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10/23 13:07:59
Name 아난
Subject [일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1 의 앞 몇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1 의 앞 몇줄:

내가 울부짖은들 천사의 위계로부터 도대체 누가
그 소리를 들어주랴?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껴안는다 해도,
나는 그의 나보다 강력한 존재에 의해 스러지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 낼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기에.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조차 태연하게
마다하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und wir bewundern es so, weil es gelassen verschmäht,
uns zu zerstören. 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

--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천사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냥 '아름다움'이라고 읽어도 좋다. 그렇게 읽으면 위 구절들은 전통적인 철학적 미론과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미론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이 무서움의 시작이라는 주장은 얼핏 숭고함을 아름다움으로 재기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칸트의 경우 숭고함의 경험의 다른 요소인 찬탄은 결국 인간의 자기 찬탄인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 릴케가 말하는 찬탄은 천사에 대한 찬탄이다. 정확히는 우리보다 강력한 존재가 우리에게 베푸는 관용에 대한 찬탄이다. 그 관용은 무슨 인정같은 것이 아니다. 굳이 파멸시키는 수고를 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인간을 하찮게 본다는 것이다. 그 태연한 마다함, 인간이 올려다볼 수만 있을 따름인 그 절대적 고귀함/거만함이 멋있다는 것이다(그것은 물론 동시에 무서운 것이다). 릴케의 미론은 역시 숭고함을 아름다움으로 재기술한 아도르노의 미론과도 다르다. 아도르노에게서도 숭고함의 경험의 실체는 인간의 부정적 자기 인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인식은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가리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릴케와는 달리)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성된 사실로 본다.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은 역사적으로 소멸될 수 있다(물론 언젠가 온전한 적이 있었는데 타락했고 이제는 그 온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천사와 같음'이 그 실현이 절실하게 희구되어야 하는 인간의 온전함의 내용인 것도 아니다. 그 점에서 아도르노는 (릴케와는 달리) 유물론자이다. 인간은 끝끝내 천사와 같아질 수는 없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 '수 있음'은 너무나도 약하게 울린다. 인간은 천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 내에서의 행복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다. 따라서 릴케와 아도르노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별 (현실적)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인간이 아무리 행복해지더라도 그 행복은 죽음을 모르는 안온하게 보호된 유년의 삶에서만 가능한 행복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 (이런 의미의 아름다운 것은 사랑스러운것, 예쁜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앞에서 어떤 위축을, 어떤 무서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천사와 같아질 수 없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는 늘 어떤 인간들에게는 불안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1/10/23 13:29
수정 아이콘
한메타자의 추억..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3946 [일반] <이터널스> - 욕심과 과욕(스포?) [22] aDayInTheLife11228 21/11/03 11228 4
93945 [정치] '카드 캐시백' 백화점 안된다더니…온라인 결제 다 뚫렸다 [20] Leeka15043 21/11/03 15043 0
93944 [정치] 버지니아 주지사, 12년만에 공화당 탈환 [19] Alan_Baxter11680 21/11/03 11680 0
93943 [정치] 해외 지도자 조문 은폐한 청와대-외교부 [129] 추적왕스토킹19332 21/11/03 19332 0
93942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1) [25] 글곰11151 21/11/03 11151 33
93941 [일반] 일본 중의원 선거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78] 이그나티우스15669 21/11/03 15669 90
93940 [일반] [주식] 투자 INSIGHT: 피셔인베스트 "주도주에 투자하라" [18] 방과후계약직10917 21/11/03 10917 2
93938 [일반] 일본 중의원선거 간단 요약 [75] Dresden17472 21/11/02 17472 16
93937 [정치] 제1야당 후보, 양보해 주면 압도적 정권교체... [94] 우주전쟁21355 21/11/02 21355 0
93936 [일반] (뇌내실험) 어떤 신이 기도를 들어주는 '진짜' 신인지 보는 연구 [76] 여수낮바다16053 21/11/02 16053 10
93935 [일반] 개로 사람을 잡아죽여도 되는 나라 [121] 착한글만쓰기19368 21/11/02 19368 41
93934 [일반] 강아지는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로봇 강아지는요? [20] 오곡물티슈11379 21/11/02 11379 18
93933 [일반] 오징어게임 가상화폐, 그들만의 오징어게임 [34] 바둑아위험해11824 21/11/02 11824 3
93932 [정치] 전세대출의 분할상환 산정 기준이 나왔습니다. [43] Leeka14912 21/11/02 14912 0
93931 [일반] 얀센접종후 부스터샷 모더나 맞은후기!! [80] 마이바흐17962 21/11/02 17962 38
93930 [일반]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56] BMW25590 21/11/01 25590 148
93929 [일반] 10월에 찍은 사진들 [26] 及時雨13228 21/11/01 13228 13
93928 [일반] [도시이야기] 경기도 수원시 - (2) [14] 라울리스타11000 21/11/01 11000 9
93927 [일반] 리얼돌이 드디어 들어옵니다 [78] 착한글만쓰기16193 21/11/01 16193 46
93925 [일반] 우리회사 남녀직원의 차이 [40] 쿠라19747 21/11/01 19747 17
93923 [정치] 곽상도 "아들 퇴직금 50억원 추징보전 풀어달라" 항고 [37] wlsak13281 21/11/01 13281 0
93922 [일반]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전자계집이랑 놀고 있냐, 밖에 좀 나가 [42] 오곡물티슈21197 21/11/01 21197 16
93921 [일반] [주식] 기업 분석 연습 (세정 산업) [11] 방과후계약직11271 21/11/01 11271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