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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14 08:32:16
Name 언뜻 유재석
Subject [일반] [잡담] 버스 정류장...

눈 떠 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상황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으니 어디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마냥 버스 정류장에 앉아 지나가는 버스 수십 대를 보고만 있었다.

『아, 저거 탔어야 하나?』 『아 저거 타면 되나?』

라고 생각하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앉았다 만 반복하며 셀 수 없는 많은 버스를 지나 보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눈 떠보니 버스 정류장이었으니까 말이다.







7년전 어느 봄날, 내가 있던 버스 정류장에 한 여자가 내 옆에 와 앉았다. 하늘색 셔츠를 입은...



그녀도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나와 비슷하게 몇 대를 지나쳐 보냈다. 저분도 목적지를 모르시나...

기다리는 것이 나처럼 퍽 무료해 보여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그녀는 인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그렇게 몇 마디 주고 받던 것이

재밌어져 버스가 휘휘 지나 가는 건 이제 둘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여전히 우리는 재밌었고 서로에 대해 많은 걸 공유하고 알게 되었다.



목적지가 생각난 건 그 때였다.


『코드가 맞는 사람과 평범하지만 화목한 가정 꾸리기』


맞네, 나 저기로 가려고 한거였네 라고 퍼뜩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그녀도 자기 목적지가 그곳이라고 했다. 그럼 같이 가자고 했다.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부랴부랴 어떤 버스가 그곳을 가는지 알아 봤다. 몇 정거장 가야 하는지, 요금은 얼마인지, 환승이 있는지,

어떤 버스가 돌아가고 어떤 버스가 빨리 가는지 등등.. 우리 둘은 서로 찾은 버스 정보를 같이 공유했다.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그럼 다 된 건가요? 그 버스 오면 놓치지 않고 타면 되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2025년의 여름, 우리 정류장 앞 신호등에 멈춘 버스를 보았다.


저걸 타면 되겠다 하고 둘은 버스 정류장에서 일어났다.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신호가 바뀌었는데 왜인지 출발하지 않던 버스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내 유턴을 해 왔던 길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녀가 엉엉 울었다.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저렇게 가버리는 건 무슨 경우냐며. 나도 눈물이 났지만 그녀를 달래는데 집중했다.



토닥이며 말해 주었다. 우리 이제 무슨 버스 타면 되는지 알았잖아요. 몇 정거장 가는지, 요금 얼마인지, 어디서 환승해야 하는지

다 찾아 봤잖아요. 버스 또 올거예요. 오면 놓치지 말고 탑시다. 또 돌리려고 하면 내가 뛰어가서 꼭 잡을게요 라고...


꼭 잡아줄거지요? 라고 그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물론이죠. 꼭 같이 타요 라고 대답해 주었다.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2025년 8월 9일, 버스가 유턴했던, 서로에게  참 가혹한 하루를 견뎌낸 것을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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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25/08/14 08:39
수정 아이콘
전세 대출? 아파트 청약? 상견례? 아이? 뭘까요 궁금하네요 아 어쩌면 아이 일 수도 있겠군요 ㅜㅜ 힘내시길요 

글 잘 읽었습니다
25/08/14 08:46
수정 아이콘
금방 다음 버스가 올 겁니다. 그 버스를 타고 가시는 길도, 설령 잠시 손을 놓더라도, 여유가 생겨서 문득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더라도, 함께 간다면 틀림없이 행복할 겁니다. 크게 보면 모두 행복의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혜정은준은찬아빠
25/08/14 08:46
수정 아이콘
두 손 꼭 잡고, 서로 힘내세요!!
25/08/14 09:40
수정 아이콘
제 경우에도 버스가 우회전 좌회전 하고 유턴하고, 그러면서 절망하고 낙담하고 눈물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기다렸던 버스의 코스대로 가지도 못했고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했지만, 함께 좌절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꼭 잡은 두 손만은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삶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두 손을 함께 잡고 이겨내리라는 믿음은 더 강해졌어요. 유재석님의 삶이 더 밝고 따뜻해지기를 기원합니다.
파고들어라
25/08/14 10:24
수정 아이콘
인셉션의 대사가 생각나네요.
"당신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당신을 멀리 데려다줄 기차를, 원하는 데로 데려다줄 건 알지만 그게 어디인지는 몰라. 하지만 그건 상관없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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