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송태섭 시점의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북산선수 5인 모두 산왕전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부여받기는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은 송태섭이었으니까요. 이 문제를 이노우에 작가도 알고 있었는지 상당한 시간을 들여 전에 알려져있지 않았던 그늘진 가족사라는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그것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습니다. 애초에 <슬램덩크>는 등장인물의 가족이나 사생활의 비중을 극도로 줄이고 멤버 5인이 어떻게 팀을 이뤄 농구라는 시합에 매진하는 지에 대해서만 집중한 만화이기 때문입니다. 송태섭의 가족사를 따로 그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산왕전'과 접목하면 반드시 어긋나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죠. <슬램덩크>는 <터치>가 아니고, 송태섭은 우에스기 타츠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츠야는 작중에서 내내 카즈야의 그림자와 싸우죠. 하지만 슬램덩크 원작에서 송태섭은 단 한순간도 형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초기 설정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에 와서도 농구할까말까 망설이다가 한나를 보고 농구부에 들어왔습니다. 동기가 강백호와 별다를 바 없었죠) 갑작스런 추가설정은 그렇게 본편과 어울리지 않고 따로 놀게 됩니다.
그걸 수습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송태섭이 북산고에 입학하는 계기에 대해서 더 그럴 듯하게 다룰 수도 있었습니다. 형의 그림자를 쫓아 산왕 타도의 기치를 걸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거라면 송태섭은 능남 유명호 감독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대만은 몰라도 송태섭이 안감독 때문에 북산고에 입학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되죠. 이 때 적절하게 등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대만입니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정대만은 뜬금없이 동네 농구장에 (짧은 머리로) 등장해서 송태섭과 잠시 만났다가 사라지는데, 이 때부터 송태섭이 정대만을 주목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극적으로 우승하며 중학 MVP가 되는 장면을 보고 감명을 받아 정대만을 따라 북산고로 입학하는 것입니다. 마치 잃어버렸던 형의 대체자(롤 모델)를 찾은 것처럼 말이죠. 한데 들어오고 나서는 정대만이 농구를 그만두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 둘의 갈등이 폭발하고, 농구부 폭력사태 이후로 의기 투합해서 같이 농구하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과거 이야기에 보다 무게감이 실리면서 현재와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겁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에요.
그리고 공들여 묘사한 시합 본편에 들어서면 역시나 송태섭은 주인공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됩니다. 이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본편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이는 건 강백호였거든요. 어떻게든 송태섭에게 조명을 가져다주려고 해도, 더블 드리블이며 단상에 뛰어오르는 거며 루즈볼을 잡겠다고 점프하는 것에다 큰 부상을 입고도 시합 출전을 강행하고, 결국엔 게임을 결정짓는 슛을 넣기까지 하는 등 주머니에 넣어둔 송곳처럼 강백호는 툭툭 튀어나오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결국 새로 추가된 이야기는 거대한 사족이 되어버리는 가운데 남는 것은 산왕전의 재현 뿐인데, 그래도 이 부분은 정말 괜찮습니다. 만화책에서의 묘사를 다소 포기하면서까지 현장감과 속도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돋보이는데 마치 실제 농구시합에서 극도로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보는 느낌으로 생생합니다. 여전히 만화책에서의 묘사가 더 풍성하고 전달하는 게 많다는 느낌은 들지만 어차피 그건 이미 봤던 거니까요. 애초에 산왕전은 팬서비스 느낌으로 아예 등장인물 소개며 뭐며 다 생략하고 진행됩니다. 전반에 신현필이 나왔던 장면도 잘려서 갑자기 후반에 신현필이 등장하기도 하고 전반은 어떻게 북산이 리드했었는지도 모르겠고 경기 자체도 띄엄띄엄 보여주기 때문에 흐름이 연결되지 않지만 감상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어차피 극장에 온 관객들은 골백번도 더 봤던 그 장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리고 그 장면들은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요약하면, 추억팔이 영화이면서 나름의 변주를 줘봤지만 그 시도가 성공적이지는 않은 가운데 기존 장면의 재현은 그래도 상당히 볼만한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산왕전 자체에만 몰두해서 전개했으면 어땠을까란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는 도중에 즐거웠던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역시나 추억은 힘이 셉니다.
ps.
1. 산왕 선수들 중에 정우성에게만 비중을 줘서 신사에 기도하는 장면을 추가로 넣고는 나중에 미국에서 송태섭이랑 붙는 장면도 애매하게 느껴집니다. 송태섭은 3학년으로 올라가 새로운 북산 캡틴이 되는 게 아니었나요?
2. 어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들어온 한 소년 관객이 영화 끝나고 나가면서 "송태섭이 마지막에 슬램덩크할 줄 알았어." 라고 말하더군요. 하기사 주인공이 송태섭이고 제목이 슬램덩크니까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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