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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3/15 16:59:59
Name 글곰
Subject [일반] 여성 SF 작가 3명을 추천하며
대부분의 장르문학이 그러하듯 SF 또한 남성작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SF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평가가 어색하지 않은 어슐러 K. 르 귄, 소위 ‘팁트리 쇼크’의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그리고 위대한 수다쟁이 코니 윌리스는 모두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훌륭한 작가들이다.

요즘은 여러 가지 의미로 페미니즘을 언급하기조차 두려운 세상이지만, 이 일단의 작가들은 흔히 ‘페미니즘 SF 작가’로 통칭되곤 한다. 그 이유는 제각각이다. 단지 여성작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칭하는 이들도 있고,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이 소위 여성성을 다룬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지기도 하며, 혹은 여성으로써 겪는 차별과 고통을 문학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는 어슐러 K. 르 귄의 사례처럼 작가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슐러 K. 르 귄은 데뷔작에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U. K. 르 귄이라고 표기해야 했다. 출판사에서 여자가 쓴 SF는 아무도 읽지 않으니 이름을 감추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그 일로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이후 자신의 이름을 반드시 ‘어슐러 K. 르 귄’으로 표기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일부러 남성의 필명으로 데뷔했고 동료 작가들과도 오직 편지로만 교류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가 여성임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가 여성으로 밝혀지자 SF업계는 충격에 빠졌고 성(gender)에 대한 담론까지 일어났는데 이를 ‘팁트리 쇼크’라고 칭할 정도였다. 코니 윌리스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여성작가인데도 페미니즘 의식이 부족하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80년대에 이미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를 쓴 사람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것도 역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오직 이들의 작품이 위대하다는 사실이다. 소위 페미니즘 SF의 마스터피스와도 같은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 약자에 대한 역설적인 증오와 폭력을 SF적으로 재해석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 여성학대와 폭력을 잔인하기 그지없는 우화로 다룬 코니 윌리스의 [사랑하는 내 딸들이여]는 각각 훌륭한 페미니즘 SF지만 그 이전에 훌륭한 SF고, 나아가 훌륭한 문학 작품이다.

그렇다. 이 글의 본령은 영업이다. 다들 한 번쯤 사 보시라는 뜻에서.

SF가 과학소설이라는 본연을 잊지 않으면서도 어떠한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어슐러 K. 르 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을 권한다. SF작가의 단편집으로서 이 단편집의 거룩함에 견줄 수 있는 책은 오직 세상에 두 권,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단편들 중에서도 특히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아홉 생명],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가 손꼽히며 개인적으로는 [파리의 4월][땅속의 별들] 또한 좋아한다.

거칠기 짝이 없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의 냉혹함과, 그에 맞서 싸우는 약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체체파리의 비법][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권한다. 본래 한 권의 단편집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두 권으로 분책되었는데 분량을 보면 납득이 간다. 이 단편집에서 특히 추천할 만한 작품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책의 제목과 동명의 단편인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체체파리의 비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은 흡사 젤라즈니의 [가만히 있어, 루비 스톤]의 여성 버전이자 업그레이드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문학의 본질이 결국 사랑으로 회귀한다는 주장을 믿는다면 누가 뭐라 해도 코니 윌리스의 [크로스토크]를 추천한다. 국내에도 그녀의 단편집이 4권 출판되어 있지만 코니 윌리스의 쉴 새 없는 수다가 가져다주는 매력은 장편에서 나온다. SF와 로맨틱 코미디의 결합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둠스데이 북]이야말로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지만, 코니 윌리스의 작품으로는 드물게도 너무 슬프다 못해 울적해지는 결말이라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자. 이제 서점으로 가시라. 책을 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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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큼중년
18/03/15 17:05
수정 아이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있으니 이제 바람의 열두 방향만 구하면 되겠습니다
크로스토크도 사려다 말았는데 언제 서점에 들러야겠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
18/03/15 22:43
수정 아이콘
시공사판 구판이 책 크기가 참 좋았는데 말입니다. 신판도 아마 번역은 동일할 겁니다.
수정비
18/03/15 17:10
수정 아이콘
코니 윌리스의 수다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장편 양목에 방울달기도 국내 출간되었는데, 코니 윌리스의 수다에 어느정도 적응하신 분이면 한번 읽어보세요~~
양목에 방울달기는 "카오스 이론"이라는 주제 때문에 적응 하기 힘든 수다의 향연이 펼쳐지는 책이라
진입 장벽이 좀 있더군요!
18/03/15 22:45
수정 아이콘
그것도 괜찮죠. 국내 나와있는 코니 윌리스 책은 죄다 추천입니다.
졸려죽겠어
18/03/15 17:10
수정 아이콘
여기서 읽어본건 당신 인생의 이야기밖에 없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VinnyDaddy
18/03/15 17:14
수정 아이콘
오멜라스(Omelas)가 살렘, 오!(Salem, O!)를 거꾸로 해서 나온 거라는 설이 있죠. 제목과는 별개로 내용은 정말 폐부를 후벼파는 명작입니다.

체체파리의 비법은 볼 때마다 요즘 세태를 생각나게 하더군요.
18/03/15 22:59
수정 아이콘
르 귄 본인에 따르면, [Salem(Oregon)] 이라고 쓰여 있는 도로 표지판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18/03/15 17:18
수정 아이콘
유명 아이돌 그룹의 뮤비에 나온 기차역 이름이 "오멜라스" 설마 저 오멜라스가 르귄의 그 오멜라스? 설마 했는데 맞더군요. 신기.
18/03/15 23:00
수정 아이콘
호오.... 덕후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군요?
18/03/15 17:20
수정 아이콘
여기에 한명 더 추천한다면 듀나....


는 농담이고 옥타비아 버틀러...굳이 여성이라는 수식어 붙일 필요없이 최고의 sf작가라고 생각합니다.
18/03/15 23:04
수정 아이콘
오오 이렇게 또 한 명을 추천받고 갑니다.
18/03/15 17:34
수정 아이콘
저는 바람의 열두 방향 중<샘레이의 목걸이>가 제일 좋아요. 짧은 단편 안에 거대한 헤인 시리즈 세계관의 매력을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두 꾹꾹 눌러담고 있죠. 개별 작품으로서는 <어둠의 왼손>이나 <빼앗긴 자들>이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게는 샘레이의 목걸이가 헤인 시리즈 중 제일 읽기 즐거웠습니다.

코니 윌리스는 많이 못 읽어봤는데, <둠스데이 북> 진짜 좋았어요.
18/03/15 23:03
수정 아이콘
SF와 판타지와 동화가 절묘하리만큼 멋지게 결합되어 있죠.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이 세계의 전설과 사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스칼렛
18/03/15 17:45
수정 아이콘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 단편집 두 권,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네 인생의 이야기'와 비견될 책이라면 당연히 읽어봐야겠지요. 감사합니다.
18/03/15 23:00
수정 아이콘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진산월(陳山月)
18/03/15 20:47
수정 아이콘
요즘 어슐러 르 귄 작가의 책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18/03/15 21:26
수정 아이콘
르귄 제 올타임 넘버원 작가입니다 장르를 초월해서요 ㅠㅠ 저는 어스시 연대기로 먼저 접했는데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작가의 생각을 주워섬기는게 아니라 세계와 삶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데 대해서 거의 쇼크를 받았었어요. 더군다나 저렇게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요. 그런데 바람의 열 두 방향을 읽고 받은 충격은 진짜 어마어마했습니다.
18/03/15 22:40
수정 아이콘
아마 대부분의 팬들이 처음에는 땅바다 이야기로 르 귄을 접했겠지요. 저는 특히 테하누가 감명깊었습니다. 마법을 잃은 마법사와 남편을 잃은 아주머니의 이야기였죠.
진산월(陳山月)
18/03/15 21:4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르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을 포함한 다섯권과 아시모트의 "파운데이션" 구판 2번째권 구매했네요. 책장에 르귄의 작품이 꽤 모였네요. 뿌듯~

추천해주신 다른 작가의 책도 읽어보겠습니다.

*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가 장바구니에 있는데 따로 분류가 되있어서 구입을 못했네요. 다음에 다른 책과 함께 구입하는 걸로...
18/03/15 22:36
수정 아이콘
파운데이션 구판이라면 현대정보문화사 9권짜리 버전(하드커버 말고) 말씀이시죠? 구하기 힘드시면 요즘 나온 황금가지판도 괜찮습니다.
진산월(陳山月)
18/03/15 23:00
수정 아이콘
현대 맞습니다. 하드커버 10권 짜린데 2권과 6권이 상태가 별로라...

황금가지판은 소장중입니다. ^^
18/03/15 23:04
수정 아이콘
어억. 하드커버 10권짜리 판본은 아주 끔찍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별적인 작품을 멋대로 자르고 붙이는 바람에...... ㅠㅠ
진산월(陳山月)
18/03/15 23:25
수정 아이콘
그렇긴하죠. 이미 보유하고 있는것이라 구색만 맞추는 걸로...
18/03/15 22:55
수정 아이콘
로저 젤라즈니를 정말 좋아하죠! 요샌 이런 '고전 SF'같은 느낌의 책들을 추천받거나 접하기가 어려웠는데, 또 새로운 책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네요~
18/03/16 08:22
수정 아이콘
우주 함대정도는 나와줘야 재미있는 SF다 라는 분께는 로이드 맥마스터 뷰졸드의 “마일즈의 전쟁”(보르코시건 시리즈)와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라드츠 시리즈) 추천드립니다. 물론 이 두 분도 여성 분.
18/03/16 09:02
수정 아이콘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를 보면 소위 스페이스 오페라가 이룰 수 있는 성취를 확인할 수 있죠. 앤 래키도 좋습니다. 재미있어요.
여담이지만 둘 다 전자책으로 가지고 있는데 요즘 후회 중입니다. 걍 책으로 살 걸...(꽂아놓을 데도 없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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