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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20 01:58:43
Name 서리버
Subject [일반] 아이가 태어나고 6개월... (수정됨)
오늘 처음으로 아이 때문에 펑펑 울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뭐 사실은 그냥 얼떨떨하고 제 품에 안겨줬을 땐 이게 내 애가 맞나? 얼굴이 쭈글쭈글하네? 보면 눈물이 난다는데 아무 감정이 안 드네 생각보다는?


의외로 이런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저는 아내로 머리가 가득 차서 아내가 무사한 지에 대한 걱정 밖에 없어서 애기는 뒷전이었고


출산 후의 아내가 수술 후에 덜덜 떠는 걸 보고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펑펑 울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아내가 마취 풀린 직후라


본인은 전혀 그런 기억이 없고, 저는 퉁퉁 부어 있는 아내의 압박 스타킹을 손을 덜덜 떨면서 신기고, 너무 춥다는 말에 간호사만 찾아 다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저에게 있어, 딸임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생각보다 귀엽지 않았습니다.  그냥 마치 제 지인 말을 빌리자면 어떤 크리쳐 같았다? 그냥 본인 욕망에 충실해서 마음에 안 들면 울고, 배고프면 울고 뭐 하나라도 불편하면 찡찡 대고, 또 말은 못해? 보호 해줘야 할 건 같은데 그냥 짜증 나고 귀찮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어릴 때부터 잠을 푹 자야 하는 스타일이고, 나이가 든 현재에도 중요한 일정이 아니면 웬만하면 알람을 안 맞추고 푹 쉬어서 눈 떠질 때 깨야 되는 사람 인지라, 애가 울어서 깨면 극도의 짜증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 몸도 약한 아내가 몸을 갈아 넣어야 하며, 그리고 애한테 뭐라고 하면 제 자신이 인간 이하가 되는 것 같아서 참으면서 오밤중, 혹은 이른 새벽에 애가 울면 억지로 애를 달래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분유를 주곤 했습니다.


한 번은 애가 우는 걸 보고 너무 짜증이 나서 젖병을 쑤셔 넣었더니 더 서러워서 엉엉 우는 걸 보고 아... 내가 지금 사고도 못하는 애에게 짜증을 내는 건가? 하고 심한 죄책감에 미안함을 느껴 그 이후로 애한테 그런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 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에서도, 사실은 보통 저녁에 항상 제가 씻기기 때문에 제 바쁜 일정에 걸림돌이 되고, 개인 시간을 저해하며, 아내와 저의 시간을 방해하는, 하지만 돌봄이 필요한 건 어떻게 생각 해봐도 사실이니 억지로 가면을 쓰고 행동하던 나날들이 계속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아이를 돌보느라, 제 업무에 차질이 생겨, 제 직장 내 퍼포먼스도 급격히 저하되는 와중 이었구요.


그런데, 오늘 늦게 집에 들어오고 바로 아이를 씻기는 시간이 되어 아... 집에 오자마자 벌써 씻길 시간 하아......... 하고 기계적으로 아이를 씻기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갑자기 아이가 펑펑 울기 시작 했습니다. 아니 아 얘가 도대체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울지? 피곤해 죽겠는데 아씨 오늘도 달래다가 저녁 다 가겠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아이를 우쭈쭈하며 살살 달래던 와중.


젖병? 아니었습니다. 기저귀? 씻기고 있었으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엄마 품? 엄마한테 안기니까 더 펑펑 울었습니다. 아닙니다. 자고 싶나? 침대에 눕히니 비명비명을 지릅니다.


언제 괜찮았냐? 제가 안았을 때. 오로지. 제가 안았을 때만 애가 울음을 다그치고, 그마저도 서러워서 펑펑 울었습니다.


물론 제가 평소에 틈이 나면 안아주고, 가끔씩 보면 웃어주고, 나름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했습니다만, 저는 주 양육자인 엄마에 비해서는


정말 손톱 만큼도 더 나은 점이 없고, 많이 못해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이가 저랑 보낸 시간이 부족했다고 펑펑 서럽게 울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제 생각엔 제가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이렇게 나를 사랑해준다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점, 그리고 내 주관적으로는 아이에게 크게 잘해주고 있다는 체감이 전혀 없는 점들이 복합적으로 다가와서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이 갑자기 북받쳐 올라 아이를 안고 있는 와중에 눈물이 줄줄 흐르더군요.


그걸 보자마자 와이프가 득달같이 놀리려고 달려들어서 영상을 찍기에 바로 도망 다녔지만, 이 아이를 기른 이후로 개인적으로는 아이 덕분에 울고, 고맙고, 행복하단 감정을 가진 첫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이래서 아이를 키우라고 하는구나....'를 느끼게 되더군요.


뭐 제가 피지알에 글을 쓰는 편은 아닙니다만.. 제가 이런 부끄러운 감회를 익명으로 나눌 커뮤니티는 저에게 있어 피지알 밖에 없기에.. 치기 어린 시절 스타글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자유 게시판에 제 소회를 남겨 봅니다.


저는 항상 제 마음 속에서 할 건 의무적으로 해주지만, 이성적으로는 제가 극한의 딸천재라고 생각 했었으나, 오늘부터 딸병X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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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사이다
25/09/20 03:08
수정 아이콘
소중한 감정에 대해 공유해주시니, 새벽감성이 올라오네요
새벽이 맞군요~
부모에게서 받는 사랑, 연인에게 받는 사랑과는 분명 다른 느낌인데 아이에게서 받는 사랑도 큰 사랑이구~ 그걸 느끼신것에 축하드립니다~
방구차야
25/09/20 03:12
수정 아이콘
분유.기자귀,트림,포대기,달래기..나름 해줄거 다해줬는데 계속 울때 짅짜 환장합니다.대체 뭣때문에 계속 그러는거냐..

야밤에 말도 못하는 이 작은 생명체를 안고있을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신뢰의 미소를 지긋이 짓는 순간..
걍 포로가 되는거죠..

아기에게는 지금 내가 가장 필요한 존재구나, 나도 이렇게 말도 못할때를 지나 한생명을 기르고 있구나라는
여러 감정이 느껴집니다. (전 안울었습니다)

퍼포먼스 저하는 뭐,,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같습니다.
생업도 중요하지만 길게보면 어떻게든 조정할수있는 일이고
가족과 아기가 가장 나를 필요로하는 순간이 지금이 아닌가 합니다.
25/09/20 03:44
수정 아이콘
쌍둥이가 태어난지 5개월쯤 됫는데
얘넨 왜 새벽3시에 일어나서 우는지ㅜㅜ
지금도 둘다 밥주고 잠다 깨버렸네용
건방진고양이
25/09/20 06:53
수정 아이콘
첫 두달에 저도 비슷한 감정이 정말 많았습니다. 부모의 책임이라는 가면 아래 고된 일 억지로 하는 것 같은 것도 서러웠고요.
결국 이런 감정들이 결국 나의 책임이고 풀어야 아내와 아기가 더 행복하겠구나 생각해서 전문적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을 받기 시작하고 쌓여가던 응어리들을 해소하기 시작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애기가 울어도 큰 반응 없이 할거 해주고 더 울면 산책시켜주고.. 제 생각일지 몰라도 제 마음이 온화해지니 애기도 전보다 더 평온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애기도 부모의 심리 상태를 느낄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 3개월 차인데 아직 "내 애기 구나" 라는 생각은 많이 안들어도 애기가 웃거나 새근새근 잘때 정말 귀엽구나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제가 아끼는 고양이들 만큼 귀여워졌어요.
25/09/20 07:12
수정 아이콘
둘째 태어난지 한달차...


ㅜㅜ 매일하던 스타크래프트를 이제는 할 시간이 안나네요...
싱싱싱싱
25/09/20 08:13
수정 아이콘
조금 더 커서(3~4살쯤)
아빠 사랑해 쪽
이러면 녹아내리실겁니다

이제는 사춘기된 딸이 암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씁쓸한 아빠입니다 ㅠㅠ
25/09/20 08:41
수정 아이콘
원래 아이들을 안 좋아했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시끄럽고, 비이성적행동들을 많이 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아이들을 낳은 뒤로는 남의 집 애들도 정말 예뻐보이고, 사랑스럽더군요.
사람은 그렇게 변하나 봅니다.
소이밀크러버
+ 25/09/20 09:00
수정 아이콘
아기들도 자기들에게 잘해주는 것 잘 알죠.

저는 이제 27개월, 그저께 100일 된 두 아이의 아빠인데 키우면서 놀랐던게 자기들 나름대로 기억하는게 많은 것이었습니다.

둘 째가 태어나기 전에는 패턴이 잡혀서 9시 반이면 자유시간이었습니다.

좀 더 키우시면 자기 시간도 꽤 생기실 거에요.
여수낮바다
+ 25/09/20 09:03
수정 아이콘
점점 노하우가 늘면 나을거 같은데 그래도 힘들지만 그 이상 보람차고 행복한...게 육아죠 흐흐
화팅입니다
완성형폭풍저그
+ 25/09/20 09:17
수정 아이콘
6세 여자아이 키우고 있습니다.
6개월 까지는 고행의 기간이라 생각하고, 통잠 자기 시작하면 숨 좀 돌리겠다. 싶다가 말하기 시작하면 극락이 열립니다.
내년에 자아가 강해지며 미칠이가 된다는데 6살까지는 정말정말 행복제조기에요.
짜부리
+ 25/09/20 09:32
수정 아이콘
저는 4일째인데... 앞으로 기대되고 두렵습니다.
서리비님도 건강하게 잘 키우길 바랍니다!
오지의
+ 25/09/20 10:37
수정 아이콘
부모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아기는 부모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저도 애들이 아직 어려서 이렇게 느낄지도..? 더 크면 다를지도..??)
내가 뭐 해줬다고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나, 아이에게 감동받을 때가 있어요.
감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부작
+ 25/09/20 10:43
수정 아이콘
앞으로 뭉클하고 행복한 순간 많으실거에요
아테스형
+ 25/09/20 10:46
수정 아이콘
저도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점은 키운정이 대단하다는 거 네요. 
키우다보네 처음엔 예쁘지않은 이 생명체가 어느새 내 옆에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내가 주는 사랑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매일 실수하고 잘못하지만 아이는 항상 나를 용서하고 나만 의지한다는 거..
감사하고도 행복하지만 때론 무섭기도 합니다. 내가 아빠라고? 내가 이 아이의 부모라고?
모든 육아인들 파이팅입니다. 예전엔 그리 좋아던 주말인데 이젠 벅찬 주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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