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2010년은 대한민국 e스포츠에 있어서는 악몽과 같은 한 해였습니다. 승부조작, 지적재산권 분쟁이 가장 큰 사건이었지만 양대 개인리그 결승도 진행 미숙과 준비 부족으로 두 번이나 구설수에 오르는 망신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전록'과 '격납고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 일들은 저를 포함해 많은 e스포츠 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격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초보적인 부분들을 매조지하지 못해 터진 사고들이기 때문입니다.
출범된 지 몇 달이나 1년 정도 된 것도 아니고, 10년이 넘은 대한민국 e스포츠에서 기본을 지키지 못한 대형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이성적인 이해는 거의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행동을 해 놓고도 당시 KeSPA와 방송사는 뻔뻔하게 선수들이나 잘 알려진 방송인들을 방패로 내세우고 팬들의 응원과 관심을 요구했습니다.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나 개선보다, 잘 알려진 사람들의 감정적 호소 뒤에 숨어 비판과 비난, 잘못에 대한 지적을 회피부터 하려는 행동은 저를 더욱 실망시켰습니다.
팬들에 대한 기만행위이고 배은망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제가 e스포츠를 바라보는 눈은 많이 드라이해졌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적어도 한 가지 막연한 기대는 가지고 있었지요. '당신들이 망하기 싫다면, 그런 잘못을 다시는 하지 않겠지.'라는 기대를. 그러나 그 기대는 단번에 깨끗이 무너졌습니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는 부서지고 흩어져 가루조차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다가온 어제의 '프로리그 결승전 파행 사태'의 의미입니다. (이 이후로 더 많은 글을 썼습니다만, 여기에는 옮겨오지 않았습니다.)
약 1년여 전, 격납고 사태, 정전록, 승부조작, 지적재산권 분쟁 등을 겪으며 지칠 대로 지쳐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일부 대목을 다시 옮겨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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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잘못들이 있었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을 한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해야 합니다.
신뢰를 깼으면 그 원인을 제공한 주체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라는 이 판은 특이합니다. 정작 잘못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엔 묵묵부답이고 그 대신 해설자. 캐스터님들이, 아니면 정말 레전드격인 선수가, 혹은 미니홈피에, 혹은 방송화면에 먼저 나타나 죄책감 가득한 발언들을 하고 남은 사람들을 믿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뒤에 정작 잘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입을 닫고 있다가, 분노가 좀 사그라들고 분위기가 좀 나아지는 것 같으니 극히 의례적이고 무미건조한 사과문을 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격도 맞지 않고 진심도 느끼기 어려우며 더러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쓰여지는 사과문은 기껏 해설자, 캐스터 등등의 얼굴이 잘 알려진 관계자들이 머리 숙여 이끌어 낸 동정여론에 찬물을 끼얹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심지어는 그런 여론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불 같은 분노에 기름 같은 걸 끼얹는 아주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불에 기름 부은 듯 여론이 들끓으면 혹은 해설자, 혹은 캐스터, 혹은 레전드 몇 명이 다시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팬들은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그야말로 적장을 끌어안고 뛰어드는 '논개'처럼 투신하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보고 더러는 안타까워하고 더러는 아쉬워하며 더러는 비판과 비난을 내려놓고 '다음에는 이런 일 없게 잘해주십시오'로 마무리하고 맙니다. 저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광경을 하도 보니 이젠 허탈해지기까지 합니다. 무슨 해설자, 캐스터가, 이 판의 레전드들이, '대신맨'이나 '이시스의 방패'라도 되는 것인가요.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가만 있고 왜 그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입을 닫고 왜 그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다시 하나가 되어 주십사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요즘 그런 광경이 더 빈번해진 지금, 안타까움과 허탈함이 갈수록 깊어집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잘못이 되풀이되어야 하느냐라는 탄식을 내뿜는 것도 답답한데, 잘못한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이 나서서 먼저 머리를 조아리는 것에 안타까워하면서 별 것 아닌 문제였으니 다음엔 더 잘 해달라고 웃어주는 것이 당연한 팬의 자세나 미덕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렇게 순수한 면과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고자 하는 팬들의 애정이 언제까지 악용되어야 하며, 언제까지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 달라'라고 해야 하고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 달라'고 해도 또 비슷한 유형의 잘못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대체. 대체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가 되어야 이런 아마추어보다 못한 대처 때문에 이 문화를 영위하는 팬들과, 게임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받는 비웃음이 좀 덜해질 수 있겠습니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변하는 동안 과연 무엇이 더 '프로답게' 변했는지 도저히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명색이 프로 스포츠라면, 어떤 개인, 어떤 소수만이 프로다워야 하는 게 아니라, 게임단이 생기고 주 5일 방송에 노출되는 겉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이 판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 속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생각이 프로다워야 했고, 그리고 팬들에 대한 자세 역시 프로답게 변해야 했습니다. 했던 실수는 다시 하지 않거나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을 최소화시키고, 찾아오는 팬들에게 선사할 표면적인 볼거리에만 신경쓸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팬들을 신경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저는 적어도 프로화가 되어가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예전부터 줄곧 있었고 요즘은 한층 잦아진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라는 판은 몸만 커졌지 생각과 정신은 자라지 않은 '어른애'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어른애'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고치려고 하는 것에는 미적대면서 팬들에게는 마치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을 배반하지 않는 부모와 같은 애정과 관심을 요구하며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 판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라면서, 사랑하는 선수와, 재미있게 보던 경기와, 흠모하고 호감을 가졌던 그 누군가를 다른 쪽 손아귀에 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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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와 비교해서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e스포츠를 전문적으로 다룬다고 하시는 분들은 2011년에 벌어진 프로리그 결승 취소가 2003년의 프로리그 결승과 같은 모양새라는 '퇴행의 증거'를 찾아낸 것을 무슨 자랑인 양 떠벌이고 있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인 양 포장하는 데에 죄 없는 프로게이머나 방송인이 대신 제물이 되는 일은 작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이번 프로리그 결승 파행에 대해 e스포츠 관계자들이나 전문 언론에게서 '천재 지변이라 해도 외국 정부의 결정이라 해도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제 때, 제대로 못하면 이유불문 잘못한 겁니다.' 라고 말했던 전용준 캐스터님의 말보다 더 책임을 인정하고, 더 프로다운 마인드로 쓰여진 말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KeSPA에는 만 하루가 지났음에도 사과 공지는 고사하고 행사 취소에 대한 긴급 공지조차 하나도 없이, 분노한 팬들의 글만 게시판에 켜켜이 쌓이고 있습니다. 악몽은 되풀이되었고. 의식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e스포츠 종주국 운운하며 목에 뻣뻣이 힘주고 있는 몇몇 부류의 소리들을 보노라니, 마음 속에 파란 불꽃이 일렁입니다.
- The xian -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8-10 0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