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도 많은 영화들을 봤는데 돌이켜보니 엄청 좋았던 기억으로 남은 영화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12월쯤 접어들어서 그 해의 영화들을 돌이켜보면 다섯개 정도는 바로바로 '정말 좋았지' 혹은 '정말 재밌었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떠올랐는데 올해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덩케르크> 정도 뿐이네요. 함께 떠올랐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지어 2016년에 봤었더라고요. 그래도 올 해 봤던 영화들 중에서 10편을 뽑아봤습니다. 5편만 뽑자니 오히려 비슷비슷하게 좋았던 영화들이 많아서 그냥 10편 골라봤어요.
<캡틴 판타스틱 Captain Fantastic>
간만에 본 아라곤 형님의 영화였습니다. 이전에 제가 본 영화가 2011년 작이었던 <데인저러스 메소드>였으니 무려 6년만에 봤네요. 부모의 의지,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신 현재는 아버지의 의지로 오랫동안 세상과 동떨어져 자연속에서 살아가던 가족이 일련의 상황들에 의해서 다시 세상과 마주하며 생기는 일들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장르는 기본적으로 드라마인데 코미디가 가미되어 있어서 잔잔하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들도 던져주고요. 무엇보다 여섯 아이들 중 다섯째와 막내가 엄청 귀엽습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2017년 봤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단 한 편을 뽑으라면 이 영화를 뽑을 것 같습니다. 일단 케이시 에플렉의 연기가 어마어마합니다. 케이시 에플렉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까지 받았죠. 영화가 나온 시기에 스캔들 문제가 터져서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 기분이 살짝 미묘하긴 했지만 영화 자체가 감정적으로 엄청 크게 다가왔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이유가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미셸 윌리엄스였는데 생각보다 출연 분량이 적었던 것이 아쉬웠으면서도 그 적은 분량에서 보여준 연기가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나 유모차를 끌고 있던 씬에서 우는 연기는 대단했어요.
<존 윅-리로드 John Wick Chapter Two>
사실 키아누 형님을 참 좋아하는데도 1편을 못봤었고, 못 본 상태로 2편을 봤습니다. 생각없이 그저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보고나서 너무 마음에 들어서 1편 블루레이를 사놓고 아직 뜯지도 않은게 문제이긴 한데, 이제는 조금은 힘겨워 보이는 모습마저도 캐릭터에 잘 녹아들어있어서 기대했던 것 보다도 훨씬 재밌게 봤습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총기 고르던 장면.
<로건 Logan>
아마 많은 분들이 올해 개봉했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블록버스터를 고르라고 하면 이 영화를 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의 아포칼립스에 너무나도 큰 실망을 했던데다 울버린 단독 시리즈의 이전 두편이 그리 좋지않아서 별로 기대하고있지 않던 영화였는데 뜬금없이 걸작이 튀어나왔어요. 호불호가 좀 갈리는 엑스(x) 표식 장면은 개인적으로는 없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긴 했는데 찰스를 보내던 로건과, 그리고 로건 본인의 마지막장면은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분노 怒り>
일본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아서 올 해에도 딱 한 편 밖에 보진 않았는데 그 하나가 대박이었습니다. 와타나베 켄이나 마츠야마 켄이치 같은 좋아하던 배우도 나오고, 심각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점점 배우가 되어가는 느낌의 히로세 스즈도 좋았어요. 전혀 다른 곳, 전혀 다른 인물들의 세 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면서 하나의 사건의 범인이 어느 이야기의 등장인물일까를 알려주게 되는데 실제로 진범이 나오는 이야기와 시실은 진범이 아닌 나머지 두 개의 이야기 모두가 완성도가 높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거 만들지 말고 이런 일본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스 슬로운 Miss Sloane>
로비스트인 주인공이 총기 규제 법안과 엮이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하드캐리라는 표현이 딱인데, 이게 '영화가 그리 인상적이진 않지만 주인공의 연기는 좋았다'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주인공이 다 이끌어갑니다. 영화를 보신 분, 혹은 나중에 보실 분들은 느끼시겠지만 대사량이 진짜 어마어마한데 그 연기를 정말 잘 해냅니다. 소재나 분위기는 많이 다르긴 한데 보면서 <제로 다크 서티>가 많이 생각났었습니다.
<엘르 Elle>
짧게 요약하면, '오오, 이자벨 위페르!' 입니다. 보는 중에도, 다 보고 나서도 마음이 그리 편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폴 베호벤 감독의 연출력과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에 몰입할 수 밖에 없도록 영화가 만들어져있어요. 다만 강간, SM 등 앞서 말한 것 처럼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될 소재들이 있으니 혹시 관심있는 분들은 이런 부분은 감안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런 장면들이 의미없이 소비되는 장면들은 결코 아닙니다.
<덩케르크 Dunkirk>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참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는 이상할 정도로 기대했던 영화들이 대부분 기대보다 한참 못했는데 기대감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화라고나 할까요. 원래 재밌게 본 영화를 극장에서 여러차례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2017년에는 자의로 두 번 이상 본 영화가 덩케르크 뿐입니다. (라스트 제다이를 한 번 정도 더 볼 것 같긴 해요.) 영화 자체도 좋았는데 국내 최초로 도입된 용산의 레이저 아이맥스가 시너지 효과를 줘서 더 만족했던 영화입니다. 기회만 된다면 용아맥에서 다시 한 번 보고싶어요.
<더 테이블>
아주 우연히 본 영화입니다. 시간이 약간 애매하게 빈 상태에서 매우 적절하게 70분짜리 영화가 곧 시작하길래 봤었습니다. 골목의 한 작은 카페의 창가 테이블에서 하루동안 네 쌍의 일행의 모습을 관찰하듯이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하나하나가 단편영화의 느낌이 많이 나요. 정유미-정은채-한예리-임수정 순서로 주인공이 바뀌니 이 배우들에게 관심있는 분들도 볼만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예리/김혜옥님이 연기한 세 번째 이야기가 가장 좋았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원작을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 영화 보기 직전에서야 부랴부랴 봤었습니다. 사실 원작은, 작은 화면에서 급하게 봐서 그럴지는 몰라도 크게 와닿는건 없었습니다. 물론 나왔던 당시에 봤다면 크게 다르게 느꼈겠지만요. 그러고 보면 이번 속편도 아주 재밌다고 느끼면서 영화를 본 것 같진 않습니다만 안드로이드나 복제인간을 대하는 철학적인 주제 같은 것 보다도 화면이 너무 좋았었습니다. 특히나 붉은 빛 계통의 색이 많이 사용된 중후반부 사막화된 도시의 장면들이 좋았어요. 그리고 대형 홀로그램 광고와 마주하던 케이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
10편 이외에 번외로, 늘 보고싶다고 생각만 하고 미루고 있었는데 때마침 재개봉을 해줘서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영화는 몇 줄로 뭔가 설명할 수는 없고 그저 정말 대단한 영화였어요.
다 뽑고 보니 신기하게도 한국 영화도 하나, 일본 영화도 하나, 유럽 영화도 하나에, 적절한 숫자의 블록버스터와 작은 영화들이 균형있게 포진하고 있네요. 공포 쪽 장르 제외하면 다양하게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역시 미쿡인들 나와서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가 제일 취향이긴 한데 내년엔 계획된 블록버스터들이 좀 더 재밌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번외로, 가장 별로였던 영화 몇 편을 뽑자면
<어쌔신 크리드>
저스틴 커젤 감독과 마이클 패스벤더, 마리온 꼬띠아르가 함께했던 <맥베스>는 2016년 저의 베스트 영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감독과 배우들이 다시 함께했는데 결과물이 정말 실망스러웠었어요.
<트랜스포머5>
심지어 이건 기대도 전혀 안했는데도 말이죠. 네 아이맥스 도장 찍으려고 봤습니다... 올 해 본 영화중에서 티켓값이 가장 아까웠었어요.
<송 투 송>
테렌스 멜릭 감독은 차라리 영상예술작가가 되는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상영관에 저 혼자밖에 없었는데 끝날 때 쯤 되긴 된 것 같아서 시계를 봤더니 절반도 안지나가서 좌절스러웠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