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중국 역사에서 치욕의 세기라고 불리는 100년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줄 알았던 대청제국이 서구열강에게 야금야금 뜯기는 시대였죠.
그런데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잘나갔고,
아니,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로 잘 나갔습니다.
물론 정부 관리들이나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아주 암흑의 시기였지만
당시 민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획득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병감(伍秉鑒)'이라는 사람입니다.
(1769 – 1843)

오병감에게 고용된 영국인 화가 조지 치너리의 유화, 1830년작
오병감은 행상으로, 당시 청나라 정부가 허가를 해준 공식 독점 상인이었는데요, 오직 이들만이 서양 상인들과 무역하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청나라에는 총 13개의 행상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서양에서 물건을 들여와 중국에서 팔고, 또 중국에서 물건을 사서 서양인들에게 판매를 하던 쉽게 표현을 하자면 중개무역상이었습니다.
오병감은 본인 스스로가 상업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서 그런지 영국의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정말 막대한 이윤을 냅니다. 중국 내륙에 대해서도 다양한 네트워크를 보유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인들이 그토록 원하던 신선한 '차'와 세련된 '도자기'를 공급했으며 서양인으로부터는 온갖 종류의 시계나 액세사리 등을 구입했지요. 하지만 서양인들이 수요가 훨씬 높았으므로, 오병감은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저 차와 도자기만 열심히 판매하면 되었으니까요.
전성기 때 그가 당장 보유한 '현금'만 해도 2600만 은원으로, 대청제국의 연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 최고 부자의 재산이 700만 은원이었다고 하는데, 오병감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죠.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최대 채권자였으며, 미국의 철도건설에 투자하기도 했고, 구미의 여러 보험회사에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당대 동아시아의 그 어떤 동양인도 그와 같은 스케일의 투자나 경영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서양인도...)
보스턴 출신의 한 미국 상인은 그와 함께 사업을 하다가 7만 달러의 채무를 지게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병감은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채무증을 찢어버리고 더 이상의 채무는 없다고 선포하는 대인배 기질을 보여준 적도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화는 오병감이 아들처럼 아낀 젊은 미국인 풋내기에 대한 것인데, 그는 다름 아닌 포브스 가문의 원조, 존 머레이 포브스였습니다. 그는 오병감 밑에서 장사를 배우고, 중국 무역에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번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와 훗날 "철도왕"이라고 불리게 되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당대 최악의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결국 아편전쟁까지 터지면서 무역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병감은 특유의 대인배 기질을 발휘하여 아편전쟁 배상금을 위해 100만 은원을 군말 없이 기부하고 (이는 전쟁배상금의 1/3에 달하는 액수였습니다!!), 무역특권을 보호받기 위해 조정에 많은 기부금도 내었습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행상제도는 폐지가 되었고, 오병감의 독점적 지위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서양인들과도 가깝고, 너무 큰 부자였기에 조정으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고 또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결국 국가의 간섭과 경쟁자들의 음모로 몰락하게 되었지요.
당시 세계 최대의 부호 오병감, 미국의 제일 가는 부자보다 훨씬 부유했고 영국, 미국, 인도 등지에서도 다양한 사업파트너를 보유했던 대상인.
19세기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면...
19세기 말 중국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