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5/06/30 22:27:56
Name 천둥
Subject [일반] 게임 좋아하는 우리 누나 이야기

 

야근중에 일하기가 너무 싫어서 끄적끄적 써보는 "게임 좋아하는 우리 누나 이야기"입니다.

편의상 존대는 생략하겠습니다.




# 배경 1

누나와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친 사촌 관계다

나의 큰아버지의 딸인 누나와 아버지의 아들인 나는 생일이 거진 1년 정도 차이나는 연년생 사촌이다.

누나는 어릴때도, 커서도 보통 나를 지칭할땐 '사촌동생'이라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사촌은 빼고 누나라 늘상 부른다.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도 나랑 대화하다보면 이놈이 외동인건지 둘째인건지 헷갈려해서 한번씩 정정하곤 한다.

외동이지만 사촌누나랑 어릴때부터 같이 커서 연년생 동생의 파이팅이 생겼다며 :)




# 배경 2

누나와 난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먼 과거에서부터 월 1번 이상은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집과 할머니집은 1시간 이상의 거리임에도 그시절 친족간의 문화가 대부분 그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 어머니는 월 1회 이상 할머니를 찾아 뵈었고, 나는 항상 그날을 기다리며 도착하자마자 누나에게 신나게 뛰어갔다.

1살이 적지만 우량아인 나와 1살이 많지만 동네에서 가장 왜소한 누나의 언밸런스한 조합은 영화의 기승전결처럼 늘 반가움 > 즐거움 > 상호폭력 > 화해로 정리되곤 했지만 그럼에도 외동인 둘은 만나면 늘 즐거이 놀았다.

중3이 되던 해 집안 사정으로 나는 할머니댁에 2년 가까이 맡겨지게 되었고 그 시절 극한의 사춘기를 보내던 누나와의 2년은 지금도 누나에게는 나에 대한 조금의 미안함으로 나에게는 누나, 그리고 게임에 대한 이색적인 추억으로 남아있다.




# 누나의 첫 게임

정확히 누나의 첫게임은 중학교 1학년땐가... 1시간 떨어진 우리집에 잠시 왔을때 내 컴퓨터로 2시간 눈도 안떼고 했던 프린세스 메이커2였을거다.


그 짧은 시간에도 주변 소리도 안들릴 정도로 집중해서 딸(?)을 키워내던 누나를 보며 역시 전교1등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이 후 누나는 집에 돌아갔기에 프메2를 다시할일은 없었다.

중3 할머니댁에 내가 동거하게 되며 내 컴퓨터도 자연히 누나 방에 배치되었다(내방은 따로 없었던지라)

보통 오후에 내가 게임을 하고 누나는 저녁에 처음 갖게된 컴퓨터를 즐거이 만져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누나의 공식적인 첫 게임은 피지알에서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창세기전2...였다.

이미 한번 클리어한 게임이었지만 할게임이 없어서 사키스키로 전장을 누비던 내 옆에서 슬쩍 슬쩍 구경하더니, 누가 사춘기 여중딩 아니랠까봐 일러스트가 마음에 든다며 본인이 해보겠다고 당당히 나섰다.

누나는 그날부터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밥먹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창세기전을 진행해 나갔다.

전교1등이 시험공부 해야하는날까지 할 정도였으면 말 다한거다. 몇번의 위기(대형 공성전에서 에러로 튕기거나, 클리어 직전에 암살자에게 살 맞고 다시 한다거나....) 끝에 엔딩에 다다르는 누나를 보며 특히 시나리오 하나하나에 몰입하는걸 보며 여자들은 게임도 드라마 보듯이 하는구나..라고 느꼈다.


누나는 내가 예상했던 폭포수 눈물 시점을 앞당기며 흑태자를 구원하는 칼스가 나타날때부터(이런게 BL 느낌인가?) 울기 시작하더니 엔딩에서는 통곡과 엔딩곡에서는 회한이 담긴 한숨을 쉬며 게임을 클리어하곤 다음날까지 감정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 누나의 두번째 게임

창세기전2 이 후 한동안 휴식기를 거친 후 누나는 두번째 게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출시된 '서풍의 광시곡'을 누나에게 추천했으나 누나는 내 게임 플레이를 보더니 이런 극한의 길찾기와 인카운트 확률게임을 할 수 없다며... 옆에서 시청만 하겠다 선언 후 역시 시라노의 죽음에 나대신 울었다.



그러던 어느날, CD집 한켠에 미뤄놨던 디아블로(2 아님, 1)를 무심결에 넣고 플레이하던 나를 보더니...

이게 뭐냐, 뭐가 이렇게 잔인하냐 저 무서운 멧돼지는 뭐냐(부처...) 등등 질문을 마구 던지더니 나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창세기전에서의 맵을 쓸어버리던 전체마법을 경험해서인지 마법사로 시작한 누나의 디아블로 탐험은 그 이 후 몇달간 이어지기 시작했다.


베틀넷도 제대로 되지 않던 시기지만 누나와 나는 아이템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나이트메어, 헬 난이도는 어떻게 클리어해야하는건지

확장팩 헬파이어에 저 젖소는 뭔지, 아드리아는 예쁜지 안예쁜지는 격렬하게 토론하며 사춘기의 한 때를 보냈다.


아. 그렇다고 마냥 즐겁기만 한건 아니었다.

누나에게 장난친다며 누나 캐릭터에 Delete 버튼을 눌렀다 땠다 하다가.... 결국 눌러버렸을때

나는 현세대 게이머보다 약 20년 먼저 릴리트를 만났다.




# 누나의 소소했던 게임

누나는 그 이 후 스타만 주구장창 파기 시작했던 나와 달리 다양한 게임을 섭렵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특히 둘이 돈 모아(실제론 거의 내돈이었지만) 사던 게임잡지의 부록 게임을 나보다 더 열심히하며 게이머의 본분을 다했는데, 대략 생각나는 게임들은 아래와 같다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에뮬레이터 게임

오락실 게임의 에뮬레이터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주인공은 맵을 색칠하고 악당은 색을 지우면서 쫓고 쫓는 게임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누나는 이 게임을 우리 할머니가 매일 아침 화투패 맞추는 포스로 하교 후 한두게임씩 하며 하루를 정리했다.



- 세틀러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땅따먹기 게임

잡지 부록으로 나온걸 나는 받자마자 CD집에 꽂아놨는데 빼서 한두번 해보더니 누나는 주말마다 땅따먹기로 하루를 보냈다.

쪼끄만 애들이 시키는대로 우루루 가서 현실에는 없는 내땅을 만들어주는게 좋대나...


- 그 외 소소한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내가 극혐하는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 누나에겐 별미였던듯 싶다.

여자들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는걸 연애시뮬레이션을 입벌리고 하던 누나를 보며 난 깨달았다.





-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

창빠였던 나는 당연 템페스트를 구매했다.

그런데.... 내 극혐포인트였던 연애시뮬레이션 냄새에 기존의 창세기전 만큼의 클리어 속도가 나지 않기 시작했고

그 사이 누나는 PC를 차지하더니 이건 하렘이야! 라며 엄청난 속도로 게임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보다 더 빨리 엔딩을 맞이하고 허무한 결과에 아쉬워했다.




# 누나의 인생게임

격동의 남매 게이머 시기가 지나고 둘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고, 약 2년간의 할머니댁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는 다시 부모님을 따라 나오게 되었다.

자연스레 PC는 나를 따라왔고 누나의 게이머 생활은 그 시기 잠시 멈추었던걸로 기억한다.


금새 고3을 지나 스무살이 되며 나는 스타만 주구장창 파는 PC방 죽돌이가 되었고

누나는 간간히 그 시절 유행하기 시작한 MMORPG들을 건드려보는 여성게이머가 되었다.

나중에 듣기로 꾸준히 PC방을 다니며 이게임 저게임 많이 손대봤다고 한다.


그 시기 서로 바빠 연락이 잦진 않았는데, 누나는 게임 내에서도 밖에서도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어릴때는 안경쓴 범생이였던 누나였지만 스무살 이 후 적당한 튜닝, 메이크업 이 후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착한 성격에 조용한 고양이과 성향(말투나 행동이.... 사투리쓰는 아이유 느낌이었다. 오해하지 말자 느낌만)이 주변 남자들에게 꽤 인기였던듯 하고 거기다 게임까지 좋아하니 금상첨화


이 챕터의 제목인 누나의 '인생게임'은 문자 그대로 인생게임인데, 적당히 풀어보자면

누나는 스무살 이 후 꾸준히 연애를 했던걸로 기억한다. 

여러 스타일의 남자들과 적당히 밀당하며 딱 예쁜 20대의 연애를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26~7이었나? 그 시기 조그만 옷가게를 시작하며 사귀던 남자친구 역시 누나와 함께 게임하는 재미를 아는 남자였다 한다.



어느날 남자친구의 먼 지인이 PC방을 오픈하였고 이 커플은 그 시기 출시한지 오래되지 않은 '아이온'이라는 게임을 같이 시작해보자며 그 피시방에 들렀다 한다.

그 시기 PC방 데이트의 국룰은 커플석에 앉아 게임과 현실 모두에서 커플의 몸과 마음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오픈 PC방의 꽉찬 손님에 부득이 둘은 한자리를 건너 앉게 되었다.

다른 PC방을 가거나 다음에 하자고도 할만한데 역시 게이머들이란...


둘은 같은 서버에 잘생기고 예쁜 캐릭터를 하나씩 생성 후 게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보들이 뭘 알겠는가... 어디로 가야할지, 퀘스트는 어떻게 할지, 몹을 뭘 잡을지 등등을 둘은 웅성웅성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 대화가 길어질때쯤 둘 사이에 끼어 앉은 한명의 불쌍한 게이머 아저씨는 참다못해 이야기 했다.

"아..거 참...제가 쩔해드릴께요, 같이 해요"


그랬다, 그 불쌍한 게이머 아저씨는 마침 아이온에서 꽤 레벨이 높은 고수! 였고

이 커플과 나이대도 비슷하여 그자리에서 도원결의 후 며칠간 열심히 둘의 레벨업을 도왔다고 한다.


남자친구와 누나는 예상보다 빠른 레벨업과 불쌍한 게이머 아저씨의 소개로 길드 생활도 하며 아이온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

.

.

.

.


그리고 누나는 그 불쌍한 한 게이머 아저씨와 결혼했다.





# 마무리

이제 누나는 마흔이 넘어 아들 둘의 엄마요, 꽤 큰 옷가게의 주인이 되어 게이머의 생활은 한켠에 미뤄둔지 꽤 되었다.

그래도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저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흑태자 얼빠 이야기, 디아블로 뒤태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되살리곤 한다.

누나는 그 시절 내 덕에 게임으로 스트레스 잘 풀었다며 그래도 디아블로 캐삭빵은 너무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1751289715598.jpg

1751289755171.jpg



그리고 나는 PC방에서 승리자가 되어 아내의 셔터맨이 된 매형이 제일 부럽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Janzisuka
25/06/30 22:32
수정 아이콘
>.</ 좋네요!
25/06/30 22:50
수정 아이콘
여윽시 창세기전 글에는 크크크
감사합니다
25/06/30 22:40
수정 아이콘
불쌍한 게이머 아저씨 알 (1강)
-> SSS급 행복한 게이머 아저씨 (10강)
강화성공!
25/06/30 22:50
수정 아이콘
매형 요즘도 겜하든데 ㅠㅜ
김홍기
25/06/30 23:07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어요
서린언니
25/06/30 23:11
수정 아이콘
저도 불쌍한 게이머인데 크크크 재미있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일반] [공지]자게 운영위 현황 및 정치카테고리 관련 안내 드립니다. + 선거게시판 오픈 안내 [29] jjohny=쿠마 25/03/16 25449 18
공지 [정치]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306322 0
공지 [일반]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60009 10
공지 [일반]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63569 4
104422 [일반]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일상 17 [1] Poe617 25/07/01 617 6
104421 [일반] 게임 좋아하는 우리 누나 이야기 [6] 천둥1814 25/06/30 1814 10
104420 [일반] 팀장이란 무엇이길래 : 공무원의 직급과 직위 [34] 글곰4279 25/06/30 4279 13
104419 [일반] 공리와 포화 [7] 번개맞은씨앗2019 25/06/30 2019 0
104418 [일반] [스포 유의] '오징어게임3'에서 보이는 '데블스플랜' [55] 슈퍼잡초맨6120 25/06/30 6120 7
104417 [일반] 만들어진 전통 - 성골 [18] 눈시4945 25/06/30 4945 37
104415 [일반] [경매이론2] 선택의 기술 [2] 오디세우스2941 25/06/29 2941 2
104414 [일반] WWF의 추억. 마초맨과 엘리자베스 [17] 빵pro점쟁이3870 25/06/29 3870 4
104413 [일반] 국내 최고령 사형수 옥중 사망…'보성 어부 연쇄 살인 사건' [81] 핑크솔져10475 25/06/29 10475 1
104412 [일반] 서유럽 지도를 걸레짝으로 만든 원인, 중프랑크 왕국 [5] 계층방정5684 25/06/29 5684 20
104411 [일반] 2022-2025 (미장 중심의) 주식 투자 후기 [17] 오징어개임3541 25/06/29 3541 1
104410 [일반] 불행은 행복의 부재. (일상글) [4] aDayInTheLife2602 25/06/28 2602 4
104409 [일반]  [경매이론1] 복잡성의 시대와 자유경쟁 시장의 변화 [1] 오디세우스2165 25/06/28 2165 6
104408 [일반] [잡담] 기쁜데 슬프고, 좋은데 시무룩해지는 그런 느낌 [6] 언뜻 유재석2692 25/06/28 2692 8
104406 [일반] 이제 좀 있으면 우리 조카 생일입니다 [8] 공기청정기2289 25/06/28 2289 1
104405 [일반] 오겜3 간단 후기(스포) [32] 하이퍼나이프5014 25/06/28 5014 5
104404 [일반] 왜 영웅은 여장남자 사이코패스일까? [5] 식별5328 25/06/28 5328 9
104402 [일반] 열심히 일하고 저축만하면 "가난" 해지는 돈이 고장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52] SOXL10769 25/06/27 10769 40
104401 [일반] 미국지수 투자 후기 [34] Chandler7247 25/06/27 7247 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