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큼 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거쳤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일제에 맞서 항일 투쟁운동을 가열차게 벌였다는 사실은 한번쯤은 들으셨을 겁니다. 그 항일 투쟁운동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뽑자면 역시 김좌진 장군이며, 김좌진 장군을 유명하게 만든 독립군의 대표전투가 바로
[청산리 대첩]이지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전역 지도]
그리고 사실 이 전투는 굉장히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청산리 전역에서 거둔 독립군의 성과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인 검증이 부족하였지만 교과에서는 청산리 대첩을 강조하였습니다. (요즘은 대첩이라는 말은 안쓰고 애둘러 표현합니다.) 이 논쟁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례는 바로 (지금은 없어진) 네이버 인조이재팬에서 벌어진 양 국가간의 역사 논쟁이었는데, 한국측의 완전한 참패로 끝났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조금 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청산리 전투라는 것의 실체부터 조금씩 더듬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박창욱 교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지적하기를 "청산리 전투의 용어가 혼재하고 있음" 다라고 하였고 군사학적 견지에서 봤을 때 청산리 전투는 청산리 근처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의 종합이기 때문에
[청산리 전역]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창하였고, 저도 이를 인용하여 앞으로는 청산리 전역으로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1] 청산리 전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핵심 타임라인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백운평 전투
(2) 천수동 습격, 완류구 전투
(3) 갑산촌 전투
(4) 어랑촌 전투
(5) 고동하 전투
(6) 기타 자잘한 10여 차례의 전투들
이 모든 전투들을 묶어서 청산리 전역이라고 부르는 전장이 되었던 것이죠.
[2] 한국측의 주장은 어떠한가?
먼저 청산리 전역에 대한 위키 백과의 서술은 이러합니다. (
https://ko.wikipedia.org/wiki/청산리_전투)
(1) 백운평 전투 : 적 200여명 사상
(2) 완류구 전투 : 적 400여명 사상
(2-1) 천수동 습격 : 적 120여명 사상
(3) 갑산촌 전투 : 적 1200~1300여명 사상
(4) 어랑촌 전투 : 적 연대장 포함 300여명 사상
(5) 만록구 전투 : 적 수백여명 사살
(6) 고동하 전투 및 기타 : 어쨌든 이김
종합하자면 전사자 1200명, 부상자 3300명으로 추산하고 있군요. 사실 이 기록은 대부분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왔던 주장에 불과합니다. 당연하지만 박은식의 당시 사정을 봤을 때 상세한 사료의 교차 검증은 불가능했고 어디까지나 "~~했더라"는 소문에 가까웠습니다. 내지는 이범석 장군이나 전투 참여자의 회고나 쪽지등의 종합이었지요.
2) 이범석 장군은 해방 이후의 회고록에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망자를 3천명까지 부풀립니다.
좀 더 공신력 있는 매체들은 어떨까요?
7차교육과정 중등 3학년 사회 역사(2)에 실린 부분을 인용하자면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m71_0100_0030_0010_0020) 위와 같습니다.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 전사. 대체로 비슷하죠?
이것은 당시 청산리 전투에 대한 독립신문의 보고서를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독립신문에 실린 대한군정서의 전투 보고서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701&tabId=01&levelId=hm_126_0010)
즉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으로는 청산리 전역은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한 빛나는 승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일본측의 주장은 어떠한가?
일단 일본측이 그린 그림부터 봅시다.
1920년 현재, 일본은 러시아의 적백 내전에 개입하였고 시베리아로 최대 5개 사단, 72000여 명을 파병한 상태였습니다.
사실 1920년대의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대호황을 맞이한 상태였고, 이를 바탕으로 최초로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가능해진 상태였습니다. (시베리아 파견군은 1922년 정부가 파병 예산안을 거부하여 되돌아오게 됩니다)
3) 우리야 1919년 3.1 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목소리를 외치자 일제가 찔끔해서 문화 통치를 했다는 걸로 우리 좋은대로 해석을 합니다만...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난립하는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일본군에게도 골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대규모 전력투사를 시행하게 되죠.
현 편제인 일본 21개 사단 가운데서 일본이 아니라 조선에서 증설중이던 19사단과 20사단이 거리와 여건상 적절하여 이 2개 사단이 낙점됩니다. (1920년대 일본의 편제상 1개 사단은 대략 8천 ~ 1만여명 정도)
[신효승, 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
이 두개 사단은 서부전선/동부전선으로 나뉘어서 독립군 및 그 지역에 살던 한인들을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동부전선은 훈춘과 왕청을 포위하는 포위망으로 구성하는 대략 1만명 가량의 침략군이었습니다.
[박창욱,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연구]
[대략적으로 붉은원 안이 동부전선, 녹색원 안이 서부전선으로 보시면 됩니다]
동부전선은 독립군의 주요 보급기지였고 따라서 일본군이 심혈을 기울인 공격을 막기보다는 일단 기지를 비워두고 피하는 식으로 피해를 최소화하였기에 딱히 역사적으로 남은 전투는 없습니다. 따라서 독립군의 주력이 모여 있었고, 이 주력이 모여있는 서부전선으로 들어오는 일본군과의 맞대결이 바로 청산리 전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청산리 전역 하면 보통 독립군이 지형을 이용해서 일본군을 끌어들인 후 매복, 포위하여 섬멸하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당시 임정의 국무총리인 이동휘의 지시는 "반일역량을 보존하였다가 일본군이 물러나면 역량을 회복하여 반일투쟁을 견지" 하라는 지시였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독립군들은 되도록이면 일본군을 피하고, 어쩔 수 없을 때만 지형을 활용한 역습 후 퇴각을 통해 최대한 전투력 보존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죠.
따라서 청산리 전역의 전투는 매복과 기습의 전투가 아니라, 추격과 도주 과정에서 산발적으로 만나는 조우전 형태가 되었습니다.
독립군이 맞서야 하는 일본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박창욱 교수는 동 논문에서 대략적으로 5천여명의 규모로 추산합니다. 그러나 이 병력이 전체가 전투 병력은 아니었고, 한덩어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타 병과나 비군인을 제외하고 본다면
1개 대대
13개 중대
6개 기관총 소대
기타 여단 사령부 외 병력
(모두 합쳐서 아즈마 지대라고 칭하였음)
등을 추산하면 아즈마 지대의 순수 전투병력은 3천여명 가량으로 짐작됩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여기에 일본군은 산포대와 저격포라고 하는 화포를 배치함으로서, 인력의 부족함을 화력으로 메꾸고자 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 일본은 현재 러시아에 많은 병력을 빼내어 병력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죠.
자, 일본군의 상황과 규모도 알아봤으니 이제 일본이 스스로 평가하는 청산리 전투의 상황을 알아봅시다.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가 끝난 뒤, 전투에 대한 평가로
[간도출병사]라고 하는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이하 언급할 내용들은 대체로 이 간도 출병사를 인용한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1) 백운평 전투 :
야스가와 소좌 소속 일본군 200여 명이 선진 정찰대를 편성. 4시간여의 수색 끝에 북로군정서 군과 조우, 30여분의 짧은 전투 후 북로군정서 군은 퇴각. 야마다 지대는 퇴각하는 북로군정서 군을 추적하였으나 추적하는데 실패.
(북로 군정서 군은 250여명, 일본군은 선견대 90명의 조우전이라는 설도 있음)
(2) 천수평 습격 : 일본군 27 기병연대 20여명을 새벽에 기습함
(3) 완루구 전투 : 퇴각하는 홍범도 부대를 포착한 아즈마 지대가 공격했으나 홍범도 부대는 감쪽같이 사라짐.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서로 총을 쐈다는 이야기가 퍼졌는데,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이 시점.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려던 일본군끼리 서로 오인 사격했을 가능성 있음. 그러나 독립군이 홍보하는 것처럼 서로 전멸할 정도로 싸웠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4) 어랑촌 전투 : 청산리 전역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계곡과 산봉우리를 끼고 방어진지를 편성한 독립군과 이를 뚫으려는 일본군의 대결. 지형이 많이 험난하여 전력 투사가 어려웠기에 일본군은 주로 포병 전력을 통한 공격 및 우회로를 찾아 기동하려는 시도를 함. 독립군은 우월한 지형을 끼고 비록 포병은 없어도 잘 버팀. 몇 차례의 일본군의 우회 기동 시도를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며 사라졌던 홍범도 부대가 이 때 불쑥 등장함.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에 의해 포병 부대가 공격받을 것을 우려하여 공세를 포기. 야간이 되자 어둠을 틈탄 독립군 부대가 성공리에 철수함.
한국측은 여기서 카노 연대장이 전사했다고 했으나, 실제로 이후 기록에 동일인물이 멀쩡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잘못된 보고인 듯.
(5) 고동하 전투 :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중대가 후퇴하던 독립군의 야영지를 발견, 추적했으나 약 30여분간의 교전 끝에 다시 독립군은 퇴각. 일본군은 추격했으나 숲에다 불을 지르는 등 독립군의 기만 작전에 의해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귀환. 일본군 사망자 4명.
(6) 이하 기타 자잘한 전투가 있지만 특기할 만한 건 없음.
이후 일본 사학자의 연구에 따르자면 청산리 전역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11명, 부상자는 24명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5] 어느 쪽이 모순이 적은가?
일단은 우리 측의 평가인 1200명 사살, 3000여명 부상을 입혔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들죠. 전체 병력이 5천명인데 4200명을 사상시켰다는 건, 여단 병력의 괴멸을 의미합니다. 현대전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사상자가 전체의 30%만 발생해도 전멸했다고 평가하는데, 5천명 중에 4200명 사상은... 즉, 일단 한국측 보고는 모순점이 너무나 많다는걸 깔고 갑니다.
여기에 또한 전과 비교는 보통 피해를 입은 쪽의 기록을 신뢰한다는 원칙에 따르자면 이 또한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실제로 영국 방공전이나 태평양 전쟁에서의 무수한 전투에서 많은 군인들이 (국적을 가리지 않고) 터무니없는 과장 전과를 자랑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엄격하게 교차 검증해보면 대체로 피해자의 전투 기록이 옳았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일본군은 정보 은폐 및 허위 과장 보고의 달인이니까, 청산리 전투 기록도 충분히 허위 또는 누락 기록이 있을 수 있다고. 일견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위의 내용들이 담긴 일본측 보고서는 언급했듯이
[간도출병사]라는 책인데, 이 책은 공개적으로 선전하는 책이 아니라 일본군 내부에서 전투를 자체 평가하고 미비한 점을 보완하는 비밀 자체평가서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러한 보고서마저 허위로 쓰는 멍청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일본은 그야말로 허위와 왜곡의 날조 뉴스로 국민들을 기만했지만, 내부에서는 '나구모 보고서'라는 것을 만들어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합니다. 즉 적어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는 자체 평가서의 신뢰도는 굉장히 높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아픈 점은, 우리의 주장이
[일본군은 왜곡 조작이 많았으니까 이것도 왜곡이 있었을거야] 나
[니들이 이겼으면 왜 간도 토벌을 그렇게 참혹하게 했니?] 수준의 간접적 주장 말고는 우리의 전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한 자료가 없다는 겁니다. 그치만 위에서 쭉 나열한 대로, 전과를 교차 검증할 수 없으면 피해국의 자료를 신뢰하는게 원칙이고, 오히려 우리의 전과 기록이 터무니없이 과장되어있는 장면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일본측의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고 화력도 증강되었으며 전차 중대도 보유했던 미군이 과달카날에서 이치기 지대를 맞서 싸워서 900여명의 일본군을 괴멸시키고 약 800명을 전사시켰지만 끝내 일본군 전멸은 시키지 못했는데, 20년 후의 미군도 해내기 어려웠던 이러한 전과를 여러가지 악조건에 맞닥드렸던 독립군이 해냈을거라고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때 (또는 지금도) 퍼져있던 '청산리 대첩'에 대한 환상은, 인조이재팬에서 역사 배틀을 벌였다가 한국쪽이 완패함으로서 참혹한 결말을 맞았습니다. 한국은 교수까지 출동했으나 패퇴함으로서 지켜보던 네티즌들이 소위 말하는 '국뽕'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역사교육에 대한 회의감 그 자체를 느끼게 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우경화하여 변질되어버리는 등 한국 인터넷에 끼친 악영향도 상당했지요.
오늘날 우리쪽 사학자들은 대체로 일본군 사상자를 400~450여 명으로 추정하던데 사실 이 정도만 해도 굉장한 전과이니만큼 객관적 증거로 밝혀진다면 청산리 전역을 대승이라고 평가해도 문제는 없을거 같긴 합니다.
청산리 전역의 의의는 무엇인가. 박창욱 교수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청산리 전역에서의 전투는 빛나는 승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군의 '경신년 대토벌'이라는 큰 그림에서 미루어 볼때, 국지적인 승리에 불과하며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독립군과 민중이 큰 피해를 받았다."
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들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림과 동시에 일본군의 추격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일본군 전체를 물리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한 독립군에게 이 정도의 승리는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전력을 보강한 일본군의 학살 작전에 휘말려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전술적 승리, 전략적 패배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청산리 전역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참고 문헌
[장세윤, 만주지역 독립운동 연구의 회고와 전망]
[박창욱,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연구]
[조동결, 만주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
[신효승, 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
[박창욱, 동북 지역 한민족독립운동사 관련 사료 정황]
[박창욱,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기타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우리역사넷 등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