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첼시 상태가 굉장히 안좋다는 것은 제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을 합니다. 최근 15경기에서 단 2승. 월드컵 브레이크 이전부터 첼시가 빨리 반등점을 잡아야 이번 시즌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제가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는데 월드컵 브레이크 이후 성적이 더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3월이 되었는데 리그 순위는 더보기 리그를 간신히 면하고 있는 상태고요. 리그컵, FA컵은 모두 탈락하고 챔피언스리그도 리드를 내준 상태에서 16강 2차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 이것도 딱히 전황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 최근 티아고 실바가 부상으로 6주 이상 결장한다는 소식도 있고 이번 여름에 계약 기간이 1년만 남게 되는 메이슨 마운트와 마테오 코바치치는 지속적으로 타 팀 이적설이 돌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클럽 분위기가 굉장히 뒤숭숭한 상황이죠.
토드 볼리가 기록적인 이적료를 쏟아부으면서 첼시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와 야망을 보여주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그 결과가 너무 처참합니다. 본인 스스로가 단기적인 성과보다도 길게 길게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팀을 운영하겠다고 했지만(투헬을 자를 때도 여기서 명분을 끌어오기도 했었죠) 지금은 더 나은 미래 걱정하기 전에 현재가 미래를 망쳐버리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니까요. 챔피언스리그를 못 나간다는 것은 재정적으로나 클럽의 리빌딩적인 측면으로나 굉장히 타격이 큽니다.
몇몇 선택들에 의문부호가 붙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투헬이 단순히 단기적인 부진을 겪게 했던 것 이상으로 내부적인 잡음들을 일으키며 갈등을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투헬을 과감하게 자를 거라면 좀 더 확실하면서 검증된 감독을 데려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레이엄 포터가 꽤 핫하던 감독이긴 하지만 첼시를 맡을 만한 감독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도 의문부호가 굉장히 많이 있었죠. 이전 로만 시대에 첼시가 선임한 감독 리스트를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첼시가 선임한 감독들은 적어도 챔피언스리그에서 굉장히 선전했거나 타 리그에서 우승 경쟁을 했던 경력이 있는 감독들이 대부분이었죠. 그게 아니면 클럽 내부적으로 경력이 많았거나. 물론 포터호가 못해도 이렇게 못할 줄은 몰랐겠지만...
이적 시장과 계약 정책도 굉장히 하이 리스크를 떠안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드리크 영입 때 나왔던 이야기지만 몇몇 내부 기자들로부터 대놓고 '첼시는 내부 영입 프로세스를 거치기보다 타 클럽이 노리던 매물을 하이재킹하는 것을 전략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물론 다른 클럽들도 좋은 선수니까 노린거고 이게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첼시가 영입 정책을 꽤 근시안적인 자세로 임한다는 근거로는 충분합니다. 클럽과 감독의 장기적인 미래, 전략 등이 고려된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죠. 그러면서 오버페이라 평가받는 영입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영입된 엔소 페르난데스를 포함해 지금까지 영입된 선수들 대부분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유망주들과 영입 선수들에 대한 초장기 계약도 문제가 됩니다. 혹자들은 이러한 장기 계약이 FFP를 피하게 해주는 편법으로서 볼리가 클럽을 현명하게 운영하는 근거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던데, 개인적으로 회계와 재무 구조에 대한 이해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긴 하더라구요. 물론 단기적으로 불가능할 뻔한 수많은 고액 영입들을 가능케하는 한가지 방안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실제로 가격을 깎거나 지출을 줄여주는 그런 획기적인 방안이 아니란 말이죠. 할부를 36개월로 끊어놓고 싸게 샀다고 생각하는 꼴입니다. 그런 할부 구입을 여러개씩 쌓아놨는데 이게 다 잘 터지면 대단히 좋은 입도선매의 좋은 예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혹시나 줄줄이 망한다면...? 미래 지출구조가 턱턱 막히면서 정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거죠. 아마 아스날이 니콜라 페페 이적료를 얼마 전까지도 냈을텐데 보고 느낀게 없었는지...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다른 나라 바르셀로나를 보면서 뭔가를 느꼈어야 하는게 맞는데 말이죠. 그거 보면서 '오 저거 정말 좋은 방법인데?' 이렇게 생각을 한건가.
그리고 이러한 장기 계약이 굳이 클럽에게 더 유리할 것도 없어요. MLB나 NBA 같은 경우 좋은 기량의 유망주들을 장기 염가 계약으로 묶어놓으면서 뽑아먹을대로 뽑아먹는 것이 가능하지만 유럽 축구 같은 경우에는 잘한다 싶으면 곧바로 재계약을 하면서 기존 계약을 폐기하고 바로 주급을 올려줘야 합니다. 그게 안되서 클럽과 척지고 이적을 택하는 선수들도 많고요. 정말 잘하는 선수를 리셀할 때에 이적료 받아내는데서 손해보고 싶지 않다 이게 아니라면 이러한 장기 계약이 클럽과 선수와의 관계에서 무슨 이점이 있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애초에 첼시 정도 되는 클럽이라면 그 정말 잘하는 선수도 고주급을 감수하고 붙잡아야 하는 클럽 아니겠습니까.
좋은 프로세스와 장기적인 비전, 일관된 정책들은 물론 굉장히 건강한 방향성입니다. 하지만 꼭 그게 진리라는 법은 없어요. 과정이 엉망이라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게 스포츠기도 하고요. 따지고보면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첼시 클럽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구단주의 독단적이고 고집있는 선택들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례들은 첼시 밖에서도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당장 챔피언스리그를 3번 연속 우승한 지네딘 지단도 감독 선임 배경을 살펴보면 페레스의 독단과 고집 투성이거든요. 펩도 파격적이란 소리 들었는데 지단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축구에서 다시 없을 3시즌의 업적을 만들었으니 독단과 고집이 아니라 탁월했던 통찰력, 선구안이 되는 거지만.
토드 볼리가 길게 길게 인내심을 가지고 클럽을 운영을 하겠다고 했지만 팬들이 그걸 기다려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동안 첼시는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클럽들보다도 특별히 구단주 주도적인 클럽이었고, 그러한 구단주를 향한 팬들의 지지도도 절대적이었던 꽤 독특한 클럽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만에 대한 이야기고 볼리라면 언제까지나 첼시 팬들이 지지를 해줄지가 의문이죠. 이러한 지지도가 있었기에 투헬 경질에서도 이해를 받았고 이적시장에서의 과감한 투자도 팬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었습니다만...
밀레니엄 이후의 첼시는 인내심, 장기적인 비전과는 가장 거리가 먼 클럽입니다. 로만부터가 그랬어요. 성적이 안좋다 싶으면 감독을 가차없이 잘라대서 2년을 채운 감독이 손에 꼽을 정도고, 그러한 감독 경질 홍수 속에서도 묘기에 가까운 새 감독 선임으로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빅이어까지 클럽으로 가져오게 한 사람입니다. 감독을 시즌 도중에 잘라야 빅이어를 따낼 수 있다는 신기한 징크스가 생기기도 했죠. 이 클럽은 더 큰 성과를 위해 지금 당장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클럽입니다.
이러한 어색한 환경 속에서 팬들이 과연 볼리나 포터를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아무리 구단주, 쩐주라고는 하지만 팬들의 지지를 잃으면 순식간입니다. 로만 아웃이라는 걸개는 거의 걸리지 않았습니다만 볼리 아웃이라는 걸개는 금방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포터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 볼리가 포터를 자를 수 밖에 없을거라 생각해요. 그게 조만간이 될 수도 있겠고 그게 아니라면 다음 사즌 초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게 아니면 스탬포드 브릿지에 비행기가 볼리 아웃을 달고 날아다니는 꼴을 금방 볼 수도 있을테니까요.
포스트 로만의 시대. 첼시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최근 프리미어리그는 빅 6의 시대라고 하지만 뉴캐슬처럼 이 구도를 위협할 만한 경쟁자도 나오고 있고요. 빅 6 내에서도 전력 지형이 크게 흔들리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최근 20년간 그 어느 프리미어리그 클럽보다도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클럽, 첼시의 이러한 영광이 과연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지. 지금 고비는 첼시에게 꽤 중요한 시점이지 않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