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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3/10 01:56:25
Name VrynsProgidy
Subject [일반]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 말고 싸우는 친구들에게 (수정됨)
나는 미스터리 물, 그중에서도 특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좋아한다. 푸아로, 미스마플이 나오는 모든 작품은 물론, 단편이나 다른 필명을 사용해 낸 로맨스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까지, 작품 대부분을 읽었고, 만족했다.

그의 소설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등장인물의 내외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독자들에게 묘사하는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창 주요 이야기가 전개되는 도중, 사건이 끝난 이후의 후일담까지, 독자들이 인물들을 실존 인물처럼 입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게 작가는 애피타이저 메인디쉬 디저트를 근사하게 담아 대접한다.

가령 크리스티의 작품 중 자주 회자하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만 해도, 단순히 그래서 사실 범인이 누구였다 하는 결말뿐만 아니라, 하나씩 베일 뒤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의 킹스 애보트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의심하고, 의심받고, 혐의를 벗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사건과,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가 예쁘게 담겨 있으며, 그것이 이 작품을 단순히 반전이 대단한 소설이 아닌 놀라운 명작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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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무실에서 친구 A와 B가 같은 미스테리 작품을 보다 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책상에 내팽개쳐져 있는, 그들이 읽다 만 책 두 권 중 하나를 들고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니, 권력자 J가 그의 지지자였던 한 여성 기자 K를 폭행했다는 의혹에 빠지고, 그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 정치적인 영향에 대해 다루는 작품이었다.

트릭이 말이 안 돼서 싸우고 있는것일까? 의문을 가지고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니 그들이 읽다 말아서 펼쳐져 있던 페이지까지 생각보다 금방 도달했고, 아직 K에 대한 경찰 수사조차 시작되지 않은 소설의 초반부였다. 어이가 없어 그들에게 대체 왜 소설을 별로 읽지도 않아놓고 내팽개친 뒤 싸우고 있느냐고 물었다. 

A는 내게 대답했다. 범인인 권력자 J가 너무 쓰레기 같은 인물인데, B가 그것을 감싸는 것이 꼴을 보기 싫었다고
B는 내게 대답했다. 권력자 J는 간악한 상대 정당 L과 작당한 K의 음모에 빠졌을 뿐인데, A가 그것에 홀랑 속아 넘어가는 것이 우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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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의 작품을 보면 명망 높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관료가 자신의 신념에 파묻혀 범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삶을 살던 동네 전과범 양아치가 사소한 계기로 인간을 향한 사랑에 눈을 떠 누군가를 구하기도 하고, 순수하게 남을 도우며 살아온 선한 처녀가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고 표독스러운 악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그들이 앞에서 보여준 삶의 모습, 캐릭터 성을 잃고, 극 중 역할에 매몰되는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건구성, 심리묘사, 상황설정 때문에 더욱더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늘로 곧게 뻗어 흔들림이 없던 관료의 정의감은 그 올곧음으로 사람을 찔려 죽게 만든다. 시골 처녀의 순수한 마음은 사건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지라는 잔혹성으로 변한다. 남을 돕는 능력이라고는 손을 잡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소시민은 벼랑 끝에 매달려 떨어지기 직전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타인의 목숨을 구한다.

나는 이러한 부분이 크리스티의 소설이 다른 미스터리 물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은 시대상황을 공감하기에는 너무
아득한 과거이고, 미스테리 트릭들도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고, 현대적으로 발전해왔기에 조금은 투박하고 익숙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는 좋은 트릭의 구성요소, 소품이 아닌 진짜 인간이 있다. 에르큘 푸아로는 추리보다도 썸타는 젊은 남녀를 연인으로 만드는 능력에 더 재능이 있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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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답을 들은 나는 깨달았다. A, B가 본 소설과 내가 본 소설은 같은 내용이 쓰여 있는 같은 책이지만, 그것을 우리 셋은 전혀 다르게 읽었고, 그것이 그들을 싸움으로 이끌었다는것을

내가 본 소설에는 '정치인 J'라고 적혀있는 단어를, A는 '파렴치한 여성폭행범' 이라고 읽었다.
내가 본 소설에는 '정치인 J'라고 적혀있는 단어를, B는 '억울한 정쟁의 피해자' 라고 읽었다.

내가 본 소설에는 '기자 K' 라고 적혀 있는 단어를, A는 '지지하는 권력자에게 배신당한 피해자' 라고 읽었다.
내가 본 소설에는 '기자 K' 라고 적혀 있는 단어를, B는 '정당 L과 단합한 피해망상증 환자' 라고 읽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읽고 받아들이고 생각한 것에는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었다. 소설 초반부 정당 L은 쓰레기 같은 곳으로 묘사되어 있었고, 작품 내 사회에서는 권력자들이 지지자들을 폭행하고 착취하는 것이 연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었으니까. 정치인 J는 상대 정당 L이 죽도록 미워할 만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여성 지지자들을 다루는 문제에 가벼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직은 진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일 뿐이고, 그 가능성의 저울이 인과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 명백하게 기울어져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낸 결론은, 편견 위에 쌓아올린 편협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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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아, 우리 그만 싸우고 읽던 이야기를 마저 읽자. 

이야기를 마저 읽으면 경찰들이 J의 증언과 K의 증언을 대조해보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밝혀낼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마저 읽으면 A의 말대로 J가 비겁하게 도망치고 숨을 것인지도 드러날지 모른다.
이야기를 마저 읽으면 B의 말대로 정말 L이 이 사태에 개입해서 정치적 혼란을 유발하고 싶었을지도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잘 쓴 미스터리에서, 그리고 그 미스터리가 참고했을 진짜 현실에서는, 정치성향도, 성별도, 직업도, 지난 몇 달간 일어난 사건도, 살아온 삶도, 실제로 그가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가 일 잘하는 정부의 장관이라고 해서, 그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 제도에 의해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고 해서, 그가 여태까지 열심히 기부를 해왔다고 해서 이번 사건에서조차 가련한 선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부정한 기업에서 일했다고 해서,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수갑을 차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가 꺼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번 사건에서조차 범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실제 일어난 사실이 남기고 간 흔적뿐이고, 그리고 그 흔적을 되짚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결국 덮어둔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야만 한다. 

물론 이야기를 끝까지 읽었음에도 작가가 진실을 밝히지 않고 펜을 거뒀을 수도 있다.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고 찝찝하게 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 그때 가서 하자, 그때 가서 다시 책을 집어 던지고 팔 걷어붙이고 싸우고 화내자, 작품을 책임감 없이 완결한 작가에게건, 작가가 그렇게 끝을 맺을 수밖에 없게 만든 이 사회에게건, 아니면 슬프게도 어쩔 수 없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서로에게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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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군
18/03/10 02:12
수정 아이콘
참 취향저격이시란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열을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다시드네요. 제가 생각해도 F만 붙어도 평정을 잃고 있는 것 같으니까.
18/03/10 02:43
수정 아이콘
사람들이 순진하고 순박해 서로 싸우는게 아닙니다. 가치관의 충돌이예요. 물러설 수 없는.
몰라서 그러는게 아닙니다. 교조적인 글에 기분 나빠서 조금 적습니다.
VrynsProgidy
18/03/10 02:46
수정 아이콘
싸우지 말란 얘기가 아니에요. 어차피 드러날 사실관계가 확실해지면 그때 싸우자는겁니다. 마지막 줄에도 슬프게도 서로 어쩔 수 없이 이해할 수 없다고 써놨구요. 이해할 수 없으니 물러설 수도 없겠죠.

그리고 "니네 순진하게 왜 싸우냐? 난 혼자 고고하게 잘나서 안 싸워~" 이렇게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가서 다시 책을 집어 던지고 팔 걷어붙이고 싸우고 화내자] 라고 했지
[그때 가서 다시 책을 집어 던지고 팔 걷어붙이고 싸우고 화내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가치관이 확고하고 대립을 피하지 않는 타입이라 여기서나 다른데서나 지겹게 싸웠고, 싸울겁니다.
18/03/10 15:22
수정 아이콘
사실관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일이 드물죠.
VrynsProgidy
18/03/10 02:53
수정 아이콘
덧붙이자면, 그 어떤 숭고하고 곧은 신념도 진실과 거짓 앞에서는 한발짝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끝까지 남은 삶을 불태우기로 했고 그 사람의 모든 말을 믿어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이 내 눈앞에서 다른 사람을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사람을 죽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진실이니까요.

신념을 가지고 주장하고 싸웠어도, 사실관계 확인 결과 자기가 틀렸으면 양보해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양보할 필요는 없고 싸워서 졌으니까 패자답게 조용히 링 밖으로 나가면 되겠네요.
18/03/10 02:56
수정 아이콘
저는 님의 주장에 100프로 동의합니다. 태도에 동의 못하는 것이죠. 저만 그렇게 느꼈다면 제가 잘못된 겁니다.
VrynsProgidy
18/03/10 03:02
수정 아이콘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1. 특정 부분의 내용이 그렇게 생각하실만하게 쓰여진것 같기도 하고
2. 뉘앙스는 친구한테 말하듯 쓴다고 썼는데 생각해보니 친구들도 제 말투가 재수없다고 저를 별로 안 좋아하네요.

내용적으로 의도와 다른 부분은 표현을 좀 손봤고
태도나 뉘앙스가 너무 재수없는 부분은... 그냥 재수없는 놈이 써서 그런거라서 그런거라 어쩔수가 없네요 ㅠㅠ

죄송합니다.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8/03/10 03: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뭐 모두가 룰을 딱딱 지키면 좋겠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성급히 나서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이들로 인해 물이 진득하게 흐려지죠. 때로는 이들로 인해 여론이 쏠리고 이것만큼은 못참는 반대쪽 사람들이 또 뛰어들어 로얄럼블이 벌어집니다. 결과가 나올때까지 가만히 두고 보려고해도 사건 당사자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때로는 결과가 조용히 묻혀서 혹은 결과가 영영 안나와서 여론전에 승리한 쪽의 의견이 진실인양 남는 경우도 있고, 이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보기 힘든게 아닐까 해요. 자극적인 소재에 인간이 입을 가만히 두기도 쉽지 않고 말이죠.

Q.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A.박제해두고 팝콘이나 먹고 있다가 결과나오면 놀려먹자.
VrynsProgidy
18/03/10 04:00
수정 아이콘
뭐 당연히 아예 결과 나오기전까지 걍 입을 봉하고 마냥 두고 봐라! 이건 말도 안되고 (저부터도 그렇게 못하는 성격이고 크크) 어디까지나 드러난 사실을 바탕으로, 일단 최소한 공식적인 사실관계는 드러난데까지 라는것만이라도 서로 익스큐즈한 상태에서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덮어놓고 응 범인 맞아~ 꽃뱀이네~ 이런것만 좀 안했으면...
세인트
18/03/10 06:21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싸우지말고 식사나 합시다.
Fullhope
18/03/10 08:16
수정 아이콘
만약 미스테리물이라면, 기자와 정치인이 무슨 말을 저리 못하나? 작가가 직업설정을 잘못했네.. 했을 것 같네요. 워딩이 핵심을 비켜가요.
숲을 봐라. 나무는 아몰랑이라는 기자와 호텔룸은 안갔고 저 기사와 같이 성추행 하지 않았다는 정치인이라니..
VrynsProgidy
18/03/10 10:24
수정 아이콘
알리바이주장하지말라는 개소리를 거르고 보면 정봉주의 해명의 핀트가 괴상망측한것은 사실입니다.

뭐랄까 자기 일이 아닌 일을 반박하는 사람의 태도에요. 법원 서기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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