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정우의 연기가 태극권이라면, 이병헌의 연기는 절권도다. 또 하정우가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라면, 이병헌은 독일 쾰른대성당의 고딕첨탑이다. 물론 충무로 연기파배우로서 송강호, 최민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병헌을 하정우와 단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둘 사이의 클래스 차이는 분명하다. 다만 두 배우의 느낌만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영화당>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하정우의 연기의 특징을 가리켜 '약간 덜하는 듯한 연기'라고 의미심장하게 설명했다. 이른바 여백이 있는 연기. 돌이켜보면 <추격자>에서도, <비스티 보이즈>에서도, <멋진 하루>에서도, <군도>에서도, <터널>에서도 그의 연기에는 왠지 모를 여백이 있었다.
통상적으로 볼 때 연극 연기는 발산하고 쏟아내는 연기의 비중이 크다. 카메라 렌즈가 무대 위 배우를 클로즈업해주지 않으므로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려면 배우의 목소리 톤이나 몸짓 등이 실제보다 조금 더 과장되고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메라가 동반되는 영화연기는 다르다. 영화에서는 쏟아내는 연기 못지않게 갈무리하는 연기, 그리고 씬과 씬 사이의 감정을 연결하는 연기가 중요한데 하정우는 여기에 능하다.
[한편 저는 제가 심리적으로 그 장면에서 시원하게 해소가 되어야 연기에 만족하는 유형도 아니에요. 그럴 경우 오히려 거기서 에너지가 다 소비돼버렸다는 느낌이 들죠. 그러니까 현장편집본을 체크해 (감정의 수위를) 신들에 분배하면서 감독한테 확인을 청해요. "이렇게 생각하고 왔는데 내일 찍을 장면이 그러하니 맞는 거죠?"라고. 그런데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건 나홍진 감독님의 <추격자> 이후였어요. 말이 통했던 것이죠.] (시네21, 2012년 2월28일, 하정우와 함께한 멋진 하루 中)
연기든 연애든 무조건 돌진하고 쏟아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마치 연애에 있어서 저돌적으로 구애하는 상대가 때론 부담스러운 반면, 느긋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견지하는 이에게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배우 하정우가 다작을 하면서도 관객들이 그의 연기에 질리지 않도록 이미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덜하는 듯한 연기'와 '대충하는 연기'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연기에 '여백'은 있으나 '대충'은 없다. 오히려 하정우는 배우의 감정보다 캐릭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습의 힘을 믿는 치열한 연습벌레에 가깝다.
[한줄을 넘어가는 대사는 모두 연습해야죠. 지금 막 뱉은 말처럼 미묘하게 템포를 조절하고 어느 지점에서 약간 씹는듯 하는 것까지 핸들링하려면 암기를 넘어 체화시켜놓는 쪽이 맞는 것 같아요. 긴 독백은 변기 옆에 붙여놓기도 하고 외출할 때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숨돌릴 때 슥 눈으로 훑기도 하면서 결이 계속 쌓여야 <의뢰인>의 최후변론이나 <러브픽션>의 고백신을 망설임 하나없이 뱉을 수 있어요.
이승엽 선수가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에서 투런 홈런을 치고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간 부담되었던 점을 죽 이야기하다 갑자기 가슴이 막혀서 "잠깐만요"(이승엽 목소리 모사) 하고 앵글을 피했다가 다시 인터뷰를 속개하는 모습이 통째로 담겼어요. 얼굴과 눈빛은 보이지 않는데 순간의 떨림이 확 왔죠. <국가대표>의 공항 장면을 그렇게 연기하려고 했어요. 감정이 워낙 노골적이다 보니 쑥스러울 것 같아서 감정에 절대 기대지 않고 내내 눈을 가리고 기술적으로 할 생각이었죠. 어떻게 각을 돌리고 움직일지 면면이 다 계산했어요. 왜냐하면 전 연기에서 감정은 절대 믿지 않거든요. 감정은 와주면 땡큐인 무엇이고, 감정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감정이 안 오더라도 표현하는 게 연기라고 생각해요.] (시네21, 2012년 2월28일, 하정우와 함께한 멋진 하루 中)
이렇듯 연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캐릭터와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배우로서의 자세가 관객이 느끼는 피로감이나 부담감을 덜어주는 주요한 하나의 요소가 아닐까?
더불어 그에게는 뿌리 깊은 '주인공 본능'이 있다. 남이 하면 민망하고 오글거리는 태도와 말도 하정우가 하면 괜히 근사하고 그럴싸해보이는 느낌.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런 아우라를 이른바 '주인공 본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연인 하정우에게 배어있는 태생적인 넉살과 유머, 그리고 능청스러움. 이러한 것들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그의 능청스러운 매력이 잘 녹아든 대표적인 캐릭터가 <멋진 하루>의 병운과 <비스티 보이즈>의 재현이다. 이렇듯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하정우의 매력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고 관객들을 안심시킨다. 감독과 관객을 동시에 안심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이렇듯 관객을 무장해제시키는 매력이야말로 배우 하정우의 가장 큰 무기이자 힘이다.
반면 이병헌의 연기는 굉장히 밀도가 높다. 그래서 조금 다른 의미에서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배우로서 그가 지닌 특유의 비운의 정서와 매서운 집중력 때문이다. 그는 섬세한 연기의 결을 지닌 배우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눈빛 하나, 손끝 하나까지도 허투루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게 만든다. 피에 젖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왜 이렇게 된거지?"라고 독백하던 <달콤한 인생>의 선우도, 애인의 복수를 끝낸 뒤 숨죽인 채 서럽게 울던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도,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긴 한가?"라고 조소하던 <내부자들>의 상구도 전부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렇듯 한명의 배우가 지닌 공통된 정서와 이미지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섬세한 변주가 그의 연기에 대한 식상함과 피로감을 없애준다.
개인적으로 꼽는 이병헌의 최고작은 <달콤한 인생>이지만, 그의 연기 인생 최대의 도전은 <광해, 왕이 된 남자>라고 본다. <광해> 이전만 해도 한복을 입고 상투를 튼 사극 안에서의 이병헌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병헌과 사극, 이병헌과 임금, 이병헌과 천민광대 등은 어떻게 해도 연결 짓기 힘든 조합이었다. 매화틀 위에 엉덩이를 까고 민망하게 똥을 누는 임금 이병헌의 모습이라니,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불안과 의문은 당사자인 이병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나리오 읽을 땐 재밌었는데 이번엔 좀 특이한 경험이었다. 나도 이 생활을 한 세월이 있으니 보통 작품을 보면 60∼70%는 밑그림이 그려진다. 여기서 나한테 맡겨지는 게 어떤 모습일지는 한 80%가 보인다. 이야기는 감독의 영역이지만 캐릭터는 내가 그리는 거니까 더 잘 보인다. 근데 이번엔 그게 전혀 안 보이더라. 캐릭터가 정확히 어떤지 내가 그 역할을 했을 땐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안 가더라. 하려고 하는 역할에 대해 이렇게 불안하고 끝까지 모르겠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한 석달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씨네21, <이병헌> 이 배우의 무한도전 中)
하지만 작품의 초반, 천민 하선과 임금 광해가 처음으로 한 화면 안에서 조우하는 씬에서 그는 그간의 관객들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킨다. 이 장면에서 분명 같은 배우였지만 전혀 다른 두명의 남자가 한 화면 안에 앉아있었다. 이 씬에서의 탁월한 연기가 배우 이병헌이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궁극의 경지였다고 본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로 더 이상 그가 도전하지 못할 배역은 없어보였다. 스스로가 본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의 굴레를 던져버린 느낌. 할리우드를 향한 늦깎이 도전도 작품을 향한 그의 자세 변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뭘 그렇게 돌다리 두드리나 싶더라. 작품의 결과나 파장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점치려는 걸까, 그냥 나를 좀더 풍요롭게 만들고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번 해보자 싶었다. 하고서 후회하는 게 낫겠다 싶더라. 그런 마음을 먹고부턴 작품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덜 걸리고 쉬워졌다.] (씨네21, <이병헌> 이 배우의 무한도전 中)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연기를 추동하는 밑바탕에는 특유의 천진난만함이 자리잡고 있다. 평소의 그는 굉장히 진지하고 까탈스러울 듯 보이지만 인터뷰나 메이킹 필름 등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장난끼가 많고 유머러스하며 어린아이 같다. 그가 지닌 차가운 이미지와 대비되는 이러한 천진난만성이 그의 연기 폭을 넓히고 더 자유롭게 만드는 원천이 아닐까 싶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임금 광해가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비운의 정서와 아우라를 통해 완성되었다면 그 반대편에 서있는 광대 하선은 배우 본연의 천진난만성을 통해 완성되었다. <내부자들>의 안상구는 이 두가지 면모가 동시에 결합된 케이스이다. 더불어 그는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캐릭터를 완성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안상구의 인간적 캐릭터는 그런 마음에서 출발한 그의 아이디어였다. "원래 안상구는 행동대장처럼 강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워낙 긴박하고 쉴 새 없이 사건들이 벌어지다보니 한 인물을 통해 관객의 숨통을 틔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는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우민호 감독에게 제안했고, 감독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사와 지문이 바뀌었고, 현장에서는 애드리브를 해가며 안상구를 만들었다.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할까?" 같은 코믹한 대사도 현장에서 탄생한 애드리브다. 안상구가 우장훈 검사와 함께 모텔방에 있는 신에서 화장실 벽을 통유리로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남자들끼리 모텔에 있는 상황에서 요상한 화장실 때문에 머쓱해지면 웃기지 않겠나."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은 "이병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준비가 돼있다니 놀랐다. (웃음)"고 당시의 소감을 밝혔다.] (씨네21, <이병헌> 우직하게, 또 영민하게 中)
<내부자들>의 조폭 안상구 캐릭터를 탄력있게 해석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배우로서의 센스와 촉이 얼마나 영민하게 살아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배우 곽도원을 일컬어 "곽도원이 총이라면 영점이 어마어마하게 잘 잡힌 총"이라던 나홍진 감독의 말을 빌자면, 배우 이병헌은 "영점을 스스로 잡을 줄 아는 총"이다. 이 총이 녹슬지 않고 스크린 안에서 앞으로 더 오래도록 빛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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