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우리 엄마는 동네 내과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씀을 들었다.
큰 병원에 가보니, 어머니가 신장암이라고 한다. 그것도 전이가 될 정도로 진행된.
그리고 이 암은 전신에 종양이 생기는 VHL(본히펠린다우 병)이라는 희귀 유전병으로 인한 것이니,
혈연들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나란히 VHL 환자가 되었다.
그 어떤 사건보다도 내 여행 동선을 크게 바꾼 사건이었다.
나는 여러 과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내 몸 여러 곳이 성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망막, 고환, 척수, 췌장, 신장 등등...
종양과 물혹이 이미 온갖 곳에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곳에 생길 예정이었다.
특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병은 본래 그러한 병이니까.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은 본래 그러한 길이니까.
나는 우선 내 여행 일정을 조정했다.
엄마의 암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최초로 진료를 본 병원에서는 엄마의 여명이 6개월 정도라 했다.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나는 엄마의 여행에 동행하고 싶었다.
의무 기숙사에 살아야 했지만 통학을 했고,
수업을 째서라도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엄마가 울거나 힘들어하면 달래주고,
먹고 싶으신 게 있으면 사다 드리고,
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면 모셔다드렸다.
다행스럽게도, 의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발전하는 의학과 헌신적인 의료진, 여러 가지 행운이 겹치면서
엄마는 6개월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사셨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여행했다.
15년 남짓을.
우리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여행은 정녕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나는 지쳤다.
나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이미 두 차례 신장암 수술을 받았고, 몸 여기저기에 종양과 물혹이 하도 많아서
어디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엄마의 모습을 쭉 지켜보면서 내 여행의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내 여행의 끝이 무엇인지,
너무 많은 것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아버렸다.
사랑하는 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받는 모습을, 엄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 가까이에서, 너무 오랫동안 보아버렸다.
늘 그랬다. 나는 내 여행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항상 그랬다. 나는 늘 실패해왔다.
나는 내 여행에서, 내게서, 특별한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내 여행이 그 자체로 가치 있을 수 없다면,
최소한 다른 이들의 여행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여태까지 살아왔다.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엄마는 더는 내가 함께할 수 없는 여행을 떠날 것이므로.
그리고 나는 지쳐도 너무 지쳤으므로.
그러나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지쳐도 너무 지쳤으므로.
함께 하는 여행 내내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으므로.
나는 그저 남은 힘을 쥐어짜서 어머니가 힘들었던 이번 여행을 잘 마치시게끔 돕고 싶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좋은 모습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것 외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불신자인 나는 기도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믿음이 보답받았으면 했다.
비록 내가 함께할 수는 없다고 한들, 어머니에게 다음 여행이 있기를,
어머니가 그곳에서 행복하시기를, 제발 더는 아프지 마시기를.
2020년 10월 12일,
어머니는 결국 홀로 여행을 떠나셨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사랑이 많은 분이셨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할 줄 아는 무척 귀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어요. 젊어서는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셨고, 마지막에는 경계선 지능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넓은 도량과 리더십을 갖춘 친구로 통했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깊은 신앙심을 지닌 신도로, 높고 크면서도 깊고 맑은 목소리를 지닌 성가대원으로 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우리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아름답게 사셨고, 가실 때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가셨어, 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어머니셨고요.
어머니를 사랑하는 분들이 너무도 많이 장례식장에 와주셨습니다. 입관부터 봉안까지 매 순간이 아름다웠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보내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어머니를 보내드리기 직전부터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어떤 좋은 분에게 보낸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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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행의 끝은 결국 무언가로 이어지기 마련인가 보다.
나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앞서 말한 좋은 사람과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서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니.
꿈 같은 일이었다.
이때였던 것 같다.
내 마음속에 여태껏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열망이 자리 잡았던 것은.
나는 이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사람 대 사람을 넘어서, 남자 대 여자로서.
이 열망은 내가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했다.
그 사람은 답장에서 “일단 비정제된 언어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라며 번호를 주었고,
우리는 11월 내내 밤늦게까지 시도 때도 없이, 카톡과 통화를 주고받았다.
짧고 진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가 되었다.
12월 초, 우리는 드디어 처음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만나기 전부터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의 외모가 출중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예뻐도 그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
심장이 정말로 터질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자, 그녀는 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바다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마스크 너머로도 전해지는 사랑스러운 미소가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른다.
2020년의 마지막은 새로운 여행으로, 그것도 수많은 여행으로 이어졌다.
평생 누군가를 만나거나 사랑을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다시 없을 사람과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랑을 했다.
나는 답을 내렸다.
함께 여행하고 싶은 누군가가 생겨버렸으므로.
세상에는 함께 하고 싶은 여행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므로.
내 삶에는 이미 차고 넘치는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으므로.
한동안 보지 않았던 병원 진료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식사에도 조금 더 신경 쓰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손에서 놓았던 일을 다시 잡기 시작했고,
내 글을 쓸 준비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벌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돌아가신 일은, 내 잘못이 아니므로.
나는 어머니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으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내 병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내 아픔을 심지어 나보다 더 크게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안한 일이다.
그녀와 만나는 동안에 내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은.
힘들다거나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힘들어할 그녀를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미안할 뿐이다.
부신에 있던 갈색세포종이 커졌다.
3월 말에 수술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수술이라고 하던 여친의 모습이 떠오른다.
뇌 MRI를 찍은 결과, 소뇌에 종양이 두 개 생겼다.
다행히 사이즈가 작아서, 머리를 열 필요는 없고 감마나이프 수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내년 3월 말에 다시 MRI를 찍고 상담할 예정이다.
감마나이프 수술이 가능하다는 얘길 듣고,
최상의 결과라며 기뻐하던 여친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요맘때 쯤이었던 것 같다.
내 여행에 함께하겠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했던 것은.
여자친구한테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는 소릴 꺼냈다가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며 혼쭐이 났다.
지난 주말에는 난생처음 화이트데이를 기념해 봤다.
꽃도 주고, 선물도 주고, 사탕도 주고, 초콜릿도 주고, 맛난 것도 먹고,
2박 3일 내내 여자친구와 찰싹 붙어 있었다.
하고 싶은 걸 다 해서 무척 뿌듯하다.
여친님은 칼로리 걱정을 하는 것 같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괜찮앙, 살 좀 쪄도.
계속 내 심장을 터뜨릴 기세로 예쁠 테니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3월 초부터 한 달간 복용해야 하는 수술 전 약 때문에
내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중간중간에 전원이 나가듯 잠드는 내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여자친구의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 너는 내게 건강하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었지.
맞는 말이다.
내 여행을 무사히 마치려면, 그리고 너와 함께 여행을 다니려면,
마땅히 죽을 각오로 노력해야겠지.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
정말 죽도록 노력할 테니까.
2021년 3월 16일.
약 기운에 취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바로 오늘이 글로써 어머니를 보내드릴 날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지금이 아니라면, 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므로.
몸은 무겁고, 머리는 핑핑 돌고, 이따금 눈물이 터져 나온다.
울다가 코가 막혀서 코를 풀면, 코피가 터진다.
이게 다 이 망할 놈에 약 때문이다.
(최저 용량인 데다가 보통은 이렇게 부작용이 심하지도 않다는데, 괜히 성질을 내본다.)
이제 나는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다행히 컨디션이 한결 나아졌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정도다.
다시금 여행길에 나설 준비가 된 것 같다.
이제 그만 놀고 다시 일할 시간이라는 의미다.
--
삶이 여행이라고 한다면,
마냥 즐겁기만 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여행길이 버거운 순간에, 부디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여행 도중에, 부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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