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12 13:58:44
Name 글곰
File #1 20190529_133757.jpg (2.36 MB), Download : 31
Link #1 https://brunch.co.kr/@gorgom/208
Subject [일반] [2023여름] 내가 살아가기에 충분할 이유


잠시 제주도에 머무르던 초여름날이었다. 느지막하게 눈을 떠 보니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푸르렀다. 햇볕이 따가웠지만 바람은 선선했다. 아이가 바다에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바닷가로 향했다.

제주의 잿빛 현무암과 눈부시게 빛나는 모래알이 뒤섞인 해변가에 차를 세웠다. 아이는 시멘트로 된 야트막한 제방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의 뒷모습을 찍었다.

뭘 보니? 나는 물었다. 바다. 아이는 대답했다. 그러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로구나.




나는 사진을 잘 찍는 편이 못 된다. 구도를 잡는 것이 서투르고 미술적인 감각도 부족하다. 참 멋진 풍경이라도 막상 사진으로 찍어낸 결과물은 영 신통찮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딸아이를 둔 아빠의 자격으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고, 그러면 간혹 오백 장이나 천 장 중에 한 장 꼴로 건질 만한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기적이란 때때로 일어나는 법이다.

그렇게 손에 넣은 이 사진은 이후로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가끔 힘이 들 때마다, 지칠 때마다, 피곤할 때마다, 나는 이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고 그러면 마음속 깊은 곳 어디선가 조그마한 따끈함이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고 음울한 우울증 속으로 가라앉아 있을 때도 그랬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낄 때에, 나는 때때로 이 사진을 보고, 세상과 맞서는 것만 같은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날 힘을 얻는 것이었다.

삶이란 때로는 덧없다는 걸 느끼곤 한다. 오로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특히 그랬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조차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할 이유가 된다. 나는 과거에 그러했듯 앞으로도 종종 이 사진을 들여다보리라. 그리고 그때마다 사진 속의 아이는 자신의 뒷모습을 통해 내게 말해줄 것이다. 인생 별 거 없다고. 그러니 한 판 붙어 보라고.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몇 해가 지난 후의 어느 날, 예컨대 초여름 오후쯤 되었을 무렵에, 내가 아이에게 말해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웃으면서 이야기하리라. 인생 별 거 없다고, 그러니 한 판 붙어 보라고.



(※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일부 인용)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及時雨
23/09/12 14:05
수정 아이콘
얼마나 좋습니까.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aDayInTheLife
23/09/12 14:08
수정 아이콘
결연하고 멋지네요. 잘보고, 또 잘 읽고 갑니다.
페스티
23/09/12 14:32
수정 아이콘
캬... 하긴 스킬이 뭐 필수겠습니까. 추억의 한 장면을 기록 할 수 있으면 족하죠
페스티
23/09/12 14:32
수정 아이콘
(하지만 글재주는 필요했다...)
23/09/12 15: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인생 한판 붙어보겠다는 각오로 매일 출근길에 나서지만, 항상 꺾이는 중년의 마음...
소이밀크러버
23/09/12 17:46
수정 아이콘
제게도 아이가 그런 의미가 되련지 같이 힘내봐요.
뉴럴클라우드
23/09/12 18:24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좋은 글들 읽으며 오후를 보냈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고 아직도 고생이시겠지만 건강한 하루하루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及時雨
23/10/10 21:19
수정 아이콘
쪽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786 [일반] 오랜만에 차인 사연 [21] 9662 23/09/13 9662 23
99785 [일반] [2023여름] 올해 여름 사진 몇장 [4] 산밑의왕6495 23/09/12 6495 12
99784 [일반] 포룸 로마눔의 유적들 복원모습 [18] 삭제됨9282 23/09/12 9282 8
99783 [정치] 尹, 국방장관 사표 수리 후 내일 개각할 듯…"안보 공백 최소화" [72] 덴드로븀14304 23/09/12 14304 0
99782 [일반] 같은 반 친구와 놀다가 손이 친구 뺨에 맞았고? [62] 톤업선크림13425 23/09/12 13425 5
99781 [일반] [2023여름] 노들섬, 다리 사이에 끼어있는 신기한 섬 [19] Tiny7482 23/09/12 7482 11
99780 [일반] [2023여름] 내가 살아가기에 충분할 이유 [8] 글곰6846 23/09/12 6846 27
99779 [정치] 민주당 전북 지역 국회의원들 삭발…“새만금 SOC 예산 복원하라” [76] 기찻길11140 23/09/12 11140 0
99778 [일반] [2023여름] 그냥 사진들 [14] 뿌루빵7335 23/09/12 7335 18
99777 [일반] [2023여름] 여름나라 사진사의 여름사진 모음 [15] 스타슈터9398 23/09/12 9398 43
99776 [일반] [2023 여름] Time Files... [14] aDayInTheLife8726 23/09/11 8726 14
99775 [일반] (나눔 이벤트) 책 출판 기념, 책 나눔 합니다 [131] Fig.18299 23/09/11 8299 48
99774 [일반] 약 한달만에 금연 실패한 이야기 [23] Croove9339 23/09/11 9339 10
99773 [정치] 선관위의 353건의 채용비리가 드러났습니다. [91] 아이스베어18073 23/09/11 18073 0
99772 [일반] 모아보는 개신교 소식 [43] SAS Tony Parker 11599 23/09/11 11599 1
99771 [정치] 국힘의 호남전략: 호남빼고 전지역 보수층 결집시키자 [77] 기찻길15438 23/09/11 15438 0
99770 [정치] 아동복지법 제17조 제5호의 악용에 페널티를 가할 수 있는 시스템의 마련 [29] 아프로디지아9183 23/09/10 9183 0
99769 [일반] PGR21 2023 여름 계절사진전을 개최합니다 [17] 及時雨6057 23/09/06 6057 7
99768 [정치] 학생만화공모전 전시 일주일 앞두고 취소…'윤석열차' 여파? [30] 항정살10808 23/09/10 10808 0
99767 [정치] 홍범도 논란에 지쳤나.. 보수 유권자 26% “총선에서 야당 찍을 것” [26] 기찻길13420 23/09/10 13420 0
99766 [정치] 尹, G20서 우크라 지원 패키지 발표...한일정상회담 또 열려 [61] 항정살12067 23/09/10 12067 0
99765 [일반] 책 읽다가 뜻밖의 국뽕(?)을 잠깐 맛보네요. [34] 우주전쟁11933 23/09/10 11933 6
99763 [정치] 뭐라도 하고싶은 울산 근황 [36] 10215114 23/09/10 1511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