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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7/16 03:04:04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일반] (스포) <드라이브 마이 카> 상처가 아무는 소리 (수정됨)
#0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_<바냐 아저씨> 중에서

#1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여러모로 연극적입니다. 연극이라는 소재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인공은 연극 연출가이고, 작품 속 작품으로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촬영도 연극적입니다. 카메라가 극도로 고정된 수준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정적인 카메라 워크를 보여줍니다. 배경도 연극적입니다.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여러 배경이 등장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배경이 갖는 의미도 다른 영화보다 크게 다가옵니다. 편집도 연극적입니다. 교차편집도 거의 없고, 있어도 한 무대에서 2개의 하이라이트를 쓴 듯한 기분을 줍니다. 연기도 연극적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를 영화에서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기분을 아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도그빌> 정도로 실험적인 작품은 아닙니다만, 어쩌면 <도그빌>보다 더 연극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
영화에는 이야기 속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그게 연극처럼 액자 속 작품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굴곡진 과거를 대화 속에서 함축해 전달하는 방식으로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많은 여지를 둔다는 점이 하루키스럽더군요. 그 이야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커다란 이야기 줄기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호하면서도 명확하다는 모순적인 느낌이 듭니다.

#3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40분부터입니다. 40분까지는 오프닝, 프롤로그 정도로 봐야 합니다. 정말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프롤로그를 길게 보여줬을까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저에게 '상처'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긴 시간을 할애하며 프롤로그를 보여준 이유는, 그 상처에 공감하지 못하면 영화의 핵심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이야기는 인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사건에 무게가 실립니다. 사건이 흥미진진할수록 재밌는 이야기가 되죠.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물에 무게가 실립니다. 사건이 인물의 마음 속에 어떤 파장을 주었는지 아주 깊숙이 파고듭니다.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가 스크린에서 느껴집니다. 아무런 사건도 새롭게 벌어지지 않고 배우들은 가만히 서서 대사만 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무언가가 고스란히 다가옵니다. 그 무언가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이를 포착한 각본과 촬영과 연출 모두에서 거장의 위엄이 느껴집니다.

#5
가후쿠는 죽은 아내의 불륜 상대로부터 우회적으로 불륜 사실을 고백받습니다. 그동안 외면했던 상처를 마주해야 했던 순간이었죠. 그때부터 가후쿠는 뒷자석이 아니라 미사키와 나란히 조수석에 앉습니다. 상처 입은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모습처럼 느껴지더군요. 미사키는 화답하든 자신의 상처를 드러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취약성을 공유하죠. 그동안 잔잔하게 쌓이던 친밀감이 급물살을 타는 지점이었습니다.

#6
미사키의 무너진 고향집을 발 아래 두고 가후쿠와 미사키는 눈밭을 뒤로 한 채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습니다. 옅은 바람 소리와 절제된 숨소리만 들렸지만, 마음 속에서는 격렬한 울림이 퍼졌습니다. 지금 가후쿠의 상처가 아물고 있다고. 그리고 그런 가후쿠를 위로하며 미사키의 상처도 아물고 있었습니다. 상처가 아문 가후쿠는 다시 무대에 섭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지 모르는 장면에서 차에 탄 미사키가 마스크를 벗습니다. 뺨에 난 상처는 이전보다 확실히 아물어 있었습니다.

#7
결혼 전 과거의 상처를 말해 준 아내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픈 기억을 완전히 없앨 순 없어. 어쨌든 상처는 남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상처를 행복한 추억으로 덮는 것 뿐이야." 그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건 결국 사람이겠죠. 기억상실증으로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처가 벌어지거나 덧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라서 상처입고, 사람이라서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참 실존주의적인 영화인 것 같네요.

#8
자게에 영화글을 많이 써주시는 aDayInTheLife님은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다룬 글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연상된다고 하셨습니다. (https://cdn.pgr21.com/freedom/94568) 저도 그랬습니다. 상처를 외면하고, 그래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비슷하게 다가오더군요. 그런데 결말은 반대였던 것 같습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은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 커다란 상실감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9
저도 사람인지라, 이제 빼박 아재 소리를 들어야 할 나이인지라 마음에 난 상처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 상처를 품고 살아가야죠. 살아가다 보면 상처는 아뭅니다. 가끔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꿈뻑일 때나, 아니면 건너 건너 온 소식을 들을 때면 오래된 상처가 욱신거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갈 겁니다. 다행히 제 주변에는 상처를 어루만져 줄 소중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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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영구
22/07/16 03:36
수정 아이콘
료스케가 해외로 나가지말고 힘들더라도 일본 내에서 영화 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aDayInTheLife
22/07/16 07:22
수정 아이콘
아이고 부끄럽습니다. 크크크크
하루키의 글들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하루키의 그 독특한 서술 방식이나 혹은 하루키식 감성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저는 참 결말이 좋으면서도 씁쓸한게 안식은, 회복은 다른 어디선가 이뤄지는 듯한 느낌이라 좋으면서 씁쓸했습니다.
마스터충달
22/07/16 14:21
수정 아이콘
"상처는 없앨 수 없다. 단지 더 행복한 추억으로 덮을 뿐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다카쓰키가 아니라 미사키를 통해 오토와의 상처가 아물었다는 흐름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만약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다카쓰키와 매듭을 짓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면, 아마도 비현실적이라 느꼈을 것 같습니다. 픽션의 문제는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거든요. 반면 현실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요. 씁쓸하겠지만, 그런 게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aDayInTheLife
22/07/16 14:32
수정 아이콘
저는 엔딩이 그 지역 바깥, 아예 그 나라 바깥으로 나가는 엔딩이라고 여겨서일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하루키의 에세이가 생각나네요. 일본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닫힌 세계고, 그 안에서 자기 완결성을 지닌 서사들이 존재하는데, 그 닫힌 세계 안에서도 닫힌 서사 속에서 분출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옴진리교 사건을 비롯한 사건 이야기를 하는 에세이였습니다. 어쩌면, 하루키도 이 이야기를 장편으로 개작한다면 이 영화의 결말처럼 바깥, 어디선가에서의 안식을 이야기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스터충달
22/07/16 14:39
수정 아이콘
갑자기 메가마트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크크크. 사실 왜 갑자기 한국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뭔가 생경한 장소라는 점에서 이 또한 하루키스럽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뭐 숨은 그림 찾기 식으로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긴 하니까, 모르는 건 그냥 모르는 데로 감상하면 되긴 하는데, 그래도 응? 머지? 싶긴 하더라고요.

하루키였다면 외국 어딘가가 한국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 국뽕 차오르는 느낌(?)도 듭니다. 요즘이니까 외국 어딘가가 한국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aDayInTheLife
22/07/16 14:42
수정 아이콘
크크크 그럴 수도 있겠죠. 료스케 감독도 히로카즈처럼 한국 와서 영화 한 편 찍어 보쉴?
22/07/16 08:43
수정 아이콘
되게 정적이고 잔잔하지만 3시간동안 집중이 깨지지않고 극장에서 재밌게 본 영화였습니다
22/07/16 08:56
수정 아이콘
영화 멋지더라고요.
저한테는 식은 치킨을 되살리는 에어프라이어 같이, 이제 좀 옛날 느낌이 나는 하루키의 엄청난 각색이었어요.
레이미드
22/07/16 11:36
수정 아이콘
좋은 영화 후기 글 감사합니다. 웬지 이 글은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를 다시 보고싶어지게 하는 글이네요.

그리고 이 블로그 포스팅 글이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ysseo_21&logNo=222812390221&navType=by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무심해지고 싶은데 그러기가 참 어렵네요.
할러퀸
22/07/16 11:53
수정 아이콘
오랜만의 리뷰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라라랜드에 이어 인생영화입니다. 영화가 모든 이에게 치유물이 될 수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가 없지만, 저는 이 영화가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섣부른 치료가 아닌 회복의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흉터는 남겠지요, 하지만 그 흉터조차 자신의 일부라면 우리는 살아가는 거겠지요.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와 같은 흉터를 가진 사람을 알아봐줄 수 있다면, 남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편히 쉴 수 있겠지요.
마스터충달
22/07/16 14:43
수정 아이콘
아... 흉터라는 말이 있었...
CapitalismHO
22/07/16 12:53
수정 아이콘
극장가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넷플릭스로 봤으면 중간에 엄청 스킵해서 보느라, 영화의 재미를 못느꼈을것 같거든요.
22/07/16 21:28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봤지만 좋게든 나쁘게든 지극히 일본적이라는 감상입니다. 삶은 있지만 사회는 없는 것 같고 삶이든 사랑이든 형식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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