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빠는 5남매 중 넷째시고, 아들로는 둘째 되십니다. 좀 자랑 섞어 말하자면 상당히 능력자시죠. 굉장히 어렸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얼마 후 집안 누군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저희 집안도 통째로 몰락했습니다. 아빠 말로는 그땐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았다고 하더군요. 대한민국의 국민 가훈, 보증서는 자 낳지도 말라는 가훈은 저희 집에도 적용됩니다. 그 와중에도 명문대를 졸업하고 집안을, 정확하게는 저희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죠. 지금은 서른이 좀 넘은 제 기억에도 어렸을 적에 집안이 무척 가난했던 생각이 나네요.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잘살진 않지만 별다른 돈 걱정 없이 사는 편입니다.
자랑에 푸념 좀 더 하자면 굉장히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분이십니다. 엄격한 가장이시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좀더 일찍 출근하는 엄마를 위해 아침밥을 하시는, 뭐 이런 특이한 분이시죠. 취사병 출신임을 자랑하시며 요리를 상당히 잘 하십니다. 자부심도 좀 있으시고요. 하지만 옛날 분이신지라 어쩔 수 없이 저랑 충돌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도 한 성깔 하기 때문에 굽히고 들어가는 경우가 없어 자주 싸움이 나지만 그런 다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저희 아버지의 진보적임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사랑하는 제 아빠께선 집안에 호랑이 삼촌으로 정평이 나있는 분입니다. 소위 말해 대가 쎄시고, 한 성깔 하시는 분이거든요. 저를 빼고 제 사촌들은 외가 친가 가릴 거 없이 저희 아빠 앞에서 벌벌 떱니다. 물론 이제는 아빠도 환갑이 되셨고, 예전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호랑이 삼촌이시죠. 저랑 같이 술먹고 서로 농담따먹기 하는 거 보면 사촌들은 기겁을 해요.
아까 아빠가 5남매 중 넷째, 아들로는 둘째라고 말씀드렸죠. 한 성깔 하는 분이라고도 했구요. 근데 저희 집에서 아빠만 그런게 아니더라구요. 2남 3녀중 첫째, 지금은 돌아가신 큰아버지만 빼고 순둥순둥한 성격이 없습니다. 큰아버지도 그렇진 않으셨지만 뭐, 다른 네분에 비하면 굉장히 순한 편이셨죠. 소위 말해 암탉이 우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항상 중요시하시던 게 가장으로서의 권위입니다.
그래서인지 제 유년기 시절 저희 친가 집안에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돈은 없지만 화목했던 외가와 달리 역시 돈은 없지만 틈만 나면 싸우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중심에는 항상 할머니 봉양을 누가 해야 하느냐와 제사를 누가 모시느냐,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누가 가장이냐, 누가 킹왕짱이냐 이게 큰 문제였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선 변덕이 있으신 탓인지, 거취가 자주 변하셨습니다. 제가 유년기던 시절엔 저희 집에서, 그러다가 미국에 계신 둘째 고모 댁에서, 또 귀국하셔서는 저희 집에서, 그리고 또 큰아버지 댁에서, 막내 고모 댁에서, 결국 돌아가시기 전엔 요양원에 계셨죠. 그때마다 제사를 누가 지내느니, 참석을 하느니 안하느니 하면서 분쟁이 났습니다. 물론 이때마다 제사를 누구네서 지내느냐, 이것도 왔다갔다 했습니다.
할머니께서 거취를 옮길 때 마다 집안엔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저희 아빠는 항상 혼자 편이셨던 것 같습니다. 가장은 남자가 해야지, 아빠 말로는 "집안은 빠따가 챙겨야 한다"고 하셨죠. 어렸을땐 뭐 그게 그런가보다 했고요, 아빠한테는 그게 당연한 일인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아빠는 그 일로 집안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셨거든요. 저야 이해 못했지만 아빠 입장에선 그게 중요한 일이었을 테니까요.아빠 입장에선 아무래도 할머니를 봉양할 만한 경제력이 떨어지시는 큰아버지, 그리고 성정도 아빠처럼 강하지 못해서 고모들에게 휘둘리는 큰아버지를 딸들에게 굴복해서 집안의 도를 버린 그런 큰아버지를 믿지 못하시더군요. 결국 볼때마다 쌈박질이 났어요. 솔직히 그땐 맨날 싸울거 왜 보는지 이해를 못했죠.
할머니가 결국 미국으로 다시 가시고 난 뒤의 어느날, 큰아버지와 아빠는 크게 싸운 뒤 의절을 하시게 됐습니다. 그게 형제가 갈라설 일인지 저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아빠 입장에선 그게 참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럴 법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뒤로 집안 제사도 큰집에서 가져갔고, 저희 집에선 몇년동안 명절을 가족 여행을 하며 보냈습니다. 뭐 사실 귀찮은 차례 제사 준비 안하고 저는 좋았어요. 언젠간 화해를 하겠지, 근데 그 날이 늦었으면 좋겠다 이런 철없는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그러던 어느날, 정말 갑자기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갑자기요.
죽음은 모든 것을 용서하게 한다고 하죠. 그때 아무 말 없이 모였던 아빠와 고모들은 그저 형제의 모습 같았어요. 그렇게 서로 죽자고 싸웠던 분들이 맞나, 하는 그런 모습이었죠. 아빠는 큰아버지 영정 앞에서 결국 통곡을 하시더라구요. 이렇게 갈거 왜 싸웠을까, 하시면서. 집안에서 꽤나 이야깃거리였죠. 호랑이 삼촌이 장례식장에서 우는 모습이 말이죠.
장례식장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아빠와 큰아버지, 고모들과의 과거의 추억들 얘기를 들었죠.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빠의 형제자매들은, 생각보다 우애 있는 분들이셨구나. 아빠가 보기보다 여리고 예민한 분이라는거는 잘 알고 있었지만, 형제자매 분들과 사이가 좋았었던 건 몰랐죠. 제가 태어난 이후로는 항상 싸우기만 하셨으니까요. 그때 들은 얘기는 그저 평범하고 우애있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했어요. 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니까요. 이제 생각하기로는 그때 가족여행간다고 저는 신났던 그 명절마다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해요. 대략 20년을, 그런 형제들과 항상 싸워가며 지냈고, 결국 의절하고, 마지막으로 본 첫째 형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다니 말이죠.
글쎄요...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아빠가 만약 가장의 권위라는거에 가치를 두지 않으셨으면, 그랬으면 우리 집안은 좀더 화목했을까요. 솔직히 그래요 그 제사라는거, 할머니 모시는거, 그거 다 가정에 부담되는 일인데, 그냥 큰아버지가 하시게 뒀으면, 고모가 할머니 모시게 뒀으면 어땠을까요. 그랬으면 저희 아버지는 좀더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가장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았으면 경제력이 떨어진다던 큰아버지도 그냥 좋은 형 오빠가 아니었을까요.
전 참으로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 얻을 것 없는 가장으로서의 뭔가 때문에, 아빠는, 또 그 아빠로 인해 엄마와 나는 많은 불행을 겪었구나 하고.
한 십년 조금 더 된 이야기네요. 그때부터 저는 가장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예 뭐, 절대 비혼주의자는 아닙니다. 때 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지겠죠. 하지만 뭐, 가장이라는 건 싫습니다. 가장 그거, 불행한 의무일 뿐이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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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결심을 한건 오래됐지만 제가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주변에 얘기한건 그리 오래 된 얘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페미니스트가 된건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저는 책임 지기 싫어서 페미니트스가 됐습니다. 아 그래 싫다, 그런 권리 나한텐 필요없으니 너희가 가져가.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 뭐 이런 거죠.
남성으로서 태어나서, 가부장제라는 억압적인 제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거죠. 그게 왜 페미니즘이냐, 하면 가부장제라는 것이 양성의 다른 권리=다른 의무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은 양성 간의 다른 권리와 다른 의무를 거부하니까요. 정확하게는 내가 평소 생각한 것이 페미니즘이었군, 이라고 생각하게 된거죠.
결국 이상적으로 최종 종착지는 남녀가 성별이 아닌 사람으로서만 평가받는 것, 저는 이런 걸 바랍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는 병역도, 육아휴가도, 경제활동도 같이 하는 것을 바라죠. 물론 이것은 최종적인 목표이니 당장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꺼라위키에 따르면 페미니즘이라 하면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더해서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찾다 보니, 어느 순간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집단에 포함이 되어 있더군요.
전 이 사회에서 남녀가 동등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엔 여러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렇게는 보지 않습니다. 남성에게도, 특히나 낮은 계급의 남성에게도 이 불합리의 날이 세워져 있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가 가부장제에 지배받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합리함이 있다고 봅니다.
어 뭐, 저는 남자죠. 당연히 페미니즘 중 일부에서 가진 남혐 기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싫습니다. 그리고 극우적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혐오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야 쟤들은 페미니스트 아니야, 쟤들은 짜가야 이렇게 말할 순 없습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흑백분리를 주장하고 폭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백인을 증오했던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X가 있습니다. 말년엔 결국 킹 목사와 자신의 목적이 같다고 인정했지만 처음엔 대립됐었죠. 그리고 초기엔 흑인 우월주의를 신봉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국내에 있어선 맬컴X가 젊은 시절 흑인 인권운동처럼, 최소 이제 막 태동한 움직임입니다. 이전에도 책상물림들 사이에서는 활동이 있었지만 양지 밖으로 기어나온 건 최근의 일이죠. 저는 지금의 혼란이 하나의 소수자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을 아직 모르니까요. 그러다 보면 젊은 시절의 맬컴X처럼 피해의식에 가득찬 래디컬리스트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죠. 그들이 "잘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런 이들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욕설 없이 설명 못할 것 들이지만 "그것들이 튀어나오는 것" 자체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보는거죠.
많은 소수자 인권 운동이 그렇습니다. 정반합에 있어 "반"이라는 것이 다들 그렇죠. 처음의 이니시는 상 또라이들이 주목을 받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또라이들은 온건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우죠. 이러면서 사회의 어그로를 끌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면서 온건주의가 등장하고, 또 이런 극단주의와 온건주의, 그리고 사회 그 자체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소수자 인권의 개념이 사회에 녹아들게 되는 과정을 거치는 거죠. 저도 그 초창기의 수많은, 제각각의 생각들 중 하나를 하는 것 뿐입니다. 뭐랄까요, 흑인 인권운동에 호의적인 백인1정도쯤 되겠군요.
(물론 와우 물이 들어서 명예를 중시하는 제가 꼬리자르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도 합니다만...)
페미니즘이 어느정도 자리 잡은 국가들에선 그 문화에 맞는 형태로 이미 문화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죠. 아마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는 우리 문화에 맞는 대로 페미니즘이 자리를 잡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결과적으로 우리 식으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듯이, 좀더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의무를 갖는 날이 오게 되겠죠.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지나갈 겁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과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많은 키배를 하게 될 것이고, 가끔은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되겠죠.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많은 또라이들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겁니다. 까놓고 말해 저같은 경우, 몇몇 극우적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허락하는 오빠"라면서 절 증오하겠죠.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저는 그러한 혼란이 싫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날 우리는 좀 더 많은 사람의 인권이 좀 더 대우받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 페미니즘이 제도권 내로 안착하는 데 20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도 걸릴 만큼 시간이 걸리겠죠. 서로 혐오하고 증오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래는 그 혐오와 증오가 서로 이해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거죠. 그런 혼란이 없다면, 아마 이 세상은 70년대처럼 남녀의 역할이 다른 세상으로 굳어져 버릴 거 같아요. 그런 세상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조용히 산다는 얘긴 아닙니다. 저는 제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극단적 페미니스트들과도 싸우고, 또 여혐론자들, 가부장제를 신봉자하는 사람들과도 싸우겠죠.
요즘 페미니즘이라는 어딜가나 말이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참 배가 부릅니다. 뭐 사실 남자 페미니스트라는 위치가 어딜 가나 치일 수 밖에 없는 위치이긴 합니다. 뭐 어쩌겠어요, 저는 아빠처럼 필요없는 짐 지면서 살긴 싫거든요. 그건, 제가 보기엔 가면 안되는 길이에요. 저는 그냥 삶을 함께 하는 아내는 좋지만, 제가 책임져야 하는 안사람을 원치는 않습니다.
오늘도 더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가장이 아닌 그냥 하나의 가족 구성원이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