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9/27 08:04:55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79
Subject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36. 불길 훈(熏)에서 파생된 한자들

가릴 간(柬), 불길 훈(熏), 묶을 속(束), 동녘 동(東), 전대 탁(橐) 이상 다섯 글자는 모두 묶은 자루를 본떴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柬과 熏은 자루 안에 향풀을 넣은 모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66f40a9469742.png?imgSeq=35149

熏의 여러 가지 금문과 소전(맨 오른쪽). 출처: 小學堂


《설문해자》에서 나오는 熏의 소전은 마치 싹날 철(屮)과 검을 흑(黑)이 합한 모습이라, “불 연기가 위로 나가는 것이다. 싹날 철(屮)과 검을 흑(黑)의 뜻을 따른다. 철흑(屮黑)은 그을음이다.”라고 풀이했다. 《광운》에서는 “불 기운이 성한 모습이다.”라고 풀이했다. 어문회 급수 시험에서는 이 한자의 훈음을 '불길 훈'이라고 하니, 《설문해자》와 《광운》의 풀이를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금문의 熏은 이런 분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왼쪽의 네 가지 熏의 금문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것은 束 안에 점이나 선이 들어가 있는 형태로, 이는 柬과 유사하다. 가장 왼쪽의 금문은 東 안에 점이 네 개 찍혀 있다. 그 오른쪽의 금문은 柬 밑에 흙 토(土)를 받쳐 썼고, 그 다음으로는 東 밑에 불 화(火)를 받쳐 썼다. 마지막 금문은 柬과 같은 형태다.

소전은 柬 밑에 火를 쓴 것이 와전되어, 柬에 있는 나무 목(木)의 아랫부분이 火로 바뀌면 나오는 형태다. 나중에 해서가 될 때 木의 윗부분마저 일천 천(千) 비슷하게 와전되어 柬과 거리가 더 멀어졌다.


금문에서는 火나 土가 없는 형태도 있기 때문에 원 의미는 불이나 흙 없이도 해석이 가능해야 하며, 熏에서 파생된 글자 중 향풀 훈(薰)을 고려하면 원래는 자루에 향풀을 넣어 싸맨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火가 들어오는 것은 향풀을 태워서 향을 내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


熏은 금문에서는 '분홍빛'이라는 뜻으로도 가차되어 쓰이며, 이 뜻은 나중에 분홍빛 훈(纁)으로 파생되어 나간다.


熏(불길 훈, 훈액(熏液), 심훈(沈熏) 등. 어문회 1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熏+力(힘 력)=勳(공 훈): 훈장(勳章), 공훈(功勳) 등. 어문회 2급

熏+土(흙 토)=壎(질나팔 훈): 훈(壎/塤), 훈지상화(壎篪相和) 등. 어문회 2급

熏+火(불 화)=燻(연기치밀 훈): 훈제(燻製), 냉훈(冷燻) 등. 어문회 준특급

熏+糸(가는실 멱)=纁(분홍빛 훈): 현훈(玄纁: 장사 지낼 때 산신에게 드리는 검은 헝겊과 붉은 헝겊) 등. 어문회 특급

熏+艸(풀 초)=薰(향풀 훈): 훈훈(薰薰), 조지훈(趙芝薰) 등. 어문회 2급

熏+金(쇠 금)=鑂(금빛바랠 훈): 고훈(高鑂: 고종 대의 의관) 등. 어문회 특급

66f5dd60ab2d9.png?imgSeq=35263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


이 중 勳과 壎은 공통점이 있다. 성부를 熏 대신 인원 원(員)을 써도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勳이 정자고 勛은 이체자로 취급하지만(중국에서는 勛을 간체자로 지정), 역사적으로는 勳보다도 오히려 勛이 먼저 출현했다.

66f4779ccf367.png?imgSeq=35163

왼쪽부터 勳(勛)의 금문, 설문해자 고문, 소전. 출처: 小學堂


勛의 금문에는 조개 패(貝)가 아니라 솥 정(鼎)이 보이는데, 이는 員의 원래 형태다. 나중에 鼎이 貝로 바뀐 것이 지금의 員이다.

금문에서 勳은 형성자의 짜임 외에도, 제사 때 쓰는 술잔에서 비롯해 벼슬, 작위를 뜻하는 爵에 기초를 둔 회의자의 짜임으로도 나타난다.

66f47c1cf178d.png?imgSeq=35165

勳의 또 다른 금문(위)과 이를 해서화한 글자(아래). 출처: 小學堂


위의 금문에서 복잡하게 생긴 무언가가 바로 爵의 금문이다. 爵은 후대에 이것저것 덧붙는 바람에 금문보다도 현재의 해서가 더 복잡하다. 여기에 두 손을 묘사하는 받들 공(廾), 또는 높은 집 또는 문을 묘사하는 멀 경(冂)을 더한 것이 바로 이 금문 勳의 이체자들이다. 술잔을 두 손으로 들어 하사하거나, 높은 집 또는 문과 술잔으로 공을 치하하는 모습을 본뜬 것 같다.

더 나아가서 보면, 勳의 성부가 熏이 된 것은 아마도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는 것이 마치 향풀을 태워 향을 내는 것과 유사한 심상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와는 대비되어, 壎은 역사적으로는 엉뚱하게도 황새 관(雚)을 성부로 쓰는 이체자 壦이 먼저 나타났고 壎은 그 다음이며 塤은 당나라 때에서야 뒤늦게 등장한다. 다만 전초고문자에서는 塤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옛날에도 塤이 쓰였을 가능성은 있다. 전초고문자에서는 壦, 塤 외에 이를 운(云)을 성부로 쓰는 土+云의 형태도 볼 수 있다. 한편 雚과 운모가 같은 으뜸 원(元)을 성부로 쓰는 坃 역시 壎의 고자(옛 글자)다.

員은 '인원 원' 외에도 '사람이름 운'이라는 훈음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員과 熏의 음은 의외로 가깝다. 이것을 감안하면 薰은 훈음이 모두 비슷한 향풀 운(芸)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을 분석해 본 결과, 형성자의 성부로서 熏, 員, 그리고 芸의 성부인 이를 운(云)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고, 실제로도 모두 글월 문(文)운에 속한다.


熏이 본디 향풀이었고 이를 태워 향을 내는 모습을 나타내는 한자였다면, 이 본 뜻을 지니고 있는 한자가 바로 薰이다. 이 한자는 현대에는 주로 사람 이름에 쓰이는 한자이지만,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인 '훈훈(薰薰)하다'가 바로 이 한자를 쓰는 단어다. 훈훈한 느낌을 주는 남녀를 가리키는 신조어인 '훈남'(薰男)과 '훈녀'(薰女)도 알고 보면 한자어인 셈이다. 한자로만 보면 '향풀 같은 남자', '향풀 같은 여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봐도 본래의 의미와 별로 다르지 않다. '훈훈하다' 자체가 향풀을 태워 나오는 향의 느낌에서 유래한 단어일 테니.


한편 《설문해자》 이래 전통적인 熏의 뜻과 유관한 한자는 연기치밀 훈(燻)인데, 순수한 형성이라기보다는 향풀을 태워 연기를 내는 모습을 고려해 熏의 뜻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어문회 준특급 한자이지만, 연기를 쬐어 음식을 보존하는 방법인 훈제(燻製)와 관련된 용어가 전부 이 한자를 쓰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은근히 접할 수 있는 한자다.


이상 熏과 그 파생자들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6f5e52876e2c.png?imgSeq=35264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熏은 전통적으로는 불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으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향풀을 싸맨 자루, 또는 그것을 불에 태우는 모습을 그린 상형자로 보인다.

熏에서 勳(공 훈)·壎(질나팔 훈)·燻(연기치밀 훈)·纁(분홍빛 훈)·薰(향풀 훈)·鑂(금빛바랠 훈)이 파생되었다.

熏은 형성자의 성부로는 사람이름 운(員)·이를 운(云)과 통한다.

熏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향풀 또는 향풀을 태우는 것과 유관하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Starscream
24/09/27 08:32
수정 아이콘
딱히 뭐라고 댓글 달 깜냥이 안돼서 그냥 재밌게 읽고만있는 1인입니다. 유익한 시리즈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층방정
24/09/27 20:43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4/09/27 09:10
수정 아이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층방정
24/09/27 20:43
수정 아이콘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식코너지박령
24/09/27 11:48
수정 아이콘
이해가 쏙쏙 되네요.
계층방정
24/09/27 20:45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읽기 쉬운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카케티르
24/09/27 11:53
수정 아이콘
어우 제 이름에 쓰이는 한자가 여기있네요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층방정
24/09/27 20:45
수정 아이콘
자기 이름에 나오는 한자를 만나면 저도 반갑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4/09/27 12:47
수정 아이콘
(수정됨) 잘 봤습니다.
한글 훈남은 주변 분위기를 따뜻하게 뎁히는 이미진데
한자 훈남은 정수리에서 연기날 거 같네요 크크
계층방정
24/09/27 20:4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글자 생김새가 밑에 있는 불이랑 위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 같이 생겼죠.
24/09/27 14:04
수정 아이콘
이름에 공훈자를 쓰는데 저게 불길훈이었군요
계층방정
24/09/27 20:47
수정 아이콘
저도 束·東·橐·柬·熏 시리즈를 조사하면서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훈제의 훈에도 들어가는 한자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350 [일반] [일본정치] 이시바 시게루, 결선투표 끝에 자민당 총재 당선 [50] Nacht8033 24/09/27 8033 3
102349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36. 불길 훈(熏)에서 파생된 한자들 [12] 계층방정3770 24/09/27 3770 4
102348 [일반]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의 순례길 [11] 식별7939 24/09/27 7939 25
102347 [일반] 아이폰으로 교통카드를 사용하다. [48] 김삼관8020 24/09/27 8020 1
102346 [일반] [2024여름] 홋카이도 비에이 사계채의 언덕(四季彩の丘) [13] 烏鳳3834 24/09/26 3834 7
102344 [일반] [2024여름] 시원한 여름을 만들어 주는 삿포로 경치 [6] 워크초짜3881 24/09/26 3881 4
102343 [일반] [2024여름] 대관령의 일출 [2] 니체2767 24/09/26 2767 5
102341 [일반] 숱 조금만 쳐주시고요. 구레나룻은 남겨주세요 [40] 항정살7398 24/09/26 7398 11
102340 [일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1] 아몬4388 24/09/26 4388 10
102339 [일반] 축구에 있어서, 실리주의 내지는 실용주의는 무엇인가. [7] Yureka4132 24/09/26 4132 1
102338 [정치] 한덕수 “전기-가스요금 올려 소비 억제해야 [133] 항정살10392 24/09/26 10392 0
102337 [일반] 어느 분의 MSI A/S 후기(부제: 3060 Ti가 4060과 동급?) [8] manymaster3168 24/09/26 3168 0
102336 [일반] 스며드는 어이없는 개그의 향연 '강매강' [19] 빼사스6228 24/09/26 6228 1
102334 [일반] 갤럭시 S25U 긱벤치 등장, 12GB 램 탑재,아이폰 16 프로 맥스보다 높은 멀티코어 [41] SAS Tony Parker 6796 24/09/26 6796 1
102332 [정치] 검찰 수심위, 김건희 여사 불기소 권고 및 최재영 기소 권고 [127] 전기쥐15491 24/09/25 15491 0
102331 [일반] [역사] 히틀러의 무기에서 워크맨까지 | 카세트테이프의 역사 [4] Fig.15143 24/09/25 5143 3
102330 [정치] 김영환 "금투세로 우하향? 신념 있으면 인버스 해라"…한동훈 "대한민국 인버스에 투자하자는 거냐" [126] 덴드로븀16880 24/09/24 16880 0
102329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35. 돌 석(石)에서 파생된 한자들 [6] 계층방정4735 24/09/24 4735 3
102328 [일반] 최종 완결된 웹소설 "디펜스 게임의 폭군이 되었다" [26] 아우구스투스9478 24/09/24 9478 1
102327 [일반] 나이키런 블랙레벨 달성했습니다.(나의 러닝 이야기) [21] pecotek6639 24/09/24 6639 11
102326 [일반] (삼국지) 조예, 대를 이어 아내를 죽인 황제(3) -끝- [29] 글곰5341 24/09/24 5341 21
102325 [일반] 참 좋아하는 일본 락밴드 ‘JUDY AND MARY’의 ‘BLUE TEARS’ [17] 투투피치3976 24/09/24 3976 3
102324 [일반] 단편 후기, TV피플 - 미묘하고 나른한 일상의 이상. [2] aDayInTheLife3611 24/09/23 3611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