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요약경시제 유현은 유연과 유수의 팔촌 형제로, 젊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모은 빈객이 법을 어겨 외가가 있는 평림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녹림군의 일당인 평림병에 가담했고, 녹림군의 수뇌부가 그를 ‘고쳐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인 경시장군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그는 유연을 제외하면 유일한 녹림군의 유씨 장군이 되었다.
황제가 되다
【23년 2월 · 완성 포위전】
한나라를 재건한다는 목표로 일어난 용릉병의 지도자 유연에 호응해 모인 녹림은 신나라의 남양태수 진부를 비수 서쪽의 전투에서 무찔렀다. 그러나 이는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이었다. 평림병 소속으로 있던 유현이 경시장군으로 추대되어, 용릉병을 이끄는 팔촌 형제 유연과 대립하는 시초가 된 것이다.
곧, 녹림군은 한나라의 새 황제를 세우는 논의에 들어갔다. 그 후보로 오른 것이 주천대장군 유연과 유현 본인이었다. 유연은 하강병의 지도자 왕상(王常)과 남양군의 호걸들의 지지를 받았고, 유현은 주유(朱鮪) 등 신시병과 평림병의 지지를 받았다.
유현이 지지를 받은 이유는 《후한서》와 후한의 관찬 사서인 《동관한기》에서 서로 다르게 기술한다. 《후한서》 유현 본인의 열전에는 나오지 않으나, 경쟁자 유연의 열전에서는 유현이 나약하므로 평림병과 신시병이 자기 뜻대로 통제하기 쉽다고 여겨 유현을 지지했다고 한다. 《동관한기》에서는 평림병과 신시병이 한나라 병사의 근원이었고, 그 장수들이 유현과 친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이유 모두 타당한 추론으로 보인다. 유현은 평림병 출신이므로, 평림병이 유현을 지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시병은 남양군 수현을 공격할 당시에 평림병의 지원을 받은 전례가 있었으므로, 용릉병보다 평림병에 더 우호적이었다. 이처럼 두 세력이 모두 유현과 친연성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황제 옹립 과정에서 유연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만, 유현의 성품을 언급하지 않은 《동관한기》에서도 유현은 전면에 나오지 않고 유현을 지지하는 녹림 대장들만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유현 본인의 성품이 나약한지 아닌지를 떠나, 유현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남들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유현은 자신의 운명에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용릉병과 신시·평림병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황제로 선택되었다.
《동관한기》는 《후한서》와 또 다른 차이를 보인다. 신시병과 평림병의 주도로 유현이 선택된 후, 《후한서》에서는 유연이 아직 왕망이 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제가 아니라 왕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동관한기》에서는 같은 주장을 신시병의 마무(馬武)와 왕광(王匡)이 한 것으로 나온다.
《동관한기》는 평림병과 신시병 중에서도 유현을 황제로 세우는 데에 반대하고 유연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평림병과 신시병의 여론은 찬성으로 기울어 있었고 이들에게 녹림의 의견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광은 신시병을 일으킨 두 지도자 중 한 명인데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만큼 신시병과 평림병 대장들과 병사들의 결의는 견고했다. 장앙이 칼을 땅에 꽂아 위압적으로 논의를 중지시킨 장면은, 결코 개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평림병과 신시병, 곧 녹림의 중론이었다.
유현은, 이러한 거대한 흐름에 떠내려갔다.
불안한 즉위식
후한 말 무씨사(武氏祠)에 그려진 제선왕의 통천관. 통천관은 한나라 시대 황제의 관으로 쓰였다.
【23년 3월 · 육수 강가】
음력 초하루인 3월 11일,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미 녹림이 장악하고 있는, 남양군의 중심지 완을 지나 흘러내려오는 육수(淯水) 위 모래톱에 단을 세우고 군대를 열병한 뒤 대회를 열었다. 예법에 능한 알자 여식(呂植)이 모든 절차를 준비했다.
유현이 따로 할 일은 없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모든 예식을 진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라는 자리의 무게는 감히 유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단을 오르는 걸음마다, 유현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온 몸은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손과 팔도 제멋대로 움직였다. 간신히 황제의 제관인 통천관(通天冠)을 받아서 머리에 쓰고, 단 위에 마련된 옥좌에 앉았다. 옥좌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황제가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그를 향해 온 병사들과 장수들이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한나라가 다시 들어섰다는 기쁨에 가득 찬 무리들. 그러나 유현을 옹립하는 데 앞장선 녹림의 제장들은,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단을 내려오는 유현을 보며 다른 마음을 품고 기뻐했다. 그들이 원하는 황제가 세워진 것이었다.
다만 유현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주유에게는, 이런 유현의 모습은 근심거리였을 것이다.
유현은 전국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자신의 장군 칭호에서 따서 “경시”로 정했다. 나라를 고쳐 다시 새롭게 한다는 뜻의 경시. 이 단어는 결국 나중에 시호를 받지 못한 유현의 칭호가 되었다. 이렇게 유현을 황제로 새로 세운 나라는 유현의 이름을 따서 현한(玄漢), 또는 연호를 따서 경시정권(更始政權)이라 한다.
유현은 즉위와 동시에 공신 세력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아래 목록은 그 핵심 인선이다.[1]
원로직
국삼로(國三老): 유량 - 용릉병 유연 숙부
정국상공(定國上公): 왕광 - 신시병 창건자
성국상공(成國上公): 왕봉(王鳳) - 신시병 창건자
삼공
대사마(大司馬): 주유 - 신시병 대장
대사도(大司徒): 유연 - 용릉병 대장
대사공(大司空): 진목(陳牧) - 평림병 대장
구경·열경
정위(廷尉): 왕상 - 하강병 대장
위위(衛尉): 장앙(張卬) - 하강병 대장
수형도위(水衡都尉): 성단(成丹) - 하강병 대장
집금오(執金吾): 요담(廖湛) - 평림병 대장
광록훈(光祿勳): 유사(劉賜) - 유현 사촌
태상(太常): 유수 - 유연 동생
상서(尙書): 호은(胡殷) - 출신 불명
관직으로는 하강병이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고, 신시병·평림병·용릉병이 고위 관직을 나눠가졌다. 삼공은 이들 셋이 한 명씩 배출했고, 국가 원로로는 녹림의 창시자와 용릉절후 가문의 원로를 추대했다. 구경과 열경은 하강병이 셋, 용릉병이 둘, 평림병이 하나다.
얼핏 보면 균형이 맞춰진 듯하나, 황제를 세울 때부터 신시병과 평림병이 손을 잡고 용릉병을 따돌렸으므로 실제로는 신시병과 평림병은 하나의 세력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 세워진 한나라는 신시병과 평림병이 주도하는 체제였다.
유연을 죽이지 못하다【23년 7월 · 완성 포위전】
그럼에도 한나라의 지휘권은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관직인 대사마에 오른 주유가 아니라, 대사도인 유연이 여전히 쥐고 있었다. 유연은 계속 완성을 포위하며 남양군의 여러 현들을 공략했다. 한편 유연은 완성 포위군에 물자를 대기 위해 군대를 나눠 인근 영천군의 여러 현들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 별동대의 장수들인 유수·왕봉·왕상·종조(宗佻)·이일(李軼) 등을 이끈 인물 역시 유연의 동생인 유수였다.
7월 4일(음력 5월 28일), 완성을 지킨 신나라의 잠팽이 유연에게 투항해 완성이 함락되었고, 3일 후인 7월 7일(음력 6월 1일)에는 영천군 방면 별동대를 지휘하는 유수가 10만을 일컫는 신군을 격파하고 곤양성을 구원했다. 이렇게 유연 형제가 앞장서서 신나라를 물리치는 동안, 경시제가 한 일은 그저 음력 6월에 유연이 함락한 완성을 새로운 한나라의 임시 수도로 선포하고, 종실과 제장들 100여 명을 일거에 열후로 봉한 것이었다. 새 한나라에서 경시제는 그저 공신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렇게 존재감이 없던 황제 경시제는 유연 형제의 위명이 높아지자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바로 제위 경쟁자였던 유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23년 7월 이후 · 완성에 입성한 경시제】
지금까지 경시제의 행적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 진행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경시제가 백승(유연의 자)의 위명을 꺼려 마침내 그를 죽였다”라는 《후한서》 유현전의 기록만으로 경시제가 이 사건의 주체라고 보는 것은 섣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시제가 유연을 시기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경시제는 황제가 되었지만 군을 지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경쟁자인 유연과 그 동생 유수만이 활약하고 있었다. 경시제가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남양의 호걸들이 실망했다는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시제는 자신이 위신 없는 황제이고 유연에게는 자신에게는 없는 바로 그것이 있음을 통감했을 것이다.
《후한서》 제무왕연전에서는 경시제와 그 신하들이 마음속으로 백승을 편안히 여기지 못해 죽이기로 계획했다고 전한다. 뒤집어 보면, 새 한나라의 공신 세력, 즉 구 녹림 제장들의 의지가 바로 경시제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경시제는 어디까지나 이들과의 친분만으로, 또는 이들의 권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나약한 성품 때문에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그런 다른 공신들이 보기에는, 유연은 자신들의 자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나라를 부흥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였다. 그렇기에, 공신들에게 유연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경시제 곁에 새로운 인물들이 떠올랐다. 바로 이일과 주유다.
이일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경시제의 제장들에게 아첨한 인물이고, 주유는 진심으로 경시제를 명실상부한 황제로 모시는 것이 목표인 인물로 보인다. 훗날 주유는 공신들에게 작위를 쉽게 내리는 경시제에게 간언하다가 도리어 경시제의 눈 밖에 나기도 한 적도 있다.
물론 유연을 죽이는 데 가담한 자들은 이들만이 아닌 경시제의 뭇 신하들로, 평림병과 신시병에 용릉병의 이일이나 하강병의 장앙 등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한 사람들이 대거 가담했을 것이다.
전국시대 옥결. 결(玦)은 도넛 모양인 벽(璧)과 비슷하나 한쪽이 끊겨 있는 형태를 가리킨다. 결단을 나타내는 신호로도 쓰였다.
【23년 7월 이후 · 완성 · 첫 암살 계획】
(후한서 제무왕연전을 각색, 대사·표정은 작가 재구)
첫 암살 계획에 따르면, 제장들을 모아 연 회의에서 경시제가 직접 유연의 칼을 받아서 유연을 무장 해제하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경시제는 우물쭈물하며 혼이 나간 듯이 유연의 보검을 구경할 뿐이었다. 경시제가 유연에게서 보검을 받아 들었으므로 무기를 지니지 못한 유연은 무방비 상태였다. 경시제는 단 한 마디만 하면 유연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한 채,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옷을 맡은 수의어사 신도건이 결단하라는 의미로 옥결(玉玦)을 바쳐 경시제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려 했다. 그러나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진 경시제는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경시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유연에게 보검을 돌려주었고,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공신들은 경시제가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세웠지만, 막상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문제에서도 단호하게 나오지 못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주유는 실망하지 않고, 경시제와 자신, 그리고 다른 공신들을 위해 다음 기회를 만들었다.
유연을 죽이다【23년 7월 이후 · 완성 · 둘째 암살 계획】
(후한서 제무왕연전을 각색, 대사·표정은 작가 재구)
사건은 용릉병의 장수 유직(劉稷)에서 비롯했다. 유직은 유연이 황제가 되지 못하자 실망한 인물 중 하나로, 경시제에게 불만을 품고 경시제가 그를 항위장군(抗威將軍)에 임명한 것을 거부했다. 주유는 유직을 빌미로 유연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후한서》 제무왕연전에서는 이때 수천 명의 병사들을 도열해 두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나약한 경시제가 전처럼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주유가 준비해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 보자.
경시제는 옥좌에 앉아 위엄 있게 병사들과 장수들을 굽어보았다. 모두 유연을 죽이는 데 동의한 장수들이었다. 그 앞에, 꽁꽁 묶인 유직이 던져졌다.
경시제는 준비된 무대에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유직! 감히 짐의 명을 거역하다니!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
고요해졌다. 주유와 이일 등 계획을 짠 모든 장수들은 긴장했다. 과연 유연이 함정에 빠질지 유직을 저버릴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미리 짠 대로 말을 하는 경시제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위용 있게 늘어선 병사들은 경시제의 흔들리는 마음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주유의 준비는 유효했다.
그때 유연이 입을 열어, 마침내 유직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주유와 이일은 서로 눈을 찡긋했다. 지금은 신도건이 옥결을 준 것처럼 말없이 경시제에게 신호하지 않아도 됐다.
“폐하, 사도는 감히 폐하에게 거스르는 자를 위하고 있나이다. 그도 반역자입니다. 유직과 함께 죽이셔야 합니다!”
주유와 이일의 말을 들은 경시제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마음이 떨리고 있었다. 과연 이런 이유로 팔촌 형제를 죽이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내가 주유와 이일을 믿어도 될까?’
그러나 공신들과 병사들 수천 명이 늘어선 공간에서, 경시제는 자신 안의 목소리 대신 그들의 위용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유연의 죽음. 그리고 유연이 죽으면, 경시제의 경쟁자도 없어진다. 경시제는 이날을 위해 외워 둔 마지막 말을 외쳤다.
“죽여라!”
아무도 유연을 위해 경시제를 달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주유 일당의 준비는 철저했고, 유연과 유직은 그대로 끌려나가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쳤다.
경시제는 떨리는 다리를 끝까지 억지로 누르며 앉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성품을 억누른 것이지,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뒤틀어서야, 황제는 사람 한 명을 겨우 죽일 수 있었다.
경시제는 죽은 유연 대신 광록훈 유사를 대사도로 세웠다. 유연 휘하에 속한 장교들과 병사들은 공신들이 서로 나눠가졌다. 그렇게 유연은 제거되었고, 경시제의 기반은 견고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경시제의 착각이었다. 경시제를 세운 사람들은 경시제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자신들의 권세를 부리고자 했다. 유연이 죽은 이상, 공신들은 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공신들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이 경시제에게는 없었다.
공신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유일한 자는 바로 유연이었다. 경시제가 손을 잡아야 할 대상은 공신들이 아니라 유연이었다. 유연의 충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면, 그가 공신들에게서 경시제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이 바로 냉혹한 권력의 이치였다.
이제는, 경시제와 그를 쥐고 흔들려는 공신들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볼 차례다.
요약유현은 녹림 수뇌부와의 친분과 주체성 없는 위치 때문에 유연을 밀쳐내고 한나라의 황제(경시제)가 되었다.
유연과 유수 형제가 각지에서 신나라를 무찌르고 위명이 높아지자, 경시제는 이를 견제한 공신들과 함께 유연을 죽였다. 이로 인해 경시제는 공신들의 허수아비로 남게 되었다.
연표23년 2월 10일(음력 1월 1일), 비수 서쪽의 전투에서 유연이 신군을 격파.
23년 2월 무렵(음력 1월), 유현이 경시장군이 됨.
23년 3월 11일(음력 2월 1일), 유현이 황제가 됨(경시제). 이후 공신들을 관직에 임명.
23년 7월 4일(음력 5월 28일), 유연이 완을 함락.
23년 7월 7일(음력 6월 1일), 유수, 곤양 전투에서 신군을 대파.
23년 7월 무렵(음력 6월), 경시제가 완으로 천도.
23년, 경시제가 유연을 죽임.
주석[1] 유현전에서는 유현이 황제가 되었을 때 임명한 관직은 삼공까지만 나온다. 구경과 열경에 해당하는 직책은 훗날 이들이 왕으로 책봉될 때의 칭호에서 나오며, 대부분 관직명+대장군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단은 수형대장군으로 언급되므로, 수형을 수형도위의 준말로 추론했다.
사진 출처그림 1. ChenDaoIsHere, “Tongtianguan (通天冠) depicted on Wu Family Shrines stone-relief”,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림 2. Snowyowls, “jude jue, unearthed in 1964 from Yinshanling M64 Guangxi”,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림 3. ChatGPT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