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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25 23:07:46
Name 한니발
Subject DAUM <5> 上
전편 링크

DAUM <1> 上
DAUM <1> 下
DAUM <2> 上
DAUM <2> 下
DAUM <3> 上
DAUM <3> 下
DAUM <4> 上
DAUM <4> 下



  DAUM <5>


  그 날도 비가 내렸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7월 21일, 울산 호반광장.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이었다. 바람도 궂었고, 아무래도 불안한 날씨였다. 이따금씩 비 걱정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0석이라던 자리는 어느 한 곳 비지 않고 모두 꽉꽉 들어찻다. 붉은색과 흰색의 막대 풍선들이 그득하니 파도를 이루어 넘실거렸다. 비 따위는 설령 내린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한 사람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빛 스타즈와 비오는 날의 결승.
  언제였더라.
  잠시 고민하려던 참에, 결승의 시작을 알리는 요란한 음악 - Daughtry의 What I Want - 가 터져나왔고, 나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2007년 7월 21일, DAUM 스타리그 2007 S1 결승전.
  이 날은, 결국 결승전 내내 비가 오지 않았다.





  대변록

「맑고 빛나는 날들은 강풍과 폭풍에 가려진다」
         - 표트르 크로포트킨, 『상호부조론』中


  김준영과 변형태가 DAUM 스타리그의 결승에서 만났을 무렵, GomTV MSL S2는 김택용 VS 송병구라는 대진을 확정지었다. 한쪽은 테저전, 다른 한쪽은  플플전. 종족 대진만 놓고 보자면 스타리그 쪽에 좀 더 구미가 당길 것인데, 사람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일단은 이것부터 보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온게임넷이 나한테 똥을 줬어! 택자도 마본좌도 이영호도 송병구도 없는 똥을 줬어!
  정말이지 최대한 온건한 표현을 써서 말하건대, 사람들의 관심이 MSL 결승 쪽에 좀 더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MSL의 대진은 MSL이 언제나 스스로를 칭해 온 그 이름 - 시대 최강자의 산실 - 에 걸맞은 것으로 여겨졌고, 그에 비한다면 온게임넷의 대진은 딱히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 한빛 스타즈가 5년만에 내놓은 결승 진출자? 거참, 오래도 걸렸구먼.
  - CJ의 2회 연속 스타리그 제패 도전? 허, 그러고 보니 그렇네.
  - 그런데, 그게 뭐?
  
  왜냐하면, 이 대결은 본좌론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개인리그는 본좌론 외에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좌란 사실 그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본좌란 시대를 소유한 정점, 그 이름 석 자로 그 시대 자체. 「닥치고 외워라 임 · 이 · 최 · 마 」, 그 어떤 반론도 허락지 않는 최강자의 계보이자 이 판의 역사. 이제 마재윤, 네 번째 본좌가 떨어졌으니 다섯 번째 본좌가 탄생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호사가들 사이에는 이미 김택용, 이영호, 송병구가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한편 마재윤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다섯 번째 본좌를 부정하며 아직 마재윤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그 힘싸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김준영이나 변형태의 이름을 입에 담는 이는 없었다.

  김준영, 데뷔리그 EVER 2005, 데뷔 후 다섯 번째 스타리그. 변형태, 데뷔리그 마찬가지로 EVER 2005, 데뷔 후 여섯 번째 스타리그. 지금까지 스타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모든 이들이 스타리그 데뷔 후 3회 참가 이내에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이번 두 사람은 퍽 이례적이다. 그리고 대개 이례적이라는 꼬리표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다섯 번, 여섯 번씩 스타리그의 문을 두들겼으면서 우승은커녕 결승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그 그릇이 본좌를 논할만한 것임은 아님을 능히 짐작케한다. 본좌로드, 그 치열한 레이스에 입장할 자격조차 갖지 못했음을 자연스레 인정하게 한다. 따라서 이 대결은「시대의 정점」을 가리는 싸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러므로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다고 여겨졌다. 본좌를 가리기에도 부족한 양대리그 결승 자리를 중견 게이머 둘한테 들려 보냈으니, 온게임넷이 자신들에게 분뇨를 투척했다 주장하는 이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다만 이 대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이유 또한 본좌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 사실 때문일 것이다. 지긋지긋한 본좌론 싸움 따위는 잠시 집어치고, 게임은 게임답게 즐겨보자 -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또한 적지 많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김준영 VS 변형태라는 대진은 썩 나쁘지 않은 매치업이었고, 특히 울산의 팬들에게 이번 결승은 흔치 않은 현장 관람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요소에 힘입어 당초의 예상과 달리 울산 호반광장 스타디움은 경기 시작 1시간 전인 6시, 5000석 매진을 달성해냈다.



  2007. 7. 21.
  DAUM 스타리그 2007 S1 결승전의 맵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경기 - 파이썬.
  2경기 - 몽환.
  3경기 - 히치하이커.
  4경기 - 몬티홀.
  5경기 - 파이썬.

  1, 5경기 몽환을 끼고 치러냈던 이영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는 테란에게 보다 할 만한 여지를 주는 구성이었다. 파이썬은 후에 국민맵으로 널리 사용되었을 만큼 무난하면서도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T:Z는 당시 20:18. 3경기 히치하이커 역시, 컨셉맵으로 다양한 게임 양상이 나왔음에도 T:Z 밸런스는 당시 13:12로 나쁘지 않았다.
  반면, 2경기 몽환은 이영호조차 넘지 못한 테란 절멸의 전장이다. 또한 4경기 몬티홀은 T:Z 12:8로 테란이 리드해가는 맵이다.
  즉 - 1, 3, 5경기는 밸런스형이고, 2, 4 경기는 하나씩 서로에게 웃어주는 맵. 절묘한 구성이랄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가장 일반적인 양상을 예상해보면 저그가 2경기는 갖고 테란이 4경기를 갖는다는 전제 하 1, 3, 5의 싸움이 승패를 가르는 형태가 될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2경기를 테란이 빼앗는다면 테란이 웃을 가능성이 급속도로 높아진다. 4경기를 저그가 빼앗는다면 저그가 웃을 가능성이 위로 치닫는다. 기회는 양쪽 모두에게 주어진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예상은 힘들었다. 선수들 또한 일반론만을 들어 자신들의 승부를 예측했는데, 김준영은 3:0 혹은 3:2 스코어를 생각하고 있다 밝혔고, 변형태는 3경기가 분수령이 될 것이라 의견을 내놓았다. 팽팽한 전통파 테저전 - 그런 게임이 되리라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단, 선수들의 이름을 가리고 본다면 말이다.
  맹습의 테란, 변형태.
  수성의 저그, 김준영.
  각 종족의 수식어가 뒤바뀌어 있다. 두 사람의 외형적 플레이 스타일은 종족 고유의 컨셉과는 정 극단에 위치해있다. 변형태는 게임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몰아치지만, 김준영은 후반의 거대한 스케일에 그 임팩트의 극점이 자리한다. 힘과 기술, 창과 방패. 가장 전형적이고 친숙한 양상이지만 그 주인들이 뒤바뀌었다는 미묘한 어레인지가 식상함을 덜어냈다.
  즐길 준비가 된 관중들이 있고, 그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으며, 공평무사한 전장과 흥미로운 매치업이 있다. 어떻게 봐도 나쁘지 않은 무대, 즐기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굳이 걸리는 것이 있다면 궂은 날씨겠지만 당장에 비가 쏟아지지 않는 이상에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남는 건 주인공들뿐이다.

  여기 김준영이 있다.
  여기 변형태가 있다.

  이윤열, 최연성, 마재윤. 지금 김준영과 변형태가 서 있는 곳에서는 한 때 영화를 자랑했던 그들이 아직 보였다. 저 멀리 어딘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을 그들의 모습이 어렴풋한 실루엣이나마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들 모습은 마재윤이 만들어놓은 이 사막 어디에서라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어디로 얼마나 가던 간에,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신기루처럼, 그들은 사막의 중앙 -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가진 곳에 덩그러니 서서 어렴풋한 형상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좌라는 이름을 가진 사막의 거상(巨像)이다. 사막을 헤매는 모든 이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고, 또 알아야만 하지만 정작 가까이에서 그들 모습을 바라보고 손 뻗어 더듬은 자들은 천에 하나도 되지 못하리라. 본좌론은 그들 이름을 시대의 이름으로 만들었고 그들을 사토에 묻힌 석상으로 만들었다.

  김택용, 이영호, 송병구. 지금 김준영과 변형태가 서 있는 곳에서는 주인 잃은 사막에 발을 들여놓는 그들이 막 보인다. 그들의 필두에 선 것은 프로토스의 혁명아로서, 그 손에는 이미 구세주의 피를 묻혔다. 지금 그들은 파도이지만. 곧 해일이 되고 홍수가 될 것이 자명했다. 마재윤의 사막을 끝내기 위한 시대의 물결로서 그들은 여기에 왔다. 사막의 주인들은 억척스럽게 밀려드는 물결에 맞서고 차오르는 물을 퍼낼 것이나 그들은 이 사막을 결국 바다로 만들고 말리라. 소금물에서 자라나는 풀꽃은 없다. 마재윤의 사막은 끝나겠지만, 낭만시대의 녹음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사막의 군주는 이제 기록 속의 신화가 될 것이고, 그 이전의 일들은 케케묵은 책들의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달아나야만 한다.

  사막과 바다, 그 사이, 여기 김준영이 있다.
  여기 변형태가 있다.

  그들이 여기서 소리 높여 노래한다면, 사막의 삭풍이 그들 노래를 싣고 영원을 헤매줄까.
  그들이 여기서 모래 위에 글을 남긴다면, 밀려드는 파도가 그 글만을 피해 사막을 삼켜줄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변형태는 박정석에게 졌다. 그 등을 쫓아 마재윤을 쓰러뜨렸고, 송병구를 떨어뜨렸다. 에로이카를 연주하고 투팩을 내찔렀다. 마재윤은 겁에 질려 달아났고, 송병구는 그의 영웅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변형태는 변방의 테란으로서 역사에 파란을 맹세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김준영은 세 번의 암습을 견뎌냈다. 진영수의 총탄을 베었고, 세상이 사랑하는 어린 신을 내리쳤다. 두려움의 수렁에서 이재균 감독이 그 손을 붙들고 끌어냈다. 그리고 김준영은 한빛의 에이스로서 세상에 맞설 것을 각오했다.
  그 모든 건 기억될까.



  마침내, 시작을 알리는 What I want가 요란하게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막대풍선을 부딪치며 함성을 내질렀다. 전용준 캐스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고 무대 위, 타임머신 박스 속의 두 주인공이 마지막 숨을 고른다.

  5.
  4.
  3.
  2.
  1.

  짤막한 전자음과 함께 두 자루 검신이 뽑혀 나오는 순간,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 게임은
  DAUM은 기억될까.





  1경기, 파이썬 (김준영 0 : 0 변형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숙련시키고, 그렇지 못한 것은 일찍 버려야 한다."
                                                                                                                           - 이소룡



  - DAUM 스타리그 2007 S1 결승전 1경기, 변형태 VS 김준영 in 파이썬.

  김준영 8시, 변형태 2시.
  게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변형태를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칼끝을 향했다. 앞뒤 가리지 않는 그 파상 공세는 언제 시작될 것인가.
  그러나 칼집에서 반쯤 뽑혀 나온 변형태의 검신은 그대로 멎어 움직이지 않았다. 변형태 역시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세를 낮추고 몸을 경직시킨다. 발을 땅에 파묻을 기세로 단단히 디딘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의 발에서, 그의 무릎으로, 점점 타고 올라가다 변형태의 눈에서 멈춘다. 어딘가를 세차게 쏘아보고 있는 그 눈에서 멈춘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의식 중에 묻고, 단 한 가지 대답 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람들은 경악하게 고개를 돌린다. 김준영을 향한다.
  '수성의 저그'가 좀처럼 내딛지 않는 앞선 한 걸음.
  그보다 더욱 드문 두 걸음.
  내딛을 리 없는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김준영이 변형태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김준영의 칼은 이미 완전히 뽑혀, 그 고래를 쳐든 채 김준영의 머리 위로 뻗어있다. 변형태는 그때서야 이를 악물고 단번에 칼을 빼들어 수평으로 눕힌 채 쳐든다. 김준영의 칼이 변형태를 노리고 수직으로 내려 꽂혔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며, 강한 진동이 두 사람의 팔을 쓸고 지나간다.
  맞붙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부들부들 떨리는 두 칼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천천히 상황을 깨닫는다.
  선공은 김준영.

  

  테란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함도 아니었고, 테란을 혼란시키기 위한 눈속임도 아니었다. 이영호를 상대할 때도 보여주지 않았던 9드론 발업 저글링, 단칼에 베겠다는 의지가 명백한 일격이었다.
  보다 빠르게 변형태의 위치를 파악하여 여섯 기 저글링이 일직선으로 중앙을 가로질렀다. 변형태는 그답게 투배럭을 이미 올렸고 앞마당조차 가져가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준영의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째에 맞닥뜨리고 대처하는 것은 그 변형태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머리가 깨닫고, 경악하고, 그 경악을 억누르며 대처하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그 촌음이 마치 한 시간, 두 시간처럼 느껴졌다. 황급히 전진시킨 머린을 다시 불러들고 블로킹을 위한 두 기의 SCV를 입구로 내보냈지만-
  조금, 늦었다.
  SCV가 채 자리를 잡기 전에, 두 기 SCV의 사이로 한 줄의 저글링이 파고 들어와 머린들의 목에 발톱을 내리꽂았다.
  팽팽히 맞붙던 두 자루 칼의 균형이 깨져나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저글링들이 미네랄 필드까지 도달한 순간 발업도 완료되었다. 후속 저글링들은 쉬지 않고 중앙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서 보다 멀리 내닫을 수 있음을 이영호는 보여주었다. 김준영은 세상에 맞설 자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건널 수 있어야 한다. 저 땅끝까지 달리며 아낌없이 빼앗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 두려움 없는 일보(一步)가 되리라.
  끝장내기 위해 김준영은 다시 칼을 쳐들었다.

  순간 김준영의 눈썹가가 꿈틀거렸다.
  변형태와 눈이 마주쳤다. 변형태의 눈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칼끝을 보고 있지 않았다. 김준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가를 비틀어 - 미소 짓고 있었다. 저절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전투광의 오기일까? 다음 경기에서 기세로 밀리지 않겠다는 것일까? 그런 블러프일 뿐이라면, 자신의 몸을 달리는 위화감과, 싸늘한 냉기는, 다만 자신이 주눅 든 탓일까?
  그럴 리 없었다.
  김준영은 황급히 전투가 벌어지는 중인 변형태의 본진에서 자신의 본진으로 화면을 돌렸다. 순간, 「팍」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 한 기가 터져나갔다. 이미 크립 위에는 몇 개인가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그 본진에 놓인 유일한 파란 점, 변형태의 SCV를 클릭한 김준영은 팔에서 빠르게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Kills : 3. 정찰 SCV 1기에게, 세 기의 드론을 당했다.
  변형태는 더욱 악랄하게 웃었다. 하시던 대로 하셨어야지, 대인(大人) 나리. 높게 쳐든 김준영의 칼은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옆구리에는 어느 틈엔가 변형태가 때려 박은 말뚝이 바닥까지 흥건한 피에 절은 채 꽂혀있었다. 터무니없는 실책이었다.

  

  변형태는 미소를 거두고 다시 칼을 들어올렸다.
  맹습의 테란을 상대로 느닷없는 선공을 걸어온 주제에, 그 공세에 취해서는 초보적인 실책까지 저지른 수성의 저그에게 승리를 가져갈 자격 따위 있을 리 없다.
  이제 저그가 대가를 치를 때였다.

  김준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난한 게임 양상으로 되돌리려 했다. 테란은 수많은 머린을 잃었다. 저그는 세 기의 드론을 잃었다. 테란도 타격을 입고 저그도 타격을 입었으니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자고 주장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변형태가 입힌 상처가 명백히 더 깊었다.
  김준영은 앞마당을 확보하고 3해처리 째를 건설하면서 급속으로 드론을 펌핑했다. 남은 저글링 네 기만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선을 유지했다. 제발 조금이라도 변형태의 공격이 늦기를 바라면서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성큰 방어선을 완성시켰고, 가까스로 견제에 사용할 뮤탈리스크를 확보해냈다. 위태롭기 그지없는 외줄타기의 연속이었다.
  반면 변형태는 그런 김준영의 움직임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첫 디펜스로 게임의 주도권은 변형태의 것이었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맹공 없이도 이미 김준영은 변형태에게 밀리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변형태는 전투 중독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가는 길에 뭔가 놓여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지금의 김준영은 변형태의 길에서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큼의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몰아쳐 찢을 이유도 없다.
  날아온 뮤탈 무리는 얼기설기 놓인 터렛의 방어선도 뚫지 못했다, 5시 멀티를 버리고 감행해온 빈집털이는 변형태의 본진에서 막 생산된 병력들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되자 변형태는 테란의 한 방 진출 병력을 몰아 김준영의 본진을 두들겼다.
  김준영은 마지막으로 포위 공격을 시도하고는, 그것이 참패로 끝나자 돌을 던졌다.
  GG.
  변형태 VS 김준영, 스코어 1 : 0.





  발췌문 : 본좌론에 관한 소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 출처 다수


   저그의 시대가 열린 데에는 세 개의 열쇠가 있었다고들 한다. 이른바 저그의 삼신기인데, 곧 뮤탈리스크 뭉치기 · 3해처리 운영 · 디파일러 운용이다.
  P.O.S의 서경종이 우연한 계기로 발견한 뮤탈 뭉치기 컨트롤은 이름 높은 투신에 의해 그 위력이 증명되었다. 그 가공할만한 움직임은 전략을 뛰어넘는 전술의 영역이었고 테란의 예측을 한참 상회하는 타격을 안겼다. 3해처리는 물론 마재윤이 이끈 트렌드다. 다수 라바의 활용에서 나오는 유기적인 움직임, 그는 더블컴에서 나오는 강력한 테란 병력까지도 찍어 누를만한 힘을 저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디파일러 - 하이브가 저그에게 선사하는 온갖 무기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그 마지막 한 조각. 이는 웬만큼 이름을 떨친 저그라면 누구나 능히 써야하는 필수 요건이었으나 이를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정교하게 사용했던 것은 김준영이었다 기록은 전한다.

  삼신기를 손에 넣은 저그는 학살극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조용호-마재윤의 CYON 결승, 마재윤-심소명의 프링글스 S2 결승 등 수 차례의 저저전 결승을 치른 MSL이 될 것이다. 마재윤은 그 저그무리의 수장이었고, 이때만 해도 마재윤은 흥행 파괴범 - 리그 브레이커라 불리고 있었다. 잠시 놀라던 사람들은 곧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임요환과 이윤열과 최연성을 거친 그들에게 패자란 곧 테란이어야 했다. 저그의 득세는 무질서였으며, 혼란은 바로 잡혀야만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의는 곧 천의라, 마침내 양대 방송사와 협회는 침묵 속에 사람들의 뜻을 받들겠다 약속했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저그 학살이 계획되었다. 그 결과는 롱기누스-리버스템플-네오 알카노이드였다. 롱기누스, 구세주의 옆구리를 찌른 성창, 그 이름은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천명한 네이밍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신화가 시작되었다.

  저그는 학살당했다. 계획대로 쓸려나갔고, 처참하리만치 박멸당했다.
  하지만 마재윤은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충격에서 깨어난 이후로는 산 기적의 간증인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마재윤은 프로토스를 가스실로 몰아넣은 마틀러에서 제노사이드를 헤치고 살아남은 기적의 장본인으로 탈바꿈했다. 그 모든 목소리는 결국 하나를 말하고 있었다.
  Savior walks on water.
  - 우리는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본좌론」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마재윤을 증오한 만큼 마재윤에게 집착했다.
  마재윤은 그 어떤 게이머와도 달라야 했다. 모두가 그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기억해야만 했다. 장담컨대, 이 무렵의 몇몇 마재윤 광신도는 할 수만 있었다면 마약성경이라도 찍어냈을 것이다 (다행히도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요환계시록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영예로운 칭호를 마재윤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한 때 박성준에게 붙여졌다가 금세 창고에 쳐박힌,「본좌」라는 이름이었다.
  본좌란 본래 무협지 등에서 본인, 자기 자신을 이르는 일종의 호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어째서 절대강자의 칭호가 되었는가는 아직도 의문이다. 알려진 사실은 박성준이 그 전성기에 이미 '박본좌'라고 불린 적이 있다는 것 정도인데 그조차도 유래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유력한 설이 아마도 본래 중국 무협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던 듯한 짤방에서 한껏 오만하게 '감히 본좌더러 ……하라고 하다니!'하는 대사가 출발점이라 하는 것인데, 한때 스갤에서 이 짤방의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제작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일견 옳은 듯도 하다.
  각설하고, 여하튼 '절대본좌 마본좌'가 하나의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본좌'란 곧 절대자의 칭호임을 넌지시 암시하는 풍조가 퍼져나가자 격렬히 반발하는 자들이 곳곳에서 들어났으니 곧 소위 '올드비'라 불리던 이들과 테란의 오랜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재윤 한 사람만이 다른 모든 프로게이머와 궤를 달리하는 절대자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런 옹립 행위는 낭만 시대 영웅들에 대한 모독이자, 자신들이 지지하는 테란 군주들을 노린 준동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따. 물론 마재윤의 지자들 역시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지만, 올드비들과 테란의지지 세력은 오랜 시간 기반을 닦아온 이들이었고 마찬가지로 결코 쉽게 설득당할 이들은 아니었다. 두 세력은 오랜 시간 대립하면서 서로를 공격했다. 매일 같이 분규가 끝나지 않았다. 결국 - 양측은 마침내 싸움에 지쳐 타협안을 만드는데 합의했으니, 그 결과물이 저 유명한 본좌 라인, 「닥치고 외워라 임 · 이 · 최 · 마 」다.

  


  임요환이 누볐던 시대를 임요환만의 시대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홍진호를 잊어야 하고 김동수를 지워야 하며 박정석을 버려야 한다. 이윤열의 시대는 어떤가? 서지훈, 조용호, 이재훈과 전태규, 김현진…. 최연성 역시, 박성준과 변은종, 박태민, 강민, 박용욱, 이병민….
  올드비들은 임요환과 이윤열, 최연성, 세 사람의 테란을 대표로 내세움으로써 그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위명들도 함께 기억에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정녕 그렇게 믿었다면, 그들의 믿음은 너무나도 순진한 것이었다. 가엾으리만치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들의 타협안은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에게 가혹하리만치 영광된 영생을 부여했다. 그들 외에 다른 모든 이들을 제물로 바친 대가였다.
  본좌론이란 매력적인 떡밥은 쉽게 대부분의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본좌론에 사로잡힌 이들은 과거의 게이머들을 기억함에 있어 단 한 가지의 기준만을 갖게 되었다. 본좌인가 (기억해야 하는가), 아닌가 (기억할 필요가 없는가). 코카콜라배의 혈전이나 김동수의 가을의 전설은 임요환의 시대 속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서지훈의 올림푸스, 박성준의 질레트, 강민의 양대 제패도 크게 다르지 않은 처우를 받았다. 본좌론은 우선 그렇게 낭만시대를, 과거를 끝장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본좌란 본디 자기 자신을 이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고,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말은 또한, 그 무엇이든지 채워 넣을 수 있는 마법의 단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므로 본좌는 그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본좌를 정하는 기준은 천차만별이며, 따라서 어떤 기준에 따른 성취를 이룬 한 게이머를 본좌라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능만 하다. 마찬가지로 천차만별의 기준들을 들여 그 게이머가 본좌가 아니라고 주장할 기존 기득 세력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순수한 권력 다툼으로, 신진 세력이 승리를 거둘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하겠다.
  앞으로 등장할 누군가가 우승 횟수로 본좌들을 위협한다면 임이최마의 수호자들은 승률을 들어 자격을 박탈할 것이다. 승률을 충족시킨다면 패러다임의 제시를 들어 자격을 박탈할 것이다. 그조차도 충족시킨다면 경기력을, 천적을, 역상성전을, 종국에는 '포스'에 '드라마성' 같은 객관적 지표로 환산 불가능한 가치들을 내세워 자격을 박탈할 것인가. 알겠지만, 본좌라인의 수호자들은 이미 본좌라 불리는 임-이-최-마를 공통으로 관통하는 기준에서조차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답을 제시한 바 없다. 그들은 그렇게, 미래도 끝장낼 수 있었다.



  본좌론의 승자는 단 한 사람뿐이다. 함께 본좌라 불리는 임요환과, 이윤열, 최연성조차도 그와 같은 선에 설 수는 없었다. 그들 또한 승자라 말할 것인가? 임진록과 가을의 전설, 그 외 숱한 무용담과 적수들을 망각에 빼앗긴 임요환을 승자라 말하겠는가? 임요환맘큼이나 긴 시간을 싸웠고 그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빼앗긴 이윤열을 승자라 말하겠는가? 양산형 테란들이 그러했듯, 이제 그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을 최연성이 승자인가? 물론 그들은 위대한 과거로 영원히 남는다. 그리고 그들 위대한 과거를 모두 짓밟고 협회와 방송사의 야합마저 이겨낸 마재윤은 유일무이한 신화, 영원한 현재로 고정된다. 마재윤은 임-이-최의 역사를 계승하는 자가 아니다. 마재윤은 네 번째 본좌가 아니라, 4대 전부를 소유하는 본좌다. 임요환도 이윤열도 최연성도 본좌의 방식으로 그들 시대를 살아내지 않았다. 지난 역사는 마재윤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본좌론의 방식으로 재편되고 조작되었으며, 이제 앞으로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본좌론이 지속되는 한, 그는 모든 것의 시작(A)이자 끝(Ω), 단 한 명의 구세주Savior이다.

  본좌란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럼으로써 그건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마재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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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6 00:31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지만... 마지막 부분은 아무리 뭐라해도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군요.. ㅠㅠ
김준영 대 변형태는 정말 스타리그 최고의 결승전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포프의대모험
12/12/26 01:04
수정 아이콘
전역하셨나요? 드디어 뒷부분이 나오는군요
안수정
12/12/26 01:22
수정 아이콘
마재윤의 죄는 용서할수 없지만
어째튼 저시절 마재윤의 플레이는 정말 최고였죠.. 그걸 이제는 마음대로 추억할수도 없는 이 현실이 참 슬프네요......
12/12/26 12:33
수정 아이콘
마지막 분단에 동의합니다. 마재윤이란 인물의 과와는 달리, 그 실력만큼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임요환의 시대에서는 그래서 2002년에 홍진호가 임요환보다 약했어? 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물론 커리어는 임요환이 훨씬 좋지만, 코카콜라배 결승의 테란맵 3개 저그맵 2개. 그리고 그 만큼 나온 결과에 임요환이 리그를 다 씹어먹었다 라고 말하는건 어폐가 있죠.
이윤열과 최연성은 확실히 엄청난 승률과 온갖 우승으로 논란의 여지 없이 시대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이윤열은 최연성한테 물러서야 했고, 최연성은 마재윤한테 물러서야 했죠. 결국 마재윤은 스스로 몰락하였고 그 이후에 본좌론은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2006년은 마재윤의 해였습니다. 마재윤의 승률은 이후의 이영호에 비하면 높지 않지만, 마재윤은 이겨야 하는 경기를 이겼고, 져도 되는 경기는 졌습니다. 프링글스배의 롱기누스라는 희대의 테란맵에서 온갖 테란을 다 때려잡고 우승하는 모습은 왜 그 시대에 본좌론이 화두였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시대가 본좌론의 마재윤을 원한게 아니라 마재윤이 본좌론을 만든것이었죠.
Mooderni
12/12/26 12:39
수정 아이콘
휴가나오신건지 전역하신건지는 잘모르겠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글이 떳네요 재미있게 완독하였습니다!
재미있는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ps.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또한 적지 많은 않았다. 이 문장 수정해주시면 좋을 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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