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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01 13:44
만약 유비가 미래를 볼수 있었다면 유비가 형주로 같이 진군하는게 최선이었겠죠. 그러면 손권도 형주로 들어올수 없었을테니까요.
다만 이렇게 되면 성도가 비는데, 유비는 익주의 지배권을 공고히 해야되는 상황이고, 형주로 진군하게 되면 손권과의 외교적 마찰이 훨씬 더 심해지는 리스크를 져야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미래를 본 게 아니면 택하기가 매우 어려운 선택입니다.
25/04/01 13:50
성도에 있는 상태에서는 뒤늦게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병력을 보내기에는 거리상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이라 처음부터 같이 진군해야되는데 이게 참..
25/04/01 13:49
219년 기준으로,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이긴게 5월, 관우가 양양-번성으로 북진한 것이 7월, 손권과 조조의 협공으로 관우가 패배한 것이 10월, 포위당한 관우가 도망치지 못하고 죽은게 12월입니다. 유비가 미래시가 생겨서 손권의 통수를 알았다 한들, 아무리 늦어도 7월에는 뭔가를 해야 할 텐데 큰 원정을 마치자마자 2개월만에 군사를 동원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손권의 통수를 편지만으로 통보하면 관우가 무시할 가능성도 높구요.
현실적으로는, 미방을 (겉으로라도) 승진시켜서 중앙으로 불러 강릉성의 책임자를 바꾸고, 상용의 책임자를 유방이 아니라 맹달로 통일 시켜서 분쟁의 요소를 없앤뒤 관우에게 번성의 공격을 포기하고 강릉성에서 수성을 지시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릉성은 이후 역사를 보면 올바르게 지킬 땐 거의 넘어가지 않는 성이거든요. 그 후에 차차 생각해 볼 일이죠.
25/04/01 14:07
위에 류지나님 말씀대로, 219년 기준으로도 빡빡한 스케쥴인데,
문제는 유비도 익주에서 전황이 어려워서 기존에 형주에 있던 제갈량과 관련 후방 인원 + 모아둔 식량들도 땡겨간거라 형주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여서 사실 답이 없죠. + 당시 기준으로 관우 말고는 형주를 맡길 수 있는 인원도 없어서 대체도 불가하고, 오나라는 어찌되었든 간에 형주를 먹기 위한 준비 중이었으니;
25/04/01 16:12
동맹이긴 했지만 혈맹에 가까운 사이는 아닌지라 혼사가 성립되면 일국의 군주와 타국의 장수가 혼인으로 연을 맺는거니
그 의미가 형주를 들고 오나라로 소속을 옮기거나 아예 독립해서 독자적인 군벌로 대등한 관계로 본다로 보여 관우 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을 수 없는 정치적 술수 였을 것 같습니다.
25/04/01 14:38
제 생각에는 촉나라는 그 당시에 익양대치부터 좀 더 효과적으로 서로 잘 풀었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가장 온건파였던 노숙마저 틀어지게 된 것이니 익양대치를 형주파들을 더 잘 포섭해서 형주가 보다 더 유비의 땅으로 확고히 했어야 했는데 너무 단기적으로 바짝 제갈량으로 하여금 군사 모으고 군량 모아서 익주로 들어가 버려 오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형주가 다 무릉을 제외하고선 유비로부터 등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유비 자체도 형주의 관우에게 가절을 준 것은 형주와 한중에서 양방향으로 치고 갈 생각이 만만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그 때문에 관우는 배를 만들고 있었을테고 조조가 위왕을 하면서 유씨가 아닌 왕이 등장한 것에 반란이 일어난 시기를 놓칠 수가 없었을 것 입니다. 관우가 형주에서 군대를 일으킨 후에는 아예 미리 유비가 한중을 걸어잠그고 형주로 부대를 보내지 않는 이상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이 들고, 아싸리 형주를 익양대치에서 깔끔하게 주었거나 형주의 호족들을 잘 포섭해서 본인 땅을 공고히 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방통이 눈먼 화살에 맞아버린게 치명타라고 생각이 들고요. 방통이 살아있었으면 제갈량과 방통의 담당구역이 바뀌면서 관우 옆에서 군사중랑장을 했을테고, 형주에서의 방씨의 입지와 오나라 명사들과의 방통의 관계 등등 아무리 유비가 단기적으로 형주를 좀 착취해서 군사랑 군량을 뽑아냈더라도 좀 더 안정적으로 입지를 다지는데 도움이 크게 되었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또한 관우도 익주에서의 성과가 있어 방통에서 막연히 하대하지는 못해서 관쪽이 짓도 못했을테고요.
25/04/01 17:09
관우를 살리는 건 몇 가지 조치로 가능했겠지만, 관우가 진격 자체를 멈추지 않는 한 양번에서 패하는 것 자체는 못 피했을 것 같습니다.
25/04/01 17:49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라는 걸 증명하는 부분중 하나가
익양대치 - (한중전투 건너뛰고) - 형주상실 및 이릉대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25/04/01 19:03
관련글에 묻어가는 질문인데(이 글을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오나라가 관우를 배신해서 형주를 얻어낸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긴 했을까요? 촉나라와의 동맹 악화, 이릉대전, 양쪽의 국력이 소모되면서 위나라 독주를 저지하기 더더욱 어려워 진 것을 다 종합해서요. 일단 챗 GPT는 결과적으로 큰 이득이 되진 않았고 손해가 더 큰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물론 형주는 오랫동안 쌓인 감정적인 문제 또한 크다고 생각해서, 오나라 입장에선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25/04/01 19:27
연의에서는 꼭 관우 통수를 쳐야겠냐는 손권의 말에 여몽이 "지금 위나라를 공격한다면 염원하던 서주는 공략 가능하겠으나-" 로 운을 띄웁니다. 역사는 만약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관우의 북진에 맞춰서 오나라가 합비루트로 서주를 공략했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았을 것이고 삼국의 정세가 많이 달라졌겠죠.
25/04/01 22:35
서주 자체는 조조가 대효도 청야전술로 작살을 내어버려서 회복하는데 진나라에도 다 회복못한 곳이라 먹어도 평지에 방어도 힘들고 빈 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위나라도 버려둔 상태였구요. 그래서 항상 합비로 꼴아박을 했던 것이고요. 정사에서 여몽이 먹을수 있겠지만 지킬려면 대군을 상주시켜야 한다면서 오히려 관우를 쳐야 한다고 했고요. 전종도 관우를 쳐야 한다고 간언할 정도로 오나라에서는 형주를 쳐서 먹을 수 있다는 각이 나왔던 시점 같습니다.
25/04/01 23:02
오나라의 대전략 자체는 주유때부터 노숙을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천하이분지계 였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주유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강릉공방전이 끝나고 주유가 익주 들어가고 유비는 그 사이에 주유 밑에서 형주 정리하고 밑에 소속된 객장 세력 느낌이 되었을텐데 주유가 사망하면서 노숙이 동등하게 대우한 느낌인지라 다시 유비에게 친화적인 노숙이 죽고 나서는 여몽 육손 등은 우선 장강이남 구역을 다 확보해서 도하의 어려움을 만들어 수비하는데 쉽게 만드는데 주력했고 그리고 촉한이 멸망할 때 오나라 병력이 구원을 갔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오히려 익주를 점령하려 했다가 장익이었나한테 털리고 돌아갔었던 예를 보면 장강이남과 서촉을 먹고 통일을 노린다가 항상 기본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권 입장에서는 호족연합이였던 양주에서는 본인에게 정치적 세력기반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형주를 점령함으로써 이 곳은 손권에게 중앙집권화도 되었고 호족출신이 아닌 세력들을 키워내서 나중에 이궁의변으로 쳐 싸울만한 견제 세력을 만들어 낸게 오나라의 형주 점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위나라 자체도 조비에서 석정전투니 조비 친정등으로 꾸준히 국력을 까먹고 조씨 하후씨들도 견제하고 조비 본인의 권력을 높이는데 주력하여 아예 밸런스가 확 깨졌다란 상황은 아닌 어떻게 비벼볼 여지도 있었는데 조예가 너무 치세를 잘해서 답이 없어진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손권이나 제갈량 모두 조예가 즉위하면서 드디어 기회라고 쳐들어왔는데 능력이 뛰어난 황제가 조예였으니 말이죠.
25/04/02 00:51
장비+제갈량 보난 뒤, 강릉성 문 전부 열고 장비는 혼자서 성문 앞에 서있고 제갈량은 정문 누각에서 거문고 튕기면 오나라군 도망가지 않을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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