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완벽하게 팬만을 위한 영화

보통 이런 류의 영화는 도입부에서 '창조주는 어떤 종족을 만들었고 이 세계는 어떻고 블라블라' 정도로, 길고 짧은 정도는 있지만 대충 언급은 하고 넘어가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그냥 시작부터 "여긴 아이언포지. 여긴 스톰윈드. 알잖아?" 라고 하는 식입니다.

"나는 워크-와우저만 잡는다!" 라고 천명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이런 식이기 때문에, 사실 관련 내용이나 스토리를 전혀 모르는 분들이 보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2. 영화안에 들어있는 개똥, 가로나

가로나가 화면에 잡히는 모든 부분이 개똥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캐릭터만 빠졌어도 이 영화에 좀 더 높은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저는 대체 왜

"얘가 인간이랑 말이 통하는 이유" 를 모르겠고
"왜 잔인한 오크를 잡아와서 왕과 대면한 자리에 꽁꽁 묶어두지 않고 몸매 감상이나 쳐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왜 꼬맹이 카드가랑 섹드립 치면서 노는지" 모르겠고
"왜 종족이 다른 로서랑 로맨스 관계가 되는지" 모르겠고
"왜 메디브가 가로나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는지" 모르겠고
"왜 레인이 가로나더러 자기 뒤를 찌르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납득이 안 됩니다. 가로나를 대하는 고위층의 태도가 이러니 저는
"혹시 이 사람들 이 사태에 대해서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나?"
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전쟁, 특히나 침략자에게 자기 땅이 짓밟히고 백성들은 다 죽어가는데 왕이나 장군이나 무슨 초탈한 도인처럼 "아 죽는갑다" 하고 내버려 두는 거 같다는 심정입니다. 오크에 대한 증오, 분노, 전쟁에 대한 흥분 이런게 전혀 없어요.

개연성 뿐만 아니라 가로나가 취하는 행동도 하나도 맘에 안 듭니다. 왜 저 '괴물'이 인간같은 섹시함을 표현하려고 저러고 있는지. 영상은 왜 저렇게 잡아주고 있고 연기는 왜 저렇게 하는지.

완전히 다른 두 종족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려면 좀 더 시간과 비중을 둬서 다양한 묘사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무슨 가로나가 매력 +100 옥새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주변 모두를 홀리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되네요.



3. 팬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매력.

1번과 연계되는 사항으로서, 팬이나 설정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역시 메디브 관련해서겠죠.

팬들은 압니다.

메디브가 맡은 수호자는 어떤 역할인지.
메디브는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사명을 띄고 태어났는지.
메디브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악의 존재.
메디브가 짊어진 고뇌와 해결 방식.

이 모든 걸 알기 때문에 메디브의 최후의 순간에 모두가 감동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모르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수호자는 뭔지. 아무리 봐도 메디브 쟤가 흑막인데 (영화에서는 거대한 악에 대해 전혀 안 나오니까)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후회하는지. 모르고 보면 그냥 마법에 홀린 정신나간 늙은이가 삽질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개심한 스토리 이상이 아니에요. 여기에 무슨 매력이 있습니까?

오크 쪽 이야기도 마찬가집니다. 오크의 세상이 멸망하고 있다는데,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코빼기도 오크들 세계는 안 보여줍니다. 아니, 저들에게 공감을 하려면 오크의 세계가 얼마만큼 황폐화 되었고, 아제로스 까지 넘어올 정도의 절박함이 있다- 뭐 이런 묘사가 필요한데 없어요. 그냥 타 세계에서 넘어온 괴물들이 약탈, 방화, 학살하는 종족이에요.

재밌는건 제가 듣기로 원작에선 오히려 단순무식 약탈자가 맞았고,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오크의 종족 세탁이 이루어져서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영화에서도 적나라하게 그런 티를 냅니다. 정작 저는 오크에게 도저히 감정이입이 안되더군요. 위에서 말했던 이유로.


물론 최소한의 개연성은 있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야 잘 때려부순다! 악 안돼! 제발 이겨줘! 인간 만세!" 뭐 이런식으로 생각할 여지는 충분히 많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이 영화는 팬이 아닌 사람이 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로 보입니다.


4. 전투씬의 난잡함

반지의 제왕과 비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려나요?

멋지게 차려입은 갑옷과 방패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규모 전투씬의 퀄리티가 좀...
특히나 마지막 대회전에서 인간들이 대체 어떻게 쪽수가 많은 오크들의 본진에 침투해서 게이트를 역으로 끼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총을 들고 있으면 앞에서 지켜줄 방진은 왜 안짜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전쟁이 아니라 그냥 대규모 패싸움처럼 보이는 건 연출의 문제인지 카메라의 문제인지...

굴단과 듀로탄의 일기토는 멋집니다. 나름 박력있어요.
근데 메디브 vs 로서, 카드가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제가 봐도 이건 아닙니다. 뭐죠? 이건?
사실 메디브가 자기 능력으로 초토화 시켰으면 넉다운이었을 테니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건가요?
골렘에다가 재갈 물려서 조종하던데 얘는 대체 왜... 골렘이 나온 이유도, 얘가 중심이 되서 싸운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로서와 블랙핸드 막고라도 앞뒤 설명이 전혀 없네요.
오크들은 왜 로서의 막고라 (사실 인간은 이런 문화도 없는데) 를 받아들인 걸까요? 하자고 얘기도 안했는데.
블랙핸드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내세운 걸까요?

그런거 치고는 일기토가 너무나 허무하고 시시하게 끝나서 아무 감상이 안 들더군요.



5. 닦이급 영화는 아니지만 잘 만든 영화도 아니다.

평론가들의 혹평 만큼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 만든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팬들에게 주는 팬서비스 이상의 가치는 전혀 없는 영화에요.

다만 혹평만 했는데, 팬들에게는 또 다른 감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캐릭터들의 특성과 뒷배경, 아제로스 세계에 대한 이해도, 게임을 하면서 쌓아왔던 동경과 감상. 이러한 것들이 받쳐주고 (그리고 머릿속에서 재창조되며) 팬심으로 본다면 못 볼 영화는 아닙니다.

다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고 하면 추천하지 말던가, 아니면 최소한의 설정 정도는 알고서 보러 가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숨겨진 매력을 어느 정도는 읽어낼 수 있을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