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면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최초로 임용되는 검사가 선서를 하는 장면이지요.
한손에는 선언문을 들고, 다른 한손을 들어 뭔가 멋진 말을 읊조리며
검사가 된 주인공, 또는 등장인물이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은 꽤 익숙하실겁니다.
이 장면은 2008년 이전의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검사의 선서는 2008년 10월부터 생겼거든요.
2008년 10월 이후, 실제로 검사는 취임시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합니다.
- 검사 선서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이 선서의 내용은 재미있게도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대통령령으로.
[검사 선서에 관한 규정] 이라는 이 대통령령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수감생활중인 이명박씨가 대통령이던 시절,
이명박씨의 제안으로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임검사들은 단순히 선서문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 선서에 관한 규정]에 따라 선서문 2부에 서명날인하고
1부는 개인별 인사기록으로 분류하여 국가에서 보관하고,
1부는 본인이 소지합니다.
사실상 저 선서가 어떠한 강제력도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선서문에 서명날인하고 나라와 개인이 보관한다는 점을 저는
'너의 선서를 국가가 기억할테니, 너 역시 기억해라.' 라는 취지로 이해했습니다.
대한민국 공무원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일 치고는 나름 멋지죠.
이 글을 정치탭으로 쓴 이유,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쓴 이유는
아마도 굳이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글을 읽는 분들은 다 아실겁니다.
[공익의 대표자]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검사 선서의 저 내용들은 국가가, 국민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검사의 모습일테고,
검사 스스로도 바라는 이상적인 검사의 모습일겁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모습이다보니, 실존하기 어려운 모습이겠죠.
아니 이제는 국가나 국민들, 그리고 검사들이 기대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되어버린건 아닐까 싶습니다.
나름 법조인 입장에서 저는 오늘 좀 많이 벙쪘습니다.
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경력이 오래되고, 많은 피의자를 수사해 본 검사들은 그런 장면을 때때로 보아서
어느 정도 덤덤해졌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게 아무렇지 않게 입밖으로 나와도 되는 말인가.
그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밖으로 나올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익의 대표자]
대한민국에서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많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검사들은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다면 부끄러워할까요.
2008년 이전에 검사가 되셨으니 검사 선서를 하지 않으셨을
한때는 대한민국 검사들의 톱이었던 분의 발언.
그리고 그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몇몇 댓글들을 보면서
세상이 많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검사가 [공익의 대표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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