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이 만난 사람] 프로게이머 임요환
[뉴스메이커 2005-05-19 16:39]
“손가락에 영혼을 싣는다”
억대 연봉, 발매한 자서전과 DVD는 베스트 셀러, 프로젝트 앨범 취입, 방송 고정출연, CF와 영화에도 출연, 기업 및 대학에 특강, 토익 게임강의 기획, 광복 60주년 추진기획단 자문위원, 2005년 5월 현재 팬클럽 회원 65만여 명, ‘뉴스위크’ ‘월스트리트저널’ ‘NHK’ 등 해외언론에서도 집중취재, 호칭은 ‘황제’ 혹은 ‘그분’… 스물다섯 살 프로게이머 임요환의 이력서는 화려하다. 최근 e스포츠는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처럼 정식 스포츠종목의 하나로 인정받는다. 상무팀 창단 논의는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한중친선대회를 주선하고 각 기업의 e스포츠 마케팅 열기도 뜨겁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요즘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의사, 변호사가 아니라 프로게이머란다. 이처럼 e스포츠와 프로게이머에 대한 관심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고조되면서 게임의 황제인 그의 인기 역시 폭발적이다. 지난 만우절에는 인터넷에 그의 결혼설이 나돌아 화제가 됐다. 할리우드 스타 수준이다.
그러나 목성·금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구에서는 잘 모르듯 게임이라곤 테트리스를 몇 번 해봤을 뿐이고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만 하는 주제에 ‘e스포츠의 황제’를 알현(?)하러 가자니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동시에 느꼈다.
언젠가 그가 TV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e스포츠에 문외한인 진행자가 난처한 질문을 던지자 그의 팬들이 프로그램 게시판에 항의성 글을 올려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다. 혹시나 기사를 잘못 쓰거나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을 했을 경우 사이버테러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아무리 그에 관한 자료를 열심히 찾아 읽어봐도 ‘드랍쉽’ ‘바카닉’ ‘유닛’ ‘벙커링’ ‘뮤탈리스크’ 등의 용어는 고대 라틴어만큼 생소해 무엇을 물어볼지 난감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프로게이머의 역사를 혼자 써가는 청년,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그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임요환 선수의 명성만 알 뿐이지 스타크래프트 등에 대해 잘 모르니 무식한 질문을 해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고백했다. 소속팀인 SK텔레콤 프로게이머 선수복을 입은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문인이 아니시니 당연하죠. 저도 게임밖엔 잘 모르는 걸요.” 게임이 뭔지도 모르지만 무조건 그의 팬클럽에 가입하고 싶어졌다.
수도승 같은 극기와 노력이 성공 비결
사실 기성세대들은 그의 존재나 인기를 이해하기 힘들 게다. 하는 일이라곤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이며 하루 종일 괴물이나 무기가 오가는 이상한 세상에 푹 빠져 있는 사람에게 수십 만 명이 갈채를 보내고 유명 기업이 수억원의 연봉을 주고 젊은이들이 우상으로 숭배하니 말이다.
세상은 변했다. 컴퓨터 게임도 스포츠로 인정받고, 프로게임이 벌어지는 곳에는 그 어떤 경기장보다 많은 팬이 몰려든다. 현재 국내에 활약하는 프로게이머는 240여 명, 지난해엔 100개의 대회가 열렸으며 상금규모만 50억 원이다. 지난해 7월 부산 광안리에서 열린 게임리그 결승전에는 무려 10만 명이 몰려들었고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연간 60만~70만 명이 스튜디오나 특설경기장을 찾는단다. 중국에서 경기가 열렸을 땐 3일간 기차를 타고 왔다는 팬이 자신의 등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구할 정도여서 또다른 한류스타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98년에 스타크래프트 게임 리그가 시작되었으니 놀라운 발전이다. 이런 e스포츠 세계의 최고스타가 임요환 선수다.
스타크래프트는 수십개의 유닛을 마우스 클릭으로 하나하나 조정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게임 화면과 유닛에 명령을 내리는 마우스의 현란한 움직임은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도 흥분하게 만든다. 임요환 선수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한 종족인 ‘테란’으로 각종 게임을 섭렵해 세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한다. 별명 역시 ‘테란의 황제’. 그는 1분에 300회, 1초에 적어도 5회의 마우스 클릭과 움직임을 기록할 만큼 신들린 컨트롤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공격과 방어가 생명인 게임마다 깜짝 전략을 펼쳐 팬들을 까무라치게 만들고 고도의 집중력과 침착함 역시 놀랍다고 극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게임을 했을까.
“어릴 땐 달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전자오락실을 드나들었죠. 학교 공부는 별로인데 게임은 재미있고 남들보다 빨리 익혔어요. 게임을 잘하니까 동전 몇 개만으로도 하루 종일 놀 수 있어 돈은 안 들었어요. 돈이 다 떨어지면 게임 잘 하는 사람들 옆에 앉아 구경했죠. 그러다 고3 여름방학 때 마음잡고 공부하려고 친구집에 갔는데, 글쎄 그 자식이 스타크래프트를 알려주는 바람에….”
공부는 망했고 그의 인생도 바뀌었다. 당연히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시절에도 동네 PC방에 가서 15시간씩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부모님이 참 속상하셨겠네요. 맞진 않았어요?”라고 물어봤다. 세 딸 끝에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을 꼭 대학에 보내고 싶었던 그의 부모는 집에 컴퓨터도 없애고 게임을 못하게 말려도 봤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강한 아들을 믿어줬단다. 전엔 “왜 게임만 하냐”던 부모님이 이젠 “왜 게임 연습 안 하냐”고 물으신단다. 하도 전략전술이 뛰어나다기에 IQ 지수를 물어봤다.
“중학교 때 재봤는데, 뭐 시험도 아니라 대충 찍고 잤더니 99로 나왔어요. 그 기록 때문에 두고두고 놀림을 당해서 꼭 다시 재보고 싶긴 한데… 근데 제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비결은 지능이나 순발력이 아니라 노력 덕분이에요. 남들보다 연습을 더 많이 해요. 혼자 할 때도, 지금처럼 팀 체제로 할 때도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훈련해요. 프로니까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죠. 하루 종일 게임하고 게임만 생각해요. 화장실에서 볼 일 볼 때, 잠들려는 순간에 갑자기 전략이 떠오르기도 하죠. 다른 책은 볼 여유도 없고 판타지 만화책이나 삼국지 등을 보면서 게임 전략을 구상하기도 해요.”
잘 생긴 외모에 2억 정도의 연봉이면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외제차를 굴리며 재즈바에 드나들 것 같은데 그의 생활은 거의 수도승 같다. SK텔레콤 프로게임팀 주장인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 강남의 합숙소에서 생활하는데 하루 종일 연습하느라 놀러 나가서 돈 쓸 시간도 없단다. 매일 아침 선릉을 조깅하는 게 운동의 전부다. 또 며칠만 연습을 하지 않아도 손가락이 둔해져서 더 많은 시간을 훈련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 꾸준히 연습하는 게 중요하단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너무 더운 물로 샤워하면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진다며 약간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할 정도다. 피부가 여자보다 더 투명하고 고운 비결을 물어보니 자주 씻고 밖에 안 나가서 햇볕을 못보니까 저절로 깨끗하고 하얗게 되더란다.
프로게이머의 역사를 온몸으로 쓴다
어떻게 피끓는 젊은이가, 돈도 많고 팬도 많은 청년이 이렇게나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리며 살 수 있을까.
“2년 전 갑자기 제 인생의 순서가 바뀐 게 아닌가 싶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의 승리도 공허하고…. 그래서 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좀 놀아보려고 했죠.”
당연히 성적은 뚝뚝 떨어졌다. 2억원 가까운 연봉을 받고 SK텔레콤과 계약한 그에 대해 이제 임요환의 시대는 갔다는 비난도 들렸다. 문제는 남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휴가를 얻어 연습실을 벗어나도 놀 줄 아는 게 없었다. 시간이 남아 돌아도 주머니에 돈이 있어도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다른 걸 해봐도 재미가 없었다.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기엔 그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컴퓨터 게임만 하다보면 시력이 나빠지고 안구건조증도 생기고 허리나 어깨에 통증이 온다. 어떤 이는 손목에 이상이 왔다고 하고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똥배도 나온다.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이런 직업병에 시달리면서도 게임에 미치는 이유는 뭘까.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입할 때 그는 가슴이 뛰고 행복하고 즐겁단다. 경기할 때 팬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면 힘이 솟는다. 광기에 가까운 몰입과 열정, 끝없는 도전 정신이 그를 게임의 세계에서 새로 태어나게 한다. 돈이나 명예보다 게임이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해도 지치거나 싫증나지 않아서 그는 오늘도 손가락 하나에 영혼을 담는다.
“사람들이 가진 편견의 벽을 하나씩 깨가며 새로운 역사를 써간다는 보람이 커요. 솔직히 그동안 공부 못하는 한심한 애들이 오락이나 한다고 멸시받아 서러움도 많았거든요. 처음엔 ‘과연 프로게이머가 직업이 될까?’ 하고 다들 시큰둥했지만 이젠 선망의 직업이 되었고, 또 ‘프로게이머가 얼마나 오래 갈까?’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도 많았지만 저는 6년째 프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겨우 스물다섯이지만 프로게이머로선 거의 최고령이고 쉰세대예요. 감각과 순발력이 생명이라 2~3년이 평균 수명이라지만 저는 30대, 40대 프로게이머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후배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영화배우처럼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보톡스를 맞거나 성형수술을 할 수도 없는 프로게이머. 그는 그저 연습을 열심히 해서 손가락과 전략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학업을 마치는 2007년에는 군대에도 가야 하지만 언젠가는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는 코치, 더 많은 돈을 벌어 멋지고 재미있는 게임을 직접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게임에 열광하는 팬들이 점점 늘어나고 연령층도 다양해지기 때문에 프로게이머의 생명 역시 길어질 것이고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것이 허황한 꿈만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프로게임이 인기고 선수들이 스타 대접을 받는다 해도 정작 내 자식이 컴퓨터 앞에 온종일 붙어 앉아 스타크래프트만 한다면 부모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런 부모에게 조언의 말을 부탁했다.
“컴퓨터 게임에서도 배우는 게 많아요. 일단 집중력이 강해지고, 전략적인 사고도 해야 하고 무기 등을 거래하느라 협상력도 생기죠. 무조건 ‘안돼’ ‘하지마’라고 나무라기보다 부모가 게임을 같이 하거나 게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함께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대화도 하고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잖아요. 물론 프로게이머가 되려면 정말 게임을 좋아해야 하고 승부근성이나 열정이 제일 필요하니까 흥미로만 시작할 일은 아닙니다만….”
가상의 게임 세상에 파묻혀 지내는 그가 어쩌면 이렇게도 현실적이고 이성적일까. 해맑은 미소로 답하는 스물다섯 그의 가슴속에 일흔살의 지혜로운 노인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자기 직업에 열정과 성실함을 가진 청년이라면 프로게임이 아니라 정치를 하건, 사업을 하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게 당연하다. 성공은 누가 선물로 주는게 아니라 내 발로 찾아가 땀으로 씻어 발견해내는 거라는 평범한 진리를 이 아름다운 청년은 알려준다. 나 같으면 65만 명이라는 팬클럽회원들에게 1만원씩만 성금(?)을 모아도 65억원이니 그 돈으로 한평생 편하게 살 것 같은데… .
<글/유인경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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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석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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