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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7/02 18:01:21
Name 거짓말쟁이
Subject [일반] [14] 타인의 삶 (수정됨)
육상 선수를 꿈꿨다.  
운동을 싫어해서 초등학교 이후 동네 축구조차 관두었는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공부도 외모도 잘난 것 하나 없었던 나에게 무언가 칭찬받을만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학생의 자아와 잘 맞지 않았나 싶다.
체육 선생의 눈에 띄어 육상을 시작하고부터,  경력이 오래된 친구와 스스로를 몰래 견주곤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육상을 한 친구의 기록을 금방 따라잡는 자신을 보며 '설마 나...천재?' 라는 기분에 젖는 것이 즐거웠다.  물론 다 따라가진 못했지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나는 이미 강백호이고 친구는 서태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지역대회에서 끄트머리나마 입상을 하게 되자 학교의 대우도 달라졌다. 객관적으로 그 정도 기대주는 전혀 아니었는데, 교육 낙후지역으로 선정되어 특별 지원금이 나올 정도의 시골이다보니 그 정도만으로도 자랑거리였다.  

올림픽이나 어떤 육상 스타를 꿈꾸지는 않았다. 운동 경력으로 괜찮은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만 할 수 있어도 좋겠다 하는 꿈이 생길 무렵,
하교 중 갑작스럽게 무릎 통증이 찾아왔다.  그냥 길을 걷던 중이었는데 우드득 하는 느낌과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 주저앉을 정도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온몸에 흙을 묻혀가며 일어섰는데, 이번에는 반대쪽 무릎에서 같은 현상이 느껴지며 또 주저앉고 말았다.  누가 때린 것도 아니고 다친 적도 없는데.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불법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를 붙잡고 다시 일어섰더니 이번에는 또 통증이 어디 있었냐는 듯 걸을만한게 아닌가?
집까지 귀가하는 동안 그럭저럭 통증도 없이 살만하다가,  집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을 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무릎이 접힐 때만 통증이 심해지는듯 싶었다. 부모님께 증상을 호소하자 믿어주질 않았다. 연습 중에 다친 것도 아니고 걷다가 아프다고 말을 하니 내 통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전달이 되질 않았다.  겉보기에도 멍이나 붓기 등 아무 증상이 나타나질 않았다.  결국 나 자신조차도  큰 부상은 아닌가보다 하며 하루를 보냈다.  

체육 선생님에게 상황을 털어놓자 곧바로 나를 자가용에 태워 병원에 데려갔다.  엑스레이와 CT를 찍어봐도 나오는게 없었다. 원래 관절이나 인대부상은 잘 안보일 수 있다면서 선생님이 나를 위로했다.  정말 실력이 좋은 대학병원 의사를 알고 있으니 시간이 날 때 꼭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체육 선생님의 인맥으로 예약을 한 뒤, 한 달 동안 오매불망 날짜를 기다렸다.  꿈이 달린 문제이고,  일상 중에도 불편함이 계속되었다. 문제없이 등학교를 할 정도로 걸을 때는 괜찮았는데,  무릎을 굽힐 때는 통증이 너무 심했다.
마침내 아버지와 대학 병원에 도착한 날.  이 분야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의사 선생님이 MRI 촬영을 권유했다.  증상을 보니 무릎 연골 부상 같은데 CT 나 엑스레이로는 안 보이는게 당연하다고.  지금이야 허리 디스크 진단 등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당시로써는 MRI 라는 말 자체가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이상한 원통 속에 들어가자 긴장 탓에 식은땀이 났다.

마음을 졸이며 병원에 다시 찾아갔더니 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학생, 아무것도 없는데?"

따라 들어온 아버지도 같이 웃었다.  애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더니,  MRI 결과가 아주 깨끗하다고 한다.  얼마나 웃기고 반가웠겠는가.   겉으로 붓기도 없고 이상하다 했는데 의사가 별 일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주니,  부모님은 살판이 나서 엄살이 심하다고 나를 놀렸다.

나는 큰 충격에 빠져 자살하고 싶었다.

세상에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육상을 포기할 정도로 무릎이 아픈데.  치료 방법은 커녕 엄살 취급을 당하다니. 정신적 충격과 배신감이 엄청났다.  그 뒤 학교 생활까지 꼬였다면 나는 정말 부모님을 원망하는 유서와 함께 뛰어내렸을 것이다.
다행히 체육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무시하거나 섣부르게 훈련에 복귀시키는게 아니라 진지하게 나를 믿어주었다.  원래 병원에서 못 밝히는 통증이나 증상이 있다면서. 그런 증상 때문에 은퇴한 선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야구의 입스나 블래스 증후군을 설명한 게 아니었을까?
결국 나는 부상회복을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육상부를 쉬다가,  중3 2학기라는 시기와 겹쳐 자연스럽게 선수 활동을 내려놓았다. 육상부 운영도 나보다 원래 성적이 약간 좋았던 친구에게 집중되어 내 존재는 없는 사람처럼 되었다.  나는 원래 그랬던것처럼 평범한 학생들과 함께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듣고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단 둘 뿐인 육상부 동기와 학교가 갈라지고나니,  내가 육상부 선수였다는 사실조차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중학교의 3년이 꿈처럼 사라져있었다.

무릎의 통증은 제법 사그라들었지만 정신적 충격이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강박증이 생겨 수학 공부가 불가능했다.  5+5 같은 수준의 문제도 백 번, 천 번 검산을 해야 넘어갈 수 있었다.  친구와 가벼운 말싸움이라든지 전날  뉴스에서 본 주제가 마음에 걸리면 하루종일 머리를 떠돌아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벼락치기로 출제범위를 외워 중하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수학 관련 성적이 문자 그대로 0점이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육상 선수로써의 에고가 무너진 탓인지 인간관계에도 극도로 소극적, 방어적이 되어 평판은 좋았지만 깊이 사귄 친구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해본적 없는 탓인지 수학여행 같은 활동도 내키질 않았다.

20대가 되는 동안 암흑 같은 시기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은 만화책과 장르소설 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에 집착하는 강박증도 오락물을 읽을 때 만큼은 편안했다.  판타지 소설을 읽다보니 당시 작가들이 모인 '커그' 라는 커뮤니티에 눈이 닿았다.  장르소설 감상글을 남기며 종종 커뮤니티 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그 곳 자유게시판에서 나처럼 꿈이 꺾인 누군가를 보았다.

화실에서 당한 극도의 노동착취와 건강 악화,  여타 개인적인 문제가 겹쳐 진학마저 포기하고 걸었던 만화가 지망생의 길을 그만두려는 어떤 지망생의 소회를 밝힌 글이었다.   10대부터 바친 꿈을 포기하게 된 입장이 당시의 내 심정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임에도 크게 인상에 남았다.  본인이 대표작으로 여기는 듯한 한 장의 판타지 일러스트와 함께.

내 인생도 어둡고 당신 인생도 어둡구나.  그의 모습이 마음에 남아 일러스트를 허락 없이 하드디스크 한 켠에 저장해두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육상을 그만둔 후 마치 주정뱅이의 인생처럼 구심점이라는게 없어진 느낌이었다. 강박증이 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했고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취직도 하고 연애도 해보고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도착했는데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 있었다.  중학교 3년이 아니라 고등학교 3년도,  10대의 청춘 자체가 날아가 있는 느낌.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의 추억도 없고  오죽하면 졸업앨범도 사질 않았다.    

흘러가는데로 사는 삶에 그나마 감흥이 이는 것이 게임과 프로리그 였으므로 자연스럽게 피지알을 알게 되었다.  가입 대기 기간이 길다는 점과 스타크래프트 전성기 시절 그 욕설 없이 비꼬는 듯한 말투에 기가 질려 오랫동안 '눈팅'만을 했었지만.   겜돌이와 덕후들의 코드가 녹아 있는 유머게시판과 좋은 글이 올라오는 자유게시판을 클릭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2017년.  피지알 자유게시판에서 어떤 인생 소회를 읽게 되었다.  청춘을 바친 만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시험에 합격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열심히 가꾸어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다시 한 번 만화가를 꿈꾸는 자신을 돌아보는 어떤 남자의 글을.  

그의 시그니쳐나 다름 없는 판타지 일러스트 한장을 본 순간 10년 가까이 지난 과거가 밀물처럼 쏟아져 내리며 나는 깊은 감상에 빠졌다.  저 사람이 꿈을 포기했을 때 나도 꿈을 포기한 동류였는데.  저 사람이 새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을 때 나는 거기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왜 그렇게 되었을까.  못난 삶을 사는데 당연히 내 탓이 크겠지만 새롭게 시작하려면 어찌됐건 인생이 틀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의사 선생님의 웃음소리와 함께, 또 다시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아프긴 하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다는 핑계로 외면하던 무릎 부상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허무했다.  반월상 연골파열이라는 비교적 흔한 무릎 연골손상 이었다.  파열이 일어난 위치에 따라 절묘하게 MRI에 나타나지 않는 케이스가 있는데,  이제는 무릎에 직접 내시경을 삽입해 보는 관절경 시술이 흔해져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이것 때문에 군대에서도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진단서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자 "그 때 왜 자세히 말을 안했노!" 라며 안타까워 했다.  나를 꾀병 취급한 게 나를 못 믿어서, 무심해서가 아님을 확인하자 마음 한 켠에 쌓인 상처가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가끔씩 덮쳐오는 정신적인 불안정함이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부활하는 강박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 최근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보았지만,  생업에서 오는 스트레스 탓에 컨트롤이 안될 때가 많고 피지알에도 그렇게 주기적으로 똥을 싸고 있다.

따라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은 나에게 없지만, 감히 이 기회를 빌어 전하고 싶은 말은  어떤 위인의 삶이나 큰 과업을 이루는 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열심히 사는 모습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고,  나에겐 그런 삶이 피지알의 당신이었다는 것이다.

2020년 '페이북 공모전' 에서 아깝게 떨어진 당신의 소식을 피지알에서 읽었다.  그 꿈이 끝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당신의 삶을 존경하며 응원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주길.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피지알이라는 공간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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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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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흔들어라
21/07/02 19:09
수정 아이콘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열심히 사신 거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저도 당연히 잘 몰랐는데 라디에이션 하우스라는 영상의학과 다룬 만화(일본)을 보니 CT나 MRI 등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환자의 병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더라구요. 한마디로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의 병을 밝혀내는 것도 실력이니 그 예전 의사와 병원은 비웃으면서 넘겨버리세요
거짓말쟁이
21/07/02 19:42
수정 아이콘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동안 그 의사분을 많이 원망했는데 나중에 의학 상식을 좀 쌓고 과거를 돌이켜보니 상황이 좀 그랬습니다. 의사가 병을 진단하려면 증상은 어떤지 ,어쩌다 언제 다쳤는지, 과거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이런것까지 다 파악해야 사진도 필요한걸로 제대로 찍고 판독도 그 방향으로 하는데..저 때는 소개소개로 유명한 의사분 스케쥴에 끼어들어간 거라.. '중3 짜리가 걷다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네' 정도로 잘못 전달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운동 했고 이런거 알았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도..
21/07/03 10:51
수정 아이콘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이지만, 담담하게 읽지는 못 했습니다.
그 절묘한 연골파열의 위치로인한 희귀케이스였었다니.... 읽어내려가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졌습니다.
그럼에도...기대했던 방향과 다르게 꺾여버린 그 길을, 나름 순응하면서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오셨군요.
응원합니다.
피지알 누군가의 삶에 감동을 받으셨듯이... 님의 이 글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거짓말쟁이
21/07/03 20:1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카오루
21/07/03 22:14
수정 아이콘
제 인생에서 댓글쓰기 버튼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있었을까요...
일단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타인의 삶'이라는 제목을 보고 안타까운 사연을 보면서 동질감도 느끼고 하고 있었는데
어..어..커그?어..어..?어라? 하다가 갑자기 가슴에 무언가 세게 와서 끝까지 못읽었습니다.
이제서야 끝까지 읽고 글을 남기네요. 댓글도 정말 썼다 지웠다..썼다 지웠다..

남은말은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순탄치는 않았던,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그저 살기위해서, 때로는 그래도 손에서 놓지 못해서 살아왔던, 그런 삶인데, 그게 누군가의 감동이 되었다는 것이, 정말......정말...이루 말할수 없이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타인의 삶'영화의 마지막과 같은 연출을 할 수는 없겠죠.
그래도, 말씀드릴 수 있는것은, 님도 정말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오셨고, 아직 우리가 갈길은 한참 남았다는거...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습대로 살아가서 가끔 그 길을 걷다가 지치고 힘들때 누군가가 옆에서 옛날 그모습 그대로 걷고있어서 조금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있도록..., 아마 바꾸고 싶어도 못바꿀 테지만요, 그렇게 가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모습으로 남겠습니다.

썼다 지웠다 하다가 결국은 요점없는 말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참. 서로 그래도 정말, 잘 살아왔어요.
거짓말쟁이
21/07/04 12:04
수정 아이콘
글에 썼다시피 저는 낙후지역으로 선정된 가난한 동네에 살았습니다. 친구 중에 아버지가 안계시고 ADHD 비스므리한 걸 겪으면서 학교 성적이 0점인데 뱀프 1/2 이라는 만화를 하루종일 따라그리는 애가 있었어요. 만화가가 꿈이라고 했는데..제가 한참 방황하고 만화책에 빠져있던 무렵에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이래저래 알아보다가 다음 카페 등에서 당시 한국 만화계 환경을 적나라하게 읽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대여점이 성행할 때라 만화계도 황금기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커그에서 카오루님 글을 봤을 때 구구절절하게 무슨 고생을 했는지 쓰지 않으셔도 많은 상상이 됐더랬죠. 그리고 오랜 시간 뒤에 피지알에서..저는 여전히 10대때 꺾인 꿈을 핑계로 패배주의 비슷하게 살고 있었는데 카오루님은 시험 합격부터 외모를 다듬고 예쁜 아내분을 얻기까지 진취적으로 사셨더군요. 당시 살이 찌고, 없던 외모 컴플렉스가 쌓이던 때라, 외모 가꾸고 눈썹 다듬으셨다는 대목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하하.

몇 년 뒤에 또 꿋꿋한 모습, 반가운 소식으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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