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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2/26 23:55:52
Name TheWeeknd
Subject [일반] 기록 2.
06

이해할 수가 없다.
말을 할 수가 없다.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우울감을 느끼며 자기비하에 빠지다가
권태감을 느끼며 무기력해진다.
두 감정 상태를 널뛰기하듯 왔다갔다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말할 사람도 없다.
직장 동료들에게?
친구들에게?
가족에게?
못한다.
거리감을 느낀다.
생각이 짧아진다.
나는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고 대화하기 거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07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정기적으로 산책을 나가면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과 같이 다니고 있는데 나만 혼자인 것 같다.
것 같다. 라는 말을 자주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느낌이 되었고 주관적인 감정에 휩쓸려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대화도 적어지면서 나는 내가 하는 말조차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단어들을 조합하지만 문장을 만들기가 어렵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불분명하다.
기분은 마치 널뛰기 하듯이 왔다갔다한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람들이 왜 사는지, 내가 느끼는 감정도, 내가 하는 생각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내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도,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내 시야는 좁아졌고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이 버겁고 벅차다고 느낀다.


08

침대에 누우면 가끔씩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떠오른다고 해봤자 고등학교 때가 끝이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항상 힘이 든다.
고등학교 졸업이 벌써 4년 전이다.
그때는 책을 많이 읽었었던 것 같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도서관에 항상 틀어박혀 있었다.
운동 시간에는 다른 애들이 축구하고 놀 때 운동장 구석에 박혀서 개미를 잡으면서 놀았다.
그때도 말수는 적었고 다른 애들하고는 최소한도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단체로 뭔가를 하는 날들이 정말 싫었다. 운동회와 수학여행과 수련회는 악몽이었고 그런 일정이 다가올 때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정말 가끔씩은 초등학교 때가 떠오르는데, 유일하게 떠오르는 건 3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도 난 좀 마르고 힘없는 애였는데 덩치 큰 애 하나가 쉬는 시간에 어두운 복도로 나를 불러내선 내 노예가 되라고 했다.
10년쯤 지난 지금도 걔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난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내 노예가 되지 않으면 죽일 거라고 했다.
나는 죽는 게 무서워서 그러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에게 바로 일러바치면 됐을 텐데 그땐 10살이라 그런 생각이 어려웠다.
그 후에 걔는 선생님이 없는 쉬는 시간에 나로 스파링 연습을 하거나 메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던 나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메다 꽂곤 했다.
괴롭힘은 내가 저녁에 울면서 부모님한테 모두 말했을 때 끝났다.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오고 10살의 내가 모르는 수면 아래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나서 나는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 가기 전에 복도에서 걔를 한 번 더 만났는데, 다음에 또 이상한 소리 하면 죽여버릴거라고 했다.
아마 그때 전학을 가지 못했거나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와서 항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계속 걔랑 같이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 더 나빴을 수도 있다.
그 상황은 아마 8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학년 초에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쉬는 시간에 시작되었고 기말고사를 보기 전에 전학을 갔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된다.
초등학교 때 다른 좋은 기억도 많았었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때의 기억밖에 없다.
즉 이 기억은 나의 일종의 트라우마이다. 하지만 지금 되짚어 볼 때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는 것이,
1. 1년 이상 지속적으로 피해를 받지 않았다.
2. 부모님은 내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다음날 학교에 가서 항의했고,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해 주셨다. (전학)
3. 전학간 후로 한 번도 가해자를 만나지 않았으며, 전학 가서도 비슷한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 이후로 낮선 사람들과 말문을 잘 트지 못하게 되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의 투명인간처럼 살았던 거 같다.
그게 꼭 학교폭력 때문인가? 하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2학년 때 영어교실에서 반장을 했던 걸 생각하면 최소한 그전엔 말은 잘 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학교폭력 때문에 겉도는 애가 되었든, 아니면 내가 원래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아서 겉돌게 되었든 이제는 다 의미없는 얘기다.
학교는 벌써 졸업했고 나는 학창시절이 거의 기억나지 않으니까.


09

지금 생각해보면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말을 잘 못하고 수줍어하는 것이 일종의 매력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때는 의외로 점심이나 회식자리에서 대화를 끊지 않고 이어나갈 수가 있었고 내 개그에 사람들이 웃었던 적도 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되새겨보니 말을 잘 못하는 것이 처음 한두번은 매력이 될 수 있지만, 계속 반복되면 더 이상 매력이 아니라 감점 요소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너무 당연한 거지만.
지금은 별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억지로 말을 하면 대화가 끊기는 느낌이다.
마치 내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대화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대화에 침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전에 사람들이 별로 나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대화를 잘하게 되면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가만히 있어야 중간이라도 가지 않을까?
힘이 든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힘이 들고, 눈치를 채는 것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아마도 사람들이 내가 너무 눈치를 못 채서 지친 나머지 나하고의 대화를 포기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람들은 아예 나한테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들은 마치 팔에 달라붙으려는 모기를 피하듯이 내가 근처에 오는 것을 피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대응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렵다.
가끔씩 나는 서있는 환경이 달라졌어도 고등학교 때 운동장 구석에서 개미를 잡던 18살짜리 애에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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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7 00:03
수정 아이콘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근데,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어떻게 보면 가까운 사람보다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쉽긴 하더군요.
방구차야
23/02/27 00:49
수정 아이콘
내면에서 뭔가를 반복적으로 되뇌이고 해답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가끔 물리적인 방향을 찾아보시는 것도 권장합니다. 목이 마르고 숨이 차고 근육의 한계나 물리적 고통은 이 우주와 시간속에서 나의 위치를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끝이 정해져 있는 인간으로서의 현 시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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