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KF-21 초도 비행 기념 T-50/FA-50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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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T-50/FA-50 이야기 2편 - 개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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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2편을 좋게 봐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나마 이 번 주말에 시간이 좀 되서 다음편을 올립니다.
전편과 같이 본문은 반말체임을 양해 부탁 드립니다.
[호크기 기술 이전]
공군은 고등 훈련기 소요에 대한 재연구를 통해 20대는 직도입을 나고 나머지 대수는 2003년까지 자체 개발을 하기로 소요 제기를 함으로서 마침대 KTX-2 계획은 정식으로 닻을 올리게 된다.
직도입 훈련기는 원래 이탈리아의 MB-339로 결정 되었으나 이 후 공군의 요구로 BAe(British Aerospace)의 호크기로 변경 되었다. 이 사태는 특검까지 이르게 되는 해프닝이 있었으나 여기서 중요한 얘기는 아니고….
아무튼 전영훈 박사는 이 기회를 이용해 BAe사로 부터 최대한의 기술 이전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아직 기종이 Bae 호크기로 변경이 확정 된 것은 아니었지만 전영훈 박사는 사실상 변경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전박사는 당시 BAe의 부사장이었던 진저(Ginger)를 만나 "내가 원하는 절충교역을 추가로 해 준다면 한국 공군이 호크를 구매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며 제안을 한다. 당시 진저는 한국 공군의 입찰에 MB339에 패한 것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전박사는 이를 이용해 최대한의 요구조건을 내건다.
1. 고등훈련기 개발을 위한 설계 기술 이전
2. 고등 훈련기 시뮬레이터 개발 기술 전수
3. 시험 비행 조종사 3개팀 양성
4. 항공 인력의 교육과 양성
이를 위한 모든 비용은 BAe 부담. 사실 이는 무리한 요구였지만 사정이 급했던 Bae에서는 결국 이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출세길을 마다하다]
이렇게 바쁘게 여러가지를 준비하던 중 전영훈 박사는 재미 연구 개발 무관으로 파견 근무를 지시 받게 된다. 이는 미국에서 무기 획득 과정 중 이루어지는 복잡한 일을 담당하는 업무로 기간은 3년인데 대우도 괜찮고 이후 국과연 상위 직급으로 가는 특급 코스 중의 하나였다.
원래 이 자리는 국과연 내 육군 대령이 가는 것이 암묵적 규칙이었으나 당시 공군 관련 무기 획득 사업이 급증하면서 국과연 내 유일한 공군 대령이었던 전박사에게 보임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쁘기 그지 없었겠으나 전박사에겐 전혀 그렇지 못했다. 탐색이나 체계 개발은 커녕 이제 겨우 2년짜리 기초연구 단계인 고등훈련기 사업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고 철저한 준비와 예산이 필요한 탐색 개발은 전박사가 없으면 물 건너갈 것이 뻔했다.
결국 전박사는 고등 훈련기 사업 때문에 무관으로 보임할 수 없다고 통보 했으며 국과연 내에서 만인이 부러워 하는 출세길을 걷어 찬 이 일은 쇼킹한 사건으로 나름 핫한 이슈가 되었다.
[BAe의 기술 전수]
공군은 결국 호크 훈련기 20대를 구매하기로 하고, 덕분에 전박사가 요청한 추가적인 절충 구매 조건이 이행되어 국과연과 항공 업체들의 인력 20여명이 영국으로 가서 기술 이전을 교육을 받게 되었다. 영국 연구원들은 한국 연구원들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퇴근 시간 후 연장 근무 불가는 물론, 각종 자료를 요청해도 심사 후 통과 된 것만 가능할 정도로 철저했다.
BAe에서는 항공기 설계에 대한 성능 해석을 위해 CAPS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는데 프로그램 자체는 한국에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전박사는 소스코드를 반드시 받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한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사실 좀 지나치다고 할 수 도 있는데 전 박사는 소스 코드 없이 받아갈 경우 Bae 측에서 프로그램을 살짝 고쳐서 해석 결과가 엉망이 되도록 할 수도 있고 추후 독자적으로 기종을 개발 할 때 소프트웨어를 고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반드시 소스 코드를 받아가야만 한다고 결심을 했다.
아무튼 당연히 BAe는 소스코드는 절대 안 된다고 했으나, 전박사는 Bae의 진저 부사장에게 한국 공군이 호크기를 추가 20대 구매하도록 돕겠다고 딜을 해서 결국 소스코드를 받아낸다. 물론 전박사는 호크기 20대 구매를 돕기는 커녕 절대로 저지할 생각이었다. 만약 호크기 추가 구매가 있으면 고등 훈련기 개발 계획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도덕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다고도 할 수 있어 넣을까 고민도 했으나 전박사가 고등 훈련기 계획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에피이고 한국 항공 산업의 해석 소프트웨어 관련 중요 정보이기도 해서 넣었다.
[탐색 개발 계획을 세우다]
이제 2년의 기초 연구가 끝나가고 탐색 개발로 넘어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편에도 언급했듯 무기 체계 개발은 1단계 기초 연구, 2단계 탐색 개발, 3단계 체계 개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1단계 기초 연구는 말 그대로 사전 조사에 가깝고, 3단계 체계 개발은 상세 설계 및 제작 테스트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발 업무라고 보면 된다.
그럼 생소한 2단계 탐색 개발은 어떤 것인가? 이 단계는 군의 요구 조건(ROC)를 분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개념적인 설계를 하고 검증하는 단계 이다. 말이 좀 추상적인데 아무튼 탐색 개발 단계는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단계로서 여기서 뭔가 잘못 된 것을 찾아내지 못하거나 그대로 밀고 나갔다가 3단계인 체계 개발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탐색 개발부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다는 점이었다. 고등훈련기, 즉 KTX-2 골든 이글은 총 사업비가 2조 이상으로 추정 되었고 90년대 초 대한민국으로서는 이만한 돈을 단일 무기 체계 개발에 퍼 붓는 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탐색 개발에 드는 비용은 전체 사업비의 불과(?) 5% 미만이지만 2조의 5%면 천억원으로 이 역시 탐색 개발 비용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전박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탐색 개발 사업비를 줄이기 위해 온갖 머리를 싸매며 비용을 산출한 끝에 571억이라는 금액이 나왔다. 그리고 KFP 및 호크 훈련기, 해상 초계기 등에 절충 교역으로 225억을 확보 해 놓았기 때문에 정부로 부터 확보해야 할 나머지 금액은 346억 이었다. 그러나 미사일 한 발에 수십억씩 하는 요즘 시세로는 별거 아닐 것 처럼 보여도, 346억이라는 금액도 이 역시도 그 당시로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 금액을 산출하기 까지 전박사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해외 사례를 조사하고 뺄 수 있는 것은 다 뺐지만 더 이상 줄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전박사는 당장 사업 승인을 받기 위해서 꼼수를 쓰거나 꼭 필요한 예산을 삭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서 말한 것 처럼 탐색 개발은 사업 전체의 성패를 좌우하는 굉장히 중요한 단계이며, 또한 일부 체계가 문제가 생겨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육군 무기 체계 등과 달리 항공기는 나사 하나만 잘못 설계해도 비행기가 추락 할 수도 있는 체계여서 적당히 라는 게 통하질 않고 되려 나중에 몇 배나 더 큰 비용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자면 탐색 개발 단계에서 풍동 시험 비용을 줄였다가 나중에 실제 비행기 제작 단계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설계를 전면 재수정하고 모든 풍동 시험을 다시 실시 해야만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비용을 최대한 아끼더라도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즉 571억은 줄일 때까지 줄인 비용이며 전박사로서는 여기서 한 푼도 줄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예산 통과가 안 될 것 역시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로지 정면 돌파만 남았을 뿐.
[예산과의 전쟁1 - 국과연]
국과연의 예산 승인 절차는 부장 -> 본부장 -> 연구소 심의회 부소장 -> 연구소장을 거쳐야 했다. 이 후 국방부 내에서도 승인 받을 부서가 한 둘이 아니고, 재경원 국회까지 승인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일단은 국과연 내부 승인을 받는 것이 급선무.
앞서 이야기 했듯이 전박사는 예산을 줄여서 승인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했다 가는 결국 나중에 더 큰 문제가 터지고 결국 사업이 실패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들어도 한 명 한 명 될 때까지 설득해서 정면 돌파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바로 위 상관인 부장을 찾아가서 346억 예산안을 들이밀었다. 부장은 설명을 들어볼 생각도 없이 결재를 거부했다. 탐색 개발 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결재를 못하니 먼저 본부장님한테 결재를 받아오게"
"부장님한테도 결재를 못 받았는데 어떻게 본부장님한테 가겠습니까?"
전박사는 3일을 찾아갔지만 허사여서 결국 본부장을 먼저 찾아가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본부장 역시 이 계획은 말도 안 된다며 퇴짜를 놓았고 KTX-1의 경우 기본 설계에 시제기 2대 비용을 포함해서 106억원이 들었는데 KTX-2의 경우 개념 설계만 하는데 346억이 든다면 누가 이해를 하겠냐며 무조건 금액을 100억 이하로 낮추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금액을 한 사업에 배정하면 다른 사업들의 사업비가 깎여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박사는 "국방부에 가서 예산을 더 받아 오겠습니다"하고 대답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렇게 몇 날 몇 일을 찾아갔지만 허사였고 계획서 제출 마감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계획서 제출 마감일 당일에도 승인을 받지 못했다.
전박사는 홀로 비용을 100억 이하로 줄여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봤지만 그대로는 사업 실패가 뻔했다. 적당히 대충 대충 할 바에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획서를 받는 연구계획부 조남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남태 부장은 나름 전영훈 박사를 신뢰하는 편이었고 전 박사는 죄송하지만 하루, 이틀만 더 말미를 달라 부탁을 했다. 감사하게도 조부장은 이틀의 말미를 더 주었다.
그 다음날 다시 본부장님을 찾아갔지만 요지부동. 본부장의 의견은 자기가 결재를 해 봤자 위에 올라가면 잘릴테니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부장님, 이 사업이 죽어도 좋으니 원이나 없게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이 말에 본부장은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결국
"그래, 전 박사 소원이라니 결재해 주지. 그러나 사업이 죽어도 내 원망은 하지 말게"
하고 결재를 해 주게 된다.
곧바로 다시 첫 단계인 부장을 찾아가 "전박사. 정말 재주도 좋구먼. 이거 본부가서 죽어도 나는 몰라" 하는 소리와 함께 결재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틀을 기다려주기로 한 은인인 조남태 부장을 찾아가 서류를 제출했으나….. 금액을 들은 조남태 부장마저 입을 쩍 벌리며 "이건 안 돼" 하며 결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왜 이 비용이 필요한지에 대해 조부장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고, 조 부장은 하루를 고민한 후 전박사를 다시 불렀다.
조 부장은 사업 계획서 내용에 대해 3시간이 넘도록 하나 하나 조목조목 따져 물었고 전박사는 이에 대해 성실히 대답을 해야 했다. 전박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득하고 공감대를 넓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설명하던 도중 조 부장은
"전 박사, 나 지금 스파링 하는거야"
라면서 국방부나 타 부서에 가서 설득하려면 자신도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일종의 스파링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사업은 전박사처럼 의지를 가지고 완벽하게 해야 해. 내가 밀어 줄게"
전박사는 너무나 감사해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며칠 후 드디어 국과연 부소장을 위원장으로하는 연구소 본부 심의회가 열렸다. 예상대로 위원들은 이 사업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위원들의 질문에 대해 전박사가 하나 하나 대답을 하면서 공방이 벌어졌다. 결국 부소장은 이 사업의 예산이 너무 커서 이 대로는 다른 사업들을 죽여야 한다면서 국방부가 국과연에 할당한 예산의 증액 없이는 사업은 불가하다. 사업을 보류하자고 말했다.
전박사는 국방부 설득은 제가 할테니 제발 국방부로 사업안을 올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고, 결국 부소장은 "전 박사가 국방부에 가서 예산을 더 따와" 하며 승인 해 주었다.
결국 우여 곡절 끝에 국과연 내부 승인을 받았지만, 이제 앞에는 더 큰 전쟁, 국방부에서 추가 예산 따오기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예산과의 전쟁2 - 국방부]
국방부에서의 승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국방부 획득 개발국 총괄과 -> 해공과(해군과 공군 담당) -> 해당 연도 예산을 배정하는 중기 계획과 -> 전증위.
먼저 해공과는 다행히도 전박사와 공사 동기인 김진철 대령이 담장자여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령 밑의 담당자의 첫마디는
"이거 왜 이렇게 탐색 개발비가 많아요? 이거 돈 없어서 못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한 두 번으로 설득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기에 획개국 총괄과로 인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중기계획과, 이곳이 실제로 예산을 배정하는 곳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의 중기 계획 과장은 육군 대령으로 사관학교 기수로는 동기였다. 보통 사관학교 동기끼리는 군종이 달라도 대체로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나 첫 만남에서 부터 이 대령은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싸늘했고 동기임에도 전박사는 구걸하는 처지 같았다. 과장 밑의 담당자에게 설명을 했으나 면박만 당하고 일정이 끝났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거대한 벽을 접하고 보니 전박사는 힘이 쏙 빠졌다. 사실 이 일은 장관급 이상의 주요 인사들이 의지를 갖고 추진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국과연 실장에 불과한 대령 하나가 과연 이 일을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중기계획과장에게 브리핑을 하려는데 잘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중간에 브리핑을 듣지 않겠다는 걸 구걸하다 시피 부탁해서 브리핑을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말도 안 된다는 얘기 뿐이었다. 사관학교 동기급인데 구걸을 하는 것 같아 정말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꾹 참았으나 결과는 아무 성과가 없었다.
그 이후로 매일 같이 국방부를 들락거리며 설득을 했지만 해공과를 제외하고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매일 설득하다 보면 조금씩은 바뀔 줄 알았는데 요지 부동이었다.
이런 날들이 하도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 중기 계획 과장은
"전 박사, 대전서 이곳까지 왔다 갔다 하느라고 신발 몇 켤레 닳았나?"하고 말하기 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다들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사업 규모에 부담이 컸고, 탐색 개발을 시작하면 바로 체계 개발을 시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더욱 큰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탐색 개발이 시작 되지 못하게 막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고 방법을 아예 바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때 쯤, 마치 우영우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때 바람이 불고 고래가 보이 듯, 전 박사에게도 멋진 발상이 떠오르게 된다.
즉 고등 훈련기 탐색 개발은 KFP 사업 등의 절충 교역의 이행 사업이다. 체계 개발은 일단 나중의 별도의 문제고 국민 세금이 투입 된 절충 교역을 이행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될 것이다.
즉, '고등 훈련기 탐색 개발을 하지 않으면 절충 교역 미이행으로 감사 대상이 되거나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논리가 떠오르게 된다.
전략을 이렇게 바꾸고 다시 국방부를 다니니 그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던 해당 부서들이 조금씩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 때다 싶어 열심히 브리핑을 5,6 차례 반복하니 결국 중기 계획 과장이 전박사를 불렀다.
"내가 전 박사 정성 때문에 두 손 들었습니다. 그런데 탐색 개발 비용이 너무 많아 좀 삭감 해야겠습니다."
"이 사업은 이미 줄일대로 줄인 거고 여기서 더 줄이면 사업 실패합니다. 삭감은 안 됩니다"
"허허…. 나 참…. 알겠소. 예산 해 줄테니. 획득개발심의회나 전증위 통과는 전 박사가 알아서 하세요"
드디어 중기계획과를 통과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기계획과장은 한 마디를 덧 붙였다.
"어쨌는 나는 T-50 체계 개발 사업이 진행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마지막 관문 - 전증위]
이렇게 중기 계획과에서 예산을 편성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전력증강위원회(이하 전증위)를 통과 해야만 했다.
전증위는 위원장이 국방부 차관이며 위원들이 제1차관보, 제2차관보, 국과연 소장, 조달 본부장, 합참 전력 계획 본부장이 모이는 무기 개발 관련 국방부 내 끝판왕들이 모이는 최종 심사 위원회였다.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국과연 소장에게 보고하자 소장도 "전 박사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될 일이지" 하며 대단히 기뻐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 같긴 한데 어쨌든 전증위를 통과해야 했고 국과연 소장이 위원으로 참여 하므로 소장 역시 이 사업에 대해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했다.
드디어 전증위가 열렸고 위원장이 사업 책임자(전영훈 박사)에게 KTX-1 사업이 진행중인데 벌써 KTX-2 사업을 진행 하는 것에 대해 사업 타당성을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전 박사는 KFP 사업의 절충 교역의 중요성과 공군의 고등 훈련기 소요에 대응하기 위해 KTX-2 사업은 지금 시작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위원들은 사업의 전체 체계 개발 비용을 물었고 총 2조가 넘을 것이라는 대답에 깜짝 놀라며 돈이 이렇게 많이 드는데 꼭 해야 하는 사업인지 묻기 시작했다.
전 박사는 자꾸 얘기가 체계 개발 사업 쪽으로 빠지는 것 같아 일단 체계 개발은 나중 문제고 KFP 절충 교역 때문에 탐색 개발은 꼭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이에 한 위원이 "사업 책임자! 당신이 공군이 고등 훈련기를 원해서 체계 개발을 해야 한다면서 이제 와서 무슨 딴 소리요." 하는 바람에 전박사는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해당 위원의 말은 타당한 지적이었고, 전박사는 약간 논리적 모순에 빠진 상황이었다.
전박사는 차분히 생각한 끝에 "이왕 돈을 들여 기술 이전을 하는 것, 탐색 개발을 하면서 기술 이전을 받고 4년 후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예산이 확보 된다면 체계 개발까지 진행하여 항공 산업 발전과 자주국방을 앞당기는 일거양득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름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위원들이 계속 딴지를 걸었고 급기야 한발 물러서 있던 국과연 소장도 나서서 전박사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방이 이어지다 보니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 지고 있었다.
결국 위원장이 나서 "이 사업은 하자니 체계 개발에 문제가 생길 것 같고, 안 하자니 절충 교역이나 기술 전수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일단 1년치 예산만 승인하도록 합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전박사는 국과연 소장을 통해 "이렇게 되면 록히드로 연구원들을 파견할 수 없습니다." 라며 항의 했지만 기각되었고 결국 1년치 탐색 개발 예산을 승인하는 것으로 전증위는 결론이 났다.
국과연 소장은 이게 어디냐며 기뻐했지만 전 박사는 기쁘면서도 록히드로의 연구원 파견에 어려움이 예상되어 마음이 복잡했다.
어찌 되었든 비록 1년이지만 탐색 개발을 승인 받으면서, 조직은 '실'에서 '부' 단위로 승격되고 록히드로 보낼 엔지니어들을 준비하고 미국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의 준비를 하다보니 정신없이 1년이 지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설계팀에 공군을 7명 참여 시킨 것이다. KTX-1 사업의 경험으로 소요군인 공군이 포함 되어 있지 않으면 공군이 사업울 자신과 관계없는 남의 일 보듯 하는 문제가 있었고 또한 공군이 포함 되어 있으면 최종 사용자의 요구 사항이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공군을 참여 시킨 것은 나중에 사업 성공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심지어 KF-X 사업 성공까지 이어지는 중요 사항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엔지니어들을 선발했지만 예산을 1년치 밖에 받지 못해서 국내에서 선행 교육만 할 뿐 아직 미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일년 후 1992년 전증위에서는 반드시 남은 4년치 예산을 일괄 승인 받아야만 했다.
일년 후 다시 열린 전증위에서도 대부분의 위원들은 막대한 체계 개발 예산을 큰 문제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전 박사는 이번에는 무조건 일괄 승인을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 전수고 뭐고 아무것도 못하고 철수해야 한다고… 건물도 이미 95년까지 임차했고 장비 및 비품을 모두 구매했는데 인원들만 가지 못하고 있다며 강력히 일괄 승인을 주장했다.
한동안 옥신 각신이 이어졌지만 결국 위원장이 결론을 내렸다.
"위원 여러분! 체계 개발은 나중에 생각합시다. 지금은 기술 전수라도 잘 받도록 고등 훈련기 탐색 개발 사업을 일괄 승인하도록 합니다".
"탕, 탕, 탕"
의사봉이 세번 두드려지며 마침내 탐색 개발은 일괄 승인이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사실상 한 개인의 꿈, 아니 많은 이들에게 정신 나간 망상으로 취급받던 프로젝트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 되는 순간이었다.
긴장이 풀린 전 박사는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그동안 같이 고생한 국과연과 국방부 팀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모든 인원들이 '전 박사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감사 인사를 하는 전 박사는 결국 하염없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