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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책을 읽다가 4시쯤 됐는데, TV에 김영재라는 사람이 나왔어. 해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고 거문고도 잘하는. 뭐 암튼 그런 사람인데, 제자들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잘할 수 있습니까' 하니까 한참 있다가 '나처럼 하면 되는데'
허허, 참 맹랑한 소리다 싶었는데, 또 '선생님처럼 하는게 뭡니까' 하니까 하루에 10시간 아래로 연습을 끝내본 적이 없다는. 중요한 거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악기를 사랑했다는 거지. 악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야. 하루에 10시간 아래로 연습을 쉬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어떻게 악기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
그렇다면 배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우는 자기가 하는 말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야. 하루에 10시간씩 악기를 쓴 것 처럼 배우는 자기 자신이 악기라고 생각해야지.“
자신에게 남과 다른 장점이 있다면, 어떤 계기로든지 그것을 자각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 때 난 중학생이었다. 난 발표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말을 하기 시작하면 묘하게 집중되는 주변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어느 날, 옆집에서 놀러온 아주머니가 “정짱이는 목소리가 참 좋다~” 라고 칭찬했고, 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 무렵에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이 많았다. 친구들과 게임을 하면 이겨야 했고, 농구도 잘해야 했으며 시험기간엔 공부도 열심히 해야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스스로에 대한 기분 좋은 의심이었을 뿐. 그런데 커가면서 그런 우연한 칭찬들이 겹치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군대 훈련소에서 만난 동기 형은 카사노바를 자처하며 자신의 여성 편력을 줄줄히 자랑하는 사람이었는데, 훈련소를 수료할 때 나에게 준 마지막 쪽지의 내용이 ‘정짱이는 목소리가 좋아서 여자 꼬시기 좋겠다’ 였다. 어지간히 할 말이 없었나 보다. 대학생 때 여자 중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러 갔을 때 내가 첫마디를 떼자 아이들은 ‘오- 목소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대학교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에는 잘 봤다며 그쪽 대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누적된 칭찬들. 어느덧 난 내 목소리가 좋다는 것을 스스로 믿어 버렸다. 스스로 믿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믿게 되면 그것은 자신감이 되고 훌륭한 무기가 된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의존하기 시작한다. 의존하면 편해진다. 그것이 자신의 단점을 가려주기 때문에.
목소리가 좋다. 그래, 그것은 내 장점이었다. 난 그것에 의존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여기서 발목이 잡혔다.
교수님은 탁성에 가까운 발성법을 선호했다. 목에 좋은 발성법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한 소리를 선호했다.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힘있는 소리들. 그런 소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내 장점은 더 이상 장점이 아니었다. 장점이 단점이 된 순간, 더 이상 의존할 곳이 없어진 순간, 난 추락했다. 추락은 끝이 없었다. 쌓아올렸던 자신감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나서야 난 나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내 장점에 가려져 있었던 순수한 나의 실력-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연 2주 뒤에 시켜줄지 아무도 모른다는 태인선배의 빈정거림처럼, 교수님은 그 뒤 날 까맣게 잊어버렸다. 매일 아침에 나와 연습을 했지만, 공연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난 다시 그 배역으로 설 기회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교수님 앞에 서서 대사를 한다는 것이, 교수님 앞에서 다른 소리의 개입 없이 내 목소리만 울려야 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 두려웠다. 극단 안에서 이미 난 안되는 사람 쪽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고, 그게 그렇게 분하지 않았다.
‘쟤는 원래 욕먹는 애니까’
대사 한마디 할 때마다 교수님께 욕먹는 게 당연하게 된 순간, 스스로 패배자라고 인정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꽤나 안락했다. 패배자의 안락함. 그 안락함 속에 머물러 변화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극단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을 몰랐다. 연극판에 발 한쪽을 담구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하며, 난 패배자의 안락함을 즐겼다.
공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던 어느 날, 교수님은 아침 일찍 콜을 했다. 모두들 졸린 눈을 비비며 교수님의 입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방에서 꺼낸 수없이 많은 종이들. 거기엔 연필로 휘갈긴 글씨들과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한참을 종이들과 씨름하던 교수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 시장에서 말야. 들어갈 수 있는 남자가 누가 있나?”
다들 아무 말이 없자, 교수님은 잠깐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그 무렵 새로 들어온 남자 두 명과 나를 호명했다.
“정짱이 나오고, 넌 이름이 뭐였지.”
“김정우입니다.”
“뭐 이렇게 키가 커? 키가 몇이야?”
“백팔십팔입니다.”
“그래, 넌 이제부터 팔팔이다. 여기 나와 서.”
정우는 나와 동갑이었다. 검은 피부에 마르고 키가 컸다. 말 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약간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너, 넌 영화과에서 왔다고 했나?”
“네, 네? 네. 전 그, 이, 이 준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명은 영화과에서 온 이준호. 키는 184cm 정도 되었을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큰 정우탓에 키 얘기는 없었다. 혀가 짧은 것인지 발음이 좋지 않았고, 나이는 나보다 많았으며, 매우 내성적이었다. 극단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후배에게는 이름 뒤에 ‘씨’를 붙여서 불렀다. 준호씨는 엉거주춤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긴장했는지 얼굴이 벌게지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교수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거 왜그래? 내가 뭐라고 했어?”
“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좀.. 원래..”
“이거 한참 걸리겠네. 넌 이제부터 한참이다.”
구석에 앉아있던 태인선배가 혼자 킬킬거렸다. 본인도 웃겼다고 생각했는지 교수님은 혼자 씩 웃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비닐봉다리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냈다.
“자, 이거 받아가.”
난 번개처럼 뛰어가 물건을 받아들었다. 지하철 잡상인들이 팔 법한 물건이었다. 남자 팔뚝만한 길쭉한 박스가 세 개 있었다. 박스 옆에는 사용법과 제품 사진들이 보였는데, 밑에 야채를 넣고 위에서 누르면 칼날이 내려가면서 다져주는 기구였다. 정우와 준호씨에게 나눠 주고 셋이 연습실 한가운데에 엉거주춤 서니 교수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자, 그거 한 번 팔아봐.”
뭔 소리지. 팔아 보라니. 셋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교수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뭐해? 팔아보라고! 어떻게 할거야!”
윽. 센스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인가. 이거 헛소리라도 아무 말이나 일단 해야 되겠다. 내가 뭔가 내뱉으려는 순간 먼저 침묵을 깬 건 정우였다.
“선생님. 이거 근데 얼맙니까.”
정우의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연습실에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건 태인선배의 웃음소리 였다. 태인선배가 껄껄거리며 말했다.
“좋아, 신선한 지적이었어. 선생님, 얼만지 알려주셔야 팔든가 말든가 하죠.”
쇼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교수님도 웃음을 터뜨렸다. 예측하지 않은 일, 의외성. 교수님은 그 의외성을 좋아했다.
“대충해! 만원이라고 해!”
교수님이 웃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시 이어지는 침묵에 교수님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니, 배우하겠다는 사람들이 이거 하나 못 팔어! 지금 뭣들 하는거야!”
슬슬 분위기가 험해져 간다. 문득 박스에 ‘만능다지기 큰방아’ 라고 써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내가 먼저 용기를 냈다.
“자- 만능다지기 큰방아! 어서오세요! 싸게 드립니다. 만원입니다! 어서 오세요! 오늘밖에 기회가 없습니다. 단돈 만원!”
연습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하다. 내 상상력은 여기까지인가. 조용한 연습실에서 홀로 울려퍼진 내 목소리가 날 부끄럽게 만든다. 얼굴이 달아오르려고 하는 찰나, 뒤를 이어 후배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자 만능다지기! 만원입니다. 만원에 가져가세요!”
“자 만능다지기- 만원에 팔아요!”
교수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
“계속해봐! 근데 만능다지기란 말 밖에 몰라 사람들이.”
우리 셋은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셋이서 외치니 뭔가 의지가 됐다. 같은 말을 반복해도 티도 잘 안나고, 만능다지기를 눌러대니 그것도 제법 훌륭한 소음이 되었다. 마치 시장통의 한복판처럼. 교수님이 손을 내져었다.
“됐어! 시장 한복판 같아! 야 주현아- 얘네 셋한테 엿장수가 매는 엿판 같은 거 하나씩 만들어줘. 그 왜 있잖아 앞에 널찍한 판자 들고 있고 목에다 거는 거.”
“알겠습니다.”
주현선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나서 이런 작은 소품들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너희 세 명은 내일까지 대사를 만들어와. 지금은 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하는데, 그러지 말고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오라고. 그럼 더 풍성해지겠지. 연극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 꼭 그런 사람 있다고. 주인공 안보고 니네 같이 뒤에 있는 사람 쳐다보고 있는. 근데 너희들이 각자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봐. 그럼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탄하겠어.”
맞는 말이다. 단역을 맡은 배우들의 역량에 따라 연극의 퀄리티는 확 달라진다. 교수님은 주연부터 단역까지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원했다. 그 날 난 집에 가서 a4 한 장 분량의 대사를 썼다. 잡상인이 한 번 되어보기로 했다. 열심히 대사를 쓰고 있자니 문득 배역을 받고 방심했다가 하루아침에 짤려버린 것이 쓰게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그 때 친구들과 술 먹으러 놀러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놀았다고 하더라도 집에 들어가서 대본을 펼쳐보고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나왔더라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야 의미없다.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에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연습이 끝난 어느 날, 동기 희영누나가 다가와 말했다.
“정짱아, 너 소리 엄청 좋아졌어. 니 목소리 밖에 안들려.”
“그래? 발성 좋아졌어?”
“어 뭔가 달라. 그 전에는 그냥 힘없이 울리는 소리였는데, 지금은 뭔가 딴딴해.”
딴딴하다라... 그러고 보니 뭔가 달라지긴 한 것 같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소리를 내려고 애쓰다 보니 다른 방법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통 소리를 크게 내라고 하면, 자신의 평소 목소리 톤보다 높은 소리를 내게 된다.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를 때가 좋은 예가 되겠다. 그런데 톤을 유지한 채로 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면? 점점 소리는 눌리고, 더 저음으로 내려간다. 지금까지 소리를 크게 내려고 할 때 쓰던 방법의 반대다. 턱을 당겨 소리를 내려 누르면 목을 긁으면서 약간의 허스키한 소리가 되고 더욱 힘이 센 소리가 된다. 시장이나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 생선 파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즈아, 고등어 흐안마리에 이처눤! 을마나 쌉니까!”
(자, 고등어 한 마리에 이천원 얼마나 쌉니까)
그 시끄러운 곳에서도 뚫고 나가는 저음의 목소리. 자유롭게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난 이 발성법을 약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본 것은 희영누나만은 아니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교수님은 이미 내 대사의 변화를 눈치 채고 있었다.
이번 공연일정은 꽤 힘든 일정이었다. 다른 작품보다 많은 숫자의 조연이 나왔고, 다들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 장면 한 장면 만들어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막내부터 고참급 배우들까지 모두 주조연에 나눠서 역할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습시간은 길게 늘어졌다. 아침에 모여 지하철이 끊기기 직전까지 연습하는 나날이 이어졌고, 공연장에 들어가 셋업을 하고 공연을 올리기 시작할 때쯤엔 애인이 있던 단원들이 대거 이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말에도 쉬지 않는 극단의 일정상, 애인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선배들은 헤어졌다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그것보라며 놀려댔다. 애인 있는 단원들은 대부분 막내들이었기에.
힘든 일정이지만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컸다. 여기서 잘 해내면 교수님의 눈에 들 수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떠오른 사람은 동기 세환이형과, 나와 동갑인 영수선배였다. 세환이형은 한 장면에서 주인공을 냅다 두들겨 패는 건달역할이었는데, 예의 그 폭발력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공연을 보러온 내 여자친구는 고등학교 때까지 마산에서 살았었는데, 그곳에서 보던 진짜 건달들 같다며 혹시 그쪽 출신 아니냐며 물을 정도였다. 그리고 원래 내가 맡을 뻔 했지만 지금은 세환이형이 맡게 된 사람파는 상인. 거기에선 또 능글능글하게 잘 해냈다. 그 다음은 영수선배. 그가 등장한 장면은 그냥 식사하면서 헤어진 연인에 대해 추억하는 장면이었는데, 마술과 접목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냥 지나가버릴 장면을 마법처럼 바꿔버렸다. 혼자 중얼중얼대며 아무것도 없던 손에서 꽃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꽃을 던지는가 했는데 다른 손에서 꽃이 튀어나왔다. 뿐만 아니라 대사에 없던 애드립으로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공연 중 애드립에 대해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 교수님이었지만, 연습 중의 애드립은 얼마든지 용인했고 그러다 좋은 것이 나오면 그대로 고정시켰다. 실제 공연 때 영수선배가 나오는 장면은 관객들의 폭소가 끊이지 않았다. 무대에서의 그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마치 만화 톰과 제리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을 보는 듯 했다. 필요할 때는 생략하고 필요할 때는 과장하는. 재능이란 저런 것이구나. 나보고 저렇게 하라면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영수 선배는 이 번 작품에서 교수님께 깊이 각인되었고, 그 뒤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공연 중 후반에 다다르면 커튼콜을 할 때까지 주인공 한명과 여자배우들만 등장했다. 극이 거기까지 가면 등장하지 않는 배우들은 커튼콜까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기에 선배들은 분장실에서 쉬고 막내들은 무대 근처에서 대기했다. 나와 세환이형, 그리고 후배 정우는 항상 무대 상수쪽 -배우가 관객을 바라봤을 때 기준으로 왼쪽- 구석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항상 우울했다. 실제로 어두운 공간이기도 했고, 정우와 세환이형이 여자친구와 헤어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울하게 말들이 없다가 점차 자기비하 개그부터 시작해서 서로에게 독한 말들을 쏟아내며 웃고는 했다.
“두고 봐라, 너도 곧 헤어질거야. 내가 장담한다.”
세환이형은 얼마 전에 헤어졌다. 술 먹는 취향이 잘 맞는다며 좋아했었는데.
“형, 왜 그래. 나까지 헤어져야겠어?”
“헤어지셔야죠 선배님. 함께 하시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동안 제법 친해진 정우도 농담을 건네왔다. 정우는 극단에 들어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말로는 연기에 전념하기 위해 자기가 찼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차라리 헤어지는게 편할 수도 있겠다. 어휴- 힘드네.”
힘들긴 했다. 가뜩이나 투정을 잘 부리는 여자친구인데, 극단에 들어온 뒤로는 주말데이트는커녕 평일에도 만나기 힘들었으니 오죽할까. 극단이 정기적으로 쉬는 날은 매 주 월요일이었는데 직장생활을 하는 여자친구가 퇴근하면 저녁 8시 가량 되었고, 8시에 만나서 밥먹고 영화보고 나면 헤어져야 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여자친구는 늦게까지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공연이 끝나고는 2~3일 가량 쉬었는데, 보통 공연은 주말까지 하기 때문에 그 쉬는 날에 주말이 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월요일에 갑작스런 연습이 잡힐 때였다. 쉬는 날을 뺏기는 것도 힘든데, 여자친구의 투정까지 겹쳐지면 몇 배로 힘들었다. 하지만 난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내가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에.
세환이형과 정우는 헤어지네마네 하며 나를 놀려댔다. 요새 들어 나를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이긴 했다. 계속되는 둘의 말장난이 웃기긴 했지만, 난 진심으로 웃을 수는 없었다. 쓰게 웃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정우가 문득 걱정되었는지 한마디 건넸다.
“왜요 선배님. 요새 힘들어요?”
너무했나 싶었는지 세환이형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니 여자친구는 이쁘잖아.”
기승전 외모인가. 세환이형 말대로 여자친구는 이쁘장한 편이었다. 기획사에서 캐스팅 제의도 받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녀가 예쁘다는 사실에 무감각했다. 학교에서 선 후배로 알게 되고부터 사귈 때 까지는 몰랐는데, 사귀고 나서 주변인들에게 소개하니 예쁘다고 난리다. 그제서야 그녀의 외모가 출중한 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외모 때문에 호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학교 다닐 때 마음이 잘 맞아서 서로 끌리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볼 때는 이쁘다기보다 호감을 주는 외모... 흠. 생각해보니 결국은 외모 때문에 끌리게 된 건가. 하지만 그녀와의 연애 속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덕에 오래 가는 연애에 있어서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이쁘긴 이뻤지만 그녀와의 연애는 힘들었다. 그녀는 연애에 있어서 자기중심적인 스타일이었다. 배려 받아야 했고, 남자는 항상 희생해야 하는 존재. 그런 그녀가 1년 가까이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하는 상태에서 나를 계속 만나는 건 희한한 일이었다. 극단에 들어가고부터 자주 만나지 못해 서운해 하는 그녀에게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난 기다리는 거 못해. 내가 이만큼 기다려주고 참는 건 오빠가 처음이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이 없다 방법이.
공연은 약 2주일간이었다. 연습한 날들에 비해 2주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언제나처럼 무대 스트라이크를 하고 부서진 각목들과 소품들을 정리하고, 뒷풀이로 삼겹살을 먹은 뒤에 자리는 마무리 되었다. 이제 2~3일 가량 쉴 수 있겠지. 그나마 다행이다. 때는 무더운 8월의 여름. 여자친구는 공연이 끝난 날짜에 맞춰 휴가를 냈고, 같이 워터파크에 놀러가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터였다. 수영장에서 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은 쉴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 그저 쉬고 싶을 뿐. 뒷풀이가 끝난 삼겹살 집 앞에서 동그렇게 모여서서 교수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어서 쉰다고 말씀해주세요- 난 교수님의 입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 다들 고생 많았어. 이번에 힘든 일정이었는데, 다들 잘 해낸 것 같아. 집에 가서들 푹 쉬고, 내일 4시쯤에 모이는 걸로 하지.”
귀를 의심했다. 내일 4시? 내일 4시라고? 그럼 하루도 안쉬는 거야? 워터파크는 어쩌지? 예약한 펜션은? 여자친구에겐 뭐라고 해야 하지? 검은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나 뿐만은 아닌가 보다. 모두들 얼어붙은 채 대답이 없다. 분위기를 느낀 교수님이 다시 말했다.
“힘든 건 알겠는데, 국립에서 연락이 왔어. 바로 연습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야. 같은 작품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으니까 내일부터 바로 리딩 들어가야 돼. 그럼 내일 보는 걸로 하자고.”
어차피 우리의 의사는 중요치 않은 듯 했다. 교수님이 단원들을 쓱 둘러보시고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누군가 말했다.
“선생님. 쉬게 해주세요.”
도성선배였다. 극단 남자들 중 두 번째로 오래 된 경력의 선배. 차막내인 영수 선배나 승영선배의 말에 의하면 그나마 교수님께 발언하는 사람은 도성선배 밖에 없다고 했다. 교수님은 그를 흘끗 보더니 다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왜 없어요. 하루 이틀 쉬어도 충분해요.”
나긋나긋한 말투지만 도성선배의 눈이 선생님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새삼 놀랐다. 교수님의 말은 극단에서 절대적인 줄 알았는데.
“거 내가 알아듣게 얘기 했는데, 이해 못하겠어?”
“네, 못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 몇 개월을 했는데, 하루도 안 쉬고 바로 연습 들어간다는게?”
총무 유희선배가 다들 일단 들어가라며 소근거렸다. 자세한 내용은 문자를 주겠다며. 뒤가 궁금했지만 어쩔 수 없다.
다들 한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영수선배와 승영선배가 보인다. 그들에게 달려가서 물었다.
“선배님, 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극단에서 남자들끼리는 서로 연애전선에 대해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높은 선배들은 그냥 애인의 유무정도만 알았지만, 비슷한 막내 선 끼리는 자세하게 알고 있다. 일종의 동지의식이랄까? 그들도 내가 이번 공연 끝나고 워터파크로 놀러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터였다. 다들 애인과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응원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영수선배와 승영선배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승영선배가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취소하는게 낫지- 내일 4시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어. 도성선배가 얘기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승영선배는 군대에서 우연히 연극을 접하고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을 마친 그는 제대 후 바로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그에겐 당찬 포부가 있었다. 일단 대학에 합격한 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극단에 입단. 극단에 들어와서 바로 주연으로 발탁, 극단에서 몇 년간 경험을 쌓은 뒤 영화로 진출. 스크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여 우리나라에서 유명해 지겠다는,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 쯤 꿈꾸는 목표가 있었고 극단에 입단하는 것 까지는 막힘없이 이룬 상태였다. 그러나 일단은 거기까지였다. 그의 극단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주연에 발탁되기는커녕, 작은 단역에서도 교수님께 항상 욕을 들어먹었다. 배우의 꿈을 갖기 전에는 형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작은 키에 얼굴은 동안이었지만, 유도 유단자였기에 낙법과 아크로바틱에 능했고, 몸은 근육질로 다부졌다. 그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항상 아침 일찍 나와서 혼자 극단의 문을 열었다. 편의점 식사로 아침과 점심을 때우고, 연습에 연습. 하지만 그는 딱딱했다. 나와 함께 교수님의 욕 지분을 꽤나 차지하고 있는 처지. 연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는 한탄했다.
“연기는 참 어려운 거야. 메치기는 안되면 그냥 천 번 연습하면 되거든? 근데 연기는 그게 아니야. 연습한다고 되질 않아.”
그런 그에게 내일 하루 쉬고 안 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쉬는 날에도 극단 연습실에 혼자 나와서 연습하는 사람이니까. 영수선배가 뭔가 결심을 한 듯 물었다.
“정짱이 너... 혹시 내일 늦더라도 8시까지는 올 수 있겠냐?”
무슨 의미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나에게 영수선배가 주변을 살피더니 다가와 나직히 말했다.
“일단 내일 놀러가. 연습한다고 하면 8시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오고. 할머니 생신이라고 내가 말해놓을게. 니가 빠진적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정도는 괜찮아. 진짜로 괜찮으니까 가서 놀다와.”
가슴속의 무거운 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듯 했다. 그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갔다와서 더 열심히 하자.”
듣고 있던 승영선배도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내일 리딩만 할거야. 놀다와.”
“감사합니다.”
날아갈 듯 하다.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뒷풀이 끝나고 연락한다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 오빠. 뒷풀이 끝났어? 난 짐 다 싸놨지롱- 수영복 산 것도 오늘 다 왔어.”
내일 놀러 갈 생각에 그녀의 목소리가 밝다. 여기다 대고 못 놀러간다고 했다면... 아찔하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1박2일 여행에서 당일치기로 변했다고 말해야 한다.
“어, 그래 다행이네. 근데 유리야. 미안한데.. ”
“뭐? 뭐가 미안한데 또. 내일 못가?”
그녀의 말에 바로 가시가 뻗어 나왔다.
“아니야, 못가는 건 아니고...”
난 최대한 설명했다. 원래 내일 연습이 잡혔는데 지금은 어찌 될지 모르며, 그나마 못가는 걸 가까운 선배들이 배려해줘서 갈 수 있는 거고 어쩌고 저쩌고-
수화기 저편의 그녀가 말이 없었다. 내가 할 말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오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밖에 못해?”
“미안..”
어떻게 이 사태를 넘기지? 난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더니 짐짓 밝게 말했다.
“그럼, 지금 나 데리러와. 오빠 집 가서 하루 자고 출발할래. 그럼 1박 2일이네.”
자취했던 걸 이렇게 다행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 정도로 풀린다면 베스트다.
난 그녀와 워터파크에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워터파크에서 놀다가 점심이 조금 지나서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었는데, 그것은 무려 하루 쉬고 다음날 4시에 모인다는 문자였다. 여자친구는 신나서 방방 뛰었고, 나 역시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은 채 즐겁게 놀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이든 슬픈 시간이든, 어쨌든 시간은 지나간다. 즐거웠지만 짧은 하루. 그리고 다음 날 4시는 찾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모여서 청소를 하고, 교수님을 기다리며 몸을 풀었다. 영수선배는 나에게 다가와 잘 놀다왔냐며 눈을 찡긋했다. 승영선배도 운이 좋았다며 좋은 선택이었다며 팔장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수님은 5시가 넘어서 도착했고, 가지고 온 대본을 나눠주었다. 쇼파에 쓰러지듯 앉은 그는 문득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도성이는 내가 나가라고 했어. 다들 그렇게 알라고.”
연습실은 조용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니 도성선배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교수님이 특히나 아끼던 배우였다. 그런 사람을 나가라고 했다니. 그 날 도성선배와 교수님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고, 그 때문에 하루를 쉬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그 뒤로 도성선배는 극단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오래된 선배 한명이 사라졌다. 존재감 있는 사람이 사라졌지만, 언제 그런 사람이 있었냐는 듯 극단은 아무 탈 없이 흘러갔다. 후에 선배들에게 듣기로는, 도성선배는 자신이 스스로 나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교수님은 나가지 말라고 붙잡았다고. 그 얘기를 듣고 약간은 실망했다. 교수님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자존심 때문인가.
이 번 작품의 배경은 어촌마을이었다. 어촌마을 사람들과 외부인들의 갈등이 주된 내용. 외부인들과 어촌마을의 촌장, 몇몇 어른들이 주연급 역할. 그리고 단역으로 많은 어부들이 등장했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얘기하는 이 작품에서, 신세대를 상징하는 어부집단은 꽤 중요했다. 단역들의 집합이긴 하지만, 강한 기운을 표출할 수 있어야 했고, 저마다 대사들도 제법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임팩트 있는 장면인 어부들의 북춤이 있었다. 만선을 기원하며 추는 춤이었는데,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선이 있는 힘 있는 춤이었다. 남자 여러 명이서 대북을 매고 나와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면 꽤 멋있었다. 멋있는 만큼 힘들어서 한번 춤을 추고나면 숨이 턱 끝까지 찼다. 나중 일이지만 교수님은 이 춤의 완성도에 집착했다. 하루 연습의 시작을 이 춤으로 열었고, 다른 장면 연습하다가도 한 번, 쉬는 시간 전에 한 번, 쉬는 시간 끝나고 다시 모이면 또 한 번. 잠깐 생각할 시간에도 한 번. 하루 연습을 종료할 때도 한 번. 아무튼 심심하면 이 춤을 연습했고, 덕분에 살이 쪽쪽 빠졌다.
어쨌든 대부분의 남자 막내들은 어부에 투입될 것이고, 선배들 선에서 주연급 캐스팅이 될 터였다. 교수님은 안경을 쓴 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대본을 들여다 보았다.
“자, 선배들은 알거야. 몇 번 했으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내가 캐스팅은 대략 해두었으니 그대로 하면 되고.”
역시 예상대로 마을 촌장과 마을 어른들, 외부인들에 선배들이 캐스팅 되었다. 선배들은 자신들이 받은 배역을 살펴보느라 분주하게 대본을 넘긴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어부들은 나머지 남자들이 하도록 하고. 그리고, 여기 어부들은 정짱이가 좀 감당을 해내야 할 것 같아.”
교수님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깜짝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교수님은 대본을 골똘히 보고 있었다. 그는 날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부 계장을 하도록 하지. 어부들 통솔하고, 앞장서서 말하는.”
세환이형이 옆에서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주변을 둘러보니 선배들이 입모양으로 ‘오-’ 하며 웃고 있다. 어부들의 계장. 뭐 별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배역의 중요함을 나오는 횟수와 대사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역할은 선배들 선에서 맡아서 한 적도 있을 만큼 잘해내야 하는 역할이었다. 어쨌든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을 그린 작품에서 신세대의 대표격이니 말이다. 이번엔 놓치지 않아야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온 두 번째 기회에, 가슴이 미약하게 뛴다.
“자, 한 번 읽어보도록 하지.”
리딩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대본을 뚫어져라 보며 자신의 차례가 오면 열심히 읽어낸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햇빛이 누렇다.
1년만에 글을 쓴 것 같네요. 봐주시는 분들은 너무 오래되서 지난 내용이 기억 안나실 듯 합니다.
그간 바쁘다 보니...ㅠㅠ
읽어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