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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시 중 근대성 비판으로 읽기 가장 적합한 작품이 아마 이 시일 겁니다.
1과 3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기도 한데, 이걸 토대로 오감도 시제1호에서 아해들이 13명인 이유를 생각해 보면 (13 자체의 불길한 의미라든가, 최후의 만찬에 13명이 참석했다던가 하는 해석도 물론 있지만) 1과 3 각각에 어떤 의미부여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 있는데, 그건 사족이니 일단 시부터 무슨 얘기를 하나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어 원문을 번역한 버전입니다. 이때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이상의 한국어 시들처럼 붙여 쓰는 경우도 있고, 일본어를 번역할 때처럼 띄어쓰기를 100% 적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를 가져왔는데, 일본어는 원래 붙여쓰기를 하므로 통상적으로 서술했다고 가정하면 붙여쓰기가 의도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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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관한 각서 2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선상의 일점 A
선상의 일점 B
선상의 일점 C
A+B+C=A
A+B+C=B
A+B+C=C
이선의 교점 A
삼선의 교점 B
수선의 교점 C
3+1
1+3
1+3 3+1
3+1 1+3
3+1 3+1
1+3 1+3
1+3
3+1
(태양광선은, 철렌즈 때문에 수렴광선이 되어 일점에 있어서 혁혁히 빛나고 혁혁히 불탔다, 태초의 요행은 무엇보다도 대기의 층과 층이 이루는 층으로 하여금 철렌즈 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낙이 된다, 기하학은 철렌즈와 같은 불작란은 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 사망해버린 오늘 유우크리트의 초점은 도처에 있어서 인문의 뇌수를 마른 풀과 같이 소각하는 수렴작용을 나열하는 것에 의하여 최대의 수렴작용을 재촉하는 위험을 재촉한다,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절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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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보면, 이게 수학인지 문학인지 모를 듯하다가 마지막에는 산문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도 마무리는 느낌있게 했지만 말이죠.
첫 행부터 보면, 3+1과 1+3이 계속 나옵니다. 전체 모양을 보니 凸처럼 생겼습니다.
이 모양은 욕하는 게 아니라 볼록할 철(凸)자를 나타낸 것인데, 시에 언급된
[ 철렌즈 ]가 이 철(凸)자를 씁니다. 즉 철렌즈란 바로 볼록렌즈이고, 덧셈식의 배치로 그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때 1+3이든 3+1이든 결과는 4로 같은데, 시에서는 ‘=4’를 써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합치든 저렇게 합치든 끝내 똑같다고 하더라도, 원래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개체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볼록렌즈에 의해 수렴하면 전부 4로 획일화되기에,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4는 써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4'가 없어도 획일화는 일어납니다. 2연에서 세 개의 점(A, B, C)이 나오지만, 3연에서는 이들을 아무리 더해보았자 이전과 이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A, B, C 세 개를 더했지만 A 하나와 동일하고, B 하나와 동일하고, C 하나와 동일합니다. 애초에 점이니까, 점끼리 더해봤자 넓이는 0이죠.
그리고 A+B+C와 각각 같다면, A, B, C는 서로 전부 같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점끼리는 전부 합동입니다. 두 선의 교점이든(A), 세 선의 교점이든(B), 여러 선(數線)의 교점이든(C), 점인 이상 똑같이 취급됩니다. 구별하는 방법은 좌표상의 위치, 숫자뿐입니다.
그래서 시 하단에 괄호를 열고 줄글이 써 있죠.
그중
[ 태양광선은, 철렌즈 때문에 수렴광선이 되어 ]를 보면 볼록렌즈가 태양광선을 잡아 수렴시켰고, 일점으로 고정되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수학, 기하학이 이상에게 있어서는
[ 불작란 ]입니다. 수렴작용을 일으켜서 모든 것을 점으로 만들어버리니까요.
[ 유우크리트의 초점은 도처에 있어서 인문의 뇌수를 마른 풀과 같이 소각 ]해 버린다는 (무시무시한) 표현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유우크리트는 유클리드(Euclid)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이나 수학 자체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들이
[ 수렴작용을 나열하는 것에 의하여 최대의 수렴작용을 재촉하는 위험을 재촉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량화하고 규격화하고 추상화하여 서로 비교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근대성의 힘이고 장점이기는 하지만, 한번 이렇게 수렴작용이 시작돼서 나열될수록 점점 수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수치화되고, 그런 수렴된 것들의 수렴작용조차 계속 반복되고 재촉되게 되는, 이러한
[ 위험을 재촉 ]하는 ‘경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렴작용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모든 것을 수치화하도록 몰아가는 경향성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거칠게 줄이자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라는 지적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경향성 앞에서 (이상과 같은) 사람은 절망하지만, 절망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탄생해야 합니다. 새롭게 탄생해야 합니다. 근대 이전도 아니고 근대도 아닌 제3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탄생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절망하라 ]가 됩니다.
이때
[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은 절망하라 ]를 앞 내용과 연관지어 보면,
[ 1+3 3+1 ]과 형식적으로 유사하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적절히 끼워맞추면 한 점으로 수렴되는 절망이 1이고, 제3의 길을 찾는 탄생이 3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생각해낸 해석은 아니고) 전 글에 언급한 교수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에게서 주워들은 이 시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다시 오감도 시제1호의 아해들이 왜 13명인가를 생각해 보면, 13을 1과 3으로 나누어서 1이 문제를 의미하고, 3이 지향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31도 가능하겠지만 순서상 13이 더 자연스럽죠.
그리고 위에서 잠깐 언급한 이상의 ‘날개’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아스피린인 줄 알고 먹은 약이 아달린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혼자 고뇌하는 장면인데, 옮겨 보면
[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맑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맑스가 튀어나오는 것이 워낙 뜬금없기 때문에 분명히 무슨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맑스(카를 마르크스)와 말사스(토마스 멜서스)가 서로 대립적이라고 보면 마도로스(matroos, マドロス, 해외로 다니는 배의 선원)가 바로 제3의 길, 근대성에 대처하는 이분법적인 태도를 벗어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서는 선택지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도 마도로스가 3번째니까요.
물론 13인의 아해에 얽힌 이상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영영 알아내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본래 어떤 문학작품이든지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이렇게 보는 것도 하나의 일리 있는 해석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