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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3/26 01:11:21
Name 별마을사람들
Subject [독후감]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윤대녕의 '상춘곡 1996'을 읽고 나서


소설을 읽은 지 6년 만에 그에 대한 독후감을 쓰게 되는군요. 사랑에 가슴아팠던 분이나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강력히 추천하는 연애소설입니다.


*선운사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검단대선사와 의운국사가 창건하여 조선 성종 3년(1472년) 행호선사가 중건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6년(1614년)에 재건

*만세루
소설에 의하면 백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고려 때 불에 의해 소실되었고 그 이후 재건할 재목이 여의치 않아 불에 타버린 것들을 모아서 다시 지었는데 그것이 다시없는 걸작이 되었다고 함.


윤대녕의 '상춘곡 1996'을 읽은 지가 6년 이상이 된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 소설의 중간중간 가슴깊이 와 닿았던 구절들은 간간이 제가 연애편지라던가 여타 잡설에 두루두루 써먹어서 그랬는지 이 소설은 아직까지도 금방 막 마지막장을 덮은 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랍니다.
이 소설의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옛 연인에게 '우리 다시 사귀자'-_-;; 라는 것인데...그게 참 뭐라 할까요, 마치 한 편의 구애의 시를 옛 연인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 구석구석에는 작가의 시적 역량이 다분히 배어 있는 게 또한 사실이고요.
배경의 한 축이 되는 선운사와 만세루는 처음에 썼다시피 창건이후 소실되었다가 재 건축된 것입니다. 그 재건축이 오히려 처음보다 더 견실해지고 멋지게 살아났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아픈 과거의 상처를 통해 더욱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을 구한다는 기본 틀에 더하여 이 소설은 편지체를 통해 더욱 감미롭고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삼십대 중후반을 바라보는 늙은 노총각입니다. 십여년 전의 어느 날 한 낡은 포장마차에서 처음 만났던 여자, 그리고 갑자기 불같이 타올랐던 그녀에 대한 연정...지은이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
...
...
"...... 지금 절 유혹하는 거예요?"
나는 또 봉숭아 꽃물을 들인 것 같은 당신의 손톱을 내려다 보며 되받았지요.
"아까부터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어 엉터리 같은 자식! 하고 당신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지요. 한데 그 순간 왜 내 마음 속에서 당신에 대한 연정이 불같이 치솟았는지 모릅니다. 포장마차 안에서는 카바이드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지요. 당신은 금세 낯빛이 창백해져 짐승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습니다. 화도 나고 당황도 했겠지요.
아까처럼 소주 반 병이 남았을 때 당신과 나는 포장마차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은 봉천동에 있는 이모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이틀 후 고창으로 다시 내려갔다가 개학할 때쯤 서울에 올라올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택시 정류장을 찾아 내려가며 내가 슬그머니 어깨에 손을 두르자 당신은 가만히 있는 대신 또 가시 돋친 말을 던져왔지요.
"흥, 겨우 교양학부 때 읽은 에리히 프롬 따위를 가지고 수작을 걸어. 전공과목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안 그래도 방금 전공과목을 확실히 정한 참입니다. 최란영 당신으로 말입니다."
"머리털부터 기르시지 재수생 아저씨! 수강신청은 받지도 않을 테니."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순간 나는 당신의 멱살을 잡고 가게 셔터 문에다 밀어붙였지요. 누가 보면 아마 술취한 노상강도쯤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셔터 문이 내 힘에 밀려 당신 등에서 금속음으로 마구 출렁거렸지요.
"내일 당장 내가 먼저 선운사로 내려가겠다! 머리를 밀고 석상암에 들어가 있을 테니 유급을 시키든지 너도 전공을 바꾸든지 맘대로 해! 안 그러면 평생 네 집 앞을 지나며 목탁을 두드려댈테니."
당신은 벌벌 떠는 얼굴로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더니, 하지만 때가 좋지 않잖아요 라며 겨우 달래듯 대꾸했지요.
"하필이면 왜 이런 때 사람한테 승부를 걸어요."
내 때는 내가 알아서 정해! 라고 나는 물러서지 않고 당신을 내처 몰아붙였지요. 그러고 나서도 모자라 협박조로 또 이랬을 겁니다.
"이봐, 사람 잘못 봤어. 전공만 확실히 정해지면 나 거기다 목숨 거는 사람이야!"
당신은 짐짓 노한 얼굴로 그제서야 침착하게 되받았지요.
"괜히 자기가 불안하니까 아무나 붙잡고 이러는 거 아녜요?"
"그래,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껏 내내 불안만 먹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쯤에서 사생결단을 하려고 한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겠지만 천우신조로 그래, 오늘에야 내가 임자를 만난 것 같다."
그게 얼마간 억지였다 해도 그 때 내 마음이 그랬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굳이 혼자 가겠다는 당신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낸 다음 나는 골목 끝에 서서 울컥울컥 생소주를 토하며 치를 떨고 있었습니다. 그다지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무모한 사랑 때문에.
내 감정이 피할 수 없는 진심이란 걸 깨달은 건 다음날 새벽에 잠이 깨서였습니다. 나는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 가위와 면도기로 머리를 파랗게 밀어버린 다음 고속터미널로 달려가 정읍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지요. 정읍에 내려 흥덕을 거쳐 선운사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오후 서너시. 나는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달려 도솔암 마애불을 옆으로 툭 치고는 바위 고랑을 타고 올라가 낙조대에서 떨어지는 해를 보고 나서, 다시 석상암으로 내려와 흙 묻은 신발 그대로 요사채로 들어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마치 전설처럼 아득할 뿐입니다.
당신이 찾아오리란 장담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또 그걸 믿었대서 내려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당신이 안거하고 있는 고창 땅에 누워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으니 말입니다. 허구한 날 문지방을 베고 누워 나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내 화톳불만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었지요. 산에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를 보듯이 당신의 붉은 손톱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보름이 지나도록 당신은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달력으로 치면 개학 무렵이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잠든 내 얼굴에 감겨드는 이상한 빛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지요. 그것은 아주 은은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느껴지는 빛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바늘 끝같은 것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 같았습니다. 오래 그 소리에 귀를 던져두고 있다가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보았지요. 아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것이 문살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오는 연둣빛 봄햇살 소리였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당신에게 나는 모든 게 흑백으로 보인 때가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의 육체에서 처음 분홍을 보았다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밝은 연두. 나는 어쩌면 새로이 맞은 봄과 더불어 당신에게서 내 성인됨을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두 가지 빛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최초로 목격한 자연색이었으니 말입니다. 나는 도로 눈을 감고 돌부처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얼굴에 휘감겨 있던 빛은 서서히 풀려나가 창호지에서 미세하게 타닥거리던 빛발 소리도 차츰 엷어졌지요.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절 마당에 들어서자 그 연둣빛의 소리는 감쪽같이 달아나버렸습니다. 빛과 소리라는 말은 어쩌면 '멀리'라는 뜻에서 온 것이 아닐는지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나는 그게 당신이란 걸 금방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야흐로 봄이 막 시작됐다는 것을 뜻하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
...
...
자...드디어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지간한 영화나 소설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이 원만히 이루지지는 않습니다. 여자는 후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그 사람의 아이까지 낳게 되지요. 물론 그 이후 이혼을 하긴 합니다만...
이 소설에서 또 한 명의 서술자를 뽑으라면 인옥이 형이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공의 고등학교때 담임이었고 남자가 여자를 만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한 사람이지요. 물론 그때까지 교직에 있었던 건 아니고 화가의 길을 택했고 나름대로 성공도 거두었습니다. 그 인옥이 형이라는 인물의 대사에 녹아있는 시적인 표현들도 이 소설의 맛을 돋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인옥이 형으로 인해서 주인공은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여자는 이혼하고 아들마저 남편에게 빼앗기고 포천의 시골어디에서 혼자 번역 일을 하며 쓸쓸히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 대한 사랑이 다시 표면적으로 다시 싹트게 된 것이 이 인옥이 형이라는 인물과 동행하여 여자를 다시 만난 직후입니다. 그때의 사랑이란 십년전의 어린 사랑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애틋하고 강렬하였지만 표현의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스치듯 여자가 뱉었던 벚꽃이 필 때 다시 만나자는 말... 그 말에 대응하여 남자는 그 벚꽃을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꽃이 조금 더 일찍 피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벚꽃을 따라 올라옵니다. 그러면서 쓴 편지가 바로 이 소설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선운사에 관련한 이야기가 꽤 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벚꽃을 마중하기 위해 내려갔던 남자는 뜻밖에도 그곳에서 미당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미당의 입을 통하여 작자가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던 부분을 대신 표현하게 되죠.

젊었던 날에 사랑에 관련하여 눈물을 한번이라도 흘리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또한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순수했던 열정은 가슴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버리게 되죠. 제 생각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러한 젊은 날의 아픈 기억과 못다 한 사랑을 늘 가슴속에 묻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여자를 다시금 만나게 되었을 때 그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연모의 정을 그리 쉽게 따라간 게 아닐까요? 그 감정의 깊이는 오히려 젊은 날보다 더했으면 했지 절대 못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표현에서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그 표현의 방법이란 게 제가 보기엔 더 애틋하고 절실해 보입니다. 소설이란 게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소품이 등장하는 것처럼 선운사, 만세루, 동백꽃...이러한 소품들이 바로 주인공의 연정이자 또한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곧 주제가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남자는 다시 만난 여자에게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틈을 보게 됩니다. 바로 사람이 사는 틈이고 또한 세월을 등에 업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다른 모습인 거죠.
그리하여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시작되는 사랑을 위하여 이러한 말을 전합니다.
...
...
...
"조금 전에 나는 만세루를 다시금 참견하고 돌아왔습니다. 거긴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긴 어제오늘 날이 무척 흐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공기가 무거워진 선운사 경내는 영사넌 목조삼존불에서 퍼져내린 향내로 이틀이나 내내 신비한 빛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 향내에 발목을 묻고 나는 생각했지요. 이제 우리는 가까이에선 서로 진실을 말할 나이가 지났는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우린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은지 이미 오랩니다. 그것은 한편 목숨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아무한테나 함부로 그것을 들이댈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것은 자주 위험한 무기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알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대해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오늘 벚나무 길에서 보니 며칠 안짝이면 꽃망울이 터질 듯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처럼 꽃을 보러 온 이를 만나 만세루 얘기를 들은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 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게 당장일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만 접습니다. 처음 쓰고자 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소리도 너무 요란하고 더군다나 금방 읽기에는 길고 지루한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
...
...
바로 위의 인용에서 진실이란 말을 사랑으로 대신해 보세요. 우리는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우리는 비록 사랑을 멀리서 이야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게 된 나이라고..그리고 사랑은 목숨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입니다.
한번 실패했고 아팠던 그 상처 위에서 다시 그것을 딛고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우리들은 어쩌면 이러한 사랑에 목말라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소설의 마지막 한 줄의 대사가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때부터 가슴속에 박혀버렸습니다.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P.S 1. 본문보다 인용이 길어져 버린 거 같아 죄송합니다. 소설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너무 많아서요...
    2. 사랑은 원래 돌이켜 볼 때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 같더군요.
    3. 단편이라 한두시간이면 읽을 수 있습니다. 꼭 권해드리고 싶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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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26 06:48
수정 아이콘
저도 한때 윤대녕씨 글에 빠져 허우적 된적이 있었습니다. 반갑네요.
그 특유의 몽환적이면서도 시니컬한 그러면서도 또 감상적인..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뚜렷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글은 제가 못본것이로군요. 찾아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어요.^^
05/03/27 23:23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이런 글은 이 사이트에서는 거의 관심 갖는 분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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