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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6 22:19
이방우는 뭔 일인지는 몰라도 정말 장남으로써는 철저하게 축출됬으니 넘어가고
정종이 그냥 무난히 세자로 지목되었으면 이방원이 절대로 왕 못됬을거라고 생각해요..크크;;;
20/09/26 22:24
뭐 이방우가 조선 건국전에 배제된거라고 볼수있어서 세자책봉은 말이 안되고 결국 조선건국에 이성계 따라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방과가 적통이기도하고 명분적으로도 누가 반대할수도 없었죠.. 왕자의난 격으면서 좀 가치가 까이긴한사람이긴한데 사람관리도 꽤 잘했던인물로 알려져있고..
사실 정실부인 아들들 입장에서는 피흘려서 나라건국하고 세웠는데 이거 다 깡그리 무시하고 후실부인 아들이 그것도 새파란 핏덩이를 세자로 세우면 피꺼솟할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방원이 축출하지않았어도 이방과나 다른 아들중한명이 조지긴했을꺼에요
20/09/26 23:24
지금이야 전처 / 후처 혹은 정실 / 후실로 보겠지만,
당시 개념으로 보자면 동네 유지 딸이었을 신의왕후 소생보다는 고려 건국때부터 내려온 명문가 집안인 신덕왕후 소생이 혈통으로는 더 가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09/26 22:21
뭐 이방원이 이방번에게 같이 갈래?했는데 거기에 어떤 대답도 안했는데 막상 그걸 알리지도 않았다고 하죠..그리고 본인도 끔살당함..
20/09/26 22:27
소식을 들은 정도가 아니라, 이방원이 가는 길에 집에 들러서 동생이 왕되면 넌 죽는다 기회줄테니 같이 가자라고 하죠. 근데 방에서 안나옴...
인성을 떠나서 폐급은 맞는 거 같은게, 성공할 거 같으면 같이 가던가 실패할 거 같으면 어떻게든 궁으로 가서 알려야 했거든요. 본인이 가진 세력이 없으니 어디라도 붙어야 나중에 복불복이라도 한번 돌려보는거지, 이방원 입장에서는 원수 아들, 이방석 입장에서는 반란 때 배신한 동복형이 되는거라 아무것도 안하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목숨 못 건질게 뻔한데..
20/09/26 22:29
사실 왕자의 난 당시에 고작 17~18세밖에 안된 지금으로 따지면 이제 막 고딩인데(..) 나이 30이 넘은 이복형이 창칼들고 군사들하고 같이 와서 같이 갈래 말래?하는데 그거 무서워서 대답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뭐 결국 그떄문에 제 목숨 내놓게됬지만..크크
20/09/26 22:39
아까 좀 찾아보니 그래도 왕자라고 밑에 병력은 좀 많았던것 같더라구요. 그러니 이방원도 먼저 찾아갔던것 같고.. 폐급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니다 크크
20/09/26 22:32
솔직히 이 정도의 왕실내부문제정도로 봉합되고 개국초의 긍정적인 효과들을 이어갈수 있었다는게 운이 좋을정도로
이성계 노망나서 나라 말아먹을뻔한 급이죠. 후계문제로 나라 말아먹은 여러사례가 있는데 그냥 말아먹히기 전에 잘난 아들이 알아서 차단했다 정도로 봅니다 인륜이나 그런걸 빼고 건조하게 보면.
20/09/26 22:36
합리적 명분이 있었어도 어그로가 잔뜩 끌렸을 판인데,
목숨걸고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신급으로 기여한 형들이, 별 명분도 없이 후처소생 동생따위한테 세자를 뺏겨버렸으니 얼마나 화가났을까요;;
20/09/26 22:41
사견 좀 들어간 추측을 해보자면
이방우 - 신우, 신창 옹립에 주도적 역할을 해서 폐가입진 명분 때문에 후계구도 탈락. 공양왕 즉위 이후부터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난거 보면 그냥 이분 운이 안좋은 걸로.. 이방과 - 태조가 오래 전장에 데리고 다녀서 뛰어난 무장일 순 있으나 왕재까진 아니라고 봤을 수도 있고, 정몽주 살해에 관여한 정황이 있음. 이는 조선 건국의 주축이 될 신진사대부들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음. 추가로 무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 태조가 문치주의 국가 조선의 후계자로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방의, 이방간 - 장자도 아니고, 존재감도 없음. 이방원 - 정몽주 살해의 주연이며, 사실 그 전에 큰 공이라고 할만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방과만큼은 했어야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명나라 주원장 앞에 가서 일 잘 풀고 온건 진짜 큰 공이나 그건 책봉 후의 일이고.. 이방번 - 신덕왕후 소생이나 대신들한테 까인거 보면 진짜 성격이 개차반이었다고 봐야겠지요. 옛날엔 이해가 안갔는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건 나름 이젠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런데 이럴거면 왕자들을 일찍 숙청해야 했어요. 태조 입장에서야 본인한테 누가 개기겠냐 싶었겠지만 왕자의 난때 보면 세자 및 그 친위세력 빼곤 종친이고 사대부고 다 돌아섰죠.
20/09/26 22:44
이성계는 본인이 창업군주인데다 군권을 꽉쥐고 있었으니 설마 쿠데타 일으킬까 생각을 못했겠죠.. 태조가 절대적 권위를 갖는 유교 왕조국가에서 태조 상대로 쿠데타 한다는 것만큼 모양새 안 좋은게 어딨나요.
군사력도 솔직히 야밤에 습격해서 가능했지 정식 전쟁 했으면 군사력 차가 너무 압도적이라 백전백패 했을테고요.
20/09/26 22:43
지금 내 옆에 붙어있는 여자 자식이 눈에 밟히고 내가 죽으면 형들한테 치여서 좋은 꼴 못볼것 같고 그걸 아는 여자는 자기 목숨 자식 목숨 일가 목숨 다 걸린 일이니 죽을 힘일 다해 감언이설로 꼬드기고....그 꼬라지 보고 있는 장성한 본처 자식들은 누구는 요부가 아버지를 꼬드긴다 하면서 눈 뒤집어진 채로 뒤엎을 준비 누군 너거들은 저 자리에선 안그럴것 같으냐 무념무상 권력이란 뭔가 하며 유유자적 누구는 난 죽일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멍청한 척 하며 내 살길궁리
왕가에 흔하디 흔한 레파토리죠.
20/09/26 22:57
고려에 물들지 않았고 고려의 지도부들과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엮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어서 그랬다는 설을 봤는데 그럴만 하다 싶었습니다.
20/09/26 23:10
고려와 관련없다는 말도 문제가 좀 있는게, 신덕왕후 집안 자체가 고려 명문가입니다. 이성계도 중앙정계 진출 시기에 경처 집안 덕을 많이 봤다 하고요.
20/09/26 23:25
결국 우리가 지금 체감하는 것보다 당시 신덕왕후와 그 가문이 이성계에게 미쳤던 영향력이 컸고,
그 크기가 신덕왕후의 아들을 밀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정도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방향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이성계가 다른 아들들의 불만을 모르진 않았겠지만,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실제로 몇 년간은 그 상황이 유지가 됐고요. 하지만 역시나 건강이 변수였던 것 같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이 이성계의 건강이 악화된 타이밍에 일어난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20/09/26 23:32
저는 그걸 혈통으로 보는게, 신의왕후와 신덕왕후 집안의 급이 다릅니다. 기왕이면 명문가 집안 소생이 내 뒤를 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20/09/26 23:36
사실 이성계의 와병도 문제였지만
더 문제는 이방석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살아있는 왕비의 아들이란 지위가 사라진게 제일 컸죠 신덕왕후의 사망이 아마 태조의 병환만큼이나 결정적이었을 겁니다..
20/09/27 00:35
그래서 그걸 메우려고 정릉을 무려 서울 정동... 지금의 덕수궁과 그 근처지역이었고 무려 4대문안 릉이었죠.
물론 이성계 사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한동안 후궁릉 정도의 대접만 받게 되었지만요
20/09/27 02:11
방석이 세자가 된 건 아마 고려시절 대귀족이자 개국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신덕왕후가 현역 왕후였던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덕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른 아들들도 별 소리 못했죠.
20/09/27 02:27
저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있었던, "이방원은 이방석이 세자가 되는 게 오히려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해석에 동의합니다.
만약 이성계가 이방과를 왕으로 내세웠으면 이방원은 찬탈은 꿈도 못 꿨을텐데 말이죠.
20/09/27 08:18
예 그건 그냥 야사고 사실은... 좀 토사구팽 비슷하게 밀려난 셈이죠.
우왕 창왕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뒤집어 써야했던 책임이 장남에게...
20/09/27 11:49
저는 이 부분 보다보면 의아한게 정종이 너무 순순히 왕 자리를 동생에게 내주더군요. 단순 바지도 아니고 본인도 나름 무인 출신에 공이 있는 사람인데 2년만에 순순히 왕자리를 넘겨주는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심지어 별 공 없던 이방간도 왕이 되고자 군사를 일으켰는데..그만큼 태종이 강했으려나..
20/09/27 12:39
왕이 되고 난 후나 이후 행적들 보면 정종 이 양반은 그냥 놀고 싶었던 거 같아요(....)
부인이 불임이었던 거 같은데 어차피 왕위 물려줄 자식도 없고 그렇다고 부부금슬이 워낙 좋아서 다른 부인 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자기는 뼛속까지 무인이라 정치 같은 거 골치아프고 해서 왕자리는 동생한테 떠넘기고.... 결국 태종보다 10살이나 많은데 더 늦게 죽었더라고요. 워라밸 끝판왕....
20/09/27 13:36
아차. 제가 빼먹었는데 적장자가 없어서 물려줄 자식이 없었던거고 첩들 사이에서 15남 8녀(....)를 두었습니다.... 밤새도록 할 수... 읍읍
20/09/28 02:25
드라마 ‘나의 나라’에서 방석을 세자로 올린 이유로 든 것이 이성계가 왕 노릇을 오래 하고싶어서 가장 나이어린 방석을 내세웠다 였습니다. 나라를 힘들게 세우고 공이 있고, 장성한 아들들에게 빨리 왕좌를 내주기 싫다는 원초적인 욕심이 다른 명분보다 크게 와 닿더군요.
20/09/28 14:02
이성계의 세종을 내다본 큰그림으로 합리화를..
이성계 본인의 권력욕 때문에 어린애 한테 줬다고 하기에도 형들의 입장을 모를리 없었을 겁니다. 당장 권력 얻겠다가 피바람 부는거 몰랐을까요.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복잡하게 생각하긴 싫고 단순 뇌피셜로 어디까지 가나 한번 붙어보자 하고 판을 짰는데 본인이 진게 아닌가 싶네요.
20/09/29 10:30
여섯째 아들 이방연은 조선건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빠졌을것 같습니다.
너무 일찍 죽다보니 존재감이 없었죠 위화도회군 할때쯔음 죽었다고 하니까요
20/10/01 16:28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총애하는 후처가 낳은 자식에게 꽂혀서 후계구도 꼬는 경우가 적진 않기에 그냥 그런 케이스로 보는 편입니다. 이성계의 생애를 봐도 호탕하고 보스기질 충만한 사람 같은데 이런 사람들이 일을 결정할 때는 감정적인 요소가 꽤 크게 작용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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