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리그 관전일기 - 2006 신한은행 스타리그 1st 16강 2회차(2006년 5월 19일)
비록 전술적이냐 혹은 전략적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홍진호 선수와 임요환 선수의 손가락은 날 선 몇 합만으로 경기를 결과 짓는 날카로움을 품고 있다. 시종일관 달려들고, 피하고, 막아내고, 반격하는 ‘임진록’은 팬들의 숨을 헐떡거리게 만들었다. ‘황제’ 임요환 선수와 ‘폭풍’ 홍진호 선수가 경기 내내 펼쳐 보이는 판타지 속에 치사량의 매력이 함유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팬들은 그토록 '임진록'을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 두 선수는 서로 다른 시작으로, 서로 다른 마지막을 맞아야 했다. 홍진호 선수는 그 날카로움의 숨을 죽이고 더 큰 시각으로 이병민 선수를 안았고, 임요환 선수는 서슬 퍼런 초반 운영으로 최가람 선수를 베었다. 홍진호 선수는 웃었고, 임요환 선수는 울었다.
1경기 <신개척시대>/<815 3> : 홍진호(Z) vs 이병민(T)
테란이 저그를 즈려밟고 있는 <신개척시대>에서 홍진호 선수와 이병민 선수는 서로에 대한 기대에 동전을 던졌다. 홍진호 선수는 “안정적인 기반 위에 테크닉을 얹는” 이병민 선수가 2배럭으로 출발 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병민 선수는 “경험 많은 공격형 저그” 홍진호 선수가 (적어도 <신개척시대>에서 만큼은) 선스포닝 체제를 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홍진호 선수는 12드론 더블해처리를, 이병민 선수는 2배럭을 선택하면서 두 선수의 희비는 교차하였다. 마치 <레퀴엠>의 양상처럼, 성큰 라인을 뚫어야 하는 테란과 지켜야 하는 저그의 지리멸렬한 시간 싸움이 시작 되었고, 탱크 1기와 맞바꾼 뮤탈리스크의 희생이 정확한 타이밍의 가디언 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홍진호 선수의 승리를 이끌었다.
<815 3>에서 펼쳐진 두 번째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팬들은 홍진호 선수가 당연히 섬 멀티의 유혹에 굴복할 것이라 예상했다, 심지어 해설자와 이병민 선수까지. 이병민 선수는 세 번째 배럭을 건설함으로써 지상에 또 다른 해처리가 건설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했고, 저글링 난입을 통해 늘어나는 배럭의 수를 확인한 홍진호 선수는 이병민 선수의 병력이 달려드는 시점을 기다리며 매복하고 있었다. 섬 멀티에 투자할 자원을 모두 병력으로 돌린 홍진호 선수의 화력은 이병민 선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한 차례의 해일(海溢)로 바이오닉 병력을 삼켜버린 홍진호 선수는 그 기세를 몰아 이병민 선수의 본진을 점령하며 경기를 결론지었다.
저그에게도 언제나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증명하며 이병민 선수를 가볍게 제압한 홍진호 선수. 인간의 역사란 묘한 것이어서 무릇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그 어떤 것도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고, 모든 게 다 나쁠 수도 없는 일이다. 길고도 긴 암흑의 시간을 지나, 이제 막 ‘폭풍주의보’가 발령되었다.
2경기 <러시아워III>/<백두대간>/<신개척시대> : 임요환(T) vs 최가람(Z)
‘내츄럴 본 저그 킬러’ 임요환 선수가 신예 저그 플레이어인 최가람 선수에게 내리 두 경기를 내줄 것이라는 예상 혹은 상상을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임요환 선수는<러시아워III>에서, 테란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전략 중 한 가지인 전진 2배럭을 선보이며 여유롭게 GG를 받아냈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잃지 않았다. 모니터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는 홍진호 선수가 보였을 터이다. 하지만 너무 일렀다. 임요환 선수의 기만성 전진 배럭은 최가람 선수를 각성(覺醒) 시켰고, 허무하게 첫 판을 내준 최가람 선수는 <백두대간>와 <신개척시대>에서 자신만의 저돌적인 공세를 펼치며 두 번의 승리를 잡아냈다.
<백두대간>에서 임요환 선수의 느슨한 입구를 발견한 최가람 선수는 요구되는 만큼의 저글링만 생산하고 남은 자원을 러커 확보에 투자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개척시대>에서의 저글링 난입 역시 파이어뱃 3기, 마린 4기, 메딕 1기를 흘려보낼 수 있는 대범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가람 선수는 ‘황제’를 제물 삼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실수를 범하지 않으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스타일의 진정성은 유행 형식과는 차원이 다른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것은 불의 발견이나 원자력의 발견과도 같은 거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수도 있고, 우리를 태워버릴 수도 있다. 임요환 선수는 스스로에게 불씨를 던지고 말았다. 자동차의 엔진 성능을 지나치게 강화하면 아무리 뛰어난 카레이서도 자기 뜻대로 차를 몰아갈 수가 없다. 오늘의 임요환 선수는 지나치게 예리했다. <백두대간>에서 입구를 지키는데 평소만큼만 집중했다면, <신개척시대>에서 파이어뱃 후위에 메딕 한 기를 세울수 있는 여유를 부렸더라면 우리는 또 다른 결과와 조우했을지도 모른다.
승리에서 몰락까지의 거리는 단 한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사소한 일이 가장 중요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by sylent, e-sports 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