봐야하는거 아닌가 미안하기까지 해서 많이 써달라고 못조르겠어요. 흐흐
15/01/13 17:37
수정 아이콘
어떻게 하면 이런 분석적인 시각을 기를 수 있을까요?
김연아
15/01/13 22:21
수정 아이콘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네요. 잘 봤습니다.

다만 타임이 중간에 짤리는 게 아쉽군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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