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6/19 12:06:04
Name 기차놀이
Subject [일반] 새벽강변 국제마라톤 대회 참석 개인적인 후기(하프 코스)
대회 홈피: http://www.amarunsb.com/

만용으로 시작해서 결국 걸어서 완주한 이번 하프마라톤이, 처음에 생각한 대로 지금 삶의 자극이 되는 소소한 성취가 되길 스스로 바라며, 일상으로 복귀하기 전 기록을 남기고 싶어 글로 남겨보았습니다. 이 글에는 대회의 정보, 마라톤 내지 런닝 자체에 관한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제 개인적인 참가 동기 등 신변잡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며 거울을 볼 때마다 깊어지는 눈가, 이마, 미간주름, 팔자주름, 푸석해진 피부, 늘어지는 뱃살이 점점 더 거슬렸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마시는 소주, 폭탄주와 전자담배 시대에도 연초를 고집하며 하루 한갑을 피워대며, 병원에서 통보받은 놀랄만큼 높은 요산(통풍), 고혈압, 중성지방, 초기 당뇨(전당뇨) 증세(전당뇨) 수치에 잠깐씩 놀라는 중년의 아저씨가 서있네요.

30대 말에 시작했던 새로운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겉으로 번드레한 커리어를 이어오다가 누구나 걱정할만한 시기에 걱정할만한 일을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날이면 날마다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지난 4월 초에, 전날 마신 술의 여파로 힘들어하다가 문득 사무실 바깥편 창문을 보니 날씨가 너무 좋았습니다. 나가서 화창한 봄날 하늘 아래에서 잠시 걷다보니 돈이 없다고 건강까지 버려야하나, 혹시 지금 뭔가 잘 안되는 이유가 내가 건강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 내가 못나게 하고 다니면 남들도 결국 나를 못난사람으로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현자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잠시 스쳐갔을 생각이 이상하게 그날은 잠들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다음날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졌습니다. 전날 숙취로 그날은 술을 마시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가서 걷기 시작했고, 동네 공원까지 가서 공원을 한바퀴 돌고와서 보니 한 시간 정도 걸었네요. 이 정도 거리면 뛰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부터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가볍게 30분에서 40분 정도 뛰기 시작했고, 새벽 공기를 맡으며 피우는 연초향이 매력적이라는걸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11년 전쯤, 너무나도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때 운동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몇 달 동안 매일 5-7km 정도를 달렸었고, 주변의 권유로 하프마라톤도 두 번 정도 뛰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지속적으로 달리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어렴풋이 하프마라톤 정도는 기록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몇 주 준비해서 이악물고 뛰면 완주 자체는 가능한 정도의 난이도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조깅 후 출근한 4월 말의 어느 날, 과거 추억이 겹쳐 인터넷을 검색해 서울에서 개최되는 몇 주 후의 마라톤 대회를 검색했고, 이 조건에 부합하는 제20회 새벽강변마라톤대회에 별 생각 없이 half 코스로 등록을 했습니다. 이런 조그만 성취가 현재 저를 답답하게 하는 많은 상황에서 약간의 돌파구가 되어줄 것 같은 기대를 했습니다.

등록 후 몇 주간 업무, 사람 관계로 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생각만큼 새벽운동을 자주할 수는 없었고, 식습관, 음주, 흡연도 그대로였고, 체중도 그대로였고, 큰 마음먹고 6월 초에 발분석 서비스를 통해 구입한 러닝화는 구입 후 신발장에서 잠들어버렸습니다. 어느새 마라톤 대회 전일이 되었고, 그 주에는 감기, 허리근육 염좌로 인해 평소보다도 몸이 힘들었습니다.

6월 17일 대회 당일, 새벽 6시에 잠이 깨어, 정말 참가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다가, 힘들면 바로 그만두고 집에 오자라는 생각으로 일단 대회장으로 향했습니다. 여의나루 근처 대회장에 오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인파, 남년노소 할 거 없이 상기된 얼굴로 뛸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이 분위기 속에서라면 저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대회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시작한 half코스 참가자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0km 구간까지는 제 페이스대로 뛰었고, 그 이상의 영역은 11년만에 처음 뛰어보는 구간입니다. 12km – 15km까지는 페이스를 낮춰서 뛰었고, 18km 까지는 낮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그래도 ‘뛴다’는 정의에 부합하게 몸이 움직였습니다,

18km가 넘어가니, 이건 뛰는게 아닙니다. ‘뛴다’고 생각했지만 옆에서 걷는 사람들보다 느립니다. 온몸에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11년 전 어렸을 때와는 모든게 달랐고, 내 몸은 제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계속 저를 내리쬐고 있던 태양도 갑자기 너무너무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동시에 지금 멈추면 골인 지점까지 다시 뛰는 것은 불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도 같이 듭니다.  

결국 이 마라톤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던 저는 18.5km 정도 지점부터 걷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생각과 고민과 번뇌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 중에 이동한 구간은 고작 500m 정도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고쳐먹고, 앞으로 남은 2.5km 신나게 산책하자는 생각으로 걸어서 전진하다가, 잠깐 다시 뛰다가, 걷다가 반복하며 골인지점까지 도착했고, 도착하고 나니 최종적으로 완주 2시간 30분이 걸렸네요.

다음 목표는 10월에 있는 마라톤 full 코스입니다. 식습관, 음주, 흡연도 현재까지는 그대로이고, 이번 주도 저녁약속이 거의 매일 있는 스케줄러를 보니 한숨만 나옵니다.  다만, 다음 내용을 기억하고 다음 목표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1.        이번에 하프마라톤은 제 상황에 무리였다. 10km정도로 설정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        운동은 하루이틀할 게 아니라 평생간다는 생각으로 하자.
3.        신발은 중요하다.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뛰니 새 신발임에도 발에 무리가 없었다.
4.        최소한 담배라도 끊던가 전자담배로 바꿔보자.

모두 행복한 한주 되십시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6/19 12:12
수정 아이콘
저도어제 집근처 10k대회나갔다가 날씨때문에 죽는줄 알았습니다. 가을에 선선할때 도전하시면 훨씬 수월하실거에요
기차놀이
23/06/19 18:02
수정 아이콘
네네 갑자기 더워진거 생각을 충분히 못했습니다. 다음 가을 마라톤은 더 준비하고 대비해서 해봐야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옥동이
23/06/19 12:22
수정 아이콘
식상한 비유중에서도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것만큼 식상한게 있겠냐 싶지만 이 글을 보니 또 그게 얼마나 들어맞는 비유면 다들 식상하게 느낄까 하는생각도 드네요. 어려운 시기속에서도 힘들지만 작은 성취를 위해 내딛은 한발을 축하 드리며 지금의 좋지 않은 상황들이 짧은 구간이길 바랍니다.
항상 완주하시길!
기차놀이
23/06/19 18:08
수정 아이콘
축하 및 격려 감사합니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골인 지점은 어디일까요,,많은 생각이 드네요. 전혀 식상하지 않습니다. 옥동이님도 항상 완주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쩌글링
23/06/19 13:03
수정 아이콘
인생은 마라톤이 맞긴 한데. 최소한 장거리를 뛰어 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격언인 것 같습니다.
기차놀이
23/06/19 18:09
수정 아이콘
10k와 21k는 다르긴 한거 같아요. 어렸을땐 시간과 기록이 문제지 뛰는거야 계속 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아쉽네요. 쩌글링님도 긴 마라톤 완주,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23/06/19 17:29
수정 아이콘
비슷한 시간에 7호선 뚝섬역에서 구리IC까지 다녀오는 하프완주하고 왔습니다. 비슷한 연배분이 뛰시는거 보니 반갑네요. 화이팅입니다. 여름 달리기는 기록, 성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포인트 첫째는 탈수, 둘째는 신체의 냉각기능 유지, 셋째는 탈수와 신체의 냉각기능 유지 입니다. 되도록 해가 없을때 뛰시고 중간중간 수분 보충이 가능하다고 확인 된 경로로 달리셔야 됩니다. 손에다 손수건 같은거 하나 감고 달리시다가 수돗가같은데서 물에 적셔서 목 뒤부분을 수시로 적셔주세요. 조심하지 않으시면 왜 기계장치들이 발열 못잡고 냉각에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펑 하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화이팅 입니다.
기차놀이
23/06/19 18:10
수정 아이콘
조언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거 같은 기분은 군 전역 후 처음 느껴봐서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likepa님도 항상 화이팅입니다!
23/06/19 19:12
수정 아이콘
고생 많으셨습니다. 맞는 신발은 어떻게 찾으셨나요?
기차놀이
23/06/20 07:3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본문에도 간단히 써놨는데 조금 부언하먄, 요즘은 정확한 발 사이즈, 양발의 하중, 워킹 및 러닝 스타일 등을 분석해서 그 결과를 토대로 기성 러닝화를 추천해주는 서비스(검색엔진에 '발분석 서비스')가 있더라구요. 여러 업체 중 적당히 검색해서 예약되는 곳으로 갔습니다.
댓글자제해
23/06/20 12:24
수정 아이콘
여름에 어떻게든 유지하시면 가을에 기록이 확 잘나옵니다
화이팅입니다
기차놀이
23/06/20 15:45
수정 아이콘
무더운 여름에 실내에서라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015 [정치] 올해 수능부터 "킬러"문항 배제 [240] 우주전쟁19508 23/06/19 19508 0
99014 [일반] 팬이 되고 싶어요 上편 (음악에세이) [4] 두괴즐8696 23/06/19 8696 2
99013 [일반] 새벽강변 국제마라톤 대회 참석 개인적인 후기(하프 코스) [12] 기차놀이7726 23/06/19 7726 14
99011 [정치] 윤석대씨가 수자원공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48] 검사15006 23/06/19 15006 0
99010 [일반] 브루노 마스 공연보고 왔습니다~ [16] aDayInTheLife8884 23/06/19 8884 1
99009 [일반] 뉴욕타임스 6.12. 일자 기사 번역(미국은 송전선을 필요로 한다.) [4] 오후2시9213 23/06/18 9213 7
99008 [정치] [단독] 尹, ‘수능 난이도’ 논란 [이주호 엄중 경고]…‘이주호 책임론’ 확산 [92] 졸업17602 23/06/18 17602 0
99007 [정치] 구소련이 동해에 무단 투기한 방사능 폐기물 [239] 숨고르기21118 23/06/18 21118 0
99006 [일반] [팝송] 비비 렉사 새 앨범 "Bebe" [1] 김치찌개7296 23/06/18 7296 4
99005 [정치] 양수발전 [13] singularian11848 23/06/18 11848 0
99004 [일반] <익스트랙션 2> - 계승과 가능성 탐구의 연장선. [9] aDayInTheLife7222 23/06/17 7222 0
99003 [일반] 로지텍 지프로 슈퍼라이트 핫딜이 떳습니다. [46] 노블13013 23/06/17 13013 1
99002 [일반] 도둑질 고치기 (下편) (도둑질 후기) [10] 두괴즐8248 23/06/17 8248 12
99001 [일반] 생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15] 번개맞은씨앗8199 23/06/17 8199 10
99000 [일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OST가 나왔었네요. [13] 제가LA에있을때8531 23/06/17 8531 0
98999 [일반] 가상 KBO 대진표 짜보기 (브레인스톰편) [7] 2'o clock6547 23/06/17 6547 4
98998 [일반] (강아지 입양홍보) 보신탕집 탈출견이 산속에서 낳은 귀한 아가들의 가족을 찾습니다. [19] 델타 페라이트9499 23/06/17 9499 23
98997 [일반] <엘리멘탈> - '스트레스 적은 이야기'의 장단점.(최대한 노스포) [6] aDayInTheLife7038 23/06/17 7038 3
98996 [일반] KBS 수신료 환불받았습니다. [36] 토마스에요12314 23/06/16 12314 10
98995 [정치] BOJ 대규모 완화정책 유지…원·엔 환율 800원대 코앞 [34] 기찻길12810 23/06/16 12810 0
98994 [일반] 교회는 어떻게 돌아가는가:태신자 초청(중소교회편) 목사님 첫 만남썰 [13] SAS Tony Parker 9147 23/06/16 9147 3
98993 [일반] 일본 락덕후들의 축제! 일본 락,메탈 밴드들이 개최하는 페스티벌 모음집 [8] 요하네9374 23/06/16 9374 9
98992 [정치] 尹, 올초부터 “수능 쉽게 내라”… 이행 안한 교육부 大入국장 경질 [128] 톤업선크림17747 23/06/16 1774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