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16 14:15:09
Name 두괴즐
Subject [일반] [에세이] 새 학기가 되어서 써보는 글 (몸과 마음이 한 곳에)
몸과 마음이 한 곳에
-뭐가 됐든, 언제든


수업 첫 시간에는 오리엔테이션(OT)를 진행한다. 강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시간이다. 수업 시간에 배우게 될 내용을 요약해서 알려주고, 평가 기준에 대해서도 공지한다. 그리고 수업에 임하는 자세를 권면하는데,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한 곳에”이다. 강의실에 몸을 데리고 왔으면, 마음도 수업 시간에 함께 있자는 소리다. 달리 말하면, “딴 생각 하지 말고, 수업 시간에 집중 좀 해라!”가 되겠다. 몸이 있는 건 확인 가능하지만,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는 만화책에서 배웠다. 학창 시절에 재밌게 본 작품 중 하나가 서영웅 작가의 『굿모닝 티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학원 만화로 10대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방황을 그린다. 작중 시간은 1996년~1999년인데, 이 시기는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때와 큰 시차가 나지 않아서 더 공감하며 봤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는 작품의 주인공인 박영민이 진로를 비롯해 여러 고민에 빠져 있었을 때, 한 친구가 해줬던 조언으로 기억한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강의를 끝내는데, 한 학생이 왔다. 수업계획서에 대한 질문 몇 개를 했고, 이어서 “몸과 마음이 한 곳에”에 대한 저의를 물었다. 그래서 말했다. “오리엔테이션 들어보고, ‘몸과 마음이 한 곳에’ 있기 힘들 것 같으면, 나가라는 뜻이다.”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수강 신청을 하게 되기에 1주 차 수업을 들어봐야지 감이 온다. 내가 맡은 과목은 교양이거나 전공 선택이기에 얼마든지 다른 대안은 있다.

살다 보면 인생은 아무렇게나 간다. 그건 의외로 내가 선택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탓이다. 일단 부모를 내가 택할 수 없다. 가족 구성원도 그렇다. 학창 시절에 종일 같이 있어야 하는 얼굴들도 마찬가지다. 졸업 후는 또 어떤가? 상사도 동기도 후임도 사장도 내가 고를 수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의 결정권도 대부분 딴 놈이 갖고 있다. 그래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굿모닝 티처』가 떠올랐다.

돌아보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인생을 꾸렸다기보다는, 그때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흘러왔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대강 그랬다. 남들만큼은 열심히 살았고 평균 이하의 수면 시간을 유지하며 여러 노력을 해왔지만, 도통 알 수 없는 삶을 여전히 산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만큼은 “몸과 마음이 한 곳에” 있을 수 있는 안을 택하려 애쓴다. 그런 상황을 만들려고 하고, 그런 상황임을 인지하려고 한다. 강의를 준비하고 수업을 진행할 때, 누군가를 만나는 상황과 그 관계의 지속 여부를 가늠할 때,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육아에 전념할 때, 쇼츠를 보며 도파민 중독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뭐가 됐든 언제든.

대개의 학생들은 고등학생 시절까지 이미 주어진 수업을 듣게 된다. 대학생 때도 강의 전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양이나 선택 과목은 그럴 수 있다. 그래서 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라는 말을.

너무 많은 학생이 나가서 폐강이 되면 곤란하지만.  


#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서 아주 오랜만에 만화책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야간 자율 학습을 땡땡이친 상태에서 친구가 한 조언이었다. 불편한 마음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몸과 마음이 언제나 같은 장소에”라고 한 것이었다. 친구 말의 요지는 어차피 공부가 잘되지 않아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땡땡이를 친 것이었고, 이미 그런 선택했다면 여기에 집중하자는 거였다. 작품 속의 박영민은 툴툴댔지만, 오히려 이 에피소드를 본 내가 더 와닿았었나 보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우주전쟁
23/09/16 17:03
수정 아이콘
간단한 것 같아도 말씀하신 게 지키기 쉽지 않더라구요.
두괴즐
23/09/17 11:53
수정 아이콘
사실 저도 그래요. 그냥 생각날 때 애써보는 거지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835 [일반] [에세이] 새 학기가 되어서 써보는 글 (몸과 마음이 한 곳에) [2] 두괴즐6042 23/09/16 6042 4
99834 [일반] 로또 아쉬운 당첨 후기.jpg [34] insane13154 23/09/16 13154 20
99832 [일반] 문구점 근무중 겪은 빌런 올림픽 "동메달"편 [66] Croove16400 23/09/16 16400 22
99830 [일반] 라면에 대한 잡설. [27] This-Plus10881 23/09/16 10881 6
99829 [정치] “‘군함도’ 관련국과 대화해라”에 일본 ‘외교 승리’…왜? [96] Crochen15349 23/09/15 15349 0
99828 [일반] [2023년 여름] 돗토리 사구 [9] 서린언니6145 23/09/15 6145 8
99827 [일반] 최근 사무실 인근 문구점 인기 브랜드 순위 [43] Croove13489 23/09/15 13489 10
99826 [정치] 감사원, 전 정권 인사 22명 통계 조작 혐의로 검찰 수사 요청 [122] Perditt15971 23/09/15 15971 0
99825 [일반] [2023년 여름] 외국인 로동자의 여름(스압?) [4] Nacht6121 23/09/15 6121 5
99824 [정치] 부부가 18억원 이하 아파트 공동소유, 종부세 '0원' 된다 [129] 마르키아르15687 23/09/15 15687 0
99823 [정치] 대통령실·여·야의 ‘개연정’… 개고기 식용 금지에 하나 됐다 [61] 기찻길10350 23/09/15 10350 0
99822 [정치] WTI 90달러 돌파 [26] 뜨거운눈물7099 23/09/15 7099 0
99821 [정치] 장비 대신 대학원생 자를 판… ‘카르텔 몰이’ R&D예산 삭감 후폭풍 [127] 베라히16165 23/09/15 16165 0
99819 [일반] [정보] 고우영 열국지 등 3작품 할인 정보 [22] 아케르나르7590 23/09/15 7590 0
99818 [일반] 제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합니다. [14] zig-jeff9134 23/09/15 9134 3
99817 [일반] [추천] 디즈니 플러스 '더 베어' [18] 고요9942 23/09/15 9942 5
99816 [일반] [2023여름] 여름의 끝자락. 조금 더 자란 너 [4] 쉬군5412 23/09/14 5412 13
99815 [일반] [2023년여름] 무지개 [5] Life's Too Short4948 23/09/14 4948 7
99814 [일반] 뉴욕타임스 9. 6. 일자 기사 번역(외출할 때 노인이 겪는 어려움) [2] 오후2시8474 23/09/14 8474 2
99813 [일반] 예매 전쟁에 처음으로 투입되어 봤습니다... [32] 時雨8542 23/09/14 8542 2
99812 [일반] 기초 의약품 / 소아 청소년과 약품 공급 불안정 & 부족 [27] Schna9274 23/09/14 9274 7
99811 [정치] 일본 대마도 시의회에서 핵폐기장 추진안 통과…이제 시장 결정만 남아 [64] 기찻길14567 23/09/14 14567 0
99810 [일반] 거르는,추천 유통사, 제조사 업데이트 +대체제 (23년판) [49] SAS Tony Parker 13042 23/09/14 13042 2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