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백호. 이름의 뜻은 글자 그대로 흰 호랑이(白虎)입니다. 꽤나 거창한 이름이지요. 그래서 이게 본명이 아닌 별호 같은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애당초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던 한미한 출신이라는 의견입니다. 오서 주치전을 보면 산적(山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그런 추론에 신빙성을 더해 주지요. 후한시대에 먹고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모여서 산적떼를 결성한 경우가 워낙 많았으니까요.
반면 그가 지역의 호족 출신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주치가 오군태수 허공을 공격하여 패주시키자 허공이 도망쳐서 엄백호에게 의탁했는데, 태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의지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인물이었을 거란 주장이죠.
또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오서 여범전을 보면 엄백호를 가리켜 강족(彊族)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엄백호가 ‘강인한 족속’, 즉 이민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엄백호의 근거지인 오군 일대가 산월족 등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했고요.
자. 이렇게 엄백호는 출신성분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러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손책이 한창 강동을 점령하고 있을 때 엄백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바로 위에 언급한 것처럼, 주치에게 패해 쫓겨 온 허공을 받아들여 준 거죠. 자치통감에 따르면 195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 오군 일대는 온갖 세력자들이 난립하여 꽤나 어지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엄백호를 비롯하여 추타, 전동, 왕성 등이 제각기 많게는 만여 명에서 적게는 수천 명 가량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요.
손책은 군사들을 이끌고 가 이들을 죄다 때려잡습니다. 이때 엄백호는 동생 엄여를 보내 화친을 구했지만, 손책은 엄여를 비웃으면서 직접 찔러 죽인 후 진격하여 엄백호를 격파합니다. 엄백호는 달아나서 허소라는 인물에게 의탁하지요.(인물평으로 유명했던 허소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평소 허소를 좋게 보았던 손책은 굳이 그를 뒤쫓지 않았습니다.
198년에 엄백호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 한나라 조정(=조조)은 손책을 회계태수로 임명한 후 여포, 진우 두 사람과 힘을 합쳐 원술을 토벌하라고 명합니다. 진우라는 인물은 하비 출신이며 서주의 호족 진등의 당숙뻘 되는 사람입니다. 당시 오군태수를 자칭하고 있었는데 꽤나 세력이 있었던지 조정에서는 그를 오군태수로 인정해 주고 또 안동장군으로 임명하여 회유했지요.
그런데 진우는 내심 손책을 견제하였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무슨 계기로 손책과 사이가 틀어졌을 수도 있지요. 그는 동맹인 손책을 공격하기 위해 엄백호를 비롯하여 초기, 조랑 등 지역의 유력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엄백호로서는 손책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요.
그러나 손책은 이미 진우의 움직임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역습을 가해 진우를 대파합니다. 오서 여범전에 따르면 이때 손책은 여범과 서일에게 진우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직접 엄백호를 토벌하였다고 하네요. 그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당시 엄백호의 세력은 상당했던 걸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손책이 직접 공격에 나설 필요가 없었겠죠.
정사나 배송지주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때 손책이 엄백호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엄백호의 이름이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바로 200년, 손책이 죽은 해입니다.
오서 손책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서쪽을 정벌했을 때 진등이 그 후방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당숙이었던 진우의 복수를 하려 든 거죠. 이때 진등이 끌어들인 자들이 바로 엄백호의 잔당들입니다. 그러니 엄백호가 죽은 후에도 그 세력은 비록 약화되었을지언정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손책은 회군하여 진등과 맞섭니다. 하지만 그러던 도중에 과거 자신이 죽였던 허공의 빈객들에게 공격받아 크게 다칩니다. 결국 손책은 상처가 덧나 죽고 말았지요.
여기까지가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엄백호의 많지 않은 기록 전부입니다. 연의에서 동오의 덕왕(德王)이라는 인상 깊은 칭호와 함께 등장하는 바람에 꽤나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엄백호입니다만, 사실 덕왕이라고 자칭한 적은 없지요. 또 왕랑과 원 플러스 원 세트메뉴처럼 간주되는 경항이 있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엄백호는 그저 당대의 흔하디흔한 세력가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손책에게 살해당한 걸로 추정됩니다. 결코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었고, 조연조차도 아니었으며, 노골적으로 말해 그저 주인공에게 당하는 역할을 맡는 흔해빠진 단역일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백호는 끝내 자신의 원한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자, 생각해 볼까요. 엄백호는 과거 손책에게 패한 허공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손책에게 목숨을 잃었지요. 하지만 엄백호의 잔당들이 손책의 발을 붙들었고, 또 허공의 빈객들이 주인의 원한을 갚고자 노력한 끝에 결국 손책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엄백호가 허공에게 베풀었던 친절이 결국 돌고 돌아 보답 받은 격 아니겠습니까. 엄백호의 혼령이 있다면 무척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도덕경의 한 구절쯤을 읊조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그물은 성근 것 같아도 놓치는 게 없다고(天網恢恢 疏而不失)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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