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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5/19 02:41:22
Name 쓰바라시리치!
Subject 대한민국 진보하고 있는겁니까?
'5.18 민주화 운동'

분명 학교에서 난 이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5.18 당일 이였던 어제 인터넷 게시판들과 주요 매체들을 돌아다니면서

훝어보니 참 착찹했습니다.

'5.18 광주 폭동'

이렇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어떤 분이 그러셨듯이

차마 말로는 표현안해도 속으로 저렇게 생각하시는분이 또 얼마나 많을까요-

'전사모' 이걸 뉴스로 들었을때 참 기막혔었지요.

그런데 5.18 당일날의 인터넷에서본 반응들은 기막힘 정도를 넘어 참담했습니다.

북한 간첩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다고요? 더 큰책임은 시위를 주도한 세력에게 있는

거라고요? 무기를 들어서는 안됬었다고요?

전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상황을 100% 이해할순 없습니다.

하지만 12.12사태는 명백한 군사 쿠데타였고 오랜독재를 씻고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에겐 찬물을 끼얻는 일이였다는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광주를 제외한 나머지 전국은 침묵했다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미 그자체로 하나의 모순덩어리였고 탄생해서는 안되는 정권이였습니다.

그런한 사실은 그들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나 참혹하게 광주를 짓밟았던것이

고 그 참혹한 현장에서 이젠 민주화니 뭐니를 넘어서 '학살자'들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들었을 그 시민들이 어째서 '폭도'가 되어야 하며 '빨갱이'가 되어야합니까?

그리고 그런말들이 어떻게 우리나라의 소위 큰영향력있는 매체에서 버젓이 등장할수

있는것인지..

전 지금까지 시대가 바뀌었고 대한민국은 좀더 나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만.. 그생각에 수정을 가해야될것 같군요.

얼마전만해도 우리나라 집권세력은 항상 자신의 체제안정을 위해서

북한과 관련된 안보문제를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해 왔었죠.

북한 간첩의 선동논란도 전 정말 명명백백한 근거를 드러날때까지는 결코 수긍할수가

없습니다. 저들의 책임회피 내지는 민주화운동의 정신에 흡집을 내려는 정치적

시도라고 전 판단하고 있습니다. 반대세력들을 '빨갱이'로 몰아 날려버리는 수법은

아주 고전적인 수법아닌가요?

솔직히 두렵습니다. 정말 언젠가  '5.18 광주 폭동' 이라는 말과 5.16군사정변, 12.12사태

를 찬양하는 말들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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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돌이
05/05/19 03:02
수정 아이콘
이런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자고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지금 힘이 들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아니 제대로 굴러가야한다고 믿습니다...
DeaDBirD
05/05/19 03:31
수정 아이콘
걱정 마십시오.. 한국인들 그렇게 걱정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인생 중간 쯔음 나이인 30대 중반에서 볼 때, 나이 드신 분들도. 동년배들도. 더 어린 분들도.. 사실 엊그제부터 저도 많은 싸이트들 보았습니다만. 절대 다수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어린 분들에게 배우는 것도 많았습니다..(아래에 아이네꼬 님에게도 그렇구요..) 극히 일부의 극렬한 사람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극렬한 분들이 있어야만 또, 건강한 사회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KKK단으로 모든 백인들을 판단해서는 안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일부 덜 문명화된 아프리카 민족으로 모든 흑인들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가깝게는 일부 찌질한 빠/까로서 그 선수에 대한 모든 빠/까를 판단해서는 안되잖습니까..

전사모 몇 천명 있는들 또 어떻습니까.. 절대 다수는 '잊지 않겠다' 모드를 굳건히 지키고 계시잖습니까..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도, 나름대로 힘들겠지만, 제 눈으로 보았을 때, 정말 훌륭하게, 당차게 자라고 있는 듯 합니다.. 가끔 그네들의 정서를 보면서, 때론 눈물 글썽이기도 합니다.. 정말 멋진 후대입니다..
시간의강
05/05/19 03:55
수정 아이콘
윗분 생각과는 달리 저는 대한민국은 충분히 우려할만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나라는 그 끔찍했던 60년전 일재시대의 잔재조차 아직 청산하지 못한채, 군부 독재시절의 잔재도 털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에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씻지 않고 음식을 집어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탈이 나겠죠. 이런게 차츰 쌓이다간 정말 언젠간 탈이 제대로 날 것 같습니다. 일례로 당장 과오를 깨끗이 씻어낸 독일과 아직도 어영부영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 극명하지 않습니까? '절대 잊지 않겠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빨리 씻어내야 된다'라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다들 잘먹고 편하게 되니 깨끗하게 씻어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러다 언제 탈이 나게 되면 그때서야 정신 차리겠죠.
05/05/1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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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해선 많이 진보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솔직히 성에는 아주 많이 안차는 상황입니다.게다가 잘못하면 일본처럼 정치가 흘러갈지도....(투표율 극도의 하락에 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인구많은 일정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의 장기집권 등등의...)
사회불만세력
05/05/19 05:18
수정 아이콘
디씨 정사겔에서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두 부류인데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위해 일하는(!) 작전 세력이거나 강태공들입니다. 강태공들은 귀엽게 봐주겠는데 알바(?)들은 눈뜨고는 못 보겠더군요
시급이 얼마길래 -_-;;;;
마음의손잡이
05/05/19 05:52
수정 아이콘
솔직히 작전세력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카이사르
05/05/19 07:49
수정 아이콘
5.18에 대한 평가야 어차피 정권 바뀔 때 마다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상대방이 우리에게 총을 쐈기 때문에, 우리도 살기 위해서 총을 쏘겠다는 소리는, 독립국 선포하거나, 전쟁을 선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베트콩 게릴라들이 베트남 정부군에나 하는 소리이지, 민주화 운동 하겠다는 사람들이 할 소리는 절대로 아니라고 봅니다. 학살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에 무기를 들었다 하시는데, 시위가 과격해지면 진압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국가의 군대에 맞서서 독립국을 세울 것도 아니면서, 계엄상황하에 극도로 폭력적이고 위험한 시위와 소요사태등을 계속 일으키면서, 해산하지도 않고, 관공서를 습격하여 무장을 하는 것은 내전 한판 일으켜 보겠다는 겁니까 뭡니까? 12.12 사태에 정통성 부여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12.12 사태가 왜 잘못되었습니까? 정승화 육군총장이 계엄사령관의 자격이 없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의 군 장성들이 동의하면서도, 방법이나 시기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려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5.18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국군을 향해 발포해놓고서는 민주와 운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면 다입니까? 살기 위해서 학살자들에 맞서서 총을 들었다구요? 무슨 공수부대가 광주 사람들 학살하러 광주에 내려왔습니까? 당신들 말대로라면 공수부대가 도청을 다시 되찾은 이후에, 광주 시민들 전부 죽여야 했겠네요. 광주 사람들 죽이려고 해서 손에 무기를 들었다면서요? 그러면 지금까지 광주 사람들 어떻게 살아있습니까? 사태를 주동하고, 순진한 광주 시민의 손에 총을 쥐어준 자들 또한 반드시 법의 이름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05/05/19 07:54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님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먼저이고 왜 그런일이 있었는지...
05/05/19 08:03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 님/ 님 같은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도 해석될만 한데,
국민의 정당한 저항권 행사 차원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국민들은 헌법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자에게
다른 구제수단이 딱히 없는 경우,
정당하게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항권 행사시, 장애가 되는 군인이나 경찰 등에 폭력적 방법을 사용해도,
초법규적 위법성조각사유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 정설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의 봉사자라는 군인이나 경찰들이 국민들에게 총질을 하는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죠.
Drunken..
05/05/19 08:12
수정 아이콘
저항의 수단이 폭력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러한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폭력 시위 이전에 군부의 목을 죄여오는 탄압이 먼저였던 겁니다. 살기위한 투쟁이었던 거죠.

5.18기념관의 당시 사진들을 보신다면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었는지 무엇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었는지 공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현준
05/05/19 08:21
수정 아이콘
5.18에 대한 평가가 정권 바뀌면 바뀐다니.. 이런 어이없는 얘기를 여기와서도 볼 수가 있군요 -_-; 정권 바뀌면 5.18 민주화 운동이 다시 폭동으로 돌아가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정말 아침부터 왠 황당한 얘기를 다 보는군요.
05/05/19 08:21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님/ 반란에 의한 계엄에 대해 봉기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까스로 되찾은 민주주의를 다시 군인들의 총칼로 억압하려드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광주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그러지 못 했죠. 우린 그것을 부끄러워해야합니다. 님은 계엄상황하에서 왜 폭력시위를 했냐고 말씀을 하지만, 적어도 지각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왜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야겠죠. 왜 계엄이 발령된겁니까? 대통령이 유고해서? 12.12는 엄연히 혼란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고자했던 반란행위입니다. 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당장 또 어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도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 얼마나 지성인으로서 후안무치한 망발입니까? 또, 총을 쏘는 정권에 대해 침묵하라고 하셨습니까? 님은 님의 부모가 눈앞에서 죽어가도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런지요.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닙니다. 그날,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수 많은 영령들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푸른바람부는
05/05/19 08:35
수정 아이콘
12.12이후에 시위는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광주에서만 일어난게 아닙니다. 오히려 대규모시위는 서울등에서 일어났습니다.
518을 분석한 여러 논문이나 글들을 보면 왜 광주에서만 유혈사태가 일어났는지 알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쿠데타세력의 희생양으로 김대중과 광주가 선택된거죠. 광주가 유달리 민주화의식이 여타지역보다 높아서 그랬던건 아닙니다. 물론 518이후의 광주의 민주화의식은 여타지역을 압도했습니다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것입니다.
518과 같은 일이 부산이나 대구에서 있었다고 해도 부산이나 대구시민들도 광주와 똑같이 일어났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회불만세력
05/05/19 08:36
수정 아이콘
5.18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정권이 바뀔때 마다 다르게 평가 받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 우리 정권이 군부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푸른바람부는
05/05/19 08:56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님// 밑에글에서도 말했지만 님이 말한 518당시 상당수의 사상자가 카빈소총에 의해서 났다는 말의 근거부터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말은 시민군이 민간인을 상당수 사살했다는 말입니다. 518을 완전히 뒤집는 발언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세요. 저는 군인간에 오인사격에 대한 근거 이미 제시했습니다.
헤롱헤롱
05/05/19 08:56
수정 아이콘
아직도,, 5.18을 쿠데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전 60넘은 우리 학교 모 교수님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그 분이 1940년대 생....나는 1980년대 생,, 너무 안 맞아요.)
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평가받을 사건은 5.18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아닐까요?
이들이야 말로 조금만 더 시간 지나면,, 아주 매국노 취급 당할 것 같은데요.
카이사르
05/05/19 10:19
수정 아이콘
푸른바람부는님// 군인의 오인사격이 있었다 정도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셨지만, 군인 희생자의 대부분이 서로 쏴죽이다가 죽었다라는 님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카빈소총에 의한 희생자 관련해서 제가 주장한 내용의 근거는, 정부 공식문서로 광주지방검찰청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기록이나, 1980년도 국방부의 공식자료를 살펴보면 되실 듯 합니다. 이거 이외에도 자료가 많았는데 지금 일일히 다시 찾아보려니 힘드네요. 물론 정부쪽 기록은 무조건 조작이고 왜곡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며 님은 주장하고 싶으시 겠지만, 그렇게 만만히 볼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푸른바람부는
05/05/19 10:32
수정 아이콘
군인사망자 23명중에 송암동 오인사격사건으로만 죽은사람이 열명이 넘습니다. 부상자도 수십명이고요. 그정도 근거를 제시해도 턱없이 부족한겁니까? 그리고 근거대기가 힘들다고 핑계대지 마시고 제대로된 정부자료든 뭐든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카이사르님이 말한 내용은 정말 엄청난 내용입니다. 그냥 대충 넘어갈수 없는 내용이라서 계속 말하는 겁니다. 시민군이 시민을 사살한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세요. 국방부든 정부자료든 뭐든 제시하세요
카이사르
05/05/19 10:41
수정 아이콘
5.18은 성역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조사할 수 있으며, 반드시 진실을 끝까지 파헤쳐야 할 사안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오월대, 녹두대 했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도 봤고, 심지어는 화염병과 신나로 경찰관 및 전의경 7명을 산채로 태워죽이고는, 반성은 커녕 민주화인사 시켜달라며 개소리 해대는 미췬놈들도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계엄군 쏴죽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본 적 없습니다. 그게 진짜 민주화투쟁이고, 자랑스럽다면 왜 이야기 못 합니까? 나와서 당당하게 말하세요. 나는 민주화운동을 했고, 계엄군에 맞서서 카빈소총 들고 계엄군 쏴죽였노라 당당하게 이야기 하세요. 오히려 공수부대원들이 훨씬 더 당당하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계엄군이었노라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고. 경고방송을 했고 위협사격을 했고, 그래도 끝까지 달려드는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일 리가 없다는 판단하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쏴야 했다고. 당시 진압에 참가한 많은 공수부대원들은 끝까지 인내진압만을 강요당했으며, 오히려 시민쪽에서 총격을 먼저 가했노라고 증언하고 있는 공수부대원들도 한 둘이 아닙니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으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증오심과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배후세력이 분명히 광주에는 존재했으며, 심지어는 광주의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 북한의 대남방송을 청취해야 했다는 공수부대원의 기록도 있습니다. 5.18은 무슨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입니까? 어차피 5.18을 성역화시킨 양김씨가 정치적으로 5.18 재평가를 이용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세력인 한국전쟁 참전군인들을 반통일 세력으로 매도한 김대중 씨가, 5.18에 대해서는 날림 조사로 엄청난 보상금을 지불했지요. 이 정도의 보상은 그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한군의 남침을 막았던 사람들조차 국립공원 무료입장권 밖에는 보상받은 것이 없는데, 5.18 관련자에게는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지급했으니, 정치적으로 완전히 이용해 먹은 것이라고 밖에는 본 적 없습니다. 그러면서 관련자들을 사면이나 하고. 정치적 쇼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시체 사진 퍼날르면서 사람 증오심 고취시키고 적개감 불러일으키려는 유치한 짓 좀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늙어서 곱게 죽은 사람 아닌 이상에야, 이 세상에 보기 좋은 시체는 없습니다. 광주사태 희생자들 사진 퍼날르는 열정의 반이라도, 경찰병원을 방문해서 손가락이 잘리거나 두개골이 함몰되거나, 혹은 화염병에 맞아 얼굴이 녹아내린 전의경들 사진을 퍼날랐으면 대한민국에 시위대는 발 붙일 곳이 없었을 겁니다. 미선이, 효순이 때도 아주 시체사진 거하게 찍어서 전국적으로 공연을 하던데, 시체사진의 끔찍함으로 보자면 광주시민이나 계엄군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공안 9과
05/05/19 10:43
수정 아이콘
88년 5.18 청문회 -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95년 5.18특별법 재정 - 전두환.노태우 구속

97년 5월18일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

2004년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 - 5.18 희생자 국가유공자로 인정.

2005년 5월 19일 모 프로게이머 랭킹 사이트 - 5.18은 민중폭동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장. -_-;
상어이빨
05/05/19 10:50
수정 아이콘
공안 9과님 // 그런식의 덧글은 감정적인 댓글로 번져나갈 위험이 높습니다. 차라리 공안9과님의 5.18에 대한 의견을 쓰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

5.18 !!! 우리나라 역사의 참 아픈 모습입니다. 한 역사에 대해사 다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카이사르님 덧글에도 전 어느정도 동감합니다. 제발 감정에 호소하며 다가서는 사진과 글들 그만 봤으면 좋겠네요 ^^;
푸른바람부는
05/05/19 10:53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님이 말한 광주지방검찰청자료에 대한 분석글입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35.html
블랙비글
05/05/19 11:00
수정 아이콘
광주는 성역인듯..
Lenaparkzzang
05/05/19 11:08
수정 아이콘
당시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 죽인거는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 아니었던가요?
05/05/19 11:09
수정 아이콘
어휴~전두환일당들을 처단은 커녕 아직도 떵떵거리고 사는것만 봐도 열이 치솟는데......어휴 진짜~~(도대체 왜 아직도 손을 못대는 건지...아직도 그들의 힘이 저리도 강하다는 이야기같군요)
푸른바람부는
05/05/19 11:11
수정 아이콘
Lenaparkzzang//누구나 아는사실이 아닌가 봅니다. 알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구요.
05/05/19 11:12
수정 아이콘
상어이빨님// 감정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다시는 그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잊지 말자는 겁니다. 보십시오. 카이사르님처럼 진실은 외면하고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본인이 들었다, 본 적있다, 공수부대원들이 그러더라...하면서 본질을 왜곡하고 수천명이 사망한 사실에 대해선 그냥 지나치며 군인희생자만 강조하고, 발포까지도 시민군이 먼저 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않습니까? (당시 사망한 공수 부대원들 역시 피해자라는 생각은 누구나 그렇듯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역사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진실은 하나입니다. 아무리 폄하하고 훼손하려 발버둥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추상같은 진실 말입니다.
카이사르
05/05/19 11:14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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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및 19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던 갖가지 극렬사태가 바로 북쪽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도, 재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거물간첩 김용규의 소리 없는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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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다.
*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 4.19를 북한에세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 5.18을 호남에서는 [5.18민중항쟁]으로 부른다
*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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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폭동을 북한 간첩이 개입-유도했다고 보는 근거를 아래에 열거한다.

1) [북한은 5.18때 정찰국 소속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최주활 증언)

2)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 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계엄사 157쪽 6-8줄).

3) [북한 최대의 대남 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 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서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김중린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0쪽 끝줄로부터 241쪽 4줄).

4) 5.18 전후에 평소와는 달리 많은 간첩들이 잡혔다.
① 3.23. 한강하류로 수중 침투해 오는 간첩 3명 사살
② 3.25. 무장간첩선이 포항 앞 바다에 침입, 우리 어부 3명을 사살하고 도망하다가 해공군 작전에 의해 격침
③ 3.27. 금화지구 비무장지대에 3명이 침투, 그 중 1명만 사살
④ 5.12.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⑤ 5.15.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⑥ 5.20.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생포(증9, 계엄사 47쪽).
⑦ 6.21. 서산 앞 바다 무장간첩선 침투, 9명 사실, 1명 생포

5) 북괴에서 정규방송을 제쳐놓고 시간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여 선동했다. 당시 광주 일원에서는 KBS는 청취불능 상태였고, 그 대신 평양방송이 쩌렁 쩌렁 울렸다. 남해안으로 침입한 간첩 이창룡이 5.23에 검거되었고,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했고, 난동자 조편성이 빨갱이식 조직이었고, 차량에 적색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하여 공수부대 요원들까지 섬짓함을 느끼게 한 것은 분명 적색분자의 소행이었다(계엄사 142쪽, 5.18사건의 사료 40항, 53항 등).

6) 난동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을 한 자, 서울에서 왔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 중에는 불순분자가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본다(계엄사 157쪽, 5.18사건의 사료 41항).

7) 주요 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수 시간 전에 내일 새벽 1시라고 알려준 것이 시민군에 알려져 23세의 김춘심이라는 여성이 집 차에 확성기를 달고 이 사실을 알렸으며, 난동자들이 작전시간과 작전대상을 미리 알아 계엄군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계엄사 161쪽, 5.18사건의 사료 42항).(패망한 월남에서처럼 5.18 당시에도 간첩이 계엄군에도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아무런 정황증거 없이 아니라고만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8) 박총리는 방송에서 대부분의 광주시민이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들이 퍼트리는 유언비어에 속고 있다고 말했다(신문, 총기 버리고 유혈사태 막자. 5.18사건의 사료 48항).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믿지 말자. 오열과 불순분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선무 내용이 방송됐다(신문, 대화로 모든 문제 해결가능. 유언비어 믿지 말고 자제해야. 5.18사건의 사료 50, 54항)

9) 북한의 가장 큰 대남 공작부 3호청사는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삐라를 만들어 광주로 보냈다(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1쪽 밑에서 3줄).(주: 광주사태는 9일간의 사태였습니다. 북한이 몇 주간 삐라를 만들어 내려보냈다면 광주사태는 적어도 사태발생 몇 주 전부터 북한이 개입하기로 기획한 것일 수 있습니다)

10)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괴에서 시간대 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 광주로 침입하려다 삼엄한 경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간첩 이창룡을 검거한 사실, 3명의 독침 사건,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하는 점, 도청난동자들의 조편성이 빨갱이 식 조직이라는 사실, 구호들이 적색 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북괴간첩이 광주사태에 편승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정부를 전복코자 하였음이 분명하였다(게엄사 33쪽 좌측 중간, 계엄사 142쪽 하단).

11) 간첩설도 나돌았다. 누군가 전신전화국에 불지르자고 얘기하자 왜 불지르느냐, 이상하다, 혹시 간첩 아니냐고 경계하기도 했다(증4, 42쪽 좌하단).(주: 이렇듯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광주 시민 자신들도 간첩 행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세무서, 방송국, 파출소, 동사무소 등 닥치는 대로 불사르고 파괴하는 행위,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교도소를 공격하고, 끝까지 결사 항쟁하는 행위들을 간첩행위로 보는 것이 죄가 될 수 없다).

12) 조사도 해보기 전에 정세균은 독침사건은 간첩의 소행이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해 광주사태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갔다(증12, 92쪽, 좌측 중간. 518간부의 회고록).

13) 수습위에서 총기를 회수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총기가 회수되지 않은 곳은 기동타격대와 36인조 무장조였다. 36인조 무장조는 일종의 비상대기조였는데 이들은 수류탄, 대검, M-16자동소총으로 무장되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움직였다. 기동타격대는 시위 외곽순찰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 회수가 어려웠지만 무장조는 도청 민원실 강당에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무기 회수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자 그들은 물끄러미 처다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 사내가 일어났다. 우리는 무등갱생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우리는 싸우다 죽을 겁니다(증12, 93-94쪽, 5.18단체측 인사의 회고). (주: 36명이 M-16으로 무장하고 이런 매너를 보였다는 것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특수 집단으로 보여 진다. 선생이라는 표현은 북한에서 툭하면 사용하는 용어다.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한 피고인은 이를 매우 잘 안다. 광주시민은 나이가 든 사람에게 선생이라는 용어보다 어르신이라는 말을 잘 사용한다).

14) 우리가(공수부대) 전남대학교 교정에 처음 진주했을 때, 대부분의 구호가 붉은 글씨였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농민수탈금지. 우리 부대원들은 이를 분명 용공분자들의 소행이라고 믿었다(증17, 427쪽. 공수 작전병의 실명 수기).

15) 붉은 색으로 쓰여진 구호가 계엄군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섬듯한 내용과 붉은 글씨가 용공적 냄새를 진득 풍겼다(증6, 426쪽 제3단 7-19줄).

17) 우리나라 역사상 계엄군에게 총을 쏜 소요는 광주사태가 처음이다(증13, 69쪽, 좌측 하단).

18)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지하신문이 5.18-5.26 사이 9호까지 발행되어 계엄군 섬멸과 최규하 정권의 퇴진을 선동하였다(증4, 25-26쪽, 5.18사건의 사료 9항). (주: 지하신문 발행은 시설, 장소, 디자인, 내용 등을 갖추는 데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 지하신문이 5.18 당일부터 발행됐다는 것은 5.18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임을 웅변해 준다. 5.18측 사람들은 5.18 소요가 순수한 시민이 순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지하신문을 5.18부터 발행할 수 없다. 5.18은 배후 불순세력이 미리 준비한 사건이었다).

19) 그런데 우려하고 근심했던 일이 터졌다. 하나는 26일 새벽 4시30분 서구 사구동 734-1 최던준씨(52) 집에 무장괴한이 침입, 최씨의 부인 최소례(35)와 아들 등 일가족 3명을 쏘아 살해했다. 다른 하나는 계엄군이 포위망을 압축해 온다는 소식이었다(증16, 476쪽. 광주 취재기자의 수첩 메모).(주: 이를 순수한 광주시민이 저지를 것으로 볼 수 없다).

20) 시민군의 한 사람이 월산2동 지도원동무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증4, 41쪽, 5.18사건의 사료 18항).

21) 좌익수 170여명이 들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증10, 140쪽, 5.18사건의 사료 59항)

22) 소요가 진압국면에 들어섰을 때 계엄군에 발악적으로 저항했던 17명이 모두 희생됐다(증10, 143쪽. 5.18사건의 사료 64항).(주: 순수한 시민군이라면 이렇듯 발악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23) 사망자 26명은 남한에 연고가 없는 시체였다(증9, 141쪽, 5.18사건의 사료 38항)(주: 남한에 연고가 없는 사망자는 의심의 대상이다. 현재도 망월동 묘지에는 연고자 없는 12명의 묘가 있다. 하다 못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강탈해가다가 죽은 시민도 두둑한 보상을 받는데 어째서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가).

24) 난동자들이 이리 시 폭파사건 때의 폭약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TNT를 도청지하실에 장전하고 광주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결사항전했다. 계엄군이 27일 새벽 01시에 특공 진입하여 뇌관을 뺐다(증9, 140쪽, 5.18사건의 사료 36항).(주: 이는 시민의 차원과 민주화 운동의 차원을 훨씬 넘는다).

25) 무기고를 탈취했고, 방위산업업체에서 장갑차를 포함한 군수장비를 탈취하여 공격했으며, 세무서, 방송국, 파출소 등 공공 시설을 불태우고 치안과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170여명의 좌익수와 3,800명의 죄수들이 들어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에 걸쳐 공격했다(증9, 134-140쪽: 이는 순수한 광주시민의 행동 범위를 넘습니다).

26) 광주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이 이루어졌고 시민군의 동시다발적인 매복작전들이 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증4, 40-41쪽 및 증21, . (주: 매복작전은 북한이 전문으로 하는 무기이며 동시다발적인 작전 지휘는 순수 시민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음).

27) 불온목적의 유언비어들 즉 여자를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들만 골라서 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하게 외치고 있다 등은 순수한 시민이 지어낼 수 없는 프로급의 작품이다. 광주시민이 어재서 이런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을까? (증4, 24쪽, 5.18사건의 사료 7항)

28) 총상으로 죽은 시민의 72.2%가 시민군이 가진 M-1과 칼빈에 의해 사망했다(증9, 140쪽 중간. 5.18사건의 사료 11항).(주: 이는 불순세력의 의도적인 소행이며, 그 목적은 광주시민을 흥분케 하는 술책이라고 본다. 이는 불순세력이 개입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요인의 하나라고 본다. 5.18단체는 이를 뒤집는 통계와 해석을 아직 제시한 바 없다. 그들은 무조건 조작이라고만 말한다)

29) 10대의 소년이 돈을 받고 벽돌이 든 리어카를 끌었다(증7, 43쪽 하단. 5.18사건의 사료 23항)

30) 계엄군에게 대화를 유도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이면 군의 격분을 유도하고, 군중이 공격하면 대화를 하던 사람들이(40-50대 나이) 뒤로 빠지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군중의 공격을 유도했다(증7, 47쪽, 5.18사건의 사료 25항. 100항). (주: 이는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 프로집단의 개입을 암시함)

31) 주머니에 돈이 든 어린애가 세무서 커텐에 불을 지르는 것을 잡았는데 어느 청년들이 불을 질러라 해서 질렀다 하더라. 타일러서 풀어주었는데 새벽에 세무서가 다시 불타더라(증7, 47쪽, 5.18사건의 사료 26항)

32) 광주 전역이 시민군에 의해 장악됐고, 치안부재-무법천지가 됐다. 이들은 진지를 구축하고, 시민군을 편성하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껌과 과자를 주며 합세를 권장했다(증9, 138쪽, 5.18사건의 사료 33항) (주: 특히 어린이를 전투에 합류시키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이이기도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전과 월남전 등에서 어린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를 어찌 순수한 광주시민이라고 볼 수 있는가).

33) 시민군들은 시체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며 시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도청 앞 관장에 시체를 진열시켜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의 모임을 유도했다(증9, 137-138쪽. 5.18사건의 사료 33, 34항). (주: 이는 공산주의식 심리전 수법이다. 순수한 광주시민의 행위가 아니다)

34) 비록 발단은 학생시위에서 출발했지만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 조종과 교묘한 난동을 통해 광주시민의 지역감정을 유발-흥분시킨 데에는 고첩과 불순분자들의 책동이 있었다(증10, 141쪽, 5.18사건의 사료 63항).

35) 전옥주(32세)라는 여자가 확성기로 물러서지 맙시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 가두방송을 하여 시민들을 독려했다(증11, 257쪽. 5.18사건의 사료 73항),

36) 5.21일 새벽 05:20분, 광주역 앞 군중 200여명이 집결하여 있는데 여자가 지금 일어나야 산다며 선동했다(증11, 647쪽. 5.18사건의 사료 84항).

37) 5.27일 03:00분 도청 앞에서 여학생이 방송을 통해 시민을 선동했다(증11, 6555쪽. 5.18사건의 사료 89항), 21일 자정에 여인이 확성기로 선동 방송을 했다(증14, 439쪽. 5.18사건의 사료 125항), 새벽 2시에도 여인이 시민을 선동하는 방송을 했다(증14, 406쪽. 5.18사건의 사료 114항).

38)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방송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같아 전율을 느꼈다(증13, 83쪽, 5.18사건의 사료 103항).

39) 여성이 확성기를 통해 애절한 목소리로 밤새내 시위를 선동했다(증4, 40쪽. 5.18사건의 사료 14, 32 항 외 대수 자료).

40) 여인들의 방송은 특수전으로 단련된 우리들을 겁먹게 했다(증17, 432쪽. 5.18사건의 사료 147항).

41) 5.26.12시경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기동타격대로 조직, 5-6명을 1개조로, 각 조마다 조장1명, 타격대원 4-5명, 군용 짚 차 1대, 무전기 한 대, 카빈으로 부장, 실탄 1클립으로 무장시켜 7개조로 편성했다. 지휘계통은 상황실장-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7개조)-조원으로 설정했다. 기동타격대의 대부분은 20세 전후의 기층세력이었다(증11, 266쪽, 5.18사건의 사료 80항). (주: 이는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시민 저항이 아니다).

42) 윤상원 형은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5월 19일까지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는데 그 후에는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에게서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이끄는 노동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민군의 시위로 성격이 바뀐다.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한 것도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주동하였다. 21일 그는 이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 지역까지 시민군을 보내 습격하여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해 오게 한다(증12, 55-59쪽).(주: 윤상원은 사망했으며 5.18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43)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점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품팔이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지금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5월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증12, 65쪽, 5.18 주역이자 국회의원인 정상용의 회고).(주: 이는 5.18단체 측 인사의 증언이며 계엄사의 분석과 일치한다. 기층민들은 스스로의 철학에 의해 나섰다기 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들 기층세력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주역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이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되는 게 아닌가)

44) 수습위원회는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놓았다(증12, 90쪽. 좌측 하단).(5.18은 김대중과 관련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45) 광주사태의 주요 원인은 지역감정과 학생 시위에 편승한 김대중 일당, 용공 및 불순 세력의 조직적인 배후조종, 광주로 내려간 재경 극렬 학생들의 선동 및 가세, 대정부 불만 및 지역감정에 불을 지른 악성 유언비어 때문이었다(증4, 30쪽 하단).

46) 이날(5.24) 집회에서는 철야데모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의 참여를 절규했던 전모여인(32)을 간첩용의자로 붙잡았다. 시민들은 그녀가 한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주소 등 횡설수설하는 게 의심쩍다고 여겨 계엄분소에 넘겼다. 시민군은 정부 당국이 광주 사태를 간첩 등 불온 세력과 결부시킨 게 마음에 걸려 22일에 이어 이날까지 2명의 혐의자를 잡아 이첩한 것이다(증16, 474쪽 하단). (주: 간첩이 없었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다. 광주시민들도 간첩이 끼어 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이다. 광주시민이라 해서 교묘한 선동 전술에 넘어가지 말란 법이 없다).

47) “심지어는 열 몇 살 먹은 애들도 와요. 물어보니까 누가 돈을 주면서 앞에서 끌라고 했답니다. 힘없는 아이는 앞장세우고 시킨 사람들은 뒤에서 미니까 애가 앞장서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불순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하지만 단서가 없으니까 말을 하지 못합니다”(증7, 43쪽 하단).(주: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앞세우는 것은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공산세력이 늘 사용했던 기본전술입니다.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국군을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죽인 야수로 몰기 위한 심리전입니다)

48) 광주 진압에 참가했던 장병 153명의 100%가 광주사태는 배후가 있는 폭동이며, 순수한 데모를 불순한 배후 세력이 조종. 폭동화 했다고 생각하며 이를 숭고한 민중항쟁이라고 생각하는 장병은 단 한 명도 없다(증7, 45쪽 중간).

49) “부대원들을 향해 난폭하게 달려온 차를 간신히 저지시켰습니다. 운전수를 잡아 이유를 물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않으면 내가 맞아 죽는데 안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이 한다고 대답했습니다”(증7, 53쪽 중간). (주: 배후조종임).

50) 5.18은 신군부가 유도했다(증15, 월간조선 1988.3월호 382쪽) (주: 광주인들은 누군가에 의해 유도당했다는 게 명예훼손이라고 하지만, 5.18단체 측 고소고발인들 스스로가 신군부의 유도설을 인정한 것이다. 5.18단체는 모든 유언비어와 자료들까지 군이 날조해 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다. 광주인들은 신군부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면서도 간첩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IntiFadA
05/05/1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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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사람들과의 어지간한 정치적 견해차에 대해서는 그냥 웃으며 지냈습니다만(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서 견해차라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것이라 믿기에)..... 정말 오랫만에 누군가와의 정치적 견해차로 인해 화가 나는군요.
'월간조선'이라든가 '간첩의 증언'을 저렇게 잔뜩 인용해놓다니 놀랄 노자입니다. 월북해서 남한사회를 욕하는 증언이 '조선중앙방송'에 나오더라도 고개 끄덕거리실 분이군요. 쓴웃음만 나옵니다. 정말...
카이사르
05/05/19 11:22
수정 아이콘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실꺼면 애초에 저한테 근거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제가 제시해도 전부 조작되고 왜곡되었다고 할 것이면서, 뭣하러 근거를 요구합니까? 그냥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평행선만 달리면 되었지. 어쨋든 저 역시 위의 근거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계엄사 관련 근거들이 모두 조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다양한 시각을 보자 이겁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근거있는 소리와, 완전 헛소리(어느 목사의 수기같은..)는 분간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푸른바람부는
05/05/19 11:24
수정 아이콘
카이사르님 이제 막 나가시네요. 이거 논쟁이고 뭐고 필요없는 분이군요. 님 주변사람들도 다 님처럼 말하고 생각하시나요?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네요. 더이상 님이랑 떠들고 싶지 않네요.
카이사르
05/05/19 11:33
수정 아이콘
절제되지 못한 언어를 사용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5.18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제 생각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이 얼마든지 틀렸을 수도 있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며,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묵향지기
05/05/19 11:43
수정 아이콘
사람에 따라 가치관이 틀려 보는 시각이 틀리지만

시민을 지키는 군대가 오히려 말그대로 '학살'했던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부끄럽지만 그전까지 5.18에 대해 잘몰랐고 관심도 없었지만

이번일을 계기로 5.18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정확히 어떤건지 알게됐습니다.
05/05/19 11:50
수정 아이콘
광주는 성역이 아니다. 그런데 성역화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군요. 역사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으시고, [정치]에 의해 반쪽짜리 역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사건 당사자인 호남 사람들이 아니라면, 광주 사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려는 노력은 해봐야 할 것입니다.

다음 두 자료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http://www.cjgb.net/news/read.php?idxno=3238&rsec=MAIN§ion=MAIN
광주 5.18관련 사망자 606명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와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5.18유공자동지회, 5.18기념재단 등 4개 단체는 13일 오전 5.18기념재단 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5.18 관련 통계'를 공식 발표했다. 이번 자료는 이들 4개 단체의 보유자료와 군.검.경 수사기록, 관련자 증언, 광주시 자료, 전남대 5.18연구소 소장기록 등을 토대로 면밀한 분석작업을 거쳐 작성됐다.

그동안 5.18 피해실태는 군과 검찰의 수사기록이나 광주시 등 행정기관 통계자료, 학술논문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발표된 적은 있으나 5월 관련단체들이 피해자 관점에서 주요 통계를 작성,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자가 65명, 상이후 사망자는 376명으로 집계됐다. 상이 후 사망자 376명 중 10%가 넘는 39명은 자살한 것으로 드러나 5.18 후유증의 심각성을 반증했다. 이 가운데 5.18 당시 사망자 165명 중 129명은 총상, 9명은 칼 등에 의한 자상, 17명은 타박상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드러나 계엄군의 발포에 의한 희생이 가장 컸음을 보여줬다. (부분인용)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0728§ion=section3§ion2=
"광주항쟁 사망자 606명, 청소년도 40명 넘어"

전체사망자는 606명이며 청소년 사망자 41명, 군 오인사격 사망자 13명, 구속.연행 1394명 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자료는 5.18광주항쟁 피해자 관점에서 본 항쟁 당시 및 이후 피해상황 통계자료가 25년만에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다.

정수만 유족회장은 "5.18 진상규명 과정에서 체계적인 피해상황 통계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라며 "얼마나 많이 숨지고, 어떻게 숨지고, 누가 죽였는가 등이 5.18의 중요한 진실 중 하나라고 판단, 지난 수년동안 관련자들을 일일이 만나 구체적 진술을 확보하고, 국가기관의 자료를 대조분석한 뒤 이번에 자료를 내놓게 됐다"고 밝혔다.

청소년 사망자 41명 가운데 만 18세 미만이 30명(73.1%)에 달했다. 학교급별로는 대학생 13명, 고교생 11명, 중학생 6명, 심지어 초등생도 2명으로 조사됐다. 최연소 희생자는 두살바기 아이고, 최고령 희생자는 당시 72세였다.

특히 계엄군 사망자 23명 중 13명(특전사 9, 31사단 3, 20사단 1)은 부대간 오인사격으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무장한 시민군에 의해 계엄군 상당수가 숨졌다"는 그동안의 주장이 잘못됐음이 기록으로 처음 확인된 셈이다. 부대별 가해규모는 주력부대인 11공수, 3공수, 20사단이 나란히 52명, 33명, 21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향토사단인 31사단에 의한 피해도 6명으로 나타났다.

기록별 미신고자는 모두 461명으로, 일반병원 치료 환자가 232명으로 가장 많고 석방자 168명(당시 무연고 기록자 38명 포함), 통합병원 26명, 기타(경찰자료) 35명 등이다. 이밖에도 5.18 관련 구속.연행자수는 현재까지 1394명에 달하고, 기소자 427명 중 7명은 사형됐고, 12명은 무기형을 선고받았다.(부분인용)
블랙비글
05/05/1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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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졌네요.
카이사르님도 5.18 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시는 것 같은니 너무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아세우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몰아세워 미친 사람으로 비난하는 것은 1930년대 나치들이 쓰던 수법이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05/05/1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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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news/sagun/l/kwangju_850608.htm

"[광주]사망자 발표대로 191명" 윤국방 상위보고 더 있으면 언제든 신고바란다. 중상 백22 경상 7백30명 모두 2천5백22명 검거 광주일보 1985/06/08

윤성민국방장관은 7일오후 국회국방위에 출석, 지난 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윤장관은 이날 여야의원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수는 민간인 1백64명, 군인 23명, 경찰4명 등 모두 1백91명 이었으며, 부상자는 중상1백22명 경상7백30명
이라고 말했다.

윤장관은
광주사태가 수습된후 10일간에 걸쳐 신고소를 설치, 신고를 접수했으나 민간이 사망자 1백64명 이외에 더 신고된 사실이 없고 당시 이수자는 의사, 변호사, 검사, 군검찰관, 민간대표로 구성된 검안위 49명에 의해 확인된 숫자이며 광주시청에서 사망자 1명당 위로금 1천4백30만원씩을 지급했다
고 밝혔다.

건물 차량등 피해액 2백60억원
윤장관은
광주사태 사망자가 2천여명이나 된다는 유언비어는 사태직후 사망및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인원이 2천여명으로서 이중에는 사망자, 체포구금된자, 부상으로 입원되잔, 피신자등이 포함되었으며, 이같은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으로 사료된다
고 말하고
민간인 사망자가 1백64명이외에 더 있다면 언제든지 정부나 국회, 각정당, 각언론기관, 종교단체, 사회및 인권단체등 어디라도 신고를 요망한다
고 밝혔다.

윤장관은 당시 광주사태에 대한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면서 10.26사태이후 정부는 민주화일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일부 정치세력의 성급한 주장 ▲ 학원소요격화 ▲ 노사분규의 가열화 ▲ 특히 사북사태등으로 인한 정치,경제, 사회적혼란이 일어난 데다 북괴가 혼란한 국내정세에 고무돼 대규모기갑부대를 전진배치하는등 국내외적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생존권이 크게 위협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부는 부득이 국가적 비상난국에 대처하기위해 5.17비상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윤장관은 당시 무력진압의 경위를 설명
광주사태가 무장난동자들에 의해 무정부상태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자극과 시민의 피해를 염려,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 자제했으며 비록 군인이 난동자에게 잡혀 무참히 학살되는 상황에서도 사태악화방지에 주력했다.
고 말하고
그러나 무정부상태가 지속됨에 따라 치안공백상태에 따른 불순분자 또는 북괴무장공비의침투가능성이 증대돼 난동 6일째부터 무장난동자와 일반시민의 분리가 확인되어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조성돼 27일 새벽1시를 기해 작전을 실시했다
고 밝혔다.

윤장관은 진압작전지침에 대해
당시의 광주시 상황은 정규시가전과 유사한 작전을 실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최소한의 피해로 작전을 종결하기위해 광주시외곽도로를 차단한후 특정목표에 은밀히 침투하여 진압하도록 게획했고 계속적인 무기회수 및 선무작전을 실시하는 한편 도청 지하실등에 장치된 폭발물을 선량한 학생들의 협조로 제거하는데 성공 , 광주시가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
고 말했다.

윤장관은 또
당시 군은 작전개시시간도 선량한 시민들이 모두 잠들고 극렬난동자만 남아있는 새벽1시를 택해 시민의 피해가 없도록 작전을 실시했고 사전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고 말했다.

윤장관은 광주사태와 관련 검거된자는 모두 2천5백22명이었으며, 이중 1천9백6명은 훈방하고 6백16명은 군법회의의 검찰부에 회부돼 4백4명은 사안에 따라 형이 선고됐으나 그후 특별사면등의 조치로 전원 석방되어 현재 복역중인자은 한사람도 없다고 밝혔다.

윤장관은 광주사태로 인한 재산피해는 건물2백50동 차량 8백82대 시설물 8백84개소, 유류 3천여드럼, 기타장비 1천9백25점등으로 그 피해액은 약 2백60여억원 상당이고 난동자들에게 빼앗긴 무기는 군용이 5천8백정, 민수용엽총이 3백95정, 소화기탄 28만8천6백80발을 비롯 수류탄 5백62발, 폭약 3천여상자였으며 빼앗긴 군용무기의 약 98%에 행당하는 4천9백26정은 회수됐다고 밝혔다. 윤장관은
사건발생후 현재까지 5년이 경과했으나 유족,친지, 인권단체등으로 부터 추가적인 신고가 전혀 없었던것으로 보아 사망자수자는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다
고 강조했다.

윤장관은
광주사태는 그 자체가 국가적 위기였으며 이 위기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데 군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고 말하고
따라서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군의 명예와 사기를 더이사 저하시키는 일이 없도록 의원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린다
고 당부했다. (부분인용)
질럿과뮤탈이
05/05/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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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부터 카이사르님의 궤변과 억지를 아주 잘 봤습니다.(그분야에선 대한민국 최강인듯 합니다. 인정) 도저히 대화가 되는 분이 아닌데도 여러 분들이 설득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어쩌다 저렇게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참 불쌍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05/05/19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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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제 두 링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왜곡이라고 거부하시는 조선일보 기사도 아니요. 민주화 세력? 측의 기사입니다.

85년의 기사에서 사망자 164명. 20년 후인 2005년의 기사에서 사망자 165명. 피해자측이 온갖 노력을 들여 조사했어도 1명 늘었군요. 거기다가 경찰 4명 사망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계엄군 사망자 23명은 서로 일치하고 그 중 13명이 송암동 오인사격으로 죽었다면 나머지 10명은 자살한 것입니까? 그들은 왜 죽었습니까?

광주사건을 말할 때, 당시 재산피해나, 당시 빼앗겼던 군수물자(차량,탄약,무기)에 대해서는 민주화세력 측에선 말하는 것이 없네요?

또한 10.26 이후 얼마나 많은 간첩이 남파되고 공작을 했었는지에 대해 현 세대인들은 너무도 관심이 없는 듯 하군요. 적국 입장에서 얼마나 간첩 남파하기 좋은 시기입니까? 적국의 영도자가 피살되었는데...

윤장관의 글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 7명은 사형, 12명은 무기형. 이 부분은 눈에 띄는군요.

광주 사람들은 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다 진압되고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동세력이 없었다고 단정하고 계시군요.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불과 1년 전의 부마사태 역시 똑같이 폭력 시위에 관공서 파괴 행위를 했는데, 그 시위는 민주화 시위로 인정받는 정도가 광주 사건과는 비교도 안되게 작군요. 왜입니까?

또한 부마사태 때는 똑같이 계엄이었어도 전원 연행되었고 시민군 사태는 없었습니다. 그럼 부마사건와 광주사건의 차이는 과연 무엇입니까?
블랙비글
05/05/1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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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이 안 된다고 욕에 가까운 비난을 하고,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에 토론문화나 관용의 문화가 없다는 것이지요.
미쳤다는 취급을 받는데 누가 감히 반론을 제기 하겠습니까?
상어이빨
05/05/19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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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훼님 // 그럼요..5.18은 잊어서는, 잊혀져서는 안되는 우리나라의 아프긴 하지만 중요한 역사입니다. 민주화운동! 말 그대로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민주화가 되어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잔인한 장면들, 시체 사진들 보기가 싫다는거죠 --;; 글에다가 그런 사진으로 시각적 효과까지 다가오면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그렇게 되잖아요.. 5.18과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잔인하고 좀 보기 싫은 사진들로 상 받는 기자들..( 예: 그 독수리하고 굶어죽어가는 아기 사진 있죠?)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런 사진들도 싫구 --;
묵향지기
05/05/19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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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이 쾌변이라고 해도 그사람을 무식한 취급하는건 저역시 안좋다고 생각합니다. 말싸움아닌 '토론'이니깐요.

그리고 요즘세대는 5.18에 대해 잘모릅니다. 저도 며칠전만해도
5.18이 몬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_-;
일제만행사진처럼 결코 잊지말고 다시는 그런일을 대풀이 하지말자는 취지에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네로울프
05/05/1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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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님/ 광주 민중 항쟁에 진압군으로 참여한 한 특전사 병사의 고백록입니다. 글이 길지만 대강 훓어보지 마시고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그 날 광주시민이 단순한 폭도였는지 아닌지 아시게 되실 겁니다. 당시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글입니다. 꼭 제대로 일독하시길 부탁드립니다.

25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 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 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시*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쟁 경계령인 데프콘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구나 12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요와 혼*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 .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경 용*공 분*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서슴지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1979년 12월 30일 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



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 이는 잠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공수 부대 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시*위를 진*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


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

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력 시*위라는 것을 하여야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군인들은 자제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있을 뿐 무*력 해산을 시키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들의 숫자 또한 엄청나게 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위한 군인들을 보며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런 사태 앞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하고 열심히 상급 지휘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작전 지시를 받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부대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그대로 두고 조선대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군인들을 환송하는 일도 있었고, 시*위대는 퇴각하는 군인들을 뒤따르며 군가를 불러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순순히 퇴각하는 공수 요원들을 보고 군인 대열에 뛰어들어 군인들에게 악수를 신청하고 안아 주기도 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군인들은 작전상 철수를 하는 것인데, 마치 군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좋아하다가 결국은 더 크게 멍든 게 아닌가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토록 좋아하던 순진한 그 젊은이는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우리가 퇴각하던 그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이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다. 또 밤하늘에 화광()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 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륙육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대학 앞 주택가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 연기에 주택가의 불은 다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고*함들과 비명들로 범벅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거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맞아 거의 초죽음이 된 한 시민을 발견하였고, 순간적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그를 업고 어느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하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한 골목을 들어서니 자그만 교회가 보이고 그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급히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네가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더니 이내 자신의 서재로 나와 함께 부상당한 사람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이미 거기에는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 들어온 몇 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다. 공수부대원 하나가 군화도 벗지 않은 채 소*총을 들고 들어갔으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불빛에 사람을 내려놓고 보니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었는데 이건 말이 아니었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노동자 같았는데, 머리는 진*압봉에 맞아 15센티 이상 벌어지고, 한쪽 팔도 맞아 부러졌는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업고 들어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 그 교회는 학일동에 있는 광주 새교회이고, 그 목사님의 성함이 정인보였다는 것, 그리고 당시 백발이 성성하셨던 그 목사님은 지금쯤 이미 고인이 되셨을 것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내가 부대에 복귀한 21일은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것이다. 나의 부대 복귀가 무전으로 지휘관에게 알려지고, 나는 우리 부대가 쉬고 있던 상무대로 트럭을 타고 가게 되었는데, 군복에 피가 범벅되어 돌아온 나의 모습을 보고 직속 상관은 대노하면서 나를 심히 다루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나는 그가 내게 한 말이 가슴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밤새 나 때문에 애태운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날 만하겠지만, 그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고 평소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아닌지라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그의 말인즉 비상 계*엄하에서 부대 이탈이란 즉결 처*형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밤새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다 아는데, 여기는 전쟁터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바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말하며 나의 부대 이탈에 대해 얼마간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그 중대장과 다른 지휘관들의 처리에 일말의 고마움을 느낀다.

이 날 21일 오전,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의 모든 병력이 집결해 있었는데, 밤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위대들이 격노하여 차량으로 무*장하고 군인들과 무력으로 대치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군수 공장에서 탈ㅊ취한 도시형 장갑차를 몰고 돌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광주 청문회 당시 부대를 지휘한 자가 이 부분을 거론하며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해 군인들이 희*생당하면서 발*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법원의 최종적인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앞에 나타날 때에는 거리에 군인들이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도청 앞에서 우회전하여 빠져나가고 말았다. 장갑차에 의해 공수부대원이 치어 죽은 것은 당시 우리 여단에서 몰고 다니며 사격을 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서이다.

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였는데,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시*위를 보장받으려던 사람들이 협상이 안 되니까 급기야는 차량을 몰고 돌진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군부대의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치게 되고, 그가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장갑차의 무한궤도 밑에 하반신이 깔린 그 병사의 상체가 위로 들려지며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던 처ㅊ참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특전사에 배속된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 병사였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전 비교적 아침 이른 시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난다.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와 군인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시내버스를 탄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시*위대를 뚫고 나가 군인들에게 위ㅎ협적으로 돌진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군인들이 흩어지고 그 차량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었는데, 이에 화가 치민 군인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갑자기 길가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마침 고무신을 신고 잠바차림으로 길을 지나던 40, 50대의 남자가 군인들에게 걸려들었고, 그는 금새 진*압봉에 맞아 기*절하였다. 주변의 사태는 점차 술렁이며 다급해져 갔다. 나는 아무래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아서 급히 뛰어들어 그를 안고 피신시키려 했다. 덩치가 큰 사람이었고 내 힘만으로는 부쳐 쩔쩔매고 있는데, 다른 대대의 중사 한 사람이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수백 명의 공수 요원들이 이를 보았고, 우리는 그를 끌고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후 시민들에게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그때 같은 중대의 상급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대*검을 들이밀면서 너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때 그 질문은 내게 부질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런 내게 그는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너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우리가 부상당한 사람을 질질 끌어 그늘지고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후 멀리 서 있던 시민들을 향해 보살펴 달라는 손짓을 하고 돌아올 때, 차마 군인들이 두려워 가까이 오지는 못하지만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던가.

전일빌딩으로 기억되는데, 그 앞에서 대치할 때에 청년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군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일도 있었다. 화가 난 군인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에 그는 피가 낭자한 채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검을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ㅎ협하는 군인들에게 창백하게 질려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그의 공포에 질린 눈과 모습 또한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나는 일병 계급의 신분으로 격*노한 상급자들의 살*해 의지를 느끼면서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끌려간 그 사람은 그때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21일의 도청 앞 발*포사건은 돌진하던 시*위대 차량들로 인해 퇴각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주죽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장갑차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캘리버 50 기관총으로 무수하게 사격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ㅎ협 사격이 아니고 분명 실제 조준 사*격이었다. 어떤 자는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의해 발포가 시작되어 대응사*격을 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한 모양이나, 내가 알기로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탈ㅊ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일들에 의해 군인의 사*격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지, 먼저 하였거나 함께 사*격으로 맞대응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도청에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우리는 곧바로 긴급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 때에 조선대 광장에서 장갑차가 학교 주변의 주민들과 아이들, 그리고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을 향해 계속해서 사격을 해댄 것도 기억이 난다. 철수하는 군인들을 보호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은데, 여기서 실제로 조준사*격을 하였는지 아니면 위*협 사*격으로 사람들을 흩뜨리기만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급히 짐을 챙겼고, 저녁 7시 경 어두울 즈음 급히 조선대를 떠났는데, 주요한 문서나 장비들을 트럭에 싣고 떠나야 했던 본부대 병력이 시내를 빠져 나오다가 시*위대의 총격을 받고 몇 사람이 죽*는 최초의 군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조건 앞사람만 따라 밤새 걸었고, 그 다음날인 22일 오전 11시쯤 되어서야 도착한 곳이 무등산 깊은 골짜기임을 알았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 전 병력뿐 아니라 확실치는 않으나 다른 여단의 병사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거기서 수송기를 통해 보급된 식량 및 일인당 580발의 실탄 그리고 수류*탄이나 가스*탄 등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는 지친 몸을 쉬며 작전 명령을 기다렸다. 우리는 야만의 숲에 갇힌 맹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산중에서는 아마 포로로 잡아 왔던 대학생을 총*살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일을 나는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목격한 다른 대대의 병사 하나가 내가 아는 후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왜 이런 부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당시 그 일은 부대 내에서 소문으로 돌기도 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 공수부대가 머물렀던 그곳에서 총*상을 입은 유골이 발견되어 그것의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다른 대대의 한 중대가 국도변에서 매복을 하다가 시*위대 차량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하여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사*살한 일도 발생하였는데, 당시 그 버스에 탔다가 유일하게 생존하여 후에 그 일을 증언한 한 여학생은 군인들이 피ㅌ투성이가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무등산 골짜기에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을 머물렀고, 그 후 도청이나 광주 주요 시설들에 대한 탈환 작전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사이 이상하게도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취소된 적도 있었다. 아마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하는 최종 진*압 작전에 대해 한미 군부 내에서 이견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는데, 나는 아주 오랜 후에야 전*쟁에 대비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데프콘의 상황에서는 군 작전지휘권이 한미연합사로 넘어가고 미군측의 허락과 동의 없이는 어떤 군사적 행위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아무래도 임박한 시내 진입과 주요 시설 탈*환을 위한 작전에서 큰 희*생자가 나고 또 내 생명도 위*태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고, 텐트에서 나와 좀 떨어진 한적한 바위 밑에서 기도를 하였다. 너무 피로했고 또 단조로운 군생활에 아둔해져서인지 또렷한 의식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하나님, 제가 그래도 목사가 되겠노라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사람인데, 이제는 무죄한 사람을 죽이여야만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제가 언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이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으니 나로 이 궁지를 벗어나 죽*이지도 말고 죽*지도 말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당시 계절은 신록의 봄으로 산하는 한없이 푸르렀고 생명감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이 날은 나뿐 아니라 많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요 처*참한 비*극의 날이 된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갑자기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데, 산 속에 비트를 파고 숨겨 논 배낭과 장비들까지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투나 작전을 하기 위한 출동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철수하는 것임을 뜻하였다. 광주 외곽에 있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새 거처를 잡고 아마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시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 모양인데, 천여명의 병사들이 수십 대의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개인당 580발의 실*탄과 수류*탄이나 가스*탄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실*탄을 장전하고 경계하며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다. 국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간간이 민간 마을을 향해 사*격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광주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고 마을의 주민들이나 아이들도 시내의 소요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모내기를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왜 군인들이 그런 마을을 지나며 사격을 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두발씩 들리던 총성은 이내 콩볶는 듯 하는 요란한 소음으로 바뀌었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나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군인들의 말로는 시*위대가 나타나 그랬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사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실*탄 장전이 된 소*총을 가진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을 해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이런 와중에 애꿎게 총에 맞*아죽*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럿이었다.

잠시 후 송암동이라는 곳에서는 그러한 것보다 더 끔찍하고 내가 경험한 광주사태 중 가장 처*참한 일이 벌어진다. 광주 보병학교 일개 중대가 무반동포로 무*장하고 매복하다가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차량이 나타나자 이를 시*위대 차량으로 오해하여 사*격을 해대는 일이 발생한 것이 그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고 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군인들이 평온한 주택가를 향해 사격을 해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몸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다가 머리 부분에 총상상을 입는 일을 당했다

보병학교 병사들은 무반동포로 앞서 가던 장갑차를 명중시켜 깨어 버렸고, 뒤따르던 차량들을 향해서도 계속 공*격했다. 갑자기 폭*발음들이 사방에서 나며 총*격이 가해 오자 당황한 우리 쪽 군인들은 사*격으로 대응하거나 차량에서 뛰어내려 급히 길 옆 도랑으로 피신했다.

내가 처음 무언가 내 신체에 총*격이 가해진 것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나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었고, 만약 죽*더라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내가 어디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나를 확인했다. 머리 뒤를 만졌는데 피가 낭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얼굴을 더듬었는데, 이는 만약총*알이 머리 뒷부분을 때리고 관ㅌ통했다면 앞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굴을 더듬어 보았으나 구멍은 없었고 뒷머리 부분의 상처도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멀리서 손짓하는 불빛처럼 깜박였다. 차 안에는 나 홀로 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도피하는 동료들이 보였고, 사방에서 들려 오는 폭*발음과 총*격 소리, 무엇보다 살아나려면 빨리 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차량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거대한 폭*발발음파 함께 내 몸이 천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뒹굴게 되는 두 번째의 변을 당했다. 아마 무반동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내 주변에 터진 것이었다. 폭*발에 휩싸이는 순간 나는 온몸이 큰 방망이로 맞고 찢*기는 듯한 큰 고통을 느꼈고. 다가온 주금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 치며 울부짖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온몸이 파편에 뚫리고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나는 땅에 엎어져 한없이 아! 하나님, 아! 하나님을 외치며 절망 가운데 부르짖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의 내력도, 신학생이라는 나의 신분도 한 순간 다가온 죽음의 공*포보다 더 절실히 하나님을 찾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이 조금 지난 후 차츰 의식이 돌아왔는데, 주변에서는 여전히 포*탄이 터지고 요란한 총*격이 오가고 실*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 내가 벌집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상호 오인으로 인한 교전은 잠시 후 멈추게 되었고, 평정을 찾은 후 사태 수급이 시작되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동료들의 시*신이 즐비하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뼈가 허옇게 드러난 것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난21일 아침 내 앞에서 어젯밤 스무 명을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옆 중대의 하사관도 있었다.

나는 그저 땅에 엎어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호흡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입만 하늘을 향해 벌어지는데 이제 영락없이 죽*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재차 엄습하였다.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호흡이 다시 돌아오고 비로소 나는 내게 벌어진
05/05/1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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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에서의 댓글과도 사뭇 다르게, 이쪽에서의 데모님과 카이사르님의 댓글도 꽤나 본성을 드러내는 듯 하군요.
몇 마디만 하고 저는 마무리하겠습니다.
1. 민주주의의 적에게는 민주주의가 없다.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 아실 만하시면 그저 침묵하시리라 믿고, 모르시면 네이버를 이용하십시오.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카이사르님이야 험한 서울기동대 생활을 하며 미친 대학생들에게 여러번 생명의 위협을 당하신 모양이니, 일종의 트라우마가 형성된 불쌍한 분으로 생각하렵니다.
데모님은 정체를 모르겠네요. 자꾸 간첩간첩하시는 걸 보면, 국정원 직원이거나 독립신문 필진이거나? 어렵네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광주시민들도 무고한 건 아닙니다. 남파간첩들의 흑색선전, 유언비어에 현혹돼 국가 안위를 위협한 '소요범'이 되는 거니까요. 심하게 말하자면 내전을 일으킨 거고요. 이러한 정치적 결론, 조심스럽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잘나가는 안기부, 기무사는 5.18 당시를 전후하여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을까요? 아무나 잡아서 하루만에 사형시키곤 하던, 서슬퍼렇던 그들이 말입니다. 몰고 가려했으면 충분히, 조작해서라도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던 그들이었음에도 말이죠. 설마하니 그 간첩들이 모두 도청에서 분사했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05/05/1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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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와서 말씀이지만, 국적포기자 명단도 발표하라고 난리인 이 마당에, 당시 계엄군들 명단을 발표해보는 건 어떨까 싶어요.
보아하니 그쪽 분들은 광주에 참여했던 걸 굉장히 뿌듯해 하시는 모양인데, 훈장은 못 드려도 이름은 역사에 남기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05/05/1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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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get=_blank>http://www.metro.gwangju.kr/phps/menu/menu.php?m=070106140000&l=KOR&d=000

광주의 역사
3. 광주 민중항쟁의 전개과정

모든 대학에는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지고 계엄군이 교내에 진주했다. 광주에서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18일 자정부터 전남대에 진입하여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이 날 전남대 . 조선대 . 광주교대에서 연행된 학생은 모두 112명이었다. 북한군과의 비정규전을 수행하기 위해 훈련된 공수부대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는,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희생자들을 발생케한 요인이 되었다.

계엄군과 학생들의 첫 충돌은 5월 18일 전남대에서 일어났다. 학교 정문을 지키던 군인들은 귀가를 종용했지만 100여 명의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문 앞의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후 학생들이 2∼3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했는데, 학생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부상을 입고 쫓겨났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다시 광주역 광장에 모여 대열을 가다듬고 '비상계엄 해제' . '김대중씨 석방' . '휴교령 철회' . '전두환 퇴진' . '계엄군 철수' 등을 외치며 도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했다. 인파는 수천명으로 불어났고 점차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3시경부터 시내로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공수부대의 잔인한 살상으로 말미암아 시내 곳곳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희생이 속출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청년과 학생을 보면 총검과 곤봉으로 무조건 찌르고 구타하거나 연행하는 등 처참한 살륙극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학생과 시민들도 관공서를 습격하거나 경찰의 페퍼포그차에 방화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오후 5시경에는 이른바 농장다리 부근에서 시위대가 일부 경찰들을 붙잡아 인질로 삼기도 했으나, 곧바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아 도망치기도 했다. 오후 7시쯤 계림동에 위치한 광주고 부근에서는 시위대와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는 각목이나 쇠파이프 등으로 공수부대를 공격했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총검을 소지한 공수부대에 맞서 단순히 방어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치열한 접전 끝에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밀린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오후부터 산수동과 계림동 일대에는 들불야학과 전남대 학생들, 그리고 현대문화연구소의 '광대' 회원들이 제작한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이 날 최규하 대통령은 '5.17'과 관련된 성명을 발표하고 계엄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방미 중이던 존 위컴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으나, 미국 정부는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이로써 광주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일단 후퇴한 공수부대는 전열을 가다듬으며 광주 지역 예비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했으며, 부대원의 야간배치까지 완료했다. 이들은 36개 지점을 선정하여 각 지점마다 계엄군 1개 지대(장교 1명, 사병 10명)와 경찰 2개 분대(24명)를 배치시켜 경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수뇌부는 제3 . 제11 공수여단과 육군 제20사단의 광주투입을 결정한 후 먼저 제11 공수여단을 광주로 급파했다.

이처럼 5.17 계엄확대에 맞서서 학생과 시민들이 봉기한 지역은 전국에서 오로지 광주뿐이었다. 다른 지역과 사정이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광주에서만 민중항쟁이 시작된 점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적어도 김대중의 연행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1979년 부 . 마항쟁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3김씨 가운데 유독 김대중과 그 측근들만이 연행된 사실이 광주 시민들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5월 19일,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대학을 제외한 초 . 중 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와 기업체 등에서도 대체로 정상근무를 했다. 그러나 도심지역 상가는 대부분 철시했고 군인과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인해 긴장감이 돌았다.

10시 40분경 경찰이 최류탄을 발사했고, 시민들은 투석으로 대항했다. 그러자 11시 30분경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건물과 주택에 난입하여 닥치는대로 무조건 연행했다.

화염병과 돌맹이, 최루탄이 난무했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경비를 서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에게 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시위의 형태도 공격적인 형태로 바뀌었으며, 시위대의 지도부도 학생에서 시민으로 대체되었다.

시위소식을 접한 공수부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내로 돌진해왔다. 그들은 먼저 가톨릭센터에 진입하여 동료들을 구출한 후, 시위대의 해산에 나섰다. 이후 양측은 더욱 격렬하게 충돌함으로써 양측 모두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남교육위원회는 시내 37개 고등학교에 20일 하루동안 휴교령을 내렸다.

공수부대는 형식상 광주의 3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조속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워 강력진압을 지시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19일 오전에 다시 3공수여단을 증파했다. 이로써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3,4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지도부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평범한 여성인 전옥주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녀가 가두방송에 나서서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것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큼 호소력이 뛰어났으며, 시위의 확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운전기사들을 중심으로 차량시위가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20일 오전, 시민들은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를 맞으며 다시 시내로 모여들었다. 광주역과 공용터미날 등을 경비하는 공수부대는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수만명의 인파가 금남로를 메웠다. 이무렵
투사회보
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그 유인물은 광천동에 소재한 들불야학에서 윤상원을 비롯한 교사와 야학생들이 발행한 것으로, 정부와 언론의 흑색선전에 맞서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오후 5시 50분경 충장로 입구의 시위대 5천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이 때 시민들은 저지하는 경찰들에게 '공수부대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으니 비켜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오후 3시경부터 무등경기장 앞에 택시들이 모여들었다. 세 시간이 흐른 오후 6시경에 차량은 200대를 넘어섰고, 운전기사들은 전조등을 켠 채 차량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오후 7시경 금남로에 도착했는데, 선두에는 12톤 트럭과 버스들이 앞장섰고 200여 대의 택시들이 뒤를 이었다. 금남로 주변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차량행진을 열렬히 환영하며, 자동차 행렬에 가세했다. 수백대의 차량을 앞세운 시위대는 도청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혈투를 벌였다.

시민들은 시내로 계속 몰려들어 20여 만명으로 불어났다. 결국 계엄군은 이날 밤을 고비로 점차 수세에 몰렸으며,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내권은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쟁에 의해 '해방'되었다. 시민들은 왜곡보도를 일삼아온 MBC와 KBS 방송국을 점령하였으며, 그 중에 MBC방송국이 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MBC가 특히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신군부의 입장만을 두둔하였기 때문에 성난 시민들이 방화한 것이다. 시내의 대부분의 파출소도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 4명이 돌진차량에 의해 희생되기도 했다. 또한 시민들은 시청을 장악하였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시위군중들은 광주역과 도청의 군 . 경 저지선을 향해 나아갔다. 이에 맞선 계엄군도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저지선이 무너질 상황에 놓이자, 계엄군은 신역과 도청 앞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시위군중은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총격을 두려워하여 해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장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시내 곳곳에서 자발적인 전투부대가 조직되었고, 전투나 지휘 경험이 있는 시민들이 지휘부를 형성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총기로 무장한 것은 아니었다. 밤새 전열을 정비한 시민들은 21일 새벽에 공수부대와 충돌, 4시경에 마침내 광주역을 장악했다.

21일 아침, 시민들은 광주역 공방전에서 숨진 시신 2구를 손수레에 싣고 태극기로 덮은 채 시내로 행진해갔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는 10만 인파로 뒤덮였다. 이때부터 문화선전팀이 활동을 시작했으며, 길가에는 시민들의 주장을 담은 현수막과 벽보가 나붙었다.

이 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TV를 통해 처음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담화문에서 그는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 방화
. 선동'에 따라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라며 사건의 본질을 철저히 왜곡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광주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터졌음을 알게 되었다.

시위대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버스 . 트럭 등을 징발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식사를 시위대에게 제공한 것도 바로 이무렵부터였다. 10시 30분경 도청 당국은 철수결정에 따라 헬기로 무기와 서류를 실어날랐다. 도청 방어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그들은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맞추어 시위대를 향해 약 10분 동안 총기를 난사했다.

설마 또다시 발포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시민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으며 금남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분노한 일부 청년이 트럭을 몰고서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으나 집중사격을 받아 희생되기도 했다. 이 날의 발포책임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점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당시 신군부세력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다.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으며, 파출소나 예비군 무기창고를 공격해서 가져온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징발한 무기는 카빈소총 6백여 정, M1소총 200여 정, 탄약 5만발 등과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다이나마이트 등이었다. 이로써 무장한 시위대는 이제 시민군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광주공원의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고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계엄군의 불의의 총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시민군은 오후 3시 20분경부터 무력항쟁에 돌입했다. 시민군의 활동은 항의성 시위에서 시가총격전 형태로 바뀌었다. 고도로 훈련된 공수부대와 맞서 싸웠으므로 시민군의 피해가 훨씬 컸다. 그러나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민군들은 대오와 편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오후 4∼5시경에 수천명의 시민들이 항쟁본부가 있는 광주공원으로 몰려와 무기를 지급받아 1조당 10여 명의 대오를 갖추었다. 이렇게 조직된 시민군은 처음에 약 3∼4백명이었는데, 이들은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되었다.

시가전이 한창이던 오후 5시경에 일부의 시민군은 전남대 부속병원의 옥상에 올라가 LMG 기관총 2정을 설치했다. 이들은 12층 높이의 병원 옥상에서 약 300M 떨어진 4층 높이의 도청을 향해 사격했다. 이에 당황한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경 도청에서 철수했다. 시민군에게 포위당한 계엄군은 장갑차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서 총기를 난사하며 조선대로 퇴각했다. 전남도경 간부와 경찰들도 각자 도청을 빠져나갔다.

계엄군과 경찰이 도청에서 철수했지만 시민군은 미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저녁 8시경에야 도청이 텅비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예의 군경을 몰아낸 시민군은 도청에 들어가 감격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이로써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의 주요 기관들을 모두 장악했다. 시민들이 항쟁에 나선지 나흘만에 계엄군을 물리침으로써 신군부가 의도했던 '조기해결'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한편, 미국측은 광주의 상황이 심상치 않자, 광주거주 미국인 약 200명을 서울로 피신시켰고, 광주 공군기지에서 보유한 미공군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의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계엄군의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뿐 아니라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화순 . 나주 . 함평 . 영암 . 강진 . 무안 . 해남 . 목포 등지에서도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사실, 항쟁지도부는 처음에 항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전주와 서울로의 진출을 모색했었다. 그러나 계엄군이 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함으로서 좌절되었다.

광주와 달리 목포에서는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없었으며, 전반적으로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함평의 시위대는 23일부터 함평경찰서를 본부로 삼고 외곽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친 채 자체 경비에 나섰으나 계엄군과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무안군민 역시 경찰서와 지서를 접수하고 무장했으나 역시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영암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22일부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경찰지서를 접수하여 숨겨진 무기를 찾아내어 무장하고서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24일에 계엄군과의 교전중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해남시위대는 오후 10시경 완도까지 진출했고, 이튿날에는 강진 . 영암 . 무안 . 목포 등 전남 남부지역을 차례로 돌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들 역시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무장했으나 군부대와의 협상에 의해 자체적으로 수습하기로 하고 시위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반발한 일부 사람들은 23일 새벽 1시경 해남의 우슬재에 매복중이던 진압군과 교전을 벌이다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화순의 주민들도 항쟁에 적극 동참했다. 21일 광주에서 시위대가 내려와 시위를 주도하자 열렬히 호응했던 것이다. 이들은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여 징발한 무기와 화순탄광에서 광부들의 협조를 받아 입수한 다이나마이트를 광주로 운반했다. 또한 이들은 벌교와 보성을 돌며 무기를 수집해서 광주로 가져왔다.

한편, 5월 22일에 광주는 그야말로 '빛고을'의 봄기운이 무르익은 햇살로 가득찼다. 어지러운 총격과 군화발자욱 소리, 그리고 섬찍한 핏내음과 신음소리 등이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특히 총검을 비켜메고 시내를 활보하던 얼룩무늬 공수부대원들이 보이지 않은 광주는 더욱 아름다운 '해방의 도시'였다.

이무렵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계엄군은 광주와 연결된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서 주요 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시민군이 나타나면 총을 쏘아댔다.

이날 정오경 신부 . 목사 . 교수 . 변호사 . 정치인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저녁에는 학생들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전자는 계엄사측과의 협상을 맡았으며, 후자는 대민활동의 임무를 띠었다.

23일 오전 11시경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는 10여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여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시민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혼연일체가 되어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광주민중항쟁을 높게 평가받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계엄사에서 시민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수습위원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공수부대의 잔인무도한 살상을 목격한 일부 시민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무기반납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온건파는 더 이상의 큰 희생을 막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의도에서 무기반납을 주장했다. 결국 온건파는 배제되었고, 강경파가 두 개의 수습위원회를 모두 장악했다. 24일 오후, 항쟁지도부가 분열된 가운데 진행된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는 시민의 참여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투쟁열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이처럼 어수선한 틈에 정보요원들이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폈으며, 심지어 도청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25일에 이르러서도 시민군의 무장해제와 거부를 둘러싸고 항쟁지도부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고 더욱 첨예화되었다. 이날 열린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전날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도청의 항쟁지도부는 지금까지 집계된 사상자 수를 발표했는데, 신원이 파악된 주검 169구, 신원파악이 불가능한 주검 40여 구, 중환자 520명, 경상자 2,170명, 행방불명 2천여 명 등이었다.

이날 밤, 도청에서는 최후까지 투쟁하기 위한 지도부가 결성되었다. 시민군 투쟁위원장 김종배를 비롯한 대변인 윤상원, 내무부 위원장 허규정, 외무부 위원장 정상용, 기획부장 김영철, 상황실장 박남선 등이 그들이다.이들은 계엄군의 공격시 도청에 설치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다이나마이트는 이미 뇌관이 제거된 상태였다.
(부분 인용)
물탄푹설
05/05/1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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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떠있는 글들을 발췌해서 포장하는것 같은 글올리기도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이것도 민주주의 니까 다른시각으로 판단할수 있는겁니다.) 논점을 잡지 못하는 비교식 나열로 자신은 논리적이라고 하면 6.25전쟁은 외국압제를 몰아내려는 조국해방전쟁이었다는 북한주장도 다 갖다댈수 있는게 그런 비교식 나열아닙니까? 광주민주화 운동이 실재 부마사태에 비해 우리 현대사에 어떤영향을 끼쳤는지 그 근본부터 싹 덮어버리는 글에 개인적으로 실망스럽군요. 왜 광주에서 대규모 살육사태가 일어났는지 어째서 시위가 잦아들던 광주로 완전무장된 대규모 군병력이 진주해 들어갔는지 등 진짜 핵심이 되는 광주의 진실을 역대정부(김대중씨를 그래서 신뢰하지 않습니다.)누가 확실히 밝혔습니까? 아니 당장 그잘나게 인용하고 추론하는 대북세력 간첩등등 한나라당의 전신 민자당이 김영삼정권시절 총선에서 대패할게 기정사실화로 여겨지던 때 뜬금없이 휴전선초소에서 땅좀파는 북한군병사들의 행동가지고 전쟁이 어쩌고 해대던 것이 이정부의 면면인데 진짜 진실은 알면서도 함구한것들 아닙니까? 영남,호남으로 갈려져 심지어 일국의 대통령이 맘에 안든다고 싸그리 없애고 새로 종자를 깔았으면 좋겠어! 각하 그까짓거 탱크로 한백만명 쓸어버리면 끝입니다. 하던게 이나라의 불과 얼마전 현실입니다. 전두환씨 몰아대면 그것은 결국 영남을 해꼬지 하는것이다 가만못있는다 이고 반대로 피붓이 때로 해먹어대도 호남의 눈이 있는데 해서 넘어가는것 아닙니까 얼키고 설킨 감정의 골에 어차피 서로가 백태쓰고 바라보는데 무슨 이것봐라 저것봐라 이상하지 않는냐 인지 솔직히 헛웃음 나오는군요 왜 계엄군이 왜 무장군병력이 광주로 들어갔는냐 라는 기본중의 기본부터 말이 엇갈리고 누구도 난 그런지시한적 없다는데 어디서 답이 떡하니 있다는 겁니까? 결국 항시 해대는 역사에 맡기자! 그럼 반대로 광주로 최고의 수혜자가 된 이는 어떤부류들입니까?
05/05/1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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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의 민족-자주-민주 해방운동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해방의 광주...아름다운 등으로 미화하는 것을 보니까 바로 간첩이 떠오르던데, 너무 과민한 것인가요? 사건 전개 과정이 너무 공산주의 혁명과정과 유사하지는 않습니까?

광주사건의 의문점. 왜 공수부대가 진압을 했을까? 공수부대 3400여명과 시민 10만-30만여명의 싸움. 공수부대가 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왜 광주에서만 그토록 무력투쟁이 심했는가? 다른 전남지역은 상대적으로 평화적 시위였는데 말이다. 현재 당시 발포자로 의심되고 있는 사람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입니다.

자 이 글에서도 전옥주/윤상원에 대한 기록은 나옵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님이 올린 글이 근거가 아주 없는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석의 문제이지요.

부마 사건과 광주 사건을 비교해서 봐주십시요.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학생과 시민 중심의 박정희(朴正熙)의 유신독재에 반대한 반정부시위사건.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비록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똑같이 반정부 시위에 폭력시위에 관공서가 파괴되고 학생-시민 시위에, 똑같이 계엄령에 군이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주가 초기에 진압되지 않았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전 그 이유로 간첩의 존재 유무를 말하겠습니다.

ps) 지금은 진보적 방송인 것처럼 말해지는 mbc가 그 당시는 신군부측 방송으로 여겨서 불태워졌다는 사실이 재미있군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 아무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법 정권이니까 무장투쟁이 합법적이라고요? 불의를 보고도 죽지 않는 것은 비겁한 행위라고요? 그들은 죽었으니 열사고 진정한 민주주의 세력이라고요?

그 때 무력 시위가 성공해서 전라도 독립국이라도 만들어졌다면 상황이 더 좋았겠습니다? 저는 서로 각자의 주장만 고집하다 월남/월북으로 갈라져 패망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조그만 땅덩이에서도 전라도니 경상도니 충청도니 갈라져 싸우는데, 과연 시민혁명이 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장면 내각의 혼란을 생각해보십시요.

지금도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고요?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사실에 근거한 비판보다, 공동체에서 추방되어야할 자로 매도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 민주주의는 100년이 지나도 안올 것입니다.
악돌이
05/05/1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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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괴상한 댓글들이 역사를 호도 하시는 군요 좀 열이 받네요...

카이사르님 .....전 전투경찰 출신입니다. 님 글을 읽어보면... 다른나라분 같군요..물론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입니다...하지만 그 이긴자라는 의미는 성공한 구데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굴린 자들을 의미하지요.....그런의미에서 광주 폭도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바뀌는 것은 그들이 역사의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불의에 굴하지않는 정의이기 때문이죠.....그것이 총...이러한 것들로 희석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권마다 그 평가가 달라진다.....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 받아드리고 싶거나 혹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거나 겠지요...
그리고 정권의 평가가 역사의 평가가 되는건 아닙니다... 그차이를 망각하시지 마세요.......

그리고 데모님.....

님께서 말한 논쟁은 항상 아니 한참 지역감정이 심할때 제고향 부산이나 경상도분들이 5.18을 격하시키기 위한 논거와 너무 비슷하네요(한번 그쪽과 비교해 보시길...)...간첩이라 역사상 위대한(?) 스파이는 많았으나 과연 역사에 수레바퀴를 흔든 간첩이 누가 있었나요....아마 세계 첩보사에 1위의 첩보원이겠군요.....

국내의 언론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님의 시각에서 보면 어느쪽이든 문제가 있을겁니다......작년인가 재작년에 방영된 자료가 아마 독일 하고 미국 외신 자료인걸로 기억하는데요.. 찾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네요....

그리고 부마랑 광주는 틀립니다.....왜냐구요.....역사는 한축은 시간이니까요...그리고 부마가 민주화의 성지가 안 되고 광주는 왜 민주화의 성지냐....왠지 투정 같군요.....

데모님 제가 그냥 님글에서 느낀점을 가지고 님께서 좀더 나은 의견을 가지시기를 바라는 맘에서 적었습니다... 한가지만 이야기 하자면요 너무 근거의 표면만 아시는것 같아 맘이 아픕니다.....(님의 이야기 대로 라면 조선시대 반정은 전부 똑같은 평가를 받아야 겠지요) 좀더 많은 고민과 주변정황을 살펴보고 가슴으로 느낀 다음에 이야기 하심이.....무언가 하나가 빠진듯한 느낌을 주네요........
IntoTheNal_rA
05/05/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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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은 그 사건자체, 이를테면 발포를 언제했네, 간첩이 개입이 됐네 안됐네..같은것을 보는것보다는
사건전에 일어났던 서울에서의 대규모 학생시위등을 비롯한 배경과
전라도, 전라도출신이 받아왔던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지역차별 등등을 봐야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결론이 난지 오래된 문제죠.
근데 그걸 가지고 논쟁하는게 이해가 안되고, 굳이 여기서 논쟁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일합방은 한국에 있어 커다란 축복이었다'
를 가지고 논쟁할 가치가 없는것과 같죠.
물론 카이사르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는 말씀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를들면,
우리는 '조갑제가 의견을 주장할 자유'만을 존중해야지
'조갑제가 주장하는 의견 그 자체'를 존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좀 다른얘기를 하자면,
자꾸 간첩,간첩하는데,
설령 만의 하나 간첩의 개입이 사실이다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간첩은 자신이 의도하지않았던 '반독재투쟁'을 얼떨결에 하게된것에 불과합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있는데,
그것을 부정하는 군부에 맞서서 '봉기'를 하도록 부추겼으니
그 간첩은 직무유기를 한셈이죠.
카이사르님의 1)~~50) 을 죄다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북한이 남한에 민주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공작을 한게됩니다.
우스운 일이죠.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05/05/19 14:43
수정 아이콘
당시 사진을 보는 것도 눈을 다양하게 뜨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요.
target=_blank>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079&pn=5&num=3159


거기의 댓글을 몇 개 옮겨 봅니다.
류상우 : 광주항쟁의 시발점을 간과하고 있군요 .12.12이후 광주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위는 연일 계속되고 있는 혼란기 였습니다. 특단의 강경한 진압이 필요했던 때였다는 얘깁니다. 2005-05-07

전영남 : 부마사태 진압한 공수부대가 광주 가서 같은 방식으로 진압하려다 시위대들한테 판판이 깨졌다는거 아닙니까? 류상우님은 당시 진압에 참가했던 특전사 장교의 수기를 못 읽어보셨나요? 그 글을 읽어보면 5.18 청문회때 이해찬 의원이 제시한 진압군이 시민을 살해한 장면이라는 증거 사진이 광주가 아니라 69년 간첩 작전때 사진이라는걸 지적해내더군요.2005-05-07

이희룡 : 결론은 어떤게 맞는지 모름니다.. 젤 무서운게 군중심리를 이용하는겁니다 배후가 있었을 거라는데 한표던집니다. 2005-05-07

박아람 : 특전사대원수기에서도 자기 대대 장갑차를 시민군중에 무반동포로 맞춰서 깨졌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간첩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소수의 간첩들이 활동하며 시민군을 이끌었다기보다는 분위기를 몰고갔다고도 생각해볼수있지않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간첩들이 활동을 안했다면 그것또한 이상하지않습니까 북한으로써는 절호의 찬스였는지도 모르는데..............2005-05-07

류상우 군중심리도 작용했을겁니다만. 작용하기 이전의 시발점이 무었이었겠느냐가 중요한게 아니겠습니까? 시위도중 국군의 총에 옆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면 분노가 증폭되었을 겁니다. 옆집친구 동생 형이 시체가 되어 누어있다면 누구라도 길로 뛰쳐나가지 않았겠습니까? 2005-05-07

이동진 : 극소수는 불순 분자들이 있었을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말씀 그대로 절호의 찬스였는데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테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찌-라시정도는 뿌렸을꺼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군과 민을 이간질하는 목적이지 않았나 싶고 우리끼리 치고 받으며 기력을 소진하게끔 하려는 의도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희생당한 군,민 양측만 불쌍하게 된 셈일테죠. 2005-05-07

이동진 : 불순분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전체인냥 폭도로 규정하여 매도할일도 아니고 질서회복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을 무작정 흉폭한 무리들로 간주해서도 안될 일일테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가장 핵심 사항은 아무래도 박통 시해 사건이후 은근슬쩍 정권을 탈취했던 전두환이라는 인물쪽에 무게 중심이 쏠릴수 밖에 없을테니까요.2005-05-07

고현우 광주민주화 운동시 참가했던 시민입니다.첫발포가 벌어졌던계기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만 첫 발포계기는 이렇습니다. 금남로 도청앞에서 대치는 시민쪽은 큰차량들이 정면에 대치했고 그뒤로 시민들이 대치하였으며 공수부대원들은 일정한 거리를 띠고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대치하였는데, 시민쪽에서 장갑차가 [바리쿠다 비슷한 바퀴달린 장갑차였죠] 1대가 공수부대원쪽으로 띠어들어 공수부대원 2명을 들이받고 가로수를 박고 정지했을때 일제히 정면에 시민들 차량이 공수부대원쪽으로 일제히 밀고 들어가고 시민들도 우르르 앞으로 밀고가며 돌을 던질시 공수부대원이 후퇴하다가 공포를 발사후에 충장로쪽으로 발포하여 시민들 열댓명이 콩나물 떨어지듯 길바닥에 떨어질때 뒤도 안보고 마음으로 살려주세요 하면서 광주공원까지 띠었드랬죠.젤정면에 잇었던 나는 전일빌딩쪽 에 다행이 잇어서 총격의화는 피했지만 장갑차에 탔던 분과 충장로쪽 시민들은 화를 당했던 첫발포 사건의 전모입니다.그뒤로 발포후에 광주 모든분들 공무원 포함 시민들과 합세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갔던계기이고 수백명이 차디찬 주검으로 무참히 학살당했던 비참한 역사의 서전이엿습니다. 그당시 시민들이 간첩들도 검거하여 나중 군수사당국에 넘겼던 일화도 잇었답니다.2005-05-07
05/05/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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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람 : 왠만하면 지저분하게 댓글달지 말고 리플 달고 토론할 수는 없나요. 부마 항쟁과 서울 시민 운동을 예로 들던데 부마항쟁당시 장갑차랑 소총과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시민군이 있었나요? 계엄군의 첫실탄 발포가 있기 전부터 시민군들은 무장을 한 상태였었습니다. 그리고 방송국을 점거했으면 외부로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마항쟁당시 시민들의 무기수준은 화염병 아니면 각목이나 쇠파이프가 다 아니던가요? 감히 누가 부산 시청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할 생각을 할까요? 그게 다른 도시와는 틀렷던 점입니다. 저도 일반 시민들의 죽음에 애도하고 안타깝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사이에서 간첩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정보를 제공했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군수공장이 있다거나 시청이나 경찰소 어디가면 총을 얻을수있다던지 다이너마이트를 광주시청 지하에 설치하자던지.. 그래서 다른 지역과 달리 더욱 강경하게 진압했을수도 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박아람 : 기관총과 무반동총까지 무장한 시민군들의 무기 화력이 너무 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이트에 올려진 기관총 사진을 보십시요. 편집자 주) 만약 광주시민들도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를게 없이 그냥 일반적인 시위수준이 었다면 그렇게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광주시민들을 전부다 간첩 빨갱이라고 매도했나요? 난독증이 있습니까?

고현우 : 당시 아시아자동차라는 방산업체에서 시민들에 의해 담이 무너져 그 안의 덤프차량과 장갑차가 탈취되었을 때 시민들과 같은 광주시민들이 대부분이었던 방산업체인 아시아에서 충돌을 피하고자 부득히 보고만 있을수 밖에 없었죠. 그밖에 광주에 있던 군사단에서도 실탄과 총기가 탈취됬는데 나중 사태후에 그사단장이 보직해임된 걸로 압니다. 무차별로 공수부대원이 광주시민들에 발포하고 무참히 죽어간 같은 동네 같은 학우들을 바라볼 때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될때까지 끝까지 간다는 구국이념으로 뭉치게 된 계기였죠.

임형섭 : 박아람씨// 광주시민들이 처음부터 무장을 했나요? 공수부대가 진주하기 전까지 광주에 시위다운 시위도 없었어요..아래 댓글에 달린 내 글중 제일 처음사진 그것이 공수부대 진주전의 광주의 시위였네요.. 그러던 것이 공수부대가 전대에 주둔하고 학생들 때리고 학생들이 항의하니 더욱가혹하게 곤봉으로 때리고 공수부대들이 대로에 나와서 아무나 때리고 시민들이 그러지 말라고 군대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그러지 말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도 가혹하게 나왔고 그러다 갈등이 불거진것이지 어디 시민이 처음부터 무장을 했나요? 무장은 사람이 죽어나간 후부터입니다..2005-05-07

임형섭 : 공수부대가 서울에서 부산에서도 사람을 죽였으면 부산시민들 무장 안할것 같습니까? 안한다고 보시나요? 지금이야 광주 하면 데모가 생각나지만..박정희정권 집권때 놀랍게도 광주에서 크게 저항한 적이 없어요.. 부산 서울이 저항했지.. 광주가 그 당시는 그렇게 데모하고 그런곳이 아니였다 이 말입니다.. 2005-05-07

전영남 : 말이 나온 김에... 누가 잘못했다 아니다 따지는 것을 떠나서 광주 항쟁이 도대체 머길래 발생한지 25년이 지났건만 담론조차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를 계속 조장(?)하고 있는건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속된 말로 민주화 운동은 광주만 했나요? 또한 군인들은 어디까지나 명령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광주 5.18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민주화 운동의 모든 것, 심지어 정치와 역사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까지 삼고 있든데 말이죠. 그러나 저의 입장에서는 서울 시민의 시위나 부마, 광주 모두 그 중요성의 경중이 다르지 않는 같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광주 시청 지하에 엄청난 양의 다이나마이트를 묻어두고 여차하면 폭발시키려고 했다는데 다행히 시민군의 어떤 분이 진압군과 내통(?)하여 폭탄 전문가가 비밀리에 잠입, 뇌관을 해체시켰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게 터졌더라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을테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민군에게 그냥 맡겨놓았다면 광주는 해방구로 계속 남아 김일성에게 오판의 빌미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폭하여 광주시를 폐허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볼 수가 있겠군요.2005-05-08
05/05/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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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규 :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사건이지만 불순세력도 있었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5.18과 관련해 의문이 남는 것은:

1. 왜 평화적으로 시위를 통제할 수 있었다던 경찰들이 옷을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발생했으며, 2. 평화적 시위였다면 방송국을 온건히 접수하여 시위의 정당성을 알리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데 왜 방송국을 불지르고 파괴를 했는가 하는 점, 3. 5.18 진압 당사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교도소를 방화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려던 "시민군"에 발포를 한 부대장은 무죄를 선고 받은 점. 4. 김일성이 5.18 사건 이후 "그때가 남조선을 교란시킬 절호의 기회였다"고 털어놓은 점 등입니다.

제 생각으론 일단 경찰이 통제를 하지 못할만큼 규모가 커졌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군대가 들어올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는 것이고(군이 경찰을 무시하고 그냥 탱크 밀고 들어오는 게 아닌) 경찰들이 옷을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신변에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 방송국 방화는 일단 "전두환 쿠테타군의 것이 아닌 국가의 재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평화적 시위활동" 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방화를 선동한 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 이것은 신문에 실렸던 5.18 관련 재판에 나온 것인데 교도소 방화 및 죄수들의 해방 시도가 있었고 그곳을 지키던 계엄군은 사격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가 내려졌지요. 평화적 시위라면 왜 교도소를 공격합니까? 잡혀 있는 사람들이 다 계엄군이 끌고 간 사람들이라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설령 그런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다 해도 그런 국가시설에 대한 공격은 "폭도"란 말을 듣기에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잡혀 있는 줄 알고 교도소 부수고 풀어주려고 합니까...

4. 김일성이 5.18사건을 듣고는 "그때가 남조선을 교란시킬 절호의 기회였다"라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역시 신문에 나온 내용입니다. 한 500명 정도의 특수요원만 광주에 잠입시켰으면 확실히 무법천지를 만들수 있다고...만일 계엄군이 광주를 포기했다면 북측에서 추가지원이 왔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현대사에 불행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죽은 "모든" 사람들이 순수한 죄없는 양민이었는가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05-08

이동진 : 광주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 다시 꺼내놓는다 하여도 참 민감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일단락 되었다 하더라도 마음 아픈 구석은 남아 있을테죠.. 좀 다른 각도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은 어떤 집단사이에 언로가 막히거나 혹은 양자사이에 전달되는 정보가 거짓말에 의해 왜곡/조작되는 경우 그 피해가 막심할뿐 아니라 양측 모두에게 불행한 일로 돌아온다는 점이지 않을까 합니다. 의도적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도 문제일테고 특히 위정자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그 책임과 비판의 수위가 더 높아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위정자들의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을 포함한 국가전체에 돌아가기에 거짓말이 통용되는 정치문화 혹은 사회분위기를 경계하지 않을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현재 집권하고 있는 집권층에게도 참고사항이 될테지요.. 암턴 책임자를 가려내자면 거짓말쟁이들 혹은 민과 군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던 작자들을 골라내서 처벌할 문제이지 않을까 하며 광주에 대해서는 이런 교훈을 얻은 채 가슴아픈 기억으로 간직할수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2005-05-08
05/05/1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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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thenal_ra님// 사실상 결론이 났다 하더라도 후세대가 모른다면 또다시 토론으로 상대방을 설득시켜야 비로소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가르쳐야지요. 안그렇습니까? 야..그냥 이건 무조건 옳은거야 내 말만 믿어..이런 식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조갑제 씨가 뭐라고 하던, 지만원씨가 뭐라고 하던, 듣고 넘기면 그만입니다. 조갑제의 의견[존중]이 아니라 [인정]이 더 맞는 표현 같군요. 조갑제가 한 말은 무조건 다 거짓말이다. 이건 틀린 말이니까요. 존중은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첩은 적국 정보 조사, 군수시설, 관공시설 파괴, 선동, 치안을 낮춤, 사회혼란 야기면 그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일단 왜 공수부대였는가에 대해선 이해했습니다. 불과 6개월 전의 부마사건 때는 공수부대로 진압이 쉬워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공수부대로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로군요.

푸른 바람님이 올려주신 자료도 읽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최초 사망자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고 합니다. 분명 초기의 과잉진압이 원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당시 사회상황은 최고 수권자는 최규하 대통령 대행이었고 그가 5.17 계엄확대를 주장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대가 25년이나 지나 당시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 문제라면, 잘 아신다는 님들이 광주사건에 대해 의문점을 풀어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결론 났는데 뭘 검토하고 그러냐..그냥 닥치고 믿어...이건가요?
악돌이
05/05/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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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님

결론 났으니 닥치고 믿어가 아닙니다...

님께서 제시한 증거나 증언들은 단편적 표면적 증거에 가깝구요 민주화

운동이후 90년데 후반에 들어오기 전 까지 12.12구데타 세력이 광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 마다 써 먹던 논리와 다를께 없습니다...

그런 표면적 증거의 나열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접근은 상피적인 접근은

가능하지만 근원적 접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인 증거는

언제나 다른 표면적 증거로 반박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똑같은

상황임에도 그것이 역사적인 시간의 축에 대입대는 순간 그 역사적

의미는 틀려집니다.....(안중근 의사 나 윤봉길 의사와 같이 말입니다..지금 그런일을 벌였다면 단순한 테러리스트 였겠지만 그시기가 일제 치하

독립운동 시기였기 때문인것 처럼요..)

다원 주의 이기때문에 각각의 서로 다른 점은 인정해 줘야 하는것 맞습니다..어느 한 사실을 바라 봄에도 다른 시각이 있을 수도 있어야 겠지요..
하지만 바라봄 틀리다 하여 그 진실이 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생각함에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대세라면 그것이 왜 역사의 진실인지 다시 백지 상태에서 접근해 보시는것이 어떻신지요(다수결도 민주주의 한원칙입니다 ^^)

그리고 5.18 당시 최고 수권자가 최규한 대통령이라고 하는것은 좀 억지죠 이미 12.12이후 표면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이 통수권자 이지만 그것은 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이양 받는 척 하기 위한 수단이군요 실질적으로는 이미 전두환씨가 통수권자 였죠....그 상태에서 과연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확대를 반대할수 있었을까 그자체가 의문이죠.....
헤롱헤롱
05/05/1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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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치 식민지 근대화론을 보고 있는 것 같네요.
본질을 왜곡해서 진실을 살짝 빠져나가주는 센~스!
세리비
05/05/1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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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글을 눈으로만 읽고 있구려.. 글을 마음으로도 읽어 보시죠.
읽다보니 정말 "당신" 대단합니다. 당신 외의 다른 어휘는 비하가 들어가 쓸 수가 없군요.

부마시위와 광주 민주화운동 모두 계엄인데 왜 광주사태가 피해가 더 컸는지...
즉 광주사태에 북측의 조작이 개입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함입니까?

군인사망자 10명이 왜 생겼냐구요? 송암동 오인사격 13명이외, 위의 글에도 나온 것처럼 진압군측 장갑차에 의한 압사, 진압군 지휘체계에 의한 구타사망이 있고, 물론 시민군 측에서 무기고를 탈취한 후 조선대로 퇴각하는 진압군을 공격해 사망케 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래서 뭐란 말입니까? 직접 피를 흘린 당사자이기에 주관적이고, 밖에서 본 언론의 시각이기에 객관적이란 겁니까?

부마사태의 경과를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습니까?
충정 진압훈련을 한 부대의 투입과, 경찰 진압실패 이후 단순계엄을 통해 투입된 부대의 차이를 과연 이해 못하는 것입니까?

광주사태에 세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21일에서 23일에 걸쳐 시민군에 의해 자치가 이루어진 광주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순수 공동체 조직이다. 아니다.
시민군에 의해 벌여졌던 행위는 모두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니다 시민군의 방화와 약탈도 존재한다.
진압군의 과잉대응은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아니다 진압 당시의 유혈로 인한 격앙된 심정과 실탄지급에 의해 빚어진 비의도적 참사다.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 80년의 봄을 찾으려는 국민의 갈망에서 비롯되었고, 그 것이 87년의 봄을 이끌어내게 된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70년대 빨갱이의 짓이라고 부르짖었던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도 지금에 와서는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물며, 당시 언론에는 빨갱이의 도발이라고 하곤, 실제로 공산당 계열 지하조직 하나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서 지금에 와서야 빨갱이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당신"은 참...
그렇다면 왜 진압 직전에 유화론자들에 의한 무기 반납과 투항이 가능했습니까? 말그대로 빨갱이가 개입되었다면 투쟁이 더욱 격화되고 빨치산으로 연계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광주 유혈의 마지막은 비교적 안정되었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정치적 사안에는 진실과 거짓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그저 진실일 따름입니다.
거짓된 겉치레로 부정하려 들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05/05/1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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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homy 입니다.

어려운 주제에 대한 토론이 많이 진행되었네요.
쌍방의 토론은 언제나 환영합니다만.
의견이나 견해의 차이로 인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토론에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본인이 진실이라고 믿는것을 다른사람은 거짓이라고 믿을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틀릴수 있다라는 일말의 여지를 남기고 토론하시는것이
좀더 좋은 토론이 될수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좀더 차분하게 진행하야 주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마음의손잡이
05/05/1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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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진실이라고 믿는것을 다른사람은 거짓이라고 믿을수도 있습니다.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절대적 진리나 진실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플따름입니다.
05/05/19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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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주 들르는 어느 사이트의 쥔장께서 5.18관련 토론을 금지시키며 했던 말 중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중엔 5.18을 폭동으로 보는 분도 있고
대한민국 군정종식의 시발점으로 보는 분도 있으며,
대한민국 최대의 시민저항으로서 현대 대한민국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직접 겪었기 때문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인 분도 계십니다.
1980년 광주만 뜨고 1979년 부산/마산이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분도 있습니다.

위와같이 생각하는 게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의견만을 말한다면 싸움밖에는 안된다고 생각되는군요.
다른 문제와는 다르게 정치와 관련된 주제들은 자신들만의 논리와 근거로 주장을 합니다. 이념에따라 같은 사건을 보는 시각자체가 완전히 틀린 상태에서 소모적인 논쟁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보입니다.
아직은 토론문화가 성숙치 않은 관계로 정치나 종교관련 토론은 지양하였으면합니다.
ELMT-NTING
05/05/1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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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인용하는 "어설픈" 짓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들 주장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만,
데모님, 카이사르님이 주장하신 몇몇 자료들은 결국 "표면적"인 접근만 가능할 뿐입니다.
사진이나 글들을 실어놓고 감정적으로 접근 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두분처럼 억지가 강한 주장을 "진짜"인 것마냥 호도하는 모습은 더 불편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매체에서 자료를 접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다고 해서 그것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전 두분의 글 잘 봤습니다.

그런데 몇가지 오류가 있는듯 합니다.
12.12 사건에 대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에는 그렇구요.

광주와 김대중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으로 간주하지 마십시요.
그건 전두환/박정희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내렸다는 말과 똑같이 들립니다.
스톰 샤~워
05/05/19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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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 항상 말하다가 안되면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걸 보면 참 어이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찌되어서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는지...
김테란
05/05/20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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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데모님//수십가지 정황증거를 나열한들 한쪽의 일방적진술에 의존한다면 증거능력은 인정받기 힘듭니다.
피해자(일단 이 토론상에선 결론을 보류하자는 차원에서 원고라 하죠)들의 진술은 가뭄에 콩만큼도 없어야 하는 이유는 뭔지요.
내란선동혐의 하나만으로 진술할 권리마저 박탈되어야 하고 배심원입장의 우리는 그 상태로 판단해야 한다 보시는지요.
양측의 진술모두에서 도출될수 있거나, 물증등의 직접증거등으로 뒷받침되지 않는이상, 혹은 진술이 배반될시 논리적으로 분명히 한쪽이 거짓임을 판별할수 있지 않는 이상, 님들께서 제시하시는 편향적 정황증거들은 증거능력도 설득력도 없는 자기변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무의미한 수십가지 자료보다 제가 위에 언급하고 바라는 자료를 단 몇가지라도 제시해보십시오.
보는이들이 돌머리가 아닌이상 조금씩 수긍해 나갑니다.
상대의 판단력 자체를 이처럼 부정하시면 토론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토론은 지식주입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이죠.

마지막으로 몇가지 묻고 싶습니다.
북한이 사주한 폭동였다면(북한 사주가 아니더라도 공수부대들이 파견될만큼 안보상 심각한 폭동였다면), 수도권 부대들을 전방을 비우게 하고 광주까지 파견한것은 과연 제정신인것입니까?
군진압의 정당성이 있었다면, 굳이 1212주도세력 예하부대들로 파견하여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었던것인지요?
김일성은 왜 518을 미리,그리고 당시에 알지 못했고 아쉬워한것일까요? 그리 당당한 빨갱이토벌작전이 왜 보도가 금지되었으며, 당시 국내의 외신자료들을 모두 없앴던 것일까요?
궁금한게 한두가지가 아닌데, 일단 이정도까지^^
스톰 샤~워
05/05/20 06:11
수정 아이콘
간첩의 짓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 해봐야 별무소득인지는 알지만 그래도 한마디 안할수가 없네요.
위에서 누가 말씀하신 똘레랑스, 엥똘레랑스의 얘기는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것 같고, 아무데나 민주주의라는 말 좀 갖다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해 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평가가 끝난 일이고 아직도 당사자들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시점에 그 상처를 갈기 갈기 찢고 소금을 뿌리는 짓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려 하다니요.
민주주의는 그렇게 아무나 갖다 쓸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함부로 갖다 쓰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남영동 분실에서, 광주에서, 거리에서 쓰러지고 고통받았습니다.
그들이 피땀으로 일궈놓은 민주주의 터전 위에서 그들의 피땀을 간첩의 짓이라 오도하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다시는 더럽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05/05/2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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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 밑으로 글 달아주신 분들 의견은 대부분 논평에 불과하군요. 객관적 사실을 말해주어야 토의가 되지 않겠습니까?

악돌이님// 그 증언들이 단편적/표면적이란 증거를 대십시요. 님은 근원적 접근이 가능하신 분이신 것 같으니 그 근원적 접근을 해주십시요. 상대방 말을 겉만 비평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광주사건이 있던 시기가 헌정이 중단된 시기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최규하 대통령 대행시기였고요. 일제시대는 엄연히 국권을 빼앗긴 시기이므로 두 사건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악돌이님 다수결은 이럴 때 갖다 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다수결이란 어떤 안건을 토의에 붙여서 어느 쪽으로 결론낼 때 쓰는 말이죠. 또 다수결이라고 반드시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다수결로 결론이 났으면 진쪽은 승복해야하는 것이죠.

세리비님// 글을 그럼 눈으로 읽지 마음으로 읽습니까? 군인 사망자 10명에 대한 링크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찾아봤는데 잘 안나오더라고요.

부마사태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가르쳐주십시요. 감사히 듣겠습니다.

세리비님// 제 글 끝까지 읽으셨습니까? 광주사건에 실제 있던 당사자가 말하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간첩 잡아다 신고도 했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간첩이 꼭 빨치산을 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에 따라서 전술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대남적화의 전략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 님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광주사건에서 간첩이 직접 지휘했다는 증거가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그 후의 조사에서 간첩으로 밝혀진 일이 없다고 하고, 세리비님 말도 일리가 있고, 그럼 결국은 광주시민의 폭력성으로 결론을 내야하나 봅니다? 그렇게 되면 지역차별 밖에는 답이 없는데요.

하하...부정하는 사람이 없다고요?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쩔 것입니까? 광주사건이 민주화만 외치던 것이었습니까? 그럼 김대중 석방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것입니까? 전두환 퇴진되면 민주화가 오는 것입니까? 과연 방법적인 면에서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럼 진압 안하고 놔두면 어떻게 흘러갔을 것 같은데요? (만약 그들이 서울로 몽땅 와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면 87년의 광화문 같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05/05/2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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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형님// 싸움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고요. 토론/토의의 주된 의의는, 사실의 나열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는 상대방의 의사에 달린 것이지 억지로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님이 말하는 토론문화 성숙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주장을 하게 놔두십시요. 거기에 대해 논리적인 구조의 또 다른 주장만 있으면 서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앎은 없고 논평(어설픈, 표면적, 본질 왜곡하는 센스?, 억지, 호도 )이니 충고(입맛에만 맞는 글 읽지말고)니 인신공격(거짓된 겉치레)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또 토론게시판에서 몇번 부딪쳐서 져서? 열받는지 따라다니면서 악플 다는 사람(소주 샤워라도 받으면 정신차릴려나)이 분위기를 망치지요.

ELMT-NTING님// 글 제대로 안읽으시는군요. 1212에 대해 전국적 시위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부정했다는 근거 글 따오시겠습니까? 광주와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시위에 혼란을 부추키는 첩자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란 것이죠.

김테란님// 말씀중에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는 표현이 많네요. 좀더 정리해서 써주시겠습니까? 그러니 그 [설득]을 님들이 해보시란 말입니다.

북한 사주 폭동에 대해선 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해가 되게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어설픈 논평보다요.

결국 그럼 결론은 광주 시위는 처음에는 평화적이었으나 지역차별(광주 놈에게 본 때를 보이자)로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파견했다. 전남대가 시위진압의 시작이었고, 공수부대가 과잉진압해서 맞아서 벙어리가 죽었다. 시민이 열받아서 소문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게 되고 떼거지가 많아지자 공수부대와 충돌이 많아지고, 쪽수에서 밀리고 양측 서로 무장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총기사건이 났던지 아니면 (희도야 너만 믿는다처럼) 정호용에게 지시를 했던지요. 그리고 진압되고 전국은 평화를 찾았다.

경찰은 언제 철수한 것입니까? 경찰이 철수할 정도로 시위가 격화되어서 공수부대가 투입된 것은 아닌거 같은데요.
아무리 시민이 죽어도 그렇죠. 차량시위에 기관총에 다이너마이트에 이런게 가능한 것입니까? 희한한 사건이네요.

광주사건이 25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전개되고 흘러가는지 모르는 사람 너무나 많습니다. 정리요약본만 가지고 광주사건을 기억하는 것.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이 토론 주제에 대해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지 마십시요. 모르면 사실을 나열해서 가르쳐주면 됩니다.

논평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정말 아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진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면 왜 쉽게 풀어서 이야기 못하겠습니까? 진실로 내용에 대해 앎은 없고, 남들이 옳다니까 그런가부다 할 뿐이죠. 안그렇습니까?

스톰샤워님// 누가 민주주의를 갖다 붙였습니까? 상대방 의견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지, 그것과 국민 주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님은 감정을 버려야합니다. 항상 토론에 감정을 가지고 들어오시던데, 그래선 님이 얻어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토론/토의란 새로운 해석, 모르던 사실의 발견, 논리적인 주장 구조... 일단 딱 그정도만이라도 있으면 시간낭비는 아닙니다. 감정을 끌고 들어오면 소모적이 되는 것이죠.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습니다.

그럼 모두 가정내 화목하시길...
김테란
05/05/2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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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님//제가 의도하는바를 서두에 개략적으로 밝히지 아니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충분히 기분나쁘실수 있다 생각됩니다.
그점 죄송합니다.
요점은 1.카이사르님과 데모님의 글들에 왜 다른분들 반응이 저러한가.
2.북한의 사주에 의했거나 근본적으로 안보를 위협할 폭동였다라 가정할때의 딜레마.
단 이 2가지뿐입니다.
건방지게 데모님의 글에 대한 논평을 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아녔으며 왜 토론에 벽이 생기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였으며,
좀 더 진전될 수 있는 열린토론을 위함이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근거등에 의해 이러하게 생각한다는 것등은 일단 좋은 분위기 형성후로 미루고자 했는데,
제가 논평만 했다고 인신공격적으로 비판하시는것은 데모님께서도 적절치 못하신 대응이라 생각됩니다.
일단 저항권의 개념에서 왜 민주화운동인가에 대해선 개략적으로 이전글에 댓글을 달아놨으며,
나머지는 차근차근 함께 논의해보도록 하죠.(지금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다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정보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가 법원으로부터 검찰은 당시자료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받아냈음에도 검찰에선 극히 일부만 공개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국회의원및 언론은 그사실마저 적정선에서 함구했으니,
고작 우리는 약간을 더알고 덜알고의 차이정도밖에 없는 것이라 봅니다.
일단 이만 하고 오늘저녁쯤에 여기서 다시뵙죠^^.
스톰 샤~워
05/05/2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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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님//
위의 글중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차이 정도로 인정해 주기를 요청하는 글이 있습니다. 비단 이 글 뿐만이 아니라 터무니 없는 글로 다수의 감정을 자극해 놓고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면서 민주주의 운운 하는 글은 자주 봐 왔습니다만 그럴 때 마다 어처구니 없을 따름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해놓고 다양성의 차원에서 내 말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죠.

전 케텔시절부터 통신을 해 왔지만 온라인에서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본적은 커녕 구경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온라인은 토론을 하기에 적합한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온라인에서 토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토론에 감정을 갖고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단지 온라인 상에서 가끔씩 만나는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답답해 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데모님을 보면 헐리웃 키드의 생애가 떠오르는 군요. 인터넷 키드의 생애 쯤이라고나 할까요?
데모님은 온라인 상에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믿고,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그것을 찾아 나가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하지만 사실 온라인에서는 님께서 말하시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실천은 현실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데모님처럼 링크를 달거나 자료를 퍼오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링크를 모르거나 그런 자료를 본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그런 것들은 퍼오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는 남이 모르는 것을 알게 해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확인해 보는 정도의 의미 이상을 담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지적욕구를 채우기 위한 정도의 목적이라면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주는 것인가 하는 점 정도는 배려해 주시는 미덕을 발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호기심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가면서 충족해야 하니까요.
05/05/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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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테란님//점심 잘 드셨습니까?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논평]이란 말이 가르키는 대상은 동일한데 중복되서 사용함으로 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어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님은 논평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읽을 만한 글이었죠. 제 글에서도 단순한 논평에 대해 비판하면서 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논평이란 말이 중복되어 들어가면서 [어설픈 논평보다요.] 이 문장은 위의 논평(어설픈, 표면적, 본질 왜곡하는 센스?, 억지, 호도 )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대명사의 기능이었죠. 님 글에서 인신공격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글의 서두가 [갑자기 뭔말이야]란 감은 있었습니다.

제가 글을 쉽게 풀어달라고 요청했던 것은 [제가 위에 언급하고 바라는 자료][위]가 말입니다. 김테란님은 첫 댓글을 다셨는데, 그래서 님이 말하는 [위]가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약간 혼선이 있었습니다.

저 밑의 글에서 님은 법전공자가 아니시라면서 [저항권][시민불복종][ 명백성,보충성,최종성] 등의 일반인이라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말하고 계십니다. 먼저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부터 해주셔야겠습니다. 아울러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런 [개념] 있으신 분이시라면 [배제][배재]라고 쓰시는 실수는 줄여주십시요.

일단 왜 518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공수부대의 전대 주둔과 학생과의 첫 충돌 때문인가요? 비극의 측면에서 본다면 진압된 날 5.27로 봐야할 것이며 해방의 상징적 의미로 본다면 5.22가 되야하지 않을지요?

[저항권]을 설명하시면서 [계엄]이 도대체 무엇이며 [공권력]은 무엇인지도 챙겨주시길 바랍니다.

님 말씀대로 518 관련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재조사]요구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보는 쪽이나 [광주폭동]으로 보는 쪽이나 [광주사건]으로 보는 쪽이나 모두다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정조사]를 요구할 수 없고, 이것은 과거사 청산문제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프랑스식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국식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 아닐지요?

광주사건을 말할 때 호남사람들의 시각과 기타 지방 사람들의 시각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박정희가 근대화를 했다고? 난 그렇게 생각안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덕본게 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 분명히 있고 광주민주화항쟁? 그게 뭔데, 그 사건 때문에 내가 덕본거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 분명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은 것은 개인의 신념 때문에 죽은 것이지, 나머지 다수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단 말입니다. 흔히 87년의 광화문 100만 시위의 토양이 광주민주화항쟁이라고 하던데 그 둘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광화문 100만 인사가 한 정치인의 석방 같은 것은 요구하지 않았으니까요. 즉 이해관계가 공통이었단 말입니다. [대통령 직선제]

즉 광주사건은 부마사건과 비교하면 지금 그 대우가 형평에 맞지도 않고 미친 폭력 정권에 의한 내란 진압 정도였을까...딱 그정도의 생각입니다.

전국적으로 확대할 수 없었다면, 진압/학살은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나머지 지방 사람 다수의 생존을 위해서...그런 점에서 왜 방송국을 파괴했는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실 것으로 기대하겠습니다.
05/05/20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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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 [지금도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고요?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사실에 근거한 비판보다, 공동체에서 추방되어야할 자로 매도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 민주주의는 100년이 지나도 안올 것입니다.] 이 부분 말입니까? 적어도 무엇을 지적하는지 따오시면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일일히 찾아야겠습니까?

이번엔 의견을 내어주셨으니 답변을 드리지요.
님에게는 제 말이 [아무말/터무니 없는]으로 보이시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님은 먼저 이 사실부터 아셔야합니다. 제 글이 님의 입맛에 맞지 않을 뿐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인신공격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님이 토론을 얼마나 해보셨는지 모르지만, 한토방이나 다른 사이트에서의 여러 토론들, 결국은 그 안을 채우는 유저의 수준 문제이지 토론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님이 토론이 안되는 유저겠지요. 토론이 된다고 생각하는 유저도 많으니까요.

님 말대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는 자리면 족합니다.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다면 [설득]도 통하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님이 말하는 [생각]이야말로 님처럼 아무렇게나 내뱉은 정도 수준의 생각인가 봅니다? 전 그래도 짜여진 구조를 가진, 어느정도 교양을 가진 사람이 쓴 글을 링크붙여서 근거로 삼는 그런 정도의 차이가 님과 저 사이에 있군요.

결국 님이 토론이 안되는 이유, 토론에서 의미를 못찾는 이유는, 그런 링크를 붙여서 다른 사람의 잘 짜여진 생각을 읽어본다던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기 원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지요?

토론에 부정적인 분이신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토론]거리가 붙어있는 게시물은 피하십시요. 예를 들어 님이 마늘이 싫은 것은 알겠는데 일부러 저 쫓아다니면서 마늘 먹지 말아요 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마늘 서로 의좋게 까먹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시죠.
마늘이 입에 안맞으신가본데, 일부러 맛보시고 맵다고 울지 마시고 그만 마늘은 쳐다보지도 말길 권합니다.

그리고 인신공격의 목적이 아니라면 충고는 개인적인 쪽지로 하기 바랍니다. 님이 저에 대한 이런 충고를 남겨두신다면 저 역시 이 글을 남겨놓겠습니다. 최소한의 노력은 하고 나서 [토론]에 대해 평가하시길 바랍니다.

좀전에 카이사르님이 댓글 올려주셨는데 새로고침 해보니 스톰샤워님 글만 있군요. 카이사르님 왜 지우셨습니까? 읽어보지 못했는데 아쉽군요.
스톰 샤~워
05/05/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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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님//
온라인 상에서 토론이란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저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저 역시 님과는 별로 토론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지나친 예단일지 모르지만 제가 님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진지한 문제의식이나 내면의 고민이 아닙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찾은 작은 정보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 정도 밖에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카이사르님의 글은 거부감이 더 들긴 하지만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점에서는 님의 글보다는 더 높이 사고 싶습니다.

어설픈 지식을 자랑하려거나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공의 게시판에서 아무 의견이나 쏟아내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글 역시 토론이라기 보다는 다수의 생각에 반하는 데모님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과정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헤롱헤롱
05/05/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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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데모님,,,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의 글에는 가시가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예의가 없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슨 정의 그 자체인양 말하죠.
다음부터 글 쓰실 때는 당신의 의견이 어떻든 상대방을 조금만 배려해주세요.
자기 자신이 부끄럽지 않냐느니, 토론을 드럽게 한다느니,
그 외에도 글 전체에 상대방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가득합니다.
05/05/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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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 님은 토론의 의미를 [문제의식, 내면의 고민 성찰의 표현]에서 찾으시는 분이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고, 저는 주제에 대해 찬반 양론이 있을 때 각 사람의 주장의 근거들이 충돌하면서, 아 그렇군 하는 것을 알아감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니 서로 다르겠지요. 하지만 그 [다름]이 비난받아야하는 것인지요?

님은 또 인신공격이신데, 그럼 님의 글에서 건질 것은 무엇인가요? 님이야말로 그 어설픈 지식이나 지적호기심 충족도 없이 판을 깨는데만 관심있지 않습니까? 전 님의 주제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지 님의 [논평]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건전히 의견을 개진해주시고, 타인 그 대상에 대한 비난은 쪽지로 하라니까요. 뭐하는 행위입니까?

결국 님이야말로 주관적으로 체계화된 지식도 없이, 감정 내키는대로 인신공격하는 분이라는 것을 공공의 게시판에서 광고하고 있는 것이네요. 그런 행위를 반복하고도 아직도 부끄럽지 않으신가 봅니다. [주제]에 집중해주세요. 말하는 [사람]에 집중하지 말고요.
05/05/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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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지식]이라면 왜 어설픈지 증명이 되어야합니다. 인신공격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주제]에 대해 문의하는게 아니라 [사람]을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까..한자로 써드릴까요? [아무 의견이라니]..그런 말을 쉽게 하실 수 있으니 인신공격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죠. 그러신 분이 남에게 상처주지 말라고 충고할 자격도 없으실 것이고요. 안그렇습니까?
스톰 샤~워
05/05/20 14:38
수정 아이콘
데모님//
전 님께 인신공격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님께서는 제 말이 모두 인신공격으로 보이시나 보군요.
제가 뭔가 잘못한 건지 아님 님께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본뜻이 인신공격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름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름을 충족시키는 것도 적당히 조절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주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은 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재밌는 꺼리가 아닙니다. 님께서 뱉어놓는 글들이 다른 사람의 심장을 후벼 팔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라는 겁니다.

님께서 원하신다면 만나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pgr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흥분을 잠시 가라 앉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05/05/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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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 샤워님// 광주사건에 대해 결국 당사자가 아니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이대로 성역화가 되자고요? 결국 이성보다는 [감정]을 드러내놓고 있지 않습니까...25년이나 지난 일이니 양쪽을 다 따져보자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애당초 518에 대해 이견을 낸다는 것은 집단으로 공격당하기 딱 좋은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카이사르님이나 저는 이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다른 사이트 가면 이견들 매우 많습니다. 공격당하고 싶어서요? 아닙니다.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스톰 샤~워
05/05/20 14:50
수정 아이콘
데모 님//
이 사이트가 광주사건에 대한 전문가 사이트도 아니고 한국 현대사를 분석하는 사이트도 아닙니다. 님께서 진정 그 부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관련사이트를 찾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 곳에서 광주 사건에 대한 얘기를 그것도 그들이 간첩의 선동에 놀아난 어리석은 존재였는지 말았는지를 얘기해야 하는 것입니까?
님께서 그 부분에 갖는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이 이곳 pgr밖에는 없나요?
광주 민주화 운동은 아직 역사의 평가가 완전히 마무리 된 상황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부분이 아닙니까? 한나라당도 광주에 찾아가서 참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전두환 시절에 듣던 치떨리는 이야기들을 이 게시판에서 다시 꺼집어 내서 상처를 헤집어야만 직성이 풀리십니까?
데모님께서 얘기하시는 주장은 전두환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입니다. 지금이야 80년의 항쟁이 민주화를 위한 항쟁으로 평가되어 아린 가슴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게 되었지만 (민주화 아닌 그 무엇으로 빛낸다 하더라도 가족을 잃은 남은 자의 슬픔을 달랠 수는 없겠지만) 전두환 시절에는 가족을 잃고도 빨갱이의 자식이네, 간첩의 배후조종이네 해서 그 억울함을 밖에 내놓지도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사람들에게 다시 못질을 해야 직성이 풀리시나요?

지적 호기심도 적당한 수준에서 조절해 가면서 채우시길 다시 한번 권합니다.
스톰 샤~워
05/05/20 15:14
수정 아이콘
데모 님//
제 말을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전 데모님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를 다루려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님의 접근은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것이구요.

제가 호남사람인지 아닌지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이 나오면 편견인가요? 그것이야 말로 편견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반응하는 편견인 것 같군요.

한국에서 정통 보수라 자처하는 한나라당도 광주 민주화운동이 간첩의 소행이라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의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05/05/20 15:46
수정 아이콘
업어치나 메치나...결국은 입을 막는 것이지요.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과격하게 접근한다. 그건 도대체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요... 누가 잘 죽었다고 했나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잘 죽었다로 들린단 말인가?

항상 근거는 없고, 어설프다. 모자라다. 지나치다. 과격하다. ==> 근거없는 비난, 굳이 상대안해도 되는데 바보같이 응대하는 느낌.

호남사람도 아니면서 즉 당사자도 아니면서 제가 말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다 말다 할 자격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당과 개인을 같은 선에 놓는 개념은 어떤 것인지요? 사회적 합의란게 뭔지 모르겠군요. 결국 광주민주화항쟁..땅땅땅...이견은 반역죄..그런건가...

결국은 본인이 듣기 싫다는 것이 아닌가...저랑 토론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저를 걱정해주는 것도 아니고..단지 듣기 싫다 뿐...

듣기 싫다. 본인이 안보면 그만일텐데..듣기 싫다...훗
05/05/20 15:56
수정 아이콘
1. 광주사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2. 광주사람들이 간첩의 선동에 놀아난 어리석은 존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스톰샤워님께 사과요구합니다. 근거없는 비방과 색깔씌우기...사과하십시요. 하지도 않은 말을 꾸며내서 비난하지 마십시요.
스톰 샤~워
05/05/20 15:57
수정 아이콘
적어도 지금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간첩의 선동에 부화뇌동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세력이나 단체가 어느 정도 있나요?

지극히 소수의 의견으로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에 대한 자제를 부탁드린 것입니다.

이곳 게시판에 문희준군에 대해 비난하는 글을 올리면 그에 대해 자제를 요청하는 글이 올라옵니다. 님께서 주장하시는 견해는 문희준을 비난하는 정도의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주장에 가슴 아픈 사람이 있다면 좀 자제를 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님은 매사에 근거를 요구하시지만 어떤 석학이 와도 님의 굳어있는 생각을 바꿀 수 있을만한 근거를 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05/05/20 16:00
수정 아이콘
그런 주장에 가슴 아픈 사람은 직접 저에게 쪽지 보내주셨을 것입니다. 실제 호남 분 한분이 저에게 쪽지 보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견해차이를 인정해주시고 서로 다투지 않기로 하고 배넷 아이디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님의 행동은 당사자도 아니면서 말을 막을려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근거 있는 글에는 수긍하고 생각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쭉 보여왔습니다. 현재 저는 김테란 님의 글을 기대하고 있고요. 님의 근거없는 비방은 거부합니다
스톰 샤~워
05/05/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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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님 //
제가 이래서 온라인에선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한말도 부정하고 난 그런 말 한적 없다고 잡아 떼면 뭐라고 마땅히 대꾸하기 힘들죠.

"어떻습니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의 민족-자주-민주 해방운동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해방의 광주...아름다운 등으로 미화하는 것을 보니까 바로 간첩이 떠오르던데, 너무 과민한 것인가요? 사건 전개 과정이 너무 공산주의 혁명과정과 유사하지는 않습니까?"

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님의 글을 보면서 전체 논지를 그럼 뭘로 해석할까요? 인용한 글에선 간첩이란 말은 왜 쓰셨나요?

어차피 그건 다른 의미였다고 말씀하시겠죠.

온라인에서의 토론이란 그런 겁니다. 잡아떼기, 말돌리기, 말꼬리잡기 등등 토론 자체를 부정해 버릴 수많은 신공들이 존재하기에 토론이 거의 불가능하죠.
05/05/2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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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 또 사과요구합니다. 문희준과 어떻게 광주사건을 같은 선에 놓습니까..그리고 제 글을 [비난]으로 정의하셨군요.

항상 남의 글을 제대로 못읽고 색깔씌우고 같은 표현도 더 이상한 표현으로 스스로 바꿔놓고 비난하는 행위..중지해주십시요.

건전한 비판이면 받아들입니다. 부당한 비난...그만해주십시요.
05/05/2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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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글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십시요. 남의 글을 자기 멋대로 덧붙여 해석하고선 잘못이 없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요. 온라인에서 토론이 안되는 것은 잡아떼서 그런 게 아니라, 님처럼 원문을 곡해하고 확대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05/05/2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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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 [여러 님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광주사건에서 간첩이 직접 지휘했다는 증거가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그 후의 조사에서 간첩으로 밝혀진 일이 없다고 하고, 세리비님 말도 일리가 있고,]

이 글은 어떻습니까? 생각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님 눈엔 이 글은 안보이시죠? 어떻습니까? 님이야말로 말꼬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과해주시죠.
스톰 샤~워
05/05/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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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 없이 문희준과 광주사건을 같은 선에 놓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은 님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이 공감하지 못하는 극소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 주장이 다른 사람을 심히 공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제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님의 주장이 어느 정도 사회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님의 주장이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공감하기 힘들고 당사자들에겐 상처만 주는 주장을 정치 사이트도 아닌 게임사이트에 와서 하시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05/05/2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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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제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한번 요약해보시죠. 제가 무슨 주장을 했습니까?

다른 사람을 심히 공격한다는 근거 대주십시요. 아무도 공감하기 힘들다? target=_blank>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079&pn=5&num=3159 여기 가보십시요.

님이야 말로 토의는 안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만 하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스톰 샤~워
05/05/2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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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는 인터넷이 사회의 모든 것이고 모든 진실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링크를 거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그런 글도 있으니까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는 것인지?

지금 사회 단체나 정파나 정당 중에서 님의 말씀처럼 주장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독립신문이나 지만원씨 같은 부류 외엔 그 누구도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디에 그런 의견이 있으면 그게 사회적 공감대가 되는 의견인 건가요? 님의 상식이 의심스럽습니다
05/05/2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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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의 의견은 소수는 말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성적 소수자가 권리 주장하면, 다수가 들으면 기분 상하니까 말하지마..여기가 동성애자 사이트냐라고 하실 분..맞나요?

인터넷은 매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사회단체나 정당 등의 정치적 목적의 집단은 아니지요. 정당/정파에서 주장하고 말고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님의 주장을 읽다보면, 그냥 대세를 따라라..다수가 주장하면 그냥 반론은 다수에게 피해를 주니까 조용히 있어라.. 이거네요.
스톰 샤~워
05/05/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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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소수자가 성적 다수자를 매도하는 주장을 하진 않죠.

님의 주장이 소수의 의견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의견이기 때문에 자제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수 있는 얘기이며 사이트의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굳이 하셔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05/05/2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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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된 태도는 [518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냐..이것입니다. 님 말대로 아직 역사의 평가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공감대가 얻어진 사실에 대한 반론이 있는 사람에게 님이 알고 있는 사실로써 설득하려고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지 [민주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등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상대가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비난하기..그만하시겠습니까?

사과하지 않는 것은 고집피우기 인가요? 님의 태도로 보아 토론에서 그동안 성과가 없었음이 이해가 되는군요.

논문/책 자료 내보라고 해도 못내놓으시고 있으며(쪽지로 주신다면서요)...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자료는 무시하고, 링크 붙이면 (나도 할줄 안다. 내가 할줄 몰라서 안하는줄 알아?)라고 무시하시고...조금이라도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여기가 그런거 대화하는 사이트야?]라고 하시고, [주제]는 없고 [발언자]의 말의 꼬투리만 찾으니..그럴수 밖에요. 안 그렇습니까?
05/05/2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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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 샤워님 의견은 저에게 상처를 주네요. 자제해주시겠습니까? 단순 비난/비방만 하셔서 댓글 흐름을 망쳐놓으니 자제해주시겠습니까?

이 글을 세운 사람은 제가 아니며 저는 여기 댓글 흐름하에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고 해당 당사자로부터 자제 요청 들어온 적 없고, 단지 제 글이 입맛에 맞지 않아 항상 쫓아다니면서 입을 막을려는 사람 2명 정도가 보이네요.

다수의 공감대는 형성 못해도 아무도 공감 못하는 글은 아니며, 상처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모든 사람에게 상처주는 것도 아니요, 모든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운영자도 허가한 글이고.. 뭐가 문제인지요? 단지 스톰샤워님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 같군요.
스톰 샤~워
05/05/2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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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관련 사이트나 자료를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요청하면 될 것이구요. 하지만 님께서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간첩의 사주에 의한 공산혁명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겸손한 몸짓이었다면 저나 다른 사람들이 님의 글에 그렇게 반박을 했을까요?

자꾸 사과하라는데 뭘 사과하라는 건지... 할말 없으면 그냥 사과하라고 몰아부치나요?

자료는 정리해서 보내 드리죠.
님처럼 지식인에서 검색해서 보내드리자면 금새 보내드리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오늘 내일에 지구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30분전에 보낸 쪽지에 대해 자료를 못준다고 타박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성질도 급하십니다 그려...

진실을 알고 싶으시면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세요. 함부로 간첩의 사주였다느니 공산혁명이었다느니 하지 마시구요.
05/05/2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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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으시니 다시 반복합니다. 무엇을 사과해야하는지 모르시겠다고요?

1. 광주사건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2. 광주사람들이 간첩의 선동에 놀아난 어리석은 존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스톰샤워님께 사과요구합니다. 근거없는 비방과 색깔씌우기...사과하십시요. 하지도 않은 말을 꾸며내서 비난하지 마십시요.

스톰샤워님// [여러 님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광주사건에서 간첩이 직접 지휘했다는 증거가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그 후의 조사에서 간첩으로 밝혀진 일이 없다고 하고, 세리비님 말도 일리가 있고,]

이 글은 어떻습니까? 생각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님 눈엔 이 글은 안보이시죠? 어떻습니까? 님이야말로 말꼬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과해주시죠.

저는 근거 있는 글에는 수긍하고 생각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쭉 보여왔습니다. 현재 저는 김테란 님의 글을 기대하고 있고요. 님의 근거없는 비방은 거부합니다

자료에 대해 추천사이트와 목록이 있다셔서 즉시 주실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해야하는 것이면 기다려보겠습니다. (서..설마..그냥 해 본 말은 아니시겠지요? 설마 그런 사이트 한 곳도 모르고 광주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은 아닐지...) 친절하시게도 직접 검색이 아니라 논문/책 다 읽어보시고 스스로 정리해주시려나 봅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본인이 진실이라고 믿는것을 다른사람은 거짓이라고 믿을수도 있습니다.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절대적 진리나 진실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플따름입니다.]

저는 인터넷에 있던 직접 사람들이 말하던 [혹시 그렇지 않을까?]란 가설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님처럼 한쪽 사실만을 진실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백지상태에서 쌓아가지만, 다른 분들은 이미 결론이 나있나봅니다. 이미 결론에 이르러 엔딩을 보신 분이라면 처음부터의 단계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닐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직접 플레이하지 않고 에디트를 써서 엔딩만 받았나 봅니다.

[진실]은 항상 [의심]하는 자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스톰 샤~워
05/05/20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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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더 이상의 설전은 의미도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짓인 것 같아 더 이상 댓글을 달지 않겠습니다. 논쟁을 하자면 끝이 없겠습니다만 이 게시판은 저와 데모님의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실 이런 논쟁에 발목잡혀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못하네요.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한 것 같습니다. 단지 인정하기 싫거나 알아듣지 못할 뿐이지요.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스톰 샤~워
05/05/2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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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자신의 성숙함을 보인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몇마디 말에 수정해야 할 주장들을 무책임하게 내뱉고 보는 것을 먼저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군다나 그 말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 수 있다면요.

그리고 사과해라고 자꾸 몰아부치는 이유는 기어코 이겨보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인가요? 그럼 제가 져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광주민주화항쟁과 간첩의 연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신 것이 아니라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05/05/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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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샤워님//님이 하는 것은 논쟁도 설전도 아니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저 놈 나쁜 놈..아이고] 하는 정도지요.

애당초 님이 상대방을 비하하지 않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지저분한 댓글 달기였습니다. 제가 중간에 그렇게 쪽지로 보내달라고 했어도 님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목적이 제 인격을 모독하는데 있기 때문이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셨다고요? 이제 원하는 것을 이루시니 가시는 것 같군요. 잘가십시요.

님은 그런 생각을 수정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니 님의 말은 정당성도 없고 남을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왜 사과하라는지조차 아직도 이해를 못하시다니..-_- 제 말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란 것입니다. 님 멋대로 엉뚱하게 덧붙이지 말고요.

마지막도 또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가는군요. 연관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댓글로서 그 연관성엔 설득력이 약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걸 제가 주장했었다라는 사실을 꼬투리잡아서 님은 비난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대방이 생각을 바꿨다는데도 인격을 모독하셨구요. 그러니 먼저 남의 말부터 끝까지 잘 읽고 비판하십시요.

그리고 토론을 하면서 [감정]은 끌어들이지 마십시요. 무슨 상처를 준다느니 그런 식으로 입막으려 들지 마시고요. 결국 님은 그 많은 댓글을 달면서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군요. 왜 댓글 다셨는지 이유는 한가지 뿐이군요. 제 인격 모독.. 성공하신 것 같아서 감축드립니다.
05/05/2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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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전에 ebs에서 하는 518 토론카페 방송을 봤습니다. 허허..무슨 토론이 [찬반]도 없이 100% 찬성만 있는데 토론이랍니까? 계몽방송이지... 그리고 진행자가 왜들 그렇게 웃으면서 진행하는지 그것도 거슬르더군요. 518이 무슨 축제 방송인줄 아나...

대충 내용은 제가 가졌던 의문들에 대해 약간의 답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 왜 하필 광주였는가? 5.15일 서울에서 50만 시위가 있었으나, 집행부가 더이상 투쟁하기 원하지 않았고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5.17일 광주는 이제 한창 시위가 커갈려고 했었고 이 때 진압을 했기 때문에 더욱더 저항한 것이다.

또한 그냥 선거했으면 양 김씨 가운데 하나가 당선되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김대중과 그 추종자 제거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광주가 시범으로 당한 것이다.

2. 광주사람들은 그동안 518에 대해 말하길 꺼려했었다. 말하면 말할수록 타 지방사람들에게 광주만의 이야기로 왕따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만들기가 아니냐는 의심이었고, 이 부분은 이제 25년 지났고 김대중씨도 대통령이 되었으니 호남사람들도 좀더 당당해지자..이런 이해안되는 답변..

두번째, 민주화 운동엔 부마사건이나 서울 시위도 있는데 518 25주년 행사가 광주에서만 중점 부각되어서 광주만의 일로 자꾸 기억되는 것 같다. 호남인이 영남 출신의 노무현도 대통령 만들어줄 정도로 포용력을 가졌는데, 이제 518도 타 지방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보다 큰 행사로 만들자. 국경일로 지정하고 광주 뿐만 아니라 부마, 서울도 아우르자.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조중동 때리기, 현실은 그들이 70%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대세-현실-사회적 공감대 같은거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중동에 대해선 왜 인정안하나 모르겠다. 아무리 나쁜 신문이라 말해도 여전히 국민들은 그 신문을 보고 있다.

거기까지 보고 mbc를 보니 [김기훈 유서 대필 조작사건]나오더군요. mbc는 완전 국영방송이 되었는지 허구헌날 데모/조작/불법/열우당 잘했다 뭐 이런 것만 나오더군요.

광주사건이 광주만의 일이 되는가, 아니면 전 국민의 공감대를 얻는가는 광주민주화항쟁을 지지하는 쪽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한둘인줄 아시나본데요. 그리고 저 같은 사람에게 인격모독하면 무슨 생각이 바뀔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효과없을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플레이 동영상이지 엔딩 동영상이 아닙니다. 엔딩 딱 하니 던져놓고 이것 때문에 너희들이 자유롭게 사는거야..감사해라.. 고개숙여라... 자세히 따지지 마..그냥 믿어..옳다잖아..아니라고 하면 집단 공격당하니까 그냥 침묵해.. 잘도 되겠습니다. (퍽이나)
김테란
05/05/21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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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님//일단 저는 데모님을 보는 시각이 다른분들과는 꽤 다릅니다.데모님의 관점에 많은분들이 의아해 하시는듯 한데, 아직까지 518은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며, 이를 미리 간파한 정부의 적절한 토벌, 진압군은 518후 1주일이 지난후까지도 공포탄도 지급받지못했다(앞뒤가 안맞죠^^)는등.. 의 주장을 끊임없이 펼치는 자들이 상당히 많고, 그것만을 보고 곧이곧대로 믿는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오히려 이곳 많은 분들이 그런부류의 사람들과의 대화등을 꺼려왔기 때문에 데모님마저도 지나치게 편향된 관점을 갖고 계신 분으로 비쳐지는듯 합니다만..
김테란
05/05/21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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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보기엔 데모님관점은 진압 잘못되었고 광주시민들 억울한거 맞다.헌데 그 성과나 업적등이 어찌 광주시민만의 전유물이 될수 있는가.. 이정도이신듯 하고, 그점엔 저역시 동의합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전국적으로 볼때 광주가 특출나게 다른점 크게 없었고, 다만 전두환으로부터 선택받은것입니다. 왜 유혈진압을 선택했는가는 일단 논외로 하고,왜 광주였어야 했는가를 보죠. 첫째 고립및 사태의 정보를 차단시키기 좋은 지역이고, 둘째 눈에 가시인 정적을 제거하는 발판이 될수 있었기에 광주시민들이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17일 밤에 연행되며 다른 정치인,학생들 또한 많이 연행되었으며 어찌보면 비상계엄확대까지 되는 마당에 의례적인 일이라 받아들여질 수 있었죠.그러나 데모님께서 말씀하신 사태가 더욱 커진, 22일의 기점은 전날 발생한 최초의 민간인 사상자에도 기인하지만 또한가지 큰 이유가 김대중씨연행 나흘만에 중간수사발표가 나오며 이것이 이미 전부터 사형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의한 수순였다는 것입니다. 김대중씨가 아닌 재야인사 그 누구였더라도 또한 굳이 광주가 아녔더라도 시위를 크게 촉발시킬만한 일였다는데에는 공감하실수 있겠는지요?
김테란
05/05/21 01:48
수정 아이콘
얘기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데모님께 몇가지 부탁드리고 싶은점은
첫째는 일단 광주시민들 억울하게 희생된것. 이 한가지는 함께 공감할 수 있다면 아직 진상규명이 많이 미흡한 상태에서 너무 광주민주화운동의 해석에 대한 객관적 접근에만 집착하지 마시고, 함께 추모하는 입장에서 토론하고 안타까워하는 심정만큼은 공유하며 좀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보자는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는 '아울러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런 [개념] 있으신 분이시라면 [배제][배재]라고 쓰시는 실수는 줄여주십시요.'
저항권의 개념과 맞춤법실수는 연관성이 거의 없어보입니다. 윗글을 보면 10이면 9명은(그럴의도는 아녔다고 생각하기에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지만 보는사람입장에서 그렇다는것을 말씀드리고싶습니다.) 그정도 개념있다고 하는사람이 그런 맞춤법도 틀리나.. 이렇게 보겠죠.아마 제가 틀리는부분 꽤나 많을것입니다.보이는게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합니다만, 맞춤법지적을 인신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물론 혼자 고립되셔서 다소 거친면을 보이실수 있다는점 충분히 이해하며 저역시 그런 거친토론에 익숙한지라 기분이 크게 나쁘거나 뭐 그렇지는 않지만 이 토론을 지속할 필요가 있나?하는 의문이 생기는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김테란
05/05/21 02:04
수정 아이콘
이어서 답변몇가지를 드리자면 저항권에 대해서는 직접 알아보시면 도움될것이라 미리 밝혔으며,명백성,보충성,최종성 등등은 개략적설명에 짧게 풀어서 적었습니다.그걸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보며 법전공이건 아니건 헌법,민주주의를 공부한사람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번쯤은 접해보는 것이며, 지식검색이라는것도 있지않습니까^^ 전반적이해가 힘들다면 설명을 상대에게 직접 구하는것이 나을테지만 그게아니라면 직접 찾아보시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실듯 합니다.
계엄역시 요건이 있고 절차가 있습니다. 이를 무시한 계엄은 헌정유린이자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죠. 또한 계엄해제절차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상태.. 이모든 상황에 정당한 공권력이라는 수식어는 매우 적절치 못합니다. 이미 공권력이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죠.
단순한 김대중씨구명운동이다.. 이역시 윗글에서 대략 설명해드렸습니다. 22일에서야 이건 아니다라며 김대중씨 구명에 나섰으며, 이미 시민들은 사상자발생으로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죠. 왜 522 527이 아니라 518인가 하는것은 비상계엄확대와 공수부대투입의 시발점을 5월18일 자정으로 잡기 때문입니다. 즉 부당한 정권의 만행이라는 관점이며 자랑스러운 광주시민들의 업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죠. 다만 억울하게 당할수 밖에 없었음과 희생및 피해등을 추모하고, 끝까지 굽히지 아니한 정신만은 높이 사자는 것입니다.
김테란
05/05/21 02:22
수정 아이콘
흠..그리고 방송국방화에 대해선 그당시 상황에 시민들이 가장 절실했던것은 이사실을 호남이외의 지역에 빠르게 알리는 것. 이건 너무나도 당연하죠. 헌데 이미 군경에 의해서 사전에 모종의 조치들이 취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뭏든 당연히 시민들은 방송국에 몰려들었고, 대외에 알릴수 없음에 더욱 격분한것이죠. 이후의 방화등을 스스로 폐쇄하고, 정보를 차단하기 위함였다는 쪽으로 해석하는건 좀 이상하죠? 또한 그정도 상황에 니들은 방화범이자 폭도들이다라 보는것도 처음엔 균형잡힌 시각에서 출발했지만, 광주시민의 업적이 과대평가된다는 인식에서 빚어지는, 다소 치우친 시각이라 봅니다.
05/05/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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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테란님// 이제야 오셨군요. 저녁..밤..술까지 드시고 오시는듯...^^
[이해] 잘 되는 글 감사합니다. 몇가지 의문점 있고 반박할만한 것도 있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아케미님 글이 제 심리바를 많이 누르네요.

매일 양대 방송사의 편성표를 가져와 주시는 발그레 아이네꼬님의 담담하면서도 마음아픈 이야기입니다.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이곳에서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논쟁이 벌어져 많은 분들에게 다시 상처를 남겼네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사실만 이야기하라고 하면, 조금은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고, 이 게시판에는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이니까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봄'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아케미님 글에 동의합니다. 심려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한숨밖에 안나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안그래도 오늘 ebs토론 카페 내용도 보았고 이해를 더 깊이 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그냥 감정이 거세당한 인간으로 여겨주십시요. 제 글로 상처입으신 분들 용서바랍니다.

실례했습니다. 언짢게 해서 죄송합니다. 518에 대해선 반성하겠습니다.
아이네꼬님에게 다시 한번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케미님 글은 뭔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군요. 도리적으로도 인정적으로도 이해적으로도... 저절로 감화가 되었습니다.

김테란님// 인신공격 인정하고요. 그리고 간첩과의 연관성은 버렸습니다. 두분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끝까지 굽히지 아니한 정신] 높이 사고 기리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하니까요.

카이사르님도 더이상 오지 않으시니, 저도 이만 그만합니다. 많은 것 [친절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가르쳐주시기 바라면서...

제 글로 상처입은 분들께 죄송하단 말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김테란
05/05/21 02:53
수정 아이콘
당시 정부에 대한 쿠데타의 움직임을 염려하여 재야지도층에서 일단 자제를 권유했고 정부측답변을 기다리자 하는 와중에 사태진압및 그를통한 정적제거 정권장악을 준비해왔던 전두환은 그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강제연행및 공수부대투입을 단행했던것입니다. 광주시민의 아픔을 함께하고 민주화의 큰 씨앗(유일한 씨앗은 아닙니다)이 된점도 인정하고 데모님 말씀대로 이 모든것들이 우리모두가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및 책임은 광주시민들에게 있는것도 아니며 그들을 애달프게 추모하고 위로하는 국민들에게 있는것도 아닙니다. 검찰자료공개 판결에도 버티고 있는 검찰..언론들은 아주간략하게 보도하는데 그쳤고, 국회의원들은 전혀 독촉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 여파를 염려하고 당장 자신들이 감당하기를 꺼리는 이유 하나와 아직은 광주의 한을 이용할때라는 치졸한 계산 이것이 두번째 이유입니다. 진상이 철저히 규명되어야 경상도건 충청도건 그 아픔을 비로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사실과 매우 다른 주장들이 난무하기 때문이죠. 진상규명조차 완전하지 못한상태에서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기 보다는, 안일한 정치인들의 작태를 추궁하고 진상규명에 힘써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광주시민들에게는 씌워진 누명이 있고 그들을 보는 잘못된 색안경이 있습니다. 이를 벗겨주면서 정당한 평가를 받는것보다, 아직은 이용할 건덕지가 있어.. 그처럼 고달픈일은 차기이후의 정권이 알아서 하겠지.. 이러한 그릇된 선택을 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야단쳐야 하며, 다만 그것이 잘못 흘러서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자꾸 후벼파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테란
05/05/2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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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님 마지막글을 보면서 이글원문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오더군요. '대한민국은 진보하고 있는겁니까?' 진보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518에 대해선 대학내에서나 몰래몰래 조심스레 들을수 있었으며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이처럼 터놓고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의견차이로 치열하게 토론하신 데모님과 우리들, 그러나 많은부분을 또한 공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5공때의 박약한 근거로 폭동이라 아직까지 떠드는 자들도 많지만, 스스로도 부족함을 알기에 TV공개토론등에는 나오지를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끝으로 데모님을 비롯한 토론에 임한 많은 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05/05/2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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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테란님//그래요 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죠. 제 글 다 읽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따온 링크가 검색 목록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것에 개인적으로 놀랐답니다. 외국 검색엔진 google에서조차 말이죠. 이 말은 5공때 논리가 훨씬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그 글을 읽어보면 과장이 심하고 설득력이 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인정할 만한 것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노동절도 5.1일 쉬는데 518 기념일로 못만들까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419도 있고, 419와 518 비교도 해봐야하고..어쨋던 민중투쟁?의 날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어쨋던 518이 극복해야할 과제는 그 일이 광주인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널리 설득하고 인지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을 호남이 포용해서 당선시켰다지만 영남에선 영남인사 찬성율이 70%인데 반해 호남은 90% 넘는 선거구가 많은 것으로 보면, 호남 사람들의 포용성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토론 정리해주셔서 고맙고요. 김테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톰 샤~워
05/05/22 00:46
수정 아이콘
데모 님//
역시 님의 마음대로 정리하시는군요.
지금도 제가 지적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시는 듯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님의 댓글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중인격자가 아니면 지극히 가식적인 모습이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말을 내뱉었다가 이말 들으면 이렇군, 저말 들으면 저렇군 하는 사람이 쓴 글이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광주에 대해 객관적인 눈으로 보자고 하더니, 그 후엔 광주가 간첩의 배후 조종으로 공산혁명을 일으키려는 자들의 폭동인 듯 몰아가시고 그 후엔 광주시민이 갖는 원초적 폭력성이 문제인가라고 의문을 붙이더니 마지막에는 5.18을 기념일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의견까지 피력하고 계십니다.

이런 님의 주장들을 보면서 과연 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토론을 하는지, 토론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 어떤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개 성인이 되면 일정한 세계관과 가치체계를 갖게 되고 이런 부분은 몇가지 단편적인 사실로 인해 방향이 흔들리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님은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마주대고 하는 토론도 아닌 온라인 토론 상에서 동일한 세계관에서는 거의 나오기 힘들어 보이는 견해가 나옵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몰라서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저런 얘기들을 순서없이 나열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성숙함을 보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 되지 않음은 저의 문제라 치더라도 그렇게 수시로 조변석개할 생각이라면 일단 글을 쓰기 전에 좀 더 깊이 생각해서 쓰시길 권면해 드리는 것입니다. 님이 깊이 사려하지 못한채 함부로 올린 글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05/05/22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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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치광이로 모는 저 저열함..정말 더러운 인격을 가지셨군요. 정말 증오하게 만듭니다.

님은 머리가 굳은 것을 = 성인으로서의 일정한 세계관이라 말하시고..그러니까 님 생각이 안변하는 것이죠. 아니 님 눈에는 생각이 변하면 그게 이상한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님은 주장과 의견도 혼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지 않을까 했지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라고 했습니까? 제 글에서 밝혔듯이 토론을 함에 있어서 먼저 사실확인이 필요하다. 백지상태에서 시작해보면 이런 이런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해봤더니 신군부측의 주장이 더 눈에 잘 띄이더라. 과장된 주장인데 이런 점을 민주화운동측에선 깨는 논리를 보여야할 것 아닌가...그러면서 여러 대안도 내놓고, 이런 점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독 스톰샤워 당신만이 상대편 의견에는 관심없고, 저 사람의 정신상태는 이해하지 못하겠는걸? 미치광이로 몰아볼까? 이런 생각에 골몰하는 것이겠죠.

님의 말은 들을 가치조차 없습니다. 상대방이 토론으로 마음을 바꾸면 [조변석개]라고 몰아치시니까요.

님이야 말로 글 쓰기 전에 생각하고 쓰십시요. 님이 사려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올려서 다른 사람들의 토론을 방해하고 있으며, 그렇게 남 상처받는 것은 걱정하면서 인신공격에 열을 올리시는 모습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님의 의견은 일리는 있으나 전혀 효과도 없고, 상대 인격만 훼손하는 글일 뿐입니다. 실생활에서도 님처럼 말하면 칼맞기 딱 좋습니다. 조심하세요.
김테란
05/05/22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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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 샤~워님//데모님의 유일한 잘못은 아직까지 아픔이 남아있고,감춰진 아픔또한 적지않은 518에 대해서 상당히 거친 접근을 했다는 것이며,
그 부분에 대해선 충분히 인정하시고 사과 하셨습니다.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다는것은 생각이 열려있다는 증거이며, 그 자체는 탓할일이 아니라 권장할 일이며, 진보적 사고입니다.
소위 보수논객이라 자처하는 분들과 단신으로 뛰어 들어가 넷상으로 마짱토론을 해본 결과, 그분들은 자신들의 논지,논거에 대해서 절대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또한 상대의 논지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지 않으며, 다만 틀렸다고 전제한 후 표면적,즉 문맥상의 약점 찾기와 상대성향에 대한 인신공격등에만 골몰합니다.타당한 반론을 제기하면 답변자체를 하지 아니하고, 가능성을 열어두는 가정또한 인정하지를 아니합니다.
이번 토론에서 데모님을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봅니다. 먼저 벽을 쌓은것은 누구인지, 그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이 있었는지.. 왜 저러한 주장이 옳지 않으며, 나는 무슨근거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것인지 등등..
서로간의 의식사이의 벽을 보았다면 그 벽을 허물고자 함은 진보이며, 벽을 이용하고자 함은 수구입니다. 진보를 위해 뛰어온 우리가 어느덧 보수화 되고 때에따라선 수구적인 모습까지 보이게 되지는 않는것인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토론에서 저는 데모님에게 객관적인 시각및 균형을 견지하려는 노력과 함께, 왠지모를 광주시민및 그들에 대한 평가를 향한 다소 부정적인 시각또한 느꼈습니다. 이전에 접한 지식들이 과연 맞는것인가 검증받기 위해 토론에 뛰어들은것으로 추측되며, 부모님및 주위환경의 영향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만일 경상도분이시며, 신군부논리만 무수히 들으신 분이시라면, 그럼에도 끝까지 많은 부분을 열어둔채 토론에 임하시고 상대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로 들어주신 데모님께 박수를 쳐드려야 합니다. 수십번,수백번 보고들은 바를 상대의 몇마디로 백지화 시켜보고 다양한 가정을 인정하거나 바꾼다는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바꾼 의도가 무엇이냐고 따지고 들기 이전에, 역으로 우리의 자세는 과연 그러했는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진상이 철저하게 규명된다 한들 우리가 굳어져 있고 벽을 허물지 아니한다면 광주시민의 정신은 여전히 대한민국전체가 공유하지 못하며, 광주시민들의 한은 여전히 풀어지지 못합니다.
다만 데모님께서 고립된 논쟁이 지속되었고 그리하여 다소 거칠어진 분위기에 두분감정이 격해지신 것 뿐이라 믿고싶습니다. 사고와 마음만 열려 있다면 다시 차분해 지시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죠.
스톰 샤~워
05/05/22 03:41
수정 아이콘
데모님께 댓글을 또 하나 남겼다가 김테란님의 글을 보고 지웠습니다.

김테란님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추측이 맞길 바랍니다.

데모님께서 진심으로 광주에 의혹을 갖고 출발했다가 이글을 통해 광주항쟁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새롭게 보게 되었다면 저 역시 진정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저의 행동이 지나친 것이었음을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토론 과정이나 쪽지로 받았던 내용 등에서 여러가지 의구심이 들어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추측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니 더 이상의 댓글은 자제하겠습니다. 차분한 논조로 토론을 잘 정리해 주신 김테란님께 감사드립니다.
05/05/22 18:26
수정 아이콘
토론의 찬반을 떠나 데모님, 김테란님처럼 감정의 개입없이 토론하시는 분들과 얘기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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