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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8/09 03:01:08
Name atmosphere
Subject [일반] 성역(聖域)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 혹은 정당한가?
부정하기 어려운 명제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인 이상 본능적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논리적인 개연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한 시대의 진리였던 것이 다음 시대에는 진리가 아니기도 합니다.

진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서 자명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상식에 입각하여' 비난받지 않으면서 거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식이라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시대정신(zeitgeist)이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와 현대 유럽에서의 신에 대한 관점의 차이,
과거 미대륙에서 인종차별이 당연한 것이었다는 점,
신장되는 여성, 어린이에 대한 평가와 권리,

등등 이미 변화해 온 '상식'이 많다는 점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도전받아야 할 영역으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번째는 인간우월주의입니다.

버트랜드 러셀이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 중에 동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점진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과거에 특정부류의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이 당연한 현실로, '우리'와 '너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아직 다다르지 못해서이지 사실상 인간과 여타 동물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즉 동물을 죽이는 것과 인간을 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슬견설'에는 참새와 봉황의 죽음을 똑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이규보는 벼룩과 인간의 생명도 같이 볼 수 있었을까요.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아직 식량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인간과 동물 중 선택해야 한다면 인간을 살리겠습니다.
게다가 인간이 지상최강의 종이지 못하던 시절 동물들이 우리 선조들을 많이 죽였으니 어느 정도는 복수해도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누군가 원한다면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말이죠.

두번째는 민주주의입니다.

'어떤 것이 보다 민주적이다' 라는 것은 절대적인 논거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봅니다.
김일성,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많은 독재자가 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사람들이 흘린 피를 생각하면 나라를 말아먹은 것 이상의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고 봐야겠죠.
그러나 '독재는 해악이다' 라는 명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고 타인종 사람들, 특히 유대인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인들이나 인종차별에 동조한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강압과 공포에 의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외려 자발적으로, 괴벨스를 위시한 선전단에 의해 선동되어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을 주장한 것이죠.
히틀러는 (쿠데타를 일으킨적은 있지만 실패했고) 부정투표를 통해 총리가 된것도 아니며, 국민적 지지율과 인기도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히틀러는 악인이며 나치독일의 악업은 악업이되, 비극의 이유는 나치독일의 방향성 때문으로 봐야합니다.
즉 어떤 악인이 충분한 카리스마와 선동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민주적인 제도 아래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또한 조선시대 왕정을 '독재는 해악이다' 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논거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요즘으로 생각하면 독재적이었죠. 봉건시대 왕인이상 독재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권의 개념이 희박한 시대이기는 합니다. 군주제는 사회경제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구요.
요점은 (그래봤자 전제왕권을 휘두른 독재자에 불과한) 세종대왕을 우리는 위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왕권이 약화된 시기 붕당정치 아래에서 조선이 더욱 힘든 길을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도.

물론 개인적으로는 최대한의 민주적 장치가 보장된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코렁탕은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부정하다니 우매한지고' 수준으로 민주주의를 성역화하는 것은 도리어 우스꽝스럽습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지지하는 큰 이유는 통계학적으로 더 나은 아웃풋을 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법률입니다.

PGR에서 토론과 거기서 파생된 키워를 눈팅하다보면 가끔 보게 되는 일인데,
헌법 몇 조, 형법 몇 조를 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한 물 지나간 이슈지만 예를 들어 '의료민영화는 옳은가'에 대한 토론이라고 하면,

의료법상 교통수단 제공, 본인부담금 지원 등 환자 알선 행위는 불법이다.
의료법상 신문, 방송 등 매체를 통한 의료광고는 불법이다.
영리를 우선한 의료행위는 대한민국 법에 의해 금지되고 않으므로, 연장선상에서 의료민영화는 옳지 않다.

라는 식의 주장이 나오게 될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식의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결국 법이라는 것이 (어느 것이 보다 공평하냐라는 질문에 의해 정리된) 사회적 합의의 총합일 뿐이므로
법조항을 근거로 드는 건 '그럼 대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라는 수준의 논리일 뿐입니다.
법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법은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필요성을 넘어서 거기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장 성범죄를 위시하여 각각의 범죄에 대한 처벌의 강도가 국가별로 상당히 차이가 나며,
공간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보아도 상당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토론할 때 이런 식의 말이 나오면 솔직히 반박하기가 곤궁합니다.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피곤해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말이 안 된다'

글쎄요. 모든 고정관념을 배제한다면 자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지 모르겠습니다.

살인은 나쁜가? 글쎄요, 살인의 피해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습니다만.
전쟁에서 적국 병사를 살해하는 것은 죄일까요. 적국 병사가 막 민간인을 살해하려는 순간에 살해했다면 어떨까요.
만약 죄라면 무고한 아이나 노약자를 무차별 살해하는 것과는 경중의 차이가 있을까요.
안락사는 어떨까요. 섹스 후에 응급피임약을 먹어서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하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떨지요.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 우리는 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라가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린 아이에게도 섹스의 즐거움을 가르쳐야 한다.
마약의 자유로운 생산과 거래를 허용하는 것이 좋다.
일제의 조선병탄이 현재의 한국을 있게 했다.
(심지어) 독도는 일본땅이다.
동성애는 질시받아 마땅한 죄악이다.
(심지어) 장애인을 전부 격리 수용하고 자손을 남기지 못하게 해야한다.
일베가 우리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라는 주장들에 대해서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라는 감정적인 반응보다는 이성적인 반박이 먼저였으면 합니다.
논리적인 반박이 충분히 가능한 주제들이고,
만약 어떤 명제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이 불가능하다면, 그건 옳아보이지만 사실은 옳지 않은 명제라는 뜻입니다.

모든 성역은 침범되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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