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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9/01 22:51:09
Name 비온날흙비린내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oba34&logNo=150001846037
Subject [텍스트] 오천석 -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손은 유별나게 투박하고 힘이 셌다. 맨손으로 과일나무를 전지(剪枝)하고, 아무리 고집 센 당나귀도 아버지 손에 잡히면 안장을 써야만 했다. 자도 없이 판자 위에 정확한 사각형을 그렸다든지, 맨손으로 문에서 쇠 돌쩌귀를 뜯어냈다는 등 아버지의 손에 얽힌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의 손이 남달리 따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어깨를 꽉 붙잡았을 때 셔츠 밑으로 스며들어 오던 그 손의 따뜻함…. 아버지는 매가 공중에서 날쌔게 내려오든가, 들토끼가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내 귀를 잡아당겨 머리를 그쪽으로 돌리도록 했는데, 그 때에도 손이 그처럼 따뜻했다.

아버지의 손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글자를 쓰는 일만큼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글을 몰랐다. 문맹자가 거의 없는 오늘날 아버지가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입학한 초등학교는 몹시 엄격했던 모양이었다. 한 번만 잘못 대답해도 사정없이 자로 팔뚝을 열 대씩 때렸다. 여섯 살 난 아버지에게는 글자를 쓰고 외는 게 도무지 어려웠다. 아버지는 난독증(難讀症)이 심했는지도 모른다. 두 달 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퇴학시키고 농장 일을 돕게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그 뒤엔 내가 조그만 손으로 커다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이름 쓰는 연습을 도와 드리려고 했었다. 아버지는 자존심을 누르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다. 커다란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더 이상 글 모르는 설움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셨다.

어느 날 아무도 없을 때 아버지는 몰래 내 2학년 국어 책을 읽어보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 실력으로는 좀 어려웠던가 보다.

"오, 하나님! 애들 책도 안됩니까?"

아버지는 책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그날 이후 아무리 설득해도 아버지는 다시는 펜을 쥐려고 하지 않으셨다.

농장 일로부터 시작해서 도로 인부, 공장 일을 하는 동안 아버지의 손은 충실히 제구실을 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머리는 명민했고 아버지만큼 일에 열심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차 대전 때 아버지는 조선소에서 파이프 기술자로 큰 군함을 만드는 일에 참가했다. 아버지는 무척 열심이었고 또 능력이 있어서 자격 시험에만 통과하면 책임자를 시켜 주겠다는 제의가 왔었다. 아버지는 배의 심장부에 이리저리 이어져 있는 파이프 배선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청사진 위에 척척 도면을 그렸다. 파이프가 엇갈리거나 구부러진 부분도 모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글을 몰라 그 시험에 통과할 수가 없었다.

조선소가 문을 닫은 다음 아버지는 방적 공장에 취직했다. 거기선 밤일만 하면서 낮에 농장 일을 했다. 그 방적 공장 역시 문을 닫자 아버지는 새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매일 새벽같이 일을 구하러 나갔다가 밤이 늦어서야 그냥 돌아오곤 하는 며칠이 지난 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나 필기 시험을 본단 말이야…."

아버지로서는 일꾼을 구하는 고용주 앞에서 사인 대신 ×표를 해야 되는 게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특히 어떤 때는 딴 사람 이름에 ×표를 해서 그 사람이 아버지가 가야 할 일자리에 대신 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을 보실 때마다 미친 듯이 괴로워하셨다. 다들 뽑혀간 다음 혼자 남아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는 아버지를 본 날이면 나는 한참씩 울곤 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읍내에 있는 방적 공장에 취직이 되어서 우리는 그곳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좀처럼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눈의 빛나던 광채는 사라지고 뺨도 훌쭉해졌다.

그러나 손만은 그대로 힘이 세었고, 무릎에 앉아 성경을 읽어 드리는 나를 붙잡고 있는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아버지는 내가 글을 읽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려운 단어가 나와 읽지 못하고 쩔쩔매도 언제까지나 참고 기다리며 듣고 싶어했다. 언젠가 아버지는 라디오에서 '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남자는 도둑이나 이단자보다 더 나쁘니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지 못하느니라' 하는 성경 구절을 설교하는 걸 들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 구절을 읽어 달라고 했지만 나는 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마치 기적이 일어나 읽게 된 것처럼 성경을 뒤적이더니 한 페이지를 짚었다. 바로 그 성경 구절이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성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성경을 못 읽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이모에게 가신 주말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가게에 가서 저녁 찬거리를 사오셨다. 저녁을 먹고 나니까 아버지는 멋진 디저트를 주겠다고 했다. 부엌에서 깡통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조용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보았다. 아버지는 깡통 딴 것을 들고 서 계셨다.

"난 배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혼잣말을 하면서 뒷마당으로 나가 계단에 앉으셨다. 내게 부끄러우신 것 같았다. 깡통에는 '순(純) 감자'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상표에 붙어 있는 그림은 영락없이 배 같았다. 나는 아버지 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별자리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북두칠성 등 웬만한 별자리를 다 알았다. 아버지는 별자리에 따른 신화도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 깡통을 선반 위에 놓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깡통을 손에 들고 빙빙 돌렸다. 손으로 글자를 만지면 그 손이 저절로 글을 쓰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몇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는 아버지더러 함께 살자고 했다. 아버지는 변두리 조그만 집에서 가축이나 채소를 돌보면서 혼자 살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심장병 때문에 여러 차례 입원도 했다. 늙은 의사 그린 씨가 매주 진찰을 하고 약을 주었다. 그 가운데는 심장마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얼른 삼키라는 니트로글리셀린 알약도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셨다. 산 아래 목장에서 그 크고 따뜻한 손-이젠 늙어 마디가 울퉁불퉁했지만-으로 내 아들아이들의 어깨를 붙잡고 멀리 보이는 연못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전에 아버지와 내가 수영을 하고 낚시질도 하던 연못이었다. 그날 밤 내 가족은 새 직장 관계로 해외로 떠났다. 3주일 후,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예의 그 심장마비 때문이라고 했다.

장례식엔 나 혼자 돌아와 참석했다. 의사 그린 씨가 유감을 표했다. 그는 좀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가 처방을 써줘서 아버지가 약국에 가 약을 지으셨는데, 여지껏 그 약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니트로글리셀린 약만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도움을 청할 때까지 버틸 수 있어 안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나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마당가 바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슬픔이 북받쳐 올라 나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신 그 땅을 손바닥으로 훑어보았다. 내 손가락에 딱딱한 게 닿았다. 반쯤 묻힌 블록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블록을 들어 팽개쳤다. 그랬더니 그 아래 부드러운 땅속에 콱 박혀 있는 약병이 보였다. 뚜껑이 꼭 잠긴 채 알약이 가득 들어 있는 플라스틱 병이었다.

약병을 집어드는 내 눈엔 아버지가 뚜껑을 열려고 애를 쓰다 못해 필사적으로 블록으로 약병을 깨려고 했을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크고 따뜻한 손이 죽음과의 싸움에선 그토록 맥없이 패배한 까닭을 알고 나니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어린이 손이 안 닿게 되어 있는 안전 뚜껑. 눌러서 돌리셔야 열립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약사는 바로 그날부터 새로운 안전 약병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시내로 나가 제일 좋은, 가죽 표지의 사전과 순금 펜 세트를 샀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면서 따뜻하고 충실했던 손, 그러나 글자를 못 썼던 그 손에 그것들을 쥐어 드렸다.

---

안타깝게도 실화 기반 수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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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1 23:02
수정 아이콘
많이 읽었던 이야기인데,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고 해도 오천석씨 본인의 경험은 아닐겁니다.
비온날흙비린내
22/09/01 23:05
수정 아이콘
찾아보니 오천석씨는 전 문교부 장관에 이런 류의 글을 여러 필 모아서 수필집을 내신 거 같네요. 말씀대로 오천석씨 본인 이야기는 아닌 듯 합니다.
22/09/01 23:05
수정 아이콘
네, 아버님이 목사셨어요.
ComeAgain
22/09/01 23:08
수정 아이콘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걸로 압니다.
PGR21 동년배들은 아마 잘 알겁니다. 다음 글이 육십에 배운 한글이었나.

이 글 읽은 후로 안전뚜껑 열 때마다 생각이 나곤 합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글 연습하시던 할머니 생각도 나고.
22/09/01 23:15
수정 아이콘
늙은 의사 그린 씨..
Dark Swarm
22/09/02 01:36
수정 아이콘
전 예전에 만화로 본 기억이 나네요
이시하라사토미
22/09/02 09:06
수정 아이콘
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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