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1/26 15:48:09
Name 터치터치
Subject [일반] 겨우 축구를 보다가...
고향집 부모님 댁에는 좁은 침대모형의 안마기가 티비가 있는 반대편 벽앞에 놓여져 있었다.

자주 사용을 하지 않아서 엄마아빠의 옷가지들이 올려져 있기도 하고 여러가지 물건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로도 활용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활용된 것은 할머니의 티비보는 의자 역할이었다.

할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아서 일어서고 앉을 때 굉장히 힘들어하셨기 때문인데

어느샌가 그 안마기 구석자리가 할머니의 고정자리가 되었다.


가끔 그 고정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안방의 방바닥으로 내려 앉으실 때가 있는데

바쁜 손자가 간혹 왠 바람이 불었는지 화투를 치자며 부를때였다.

아픈 무릎을 잘 접으실 수 없어서 뒤뚱뒤뚱하며 억지로 앉으시는 모습을 손자가 지켜보고 있을 때면

'아.. 이 무릎때문에 하면서..'

괜찮은 척... 아픈 거 참아가며 미소지으며 앉으시곤 했는데

평소보다는 빠른 몸놀림을 보여주시려고 방바닥에 쿵 엉덩이 소리를 내며 방바닥으로 앉으셨다.

손자는 그런 모습 보는 것이 괜히 싫어서 애먼 화투를 섞거나 바닥에 화투판으로 깔린 천의 구김을 제거했다.



거의 십여년전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였을 거다.

학교 복학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고향집에서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제대한 손자가 한낮에 안방에서 뒹굴 거리며

농구를 보고 있으면 할머니도 안방 고정자리에 앉아서 농구를 같이 보고 계셨다.

할머니가 농구를 좋아할리 없지만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손자가 농구시청이 끝날 때까지 별말없이 같이 계셨다.




할머니는 8시 30분쯤 하는 KBS1 드라마의 애청자였다.

항상 그 시간을 제일 좋아하셨다.

하필 그 시간에 다른 채널에서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을 할 때였다.

8시 20분 쯤 할머니는 안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손자가 축구를 보고 있으니까

아무말 없이 그냥 할머니의 자리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간혹 손자가 소리를 지르며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움의 탄식을 지를때면

'아우 놀래라'

하며 웃으시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는 저기다 집어 넣기 쉽지 않겠네..'


아주 살짝 스친 말이기도 했고 그 때도 별다른 생각없었다.

어? 할머니가 농구랑 축구 차이점이 신기하신가 보다. 하였고

할머니가 두 경기의 차이점을 알아차린 것이 신기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손자는 다시 학교때문에 직장때문에 결혼때문에 사는게 바빠서

멀리 서울에서 지내게 되었고

간혹 고향집에 가면 할머니의 건강이 더 좋아지지 않아서

속옷에 오줌을 싸셔서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들으시거나

다른 손님이 올 때 몸도 아픈데 뭐하러 나오냐는 아빠의 핀잔을 듣는

횟수가 늘어나는 할머니를 보고는....

엄마가 힘들까 걱정되었고

어느 날 엄마가 할머니 요양병원 갔다는 말을 듣고서도 엄마의 수고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다행이다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이 든 것이 만약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한동안은 늘 좀 불안한 맘을 가지면서 엄마의 전화를 받았었다.


1년이나 지났을까


엄마에게 전화가 온 어느 날

너무도 당연하게 그렇지만 어색한 시간대 울렸던 고향집 전화번호를 보고 할머니 소식일 거라고 직감했고

나는 가족들 전부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할머니에게 핀잔을 주던 아빠가 장례식 내내 슬피 울었고

그래도 고향집에서 할머니랑 시간을 많이 보낸 동생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난 참 왜 이렇게 할머니에게 정이 없었을까... 하며 나오지 않는 눈물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억지로라도 울어보려고 노력했다.

장례식은 빨리 지나갔고 그렇게 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이 끝난지도 벌써 2년이나 지났다.



그러다 바로 얼마전 축구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뒤에서

이거는 저기다 넣기 쉽지 않겠네 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울컥하면서 올라오던 것을 한번은 목에서 두둑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참았다.

그러나 두 번째 올라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장례식 때도 울지 않았던 미안함이 겹쳐

1대 0으로 앞서고 있었던 후반 15분에

손자는 티비앞에서 미친 듯 울었다.

미친 듯 울었다.







알지도 못하는 농구를 보는 손자의 뒷모습을 한시간 반이나 쳐다보는 것만으로
그 재미있던 드라마를 제끼고 축구를 보던 손자의 뒷모습을 두시간이나 쳐다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행복하다 여기던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겨우 축구를 보다가..... 축구를 보다가....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1/26 15:51
수정 아이콘
아... 저도 이제야 알았네요 지금부터라도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WeakandPowerless
16/01/26 16:13
수정 아이콘
거참 오후 애매한 시간에 눈물짓게 만드시네요 ... ㅠㅠ
붕어가시
16/01/26 16:15
수정 아이콘
돌아가신 장모님 생각이 나는 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릴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힘내야겠네요.
16/01/26 16:2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고맙습니다. 저도 외할머니가 그립네요.
눈물고기
16/01/26 16:39
수정 아이콘
항상 그런거 같습니다.
이별을 해도, 정작 당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순간 감정이 왁 복받치더라구요.
어떤날
16/01/26 16:50
수정 아이콘
부모님 늙어가시는 걸 보면서 가끔 먹먹할 때가 있어요. 때로는 짜증도 나고 솔직히 부담될 때도 있고 그렇지만.. 막상 안 계신다고 생각하면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느끼는 포근함을 어디서 느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알면서도 자주 못 가는 못난 아들이지만요 ㅠㅠ
16/01/26 18:12
수정 아이콘
저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국대축구경기를 보다가 차두리 선수를 디스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가끔 차두리선수를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피아노
16/01/27 02:2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랜슬롯
16/01/27 04:08
수정 아이콘
제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이 있는데, 제 형이 죽는 꿈이였습니다. 물론 모든 형제가 돈독하겠지만 저희 형제는 정말 사이가 돈독하거든요. 누구보다도 형을 신뢰합니다. 장례식을 치루는데, 눈물이 하나도 안나더군요. 실감이 안나서그랬던건지, 정말 다른 사람들이 다 우는데 저 혼자서 멍때리고 있다가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방으로 들어가는데, 형이 두번다시 이방에 들어올 일이 없다 라는 걸 알게되자 그때부터 눈물이 나더군요. 꿈에서도 몇일동안 울고 잠에서 깰때도 엉엉울다가 일어났네요. 그렇게 울어본적은 그때 처음이였던 것같습니다. 가끔 가까운 사람이 죽을때 눈물이 안나는건 그건 안슬퍼서가 아니라 실감을 못해서 인것같습니다. 그러나 그사람과의 추억이 함께 있는 장소에 갈때, 그 사람과의 기억이 떠오르는 물건들을 볼때, 그 사람의 기억이 문득 날때, 바로 그때 슬픔이 몰려오는 것같습니다.
밀물썰물
16/01/27 05:12
수정 아이콘
김형경씨의 좋은 이별이라는 책이 헤어지는 법에 대해서 심리학을 쉽게 쓴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님처럼 헤어질 때 제대로 슬프게 헤어지지 못해서 그 슬픔을 오래 담고 있다고 하더군요.
슬프면 (확실히 슬퍼야하는데) 슬프지 않다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시간을 두고라고 슬픔이 몰려오고, 또 내 잠재의식속에 제대로 이별을 하지 못한 아픔이 남게 됩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울음이 나옴으로 해서 어쩌면 이제 제대로 이별을 하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이별이니 충분히 이별을 (표현이 좀 애매하지만) 해야한답니다.
밀물썰물
16/01/27 05:14
수정 아이콘
두번째 댓글을 씁니다. 이번은 손자와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아니 상상해 보세요.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가 집에 놀러왔는데, 내가 늘 하던 것이 있다 그런데 손자는 다른 것이 중요하다.
할아버지가 양보를 한다기 보다 손자 뒤에 앉아 손자를 쳐다보는 것이 평소에 좋아하던 것을 하는 것 보다 더 좋을 것입니다.
저는 아마 그렇게 될 것같아요.
세상의 무었보다 이쁜 손자가 저렇게 우리집에 와있어주니, 와서 내 앞에서 TV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행복할 것같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16/01/27 10:07
수정 아이콘
눈물나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3315 [일반] 문재인 전 대표님과 사진찍은 거 자랑해봅니다. [26] 포온8354 16/01/28 8354 3
63314 [일반] 새누리당 김무성이 국회 선진화법 관련 박근혜의 책임을 묻다? [94] 에버그린10905 16/01/28 10905 8
63313 [일반] 딥 러닝 베이스의 인공지능이 이제 바둑도 인간을 이긴다고 합니다. [99] OrBef14965 16/01/28 14965 7
63312 [일반] 장재인/예지/려욱/임팩트/써스포의 MV와 백지영/유승우/포미닛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4] 효연덕후세우실3762 16/01/28 3762 0
63310 [일반] [의학] 에이즈(AIDS)검사 양성이란 무엇인가? [20] 토니토니쵸파12941 16/01/28 12941 3
63309 [일반] 한국과 브라질의 비슷한것들, 반대인것들? [41] Brasileiro12974 16/01/28 12974 20
63308 [일반] SM 엔터테인먼트의 새 계획에 따른 몇 가지 소식을 전합니다. [61] 효연덕후세우실12258 16/01/27 12258 0
63307 [일반] 이재명 시장 오늘 여러 일이 있었네요. [313] 릴리스20305 16/01/27 20305 4
63306 [일반] 대한항공 채용, 초대졸·대졸 차별 타파해..’동일 임금 적용’ [61] 마르키아르11783 16/01/27 11783 3
63305 [일반] 당신의 머리는 생머리? 곱슬? 반곱슬? 직모? [67] 자전거도둑21106 16/01/27 21106 0
63304 [일반] 휴대용 청음 앰프 SHA900 구매기. [8] Crystal5691 16/01/27 5691 0
63302 [일반] 문재인 당대표 사임. [102] 게롤트15371 16/01/27 15371 37
63301 [일반] 이란 맞이하는 이탈리아, 누드 석상 가려...논란.gisa [228] aurelius15159 16/01/27 15159 3
63300 [일반] 문재인의 금괴 [56] 어강됴리13054 16/01/27 13054 7
63299 [일반] 내일 있는 1월 미국 연준 미팅 프리뷰 [5] Elvenblood3857 16/01/27 3857 5
63298 [일반] 지코/정인/스텔라의 MV와 검정치마/예지/려욱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12] 효연덕후세우실4213 16/01/27 4213 1
63297 [일반] 식습관과 영양 (EAT WITH PURPOSE) - Intro [34] 장비4705 16/01/27 4705 6
63296 [일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연대 vs 국민의당, 국민회의, 통합신당 통합 [99] 에버그린11183 16/01/27 11183 0
63295 [일반] 관서/관동 지역감정이 왜 있는지 대충 알거 같네요. [44] 강로루10626 16/01/27 10626 0
63294 [일반] “해수부 공무원이 세월호 유족 고발하라 제안했다” [43] 곰주8500 16/01/27 8500 16
63293 [일반] 왜 한국 개신교는 할랄단지를 반대할까? [191] KOZE14390 16/01/26 14390 5
63292 [일반] 한강에서 유람선 사고가 있었습니다. (인명피해 없음) [19] jjohny=쿠마6857 16/01/26 6857 0
63291 [일반] 중국 정부, 양쯔강 유람선 참사 유족들 '말썽꾼' 취급 [42] 군디츠마라7851 16/01/26 7851 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