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3/05/14 17:18:31 |
Name |
네로울프 |
Subject |
"어...왔나?" |
"어...왔나?"
몇년 만에 돌아온 녀석에게 던진 인사치고는 너무 싱거운 말이었다.
풀방구리 제 집 드나들 듯 하루에도 몇번씩 내 방을 들락거리던 녀석
이 갑작스럽게 외국으로 나간다고 했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환송회다 뭐다 해서 친구들 간의 시덥잖은 몇번의 술자리가 있었고
별다른 감회나 아쉬움도 없이 녀석은 떠났었다. 후일 들은 거지만
공항엔 녀석의 가족들만 배웅을 나왔더란다.
녀석이 떠난 후로도 가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말이 나오면 조금
생각이 났을 뿐 별로 애틋함도 보고싶단 마음도 없었다. 다만 약간
고약한 것이 있다면 별다른 약속이 없어 방구석에서 뒹굴거릴 때의
저녁이나 주말 등이 더 심심해졌다는 것 뿐이었다. 녀석의 집과 내
자취방은 지척이었던 데다 녀석이나 나나 별로 근사한 초대 따위는
받지 못하는 편이라 널널한 시간들의 대부분을 둘이 같이 보냈다.
천성이 게으른 편인 나인지라 주로 찾아오는 것은 녀석이었지만
말이다. 뭐 같이 보낸다 해서 별다른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쯤 감긴 눈을 한체 방바닥 한켠에 널부러져 TV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녀석이 들어와 채널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해대고,
뭐라 뭐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는가 보다 싶었는데 언제 또 둘이
등을 맞댄 체 자고 있곤 했다. 무료한 낮이 바닥에 녹아붙어 꺼멓게
저녁이 될 때 쯤 땀과 더위에 지쳐 일어나보면 녀석은 언제 가버렸는지
없고 대신 녀석이 혼자 끓여 먹은 라면의 잔해들만 남아있곤 했다.
가뜩이나 낮잠으로 무거워진 머리로 그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 입에선 자연스럽게 욕이 베어나왔다.
" 개.자.슥.... "
그릇만 대강 설겆이를 해서 녀석이 펼쳐논 잔해 위에서 대강 끼니를
때우고 다시 널부러짐의 세계로 빠져가고 있다보면 녀석은 으슥한
밤에 또 나타나곤 했다.
"시퐁...여기가 니집이냐? ...."
괘심한 마음에 한 소리 들먹거리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내 배위로
비디오 테잎을 던진다. 열에 일곱 여덟은 성인 비디오였다.
'지겹지도 않냐? 맨날 거기서 거긴 거 가지고..."
'나도 지겹긴 한데...뭐 그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금새 또 둘은 새끈 거리는 비디오 화면을 보고
앉아 품평을 지껄이며 낄낄댄다.
늘 그랬다. 별일없이 지나는 시간들 속에서 별일 없이 들락거리는
녀석과 별일 없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녀석이 떠난 후에도 별일 없는
시간들은 계속 됐고 변한 것이 있다면 별일 없이 들락거리는 녀석이
없어졌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방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누워 영화나 보며 뒤척이고,
어느새 잠들고, 땀에 절어 깨고, 라면을 끓이고, 수북히 쌓인 재털이를
비닐 봉지에 비운다. 느긋한 시간은 무료한 나를 안고 흘러갔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다 녀석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어느 술자리에서 얻어들었다.
대저 한 삼년만인가 보다. 좀 변했을 려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별다른 감회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두주일인가 지난 토요일 오후 일찌감치 다리 사이에 이불을
끼고 방구석에 널부러진 나는 시덥잖은 쇼프로들을 흘려보내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방문이 열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문쪽으로
돌렸고 녀석이 거기 서 있었다.
잠이 덜 깬 나는 굼벅 굼벅 녀석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어..왔나?"
녀석은 씨익 웃더니 가타부타 말없이 내가 베고 있는 베게 옆으로
기대 앉았다. 그리고 내 배밑에 깔려 있던 리모콘을 꺼내들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녀석은 말했다.
"또 디비자냐? 라면 사다놓은 거 있지?"
잠시 멈칫 했던 나는 다시 잠으로 빠져들어갔다. 잠시 후 등뒤로 녀석이
미끄러지듯 드러눕는 것이 잠결에 느껴졌다.
.................................
돌아온 PGR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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