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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06 23:24:53
Name 밥과글
Subject [일반] 인생은 터프하게 (수정됨)
어떤 통계에서 보기를, 가난할수록 인터넷에 몰입하는 시간이 길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없이 살아서 그런건지,  나름 밀레니엄 세대로서 컴퓨터를 끼고 살아서 그런건지 모르겠으나 한평생 인터넷으로 많은 군상들을 접하며 살았습니다.

와중에 잊혀지지 않는 몇몇 사연들이 있는데 무슨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커다란 비극보다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누구나 스쳐 지나갔을 법한 사건들이 마음에 많이 박혔어요

요즘도 종종 생각나는 커뮤니티 글이 3개 있는데,  하나는 아이돌에 빠져사는 어린 여동생이 꼴보기 싫다고  동생이 여지껏 모은 굿즈에 낙서를 해버린 사건이고,  두 번째는 가난한 형편에도 월급을 쪼개 사정이 딱한 아이를 후원하던 여성이, 고급 외투를 요구하는 아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사건, 마지막 하나는 '평생 후회되는 일' 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던 헬스장 오지랖 글입니다.

단순히 신체 건강이나 미용 문제를 떠나,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못하고 있다고 추측 되는 아주 뚱뚱한 초보 회원을 묘사하며,  제로 음료수나 마시면서 그렇게 느리게 걸으면 운동이 되겠냐고 비아냥거린 것을 평생 후회한다는 내용의 참회글 이었습니다.  비아냥을 들은 초보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간 후 두 번 다시 보이지 않았다고.  운동하면서 그렇게 남한테 간섭한 적이 없는데 너무 후회된다고.

뚱뚱한 회원의 사연이 거의 묘사되지 않은 글이었음에도, 그 회원이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쥐어짜냈을  용기와,  막말에 상처 받았을 마음이 선명하게 그려졌는지 글쓴이를 욕하거나 통탄을 금치 못하는 반응이 아주 많았습니다.  글쓴이가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거나 뚜렷한 욕설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행한 삶을 살던 청년이 가까스로 쥐어짜낸 용기, 스스로 인생을 바꾸어낼 기회가 무심하게 박살나는 순간이었음을 절절히 공감했던 탓이겠죠.  

평생 운동하면서 그래본 적이 없는데 그 날 대체 그 뚱뚱한 사람에게 왜 신경질을 부렸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된다고 넉 놓은 듯 말하는 그 글쓴이를 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 글쓴이가 그냥 성격이 못된 거라고, 약자를 보니 찰나에 인격이 드러난 거라고 매도하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온 경험과 주변을 돌아볼수록 그 글쓴이를 마냥 비난할 수가 없어요.  애초부터 큰 잘못이라 생각하고 커다란 후회를 담아 쓴 참회글이기도 했고.

우리는 살면서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 순간을 한 번쯤 마주하게 됩니다.  사춘기 때 부모나 친구에게 벌컥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고,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아랫 사람에게 투사하기도 합니다.  전 애인에게 받았던 상처를 현재 연인을 휘두르는 것으로 보상 받으려는 사람도 많지요

바보 눈에는 바보만 보인다는 말이 사사하는 바와 같이, 남들이 다 나랑 똑같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니 타고 나길 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갖고 태어나 남에게 큰소리 한 번 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생토록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도록 수양해야 하고 타인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마치 자식 키우는 부모가 마음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아이의 사춘기를 맞이 하듯이, 배낭 여행을 꿈꾸는 청년이라면 응당 더러운 화장실과 비포장 도로를 예상해야 하듯이,  개 키우는 견주라면 한 번쯤 개에게 물릴 각오를 해야 하듯이.

사람은 사람에게 물릴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상처받고 헬스장을 떠나버린 사연 속 청년을,  거친 세상에 좌절한 사람들을 나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잊지 못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절절한 후회를 간직하는,  절대로 악인이라 할 수 없는 사람조차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것이 인간이라면

결국 우리가 나아갈 방법은 서로의 그런 '실수'를 감내하면서 걷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는 절절히 반성하고,  남의 실수는 터프하게 받아넘기려 노력하면서요

어떤 분야든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방어력이 한껏 내려가고 맙니다.  '신서유기' 라는 예능을 보는데 천하장사 강호동도 복잡한 이름의 피자 메뉴들을 처음 주문해본다면서 벌벌 떨더라고요.  체면도 있는데 말실수 할까봐 두려웠던 것이겠죠

사연 속의 뚱뚱한 청년처럼 용기 내어 첫걸음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응당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가능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결국 상처 받는 날도 닥쳐오고 말테니,  미리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지랄하는 사람도 있을건데,  신경 쓰지 마세요"

만약 그 청년도 꿋꿋히 계속 운동을 했다면 후회하는 글쓴이에게 직접 사과를 들을 기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청년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독려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게 안타까워요

사람 사이에 부대껴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심한 상처로 우울증을 앓으면,  받은 상처를 스스로 계속 후벼파는 버릇이 생깁니다.  제가 언급한 사연은 작성자가 한껏 후회한다는 사실을 느꼈으니까 이해라도 하는 것이지,  남에게 상처주고 감정 배설하고 반성이라고는 안하는 인간도 많죠

'유년기의 끝' 이니, '서드 임팩트'니 다 그렇게 오래도록 회자되는 것이겠지요

외계인도 사도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우리는 계속 서로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먼저 맞아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면서.  아디다스 산모기에게 물어 뜯겨가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처럼. 한편으로 사람 죽이는 말라리아 모기를 말살시킬 궁리도 해가면서요

글을 쓰는 도중에 자꾸 '록키 발보아' 가 생각나서 유튜브를 찾아봤는데 링크는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자신을 믿고 인생을 터프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훌륭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을 나약한 핑계쟁이라고 훈계하는 텍스트로 오독하기 좋더라고요.  사실 사랑하는 아들을 독려하기 위한 말인데.

저는 복수를 열렬히 긍정하는 사람이지만,  이해와 용서는 복수보다 쉽게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입니다.  그 글쓴이가 절절히 후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연 속 뚱뚱한 청년도 마음을 회복했을 거에요.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꼭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면 오히려 인생을 터프하게 사는 것이 더 쉬워질 것 같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가족, 연인, 친구, 나 자신에게 상처 받은 모든 분들께.

터프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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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7 00:0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봤습니다. 역시 PGR엔 고수님들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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