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스 연대기 Ⅰ : 학자와 전사
- 칼리와 배틀넷의 대립
모든 이야기는 배틀넷 탄생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하나의 대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기말 블리자드 사의 스타크래프트 및 스타크래프트 : 브루드워의 출시는 당대 게임계, 그 중에서도 RTS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 시장에 지대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물론 스타크래프트 이전에도 걸출한 RTS 게임들은 많았습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 레드 얼럿 - 토탈 어나힐레이션 - 워크래프트에 이르는 네 개의 게임들이 이른바 4대 RTS로 불리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워크래프트는 블리자드의 간판 RTS 였습니다. 어쩌면 이미 워크래프트라는 성공한 브랜드를 가진 블리자드가 또다시 새로운 게임으로서 이미 포화된 RTS 판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도 상당히 무모하게 비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블리자드는 그렇게 했고, 결과는 어마어마한 성공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각자의 특색이 확실한 세 개의 종족, 거듭된 패치를 통한 밸런스의 구축, 사전의 치밀하게 이루어진 베타테스트, 깔끔한 인터페이스 등등. 하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스타크래프트가 가졌던 강점은 바로 배틀넷이란 시스템에 있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게임 실력을 겨룬다는 것, 또 개중 누가 가장 강한지 랭킹을 매긴다는 것이 매우 당연한 요소로 생각됩니다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스타크래프트의 배틀넷과 래더 시스템은 대단히 선진적인 것이었지요. 그토록 쉽고 간편하게 또 추가 비용 없이 인터넷 회선 저편의 상대와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시스템은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이전의 4대 RTS에서 실력을 쌓아온 고수들도 있었고, 또 스타크래프트를 게임 경력의 첫 계단으로 시작한 초짜들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고수와 초짜를 가리지 않고 전세계의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 배틀넷을 계기로 모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립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배틀넷이 탄생하기 이전에, 칼리Kali라는 시스템이 존재했습니다. 칼리란 유료화 멀티게임서비스 서버의 일종인데, 말하자면 돈을 지불하고서 배틀넷과 비슷한 기능을 제공해주는 서버였습니다. 배틀넷 등장 이전 미국의 RTS 게이머들은 이 칼리를 통하여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나 레드얼럿, 워크래프트의 승부를 즐겼습니다. 물론 칼리는 유료 시스템이라는 점을 비롯하여 몇 가지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티 게임을 즐기고자 했던 이들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유일한 답이었던 셈입니다.
칼리의 이러한 영향력은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발휘되었습니다. 칼리는 비슷한 멀티게임 서버인 칸Khan, 그리고 웹사이트인 case’s ladder 등과 연계하여 북미의 크고 작은 오프라인 게임 대회들을 주최하였고, RTS를 나름 잘 한다 하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게임 대회들에 참가했지요. 이런 과정들을 거쳐 칼리의 유저들은 일종의 커넥션을 형성하였습니다. 바로 칼리 파(派)의 등장입니다.
배틀넷이 만들어지고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곧 칼리 파는 대대적으로 래더 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 토탈 어나힐레이션에서, 레드얼럿과 워크래프트에서 각기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일제히 스타크래프트로 전향하는 이른바 ‘칼리의 대이동’이 시작된 겁니다.
이미 기존 4대 RTS에서 잔뼈가 굵은 칼리의 베테랑들이 빠르게 스타크래프트의 래더 시스템을 장악해나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배틀넷의 첫 래더 시즌 1은 초창기인지라 소리 소문 없이 끝났고, 보다 본격적으로 전세계 게이머들이 몰려든 래더 시즌 2에서 칼리 파는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시즌의 우승자 역시 칼리 출신인 eVERLAST란 게이머였는데요. 이 친구가 누군가 하면 바로 한국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빅터 마틴입니다. 마틴은 결승전에서 그 유명한 히드라-가디언 조합을 선보이면서 우승을 차지했지요.
한편 이 시즌에서 랭킹 10위 안에 포함된 프로토스는 딱 하나인데요. 훗날 캐내디언 길드인 The_Feared의 에이스가 되는 Kain_The_Feared입니다. 이 시기부터 이미 프징징 전설은 예고되어 있었던 걸까요.
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칼리 파가 래더 시즌2를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본격적인 대립은 바로 그 다음 시즌인 래더 시즌 3에서 벌어집니다. 바로 이 시즌 3에서부터 RTS 계의 베테랑 고수 집단인 칼리 파벌과, 배틀넷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신진 세력인 배틀넷 파벌이 대립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당시 배틀넷 게시판에서는 매일 같이 키배가 벌어졌는데, 그 키배 내용이 무엇인가 하니 바로 배틀넷의 권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시즌 2를 장악한 칼리 파벌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랭킹은 오직 칼리의 랭킹뿐이며, 배틀넷의 래더 랭킹은 실력을 보여주는데 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박힌 돌인 칼리 파가 굴러온 돌인 배틀넷 파들에게 ‘겜알못’을 시전한거죠. 이 키배는 이후로도 몇 년이 더 이어져서 gamers.com의 중재에 의해 칼리 파의 대표들과 배틀넷 파의 대표들이 단체 대결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이 <프로토스 연대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주 큰 상관이 있지요. 배틀넷 래더 시즌 3에서 배틀넷 파와 칼리 파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기 때문이고, 그러한 가운데 각 파벌의 대표격이라 할 만한 두 명의 게이머가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두 게이머는 프로토스의 초기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두 게이머 – 학자와 전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배틀넷의 학자
‘게임의 공학도’, ‘배틀넷의 석학’ 등으로 수식되는 게이머가 있었습니다. 바로 질리아스Zealias, MIT의 출신의 공학도이며, 현재는 라이엇 게임즈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의 게임 디자인을 맡고 있는, 바로 그 애니의 디자이너인 톰 캐드웰입니다.
질리아스 이전, 그러니까 배틀넷 시즌 1, 2에서 프로토스가 거둔 성과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Kane_The_Feared를 제외하면 10위권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죠. 그러나 질리아스의 등장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보인 특유의 기발한 착상과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은 프로토스의 전략 전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일순 프로토스를 게임의 정점에 올려놓았지요.
질리아스 이전의 프로토스는 (사실 프로토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족이 그러했지만) 전략이란 것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블리자드의 공식 웹사이트에조차 프로토스 전략 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질리아스는 그러한 프로토스에게 빛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질리아스는 MIT의 공학도답게 분석론적인 방식으로 스타크래프트에 접근하였으며, 그를 통해 수많은 전략과 팁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각 종족의 일꾼 자원 채취 효율에 관한 데이터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도 종족별 자원 채취 효율이란 개념이 다루어진 것은 이로부터 몇 년 후인데, 질리아스는 이미 스타크래프트 초창기에 해당 데이터를 시뮬레이트 - 함수화하여 발표하였지요.
또, 폭탄 드랍Doom drop이란 개념 역시 질리아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질리아스의 폭탄 드랍 개념은 단순히 다수의 유닛을 한 번에 내려놓는다는 수준이 아니라, 특정 종족전에서 어떤 전략을 상대로 어떤 조합의 유닛 구성이 최적의 효과를 발휘하는가까지 고려한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녕 질리아스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이런 것들에서가 아니었지요. 사실, ‘이것’에 비한다면 질리아스의 다른 연구 분석들은 그다지 큰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스타크래프트 사상 유일하게, 말 그대로 게임을 바꾼 발상이었으니까요. 바로 ‘슈팅 리버’입니다.
슈팅 리버, 혹은 슈팅 셔틀이라 불리는 이 발상은 가히 질리아스 최고의 업적이라 할 만합니다. 셔틀에서 내린 리버가 딜레이 없이 스캐럽을 쏜다는 점을 이용, 리버를 셔틀에 태웠다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사실상 무적에 가깝게 사용하는 전략이었지요. 그 어떤 강자들도 이 슈팅 리버 앞에서는 무력했고, 질리아스는 이에 힘입어 래더3 시즌의 섬맵 ‘다이어 스트레이츠’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래더 시즌 3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슈팅 리버는 블리자드에게 밸런스 붕괴에 관한 어마어마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후일 1.08 이후 한국에서 개발된 수많은 전략들에 대해서는 초지일관 ‘더 이상의 밸런스 패치는 없다’는 원칙을 지켰던 블리자드이지만, 이 당시에는 아무래도 게임 초기이기도 하다 보니 위기감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블리자드는 셔틀에서 내린 리버가 스캐럽을 쏘는데 딜레이를 넣는 패치를 단행하였고, 이는 유저의 전략이 패치를 이끌어낸 흔치 않은 사례 – 스타크래프트의 경우에 한합니다. 워크래프트3는 손대는 것마다 너프시킨 모 외계인의 만행이 유명하죠 – 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질리아스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RTS 게이머로서는 흔치 않게도, 질리아스는 전략의 연구자, 밸런스의 조정자를 자처하는 포지션에 있었던 것입니다.
프로토스 유저임에도 저그의 상향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질리아스의 관심사는 언제나 세 종족이 균형을 이루는 공정한 밸런스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행보는 블리자드의 밸런스 패치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요 이러한 질리아스 특유의 연구자적 태도, 그리고 자신이 찾아낸 전략을 아낌없이 공유하는 분방함 등은 수많은 질리아스 추종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질리아스는 어느새 래더 시즌 3, 배틀넷 파의 대표 기수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질리아스의 ‘슈팅 리버’ 전략이 패치로 인하여 사장되면서, 당시 지구 반대편에서 슈팅 리버를 즐겨 쓰던 소년 하나가 짜증을 내며 종족을 갈아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년은 다른 종족에서도 어떻게든 슈팅 리버를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하게 되는데….
여담입니다. 여담이지요.
- 칼리의 전사
당대의 스타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질리아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모든 게이머들이 질리아스에게 존중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칼리의 게이머들이 질리아스를 향해 조소를 보내고 있었지요. 칼리 파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게임은 수학이 아니며, 절대적인 답은 없다’라는 것.
이 당시 칼리의 거두들 중에 래더 시즌 1의 준우승을 차지했던 Agent911이라는 게이머가 있었는데, 이 친구의 질리아스에 대한 평가가 당시 칼리 파가 질리아스를 보던 시선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질리아스의 전략들이 지나치게 고정적이고 패턴화 되어있기에, 본디 유동적이고 다양한 게임 양상을 하나로 획일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실제 게임에서 질리아스의 전략들은 아주 작은 변수들만으로도 붕괴될 수 있으며, 자신은 언제나 그를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칼리 파의 주장을 단순히 아집이나 허세로 치부할 수 없었던 것은, 실제로 당시 질리아스가 발표한 수많은 전략들이 대부분 섬전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섬전은 변수가 최소화되는 전장이며, 질리아스의 전략들이 그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변수에 대한 취약성을 드러내는 셈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질리아스에 대한 칼리들의 주장은 대부분 이렇게 끝났습니다. ‘섬에서 기어 나오기만 해라! 얼마든지 깨부숴주겠다!’
이와 같이 질리아스에게는 한없이 냉정했던 칼리 파지만, 이들이 인정하는 게이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상 ‘유일한’ 게이머가 있었지요. 아니, 아니요. 이 게이머는 프로토스는 아니었습니다. 종족은 저그였고요. 그야말로 저그스러운 게임을 했지요. 오로지 피지컬에 의존하는 물량의 교과서. ‘학자’ 질리아스의 정 반대편에 위치하는 야만적인 ‘전사’ 타입이었고, 그 아이디조차도 그런 이미지에 잘 들어맞았습니다.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 Grrr...가 바로 그의 아이디였습니다.
질리아스를 상징하는 것이 ‘슈팅 리버’였다면, 그르르를 상징하는 것은 ‘히드라 웨이브’였습니다. 그르르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히드라의 물량과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플레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또 질리아스의 ‘다이어 스트레이츠’처럼, 그르르에게도 주 전장이 있었는데요. 오늘날로 치면 로템이나 파이썬 정도의 지위를 갖는 ‘리버스틱스’가 바로 그르르의 주전장이었습니다. 그르르는 이 리버스틱스로 도전자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차례로 도장 깨기를 벌였는데요. 그르르에게 희생된 게이머들 중에는 당시 리버스틱스에서 무패를 자랑하던 X17의 수장, X17_Anihillator 같은 거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질리아스와 그르르의 대결, 그러니까 배틀넷과 칼리의 대결, 또한 정점의 프로토스와 정점의 저그의 대결은 래더 시즌 3을 뜨겁게 달구었고, 이 둘은 마지막까지 래더 1, 2위를 다투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대결은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그르르가 히드라 웨이브로 질리아스를 찍어 누르면서, 사실상 그르르와 칼리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또 하나 의문이 나올 수가 있겠죠. 그르르가 대단한 게이머인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저그 게이머가 <프로토스 연대기>와 무슨 상관이냐?
이번에는 일찌감치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물론 상관이 있습니다. Grrr...란 아이디를 가진 이 게이머가 바로, 당시 풋풋한 캐나다 출신 미소년이었던, 그리고 후일 스타크래프트의 성지 한국에서 ‘마법사’ 같은 거창한 별명을 얻게 되는, 유일의 외인(外人) 우승자이자 최초로 정점을 차지한 프로토스 - 기욤 패트리이기 때문입니다.
- ‘푸른 눈’ 기욤의 영광과 몰락
이제 무대는 스타크래프트의 심장부, 성지, 이후 장장 12년에 걸쳐 수백 게이머들의 전장이 되는 한국으로 옮겨집니다.
초기 한국에서 이름을 떨친 게이머들로는 지금도 이름 정도는 기억되고 있는 신주영과 이기석이 있습니다. 아, 하나 더 더하면 최초의 한국인 래더 챔피언인 김캐...당시 김도형, 현 김태형도 있겠네요. 신주영은 세계 래더 16강을 모은 대회에서 전 챔피언인 김태형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챔피언에 올라 명성을 떨쳤고, ‘쌈장’ 이기석은 신주영 입대 이후 두각을 드러내며 오리지널을 풍미한 테란이었습니다. 신주영과 이기석의 약진은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프로게임 산업이 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온게임넷은 마침내 최초의 스타리그 – 99 PKO 코리아 오픈을 개최하게 됩니다.
초기 한국 무대를 지배했던 종족은 저그였습니다. 99 PKO의 최진우가 선보인 ‘사우론 저그’는 이기석의 프로토스를 가뿐하게 즈려밟았고, 같은 시기 전성기를 누렸던 국기봉 역시 무한 확장과 히드라 물량을 통해 이기석의 프로토스를 찍어 눌렀지요.
최진우와 국기봉은 99 PKO에서 나란히 우승, 준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이 선보인 사우론 저그의 위력은 그야말로 매혹적인 것이었고, 배틀넷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저그를 선택하여 그 픽률이 60%에 육박했습니다. 다만 사우론 저그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하여, 다음 시즌인 투니버스 하나로통신배 스타리그에서 최진우와 국기봉은 나란히 몰락하고 맙니다.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저그의 인재풀은 방대했고, 금세 최진우와 국기봉의 공석을 메꿀 게이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바로 변성철와 강도경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우론 저그와는 반대로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플레이를 무기로 삼았습니다. 변성철은 후에 홍진호 – 박성준으로 이어지는 소위 ‘공격형 저그’의 시초쯤 되는 인물이고, 강도경은 여러 면에서 균형잡힌 플레이를 할 줄 아는 저그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티 저그’ 진영에게도 서광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강도경과 변성철이 4강의 두 자리를 차지했지만, 다른 두 자리는 ‘안티 저그’의 것이었습니다. 한 명은 ‘마우스 오브 조로’ 최인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기욤 패트리였지요.
사실 하나로통신배 이전부터 이미 기욤은 한국 게이머들에게 있어 강대한 숙적이었습니다.
1999년 스타크래프트 : 브루드워 출시 이후, 블리자드는 두 번의 래더 시즌을 거친 후에 그 동안의 상위랭커를 총집결시킨 공인 리그를 개최하게 됩니다. 곧 <브루드워 월드 챔피언쉽>입니다. 한국의 게이머들은 <브루드워 월드 챔피언십>이 개최되기 직전인 브루드워 래더 시즌 2부터 본격적으로 약진을 시작한 상태였는데, 그런 구도에 힘입어 <브루드워 월드 챔피언십>은 한국 VS 안티 한국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결승조차도 한국과 안티 한국의 양상이었죠.
한국의 결승 진출자는 바로 김창선 전 해설위원이었고, 안티 한국의 결승 지출자는 기욤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욤은 김창선 전 해설위원을 3:0으로 압도하며 우승을 차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수많은 군소 리그들을 제압하면서 세기말의 패자가 됩니다. 바로 그 한국의 숙적 기욤이, 블리자드의 브루드워 래더 및 여타 북미 게임리그들의 종결과 함께 막 리그가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본디 강력한 저그 유저였던 기욤 패트리가 완전히 랜덤 – 프로토스로 전업한 시기는 대략 하나로 통신배 얼마 전의 유럽 선수권 무렵으로 추정됩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브루드워 월드 챔피언십 역시 거의 프로토스로 치르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기욤은 한국에 랜덤 – 프로토스로서 왔고, 여타 선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플레이로 보는 이들을 매혹시켰습니다.
하나로 통신배에서 기욤은 대부분 랜덤을 선택했고 저그와 테란으로도 현란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돋보인 것은 4강 변성철과의 대결에서 선보인 프로토스 플레이였습니다. 섬전에서의 자유자재의 커세어 – 리버 활용, 글래셜 에포크에서의 뮤탈리스크를 무시하는 질럿 돌격 등, 기욤의 플레이는 그 하나하나가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분했습니다. 거기에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기욤의 외모는 인기와 신비감을 더했고요.
기욤은 8강에서 최진우, 4강에서 변성철에 이어 결승에서 강도경마저 꺾어내며, 한국이 자랑하던 저그 풀을 완전히 박살내면서 하나로 통신배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한국 리그의 외인 우승자 탄생이었습니다. 여러 세계 대회들에 이어 마침내 한국에서의 패권까지 차지한 기욤에게 사람들은 ‘푸른 눈의 전사’, 혹은 ‘마법사’ 같은 이름을 붙이며 열광했지요.
하지만 그토록 화려한 플레이와 수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기욤에게는 게임 외적인 면에서의 어려움들이 뒤따랐습니다. 일단 너무 젊었던 당시의 기욤에게 한국에서의 타지 생활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점도 있고, 가장 큰 이유는 기욤이 전형적인 ‘게으른 천재’ 타입의 선수였다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인으로서 한국의 강자들을 싸그리 박살내면서 우승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한국 게이머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졌다는 점도 결코 작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다음 시즌인 ‘프리챌배 스타리그’가 열렸고, 기욤 패트리는 8강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거기서 터졌습니다. 8강 탈락이 확정되는 순간,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기욤이 gg를 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기욤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성토가 빗발쳤으며, 이후 기욤은 서서히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 0번째 최강자
앞에서 기욤을 일컬어 ‘최초로 정점을 차지한 프로토스’라 하긴 했지만, 사실 이는 반만 맞는 말입니다. 기욤이 우승을 차지한 2000년도 하나로통신배 스타리그에서의 기욤의 종족은 랜덤으로 보는 것이 옳고, 실제로 기욤이 완전 프로토스로 전향한 것은 2001년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온리 프로토스로서의 기욤은 그 전성기가 끝난 후의 일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욤을 강력했던 프로토스로 기억하는 것은 ‘기욤은 뛰어난 선수였다’는 어렴풋한 사실과, 보다 선명한 ‘2001년 이후 프로토스로서의 기욤’의 이미지가 겹쳐서 만들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즉 기욤이 스타크래프트 초창기를 장식한 뛰어난 강자였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기욤의 모습은 대개 전성기가 지난 2001년 이후의 모습들입니다.
이 애매한 엇갈림 속에서 사람들은 기욤을 선사(先史)의 군주 즉 ‘0번째 최강자’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 이명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역사의 군주가 아니라 선사의 군주일까. 왜 초대의 최강자가 아니라 0번째 최강자일까. 그 말은 곧 기욤의 뒤를 잇는 자, 기욤을 누르고 정점을 차지한 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기욤을 꺾은 그가 바로 확실한 역사 속의 첫 번째 강자, 일말의 논란도 허락지 않는 최초의 정점임을 의미합니다.
스타크래프트 최후의 밸런스 패치인 1.08 패치를 앞두고, 온게임넷은 두 명의 게이머만을 위한 무대를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한편에는 기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 기욤을 꺾을 ‘그’가 있었습니다. 이 대결, 이른바 <라스트 1.07>에서 기욤은 상대에게 3:0의 대패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더없이 확실한 종지부였지요. 또한 프로토스에게는 지긋지긋한 적수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이제 다음 장에서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욤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은 누구였는지를, 최초의 프로토스들이 맞서야 했던 적수가 누구였는지를.
바로 거기서부터, <프로토스 연대기>의 진정한 무대가 막을 올리는 것입니다.
- 2편에서 계속
큰 도움을 받은 글들입니다.
모옹님의 스타 이야기 시리즈 (https://cdn.pgr21.com/pb/pb.php?id=recommend&keyword=%EB%AA%A8%EC%98%B9&sn=on)
Tongtong님의 스타리그 역사와 프로게이머의 계보...그리고 임요환 (https://cdn.pgr21.com/pb/pb.php?id=recommend&no=78&divpage=1&sn=on&keyword=tongt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